프로이트와 5명의 여인들

 

프로이트와 여성들과의 관계가 인터넷에서 떠 돌아다니는 이상한 소문들로 왜곡되고 채색되어진 것이 많다. 그 이유는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려고 했던 여성들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은 여성들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프로이트의 인격과 인품에 그의 인간다움에 매료된 여성들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치료자(필자)는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정신분석이라는 학문 그 자체뿐만 아니라 프로이트라는 그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궁금함에 매료되어 프로이트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그의 제자인 영국의 신경학자로 정신분석가가 된 어네스트 존(Ernest Jones)이 프로이트와 40년 동안 생사 고락을 같이 하면서 프로이트의 허락을 받아서 마침내 그가 쓴 프로이트의 전기(傳記)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의 제 Ⅰ권(1953), 제 Ⅱ권(1955), 제 Ⅲ권(1957)의 총 약 1500 페이지의 서적들(주㈜: 참고)과 그리고 프랑스에서 의학과 정신의학을 공부하고 프랑스의 성, 안나(Hospital Sainte-Anne) 병원에서 라깡(Jacques Lacan)과 함께 수련을 받은 후에 정신분석가가 된 헨리 엘렌버그(Henri Ellenberger, 1970: 주㈜: 참고)가 쓴 약 1000 페이지의 광범위한 저서인 무의식의 역사에서 프로이트에 대한 부분(페에르 장, 프로이트, , 에들러의 4명이 포함)을 참고로 했다. 엘렌버그는 융(Jung)의 스위스 정신분석학회의 해산 이후에 스위스의 정신분석 학회를 재조직한 신부로써 정신분석가가 된 오스카 피스트(Oska Pfster)에게 4년간 정신분석 개인 수련치료(정신분석가의 필수 코스)를 받고 스위스에서 정신분석가로 활동을 했다. 이후에 그는 캐나다 몬트리올 의과대학에서 역동적 정신의학의 역사가가 되었고 그리고 범죄 심리학의 개척자가 된 사람이다. 이들의 자료를 바탕으로 프로이트와 여성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특별히 정신분석에 흥미를 가지고 있거나 정신분석을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프로이트라는 사람을 모르고 어떻게 프로이트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프로이트와 여성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치료자는 일전에 우리나라의 한 신문이 뉴욕 타임즈의 인터넷 판에서 인용한 신문기사를 보고 대경실색을 했다.

<뉴욕 타임스> 인터넷판은 2006 12 24, 그 동안 논란이 되었던 프로이트와 그의 처제인 미나 베르나이스(Minna Bernays)와의 은밀한 관계가 증명되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독일의 한 사회학자가 스위스의 한 호텔의 숙박부에서 1898 8월에 한 프로이트의 자필 서명을 발견했다. 서명에는 아내라고 했지만, 사실은 처제였다. 왜냐하면 당시 프로이트가 아내에게 쓴 엽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도 남편과 동생의 여행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프로이트와 처제의 내연관계는 융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으나,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은 융의 주장이 모략일 뿐이라면서 가능성을 일축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발견으로 융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 셈이다.

 명색이 세계적인 신문이라고 알려진 뉴욕 타임즈 신문에서 이러한 기사가 났을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은 그 신문 기사를 보고 프로이트와 처제인 미나(Minna)가 불륜을 저지른 것으로 오해할 만 도 하다. 그러나 어네스트 존이 쓴 프로이트의 삶과 전기(1953)를 읽은 사람은 처제와 프로이트의 관계가 이미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치료자는 프로이트와 평생동안 인간관계를 맺은 특별한 5명의 여성들을 골라서 그들과 프로이트의 관계를 소상하게 밝히고자 한다. 잘못된 정보가 잘못된 왜곡을 낳는다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프로이트가 평생동안 관계한 5명의 여성들은 다음과 같다. 처제인 미나 베르나이(Minna Bernays), 그리스의 공주이자 덴막의 공주인 마리에 보나파르트(Marie Bonaparte), 니체와 가까웠던 사교계의 여왕인 루 살로메(Lou, Salome), 하버드 법대 이사장의 딸로써 하버드 대학 졸업 후에 프로이트의 제자가 된 루드 브룬스위크(Ruth Brunswick), 영국인으로 첫 여성 정신분석가가 된 조안 리비에(Joan Riviere) 그리고 미국인으로 프로이트의 막내 딸로 정신분석가가 된 안나 프로이트와 의형제가 되어 프로이트의 식구가 된 도로시 불링함(Dorothy Burlingham)이 그들이다.

 먼저 프로이트와 부인 마샤 베르네이(Martha Berneys)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프로이트는 17살에 세계 최고였던(그 당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비엔나 의과 대학에 입학을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미 예정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여동생인 안나(Anna)가 마샤의 오빠인 엘리(Eli)와 사귀면서 그의 여동생인 마샤가 자연스럽게 프로이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샤의 여동생인 미나와 프로이트의 첫째 여동생 안나는 서로 친한 친구로써 마샤보다 먼저 프로이트의 집에 드나들게 되었다. 마샤는 유태인 명문가의 딸로써 프로이트보다 4살 연하였다. 어느 날 마샤는 미나와 함께 프로이트의 여동생 안나의 집을 방문해서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27세의 레지던트 2학년 학생이었던 프로이트가 비엔나 종합병원에서 레지던트 일을 마치고 귀가 하면서 두 사람은 눈이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초중고교 시절에 수재로써 책벌레라는 별명을 가진 독서광이었다. 그가 읽은 섹스피어, 입센 등의 작품들은 이후에 정신분석의 바탕이 되었다. 그는 평소에 대학 연구실에서 귀가해서 집에 오면 그의 사적인 연구소로 이름이 붙여진 그의 다락방에 들어가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글쓰기를 좋아해서 연애 편지, 연애 소설의 명수였다고 보면 두 연인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참고로 프로이트는 1930년에 독일 문헨에서 괴테 상(산문)을 받았다는 것은 프로이트가 글 쓰기에 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20세의 처녀로 40세였던 프로이트의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17살에 결혼을 해서 첫 부인 한데서 이미 첫째 아들인 23세의 엠마누엘과 20세인 필립(Phillip)이 있었고 엠마누엘은 이미 결혼을 해서 1살 된 손자인 존(John)이 있었다. 첫 부인의 사망으로 재혼을 하게 되면서 초혼의 20세의 어머니와 결혼으로 장남인 프로이트가 태어났다.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2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낳았다. 이후에 4명의 프로이트의 여동생은 독일 나치의 박해해서 아이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서 가스실에서 사망했다. 프로이트가 영국으로 탈출 하면서 4명의 여동생들에게 상당한 금액의 돈을 남겼지만 나치로부터 프로이트의 직계 가족들만 추방이 허용되어졌기 때문에 여동생들을 구출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지금의 체코슬라바키아인 모라비아에서 태어나서 3살 때 비엔나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프로이트가 3살 때 비엔나로 이사를 오면서 이복 형님들은 영국 만체스트로 이사를 갔다. 이복 형님들과는 평생동안 서로 의좋게 지냈고 프로이트가 고교생으로 여름 방학에 만체스트를 방문하게 되면서 프로이트는 영국을 동경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나치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되고 정신분석의 서적들과 논문들이 독일에서 화형식에 처해지고 말살 되면서 마지막으로 그는 영국으로 탈출해서 죽음을 영국에서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앞의 글에서 여러 번 밝혔다(프로이트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 1- 19 편을 보라).

프로이트의 20세의 어머니와 23세의 이복 형님과의 그리고 20세의 둘째 이복 형님과 40세의 아버지와 세 사람의 관계에서 프로이트의 오디프스 콤플렉스 이론이 태어나게 되었다고 어네스트 존은 소상하게 노트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프로이트와 부인과 만남으로 되돌아가 보자. 프로이트의 첫째 여동생인 안나는 마샤의 오빠인 엘리와 연인 관계에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프로이트 집을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면서 프로이트와 마샤는 첫 눈에 서로 반하게 된다. 1882, 4월에 응접실 가족 테이블에서 한 개의 사과를 깎고 있는 발랄하게 잡답을 하고 있는 한 즐거운 처녀의 모습이 프로이트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날 이후부터 프로이트의 사랑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는 매일 같이 장미 꽃 한 송이를 마샤에게 보냈고 마사 역시 그녀가 손수 만든 빵을 프로이트에게 선물을 했다. 5월에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공원을 데이트를 하는 연인으로 발전해 있었다. 마샤가 그녀의 여동생인 미나에게 프로이트의 첫 인상을 물었을 때 미나는 우리에게 그렇게 흥미를 많이 보이는 것은 전통적인 독일 신사 같아!”라고 대답을 했다. 두 사람은 첫 만남 이후에 2개월 후인 6 17일에 약혼을 하게 되고 여동생 안나와 엘리의 약혼보다 먼저 했으나 결혼은 안나와 엘리가 먼저 했다. 프로이트가 1886, 9, 13일에 윈즈백 시청 홀에서 결혼씩 때까지 마샤와 4 8개월의 약혼 기간을 거치게 된다. 고로 프로이트와 마샤는 서로 쌍사돈이 되었다. 프로이트의 첫째 여동생인 안나와 마샤의 오빠인 엘리가 결혼을 했고 그리고 엘리의 여동생인 마샤와 프로이트가 결혼을 했기 때문에 두 가문은 서로 양쪽으로 사돈이 되는 쌍사돈이 된 것이다.

안나는 일찍 뉴욕으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나치의 박해로부터 피할 수가 있었다. 두 가족은 프로이트의 처남 엘리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날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프로이트가 영국으로 추방될 때 처남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프로이트는 이후에 엘리의 아들인 조카 에드워드 베르나이(Edward Bernyes)에게 독일어 원본의 정신분석의 총판의 미국의 영어 번역 판권을 제공을 했다.

다시 부인과 약혼의 4 8개월의 기간으로 되돌아가보자. 프로이트는 약혼자인 마샤에게 총 900여 통의 연애 편지를 교환을 했다. 프로이트는 편지 쓰기를 좋아해서 하루에 최소 4장에서 최대 12장까지 매일 편지를 썼고 그가 쓴 편지는 마샤에게 하루에 3통 혹은 4통이 함께 배달이 되었다. 엘렌버그는 프로이트의 전기에서 최고의 긴 편지가 34 페이지의 긴 연애 편지를 썼다고 소개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마샤뿐만 아니고 그의 제자들과도 많은 편지를 썼다. 그가 제자들에게 쓴 편지가 무려 4000여 통이 된다고 어네스트 존은 밝히고 있다. 그 편지들은 이후에 프로이트의 사망 이후에 존이 프로이트의 전기를 쓰게 되면서 그들의 편지들을 모아서 참고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프로이트는 철저히 사적인 생활을 중요시했다. 그가 마샤로부터 받은 편지들 그리고 친구들과 지인들과 나눈 편지들을 하나도 남김이 없이 파괴시켰다. 마샤는 프로이트로부터 받은 900여 통의 편지를 개인 적으로 보관했다가 파괴하려고 했으나 정신분석가가 되어 아버지를 계승한 막내 딸 안나 프로이트가 학문적인 가치의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극구 말렸기 때문에 마샤는 자신의 죽고 나서 공개하라는 약속을 남겼다. 1951년에 90세의 나이로 그녀의 죽음 이후에 그 편지들은 공개가 되면서 어네스트 존이 프로이트의 개인적인 성품과 인격과 인간미를 분석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노트하고 있다.

이제 프로이트와 5명의 여인들과 첫 번째인 처제 미나 베르나이(Minna Berneys)와 관계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 미나는 마샤의 여동생이었다. 마샤와 연인관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프로이트와 가깝게 되었고 프로이트는 그녀에게 그의 친한 친구인 스콘베르그(Ignaz Schonberg)를 소개시켜 주었고 두 사람은 약혼을 했다. 그러나 스콘베르그는 폐결핵으로 프로이트가 요양을 권유했지만 무리하게 영국에서 사업차 방문했다가 실패하면서 폐결핵으로 사망 직전에 미나와 약혼을 취소시켜주었다. 이후에 미나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녀는 약혼자의 사망 이후에 프로이트의 집에 머물면서 조카들을 돌보아주었다. 프로이트는 2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6명의 자녀들을 키우면서 마샤는 살림살이와 자녀 양육으로 정신분석에는 관심이 없었다. 프로이트의 대명사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방 문턱을 넘어서는 그 순간에 사라진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프로이트는 개인적인 가족 생활과 전문 분야를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미나는 언니와 달리 총명했고 정신분석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그는 프로이트의 개인 비서 겸에 그리고 언니의 조카들을 양육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평생동안 프로이트 가족과 함께 살았다. 프로이트의 부인 마샤는 몸이 좋지 않았고 자주 빈혈에 시달렸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프로이트는 명사가 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해외 여행을 좋아했다. 특별히 그는 그리스 시대(오디프스 이론의 근원)와 로마 시대의 고적과 문화에 대한 답사 때문에 이태리를 7 번이나 여행한 것으로 노트되어지고 있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골동품들을 수집(취미로써)을 해서 친구나 제사들에게 한 개씩 선물한 일화는 유명하다. 부인은 건강 때문에 여행을 싫어해서 프로이트는 혼자서 여행을 하거나 혹은 처제인 미나를 대동하고 여행을 했다. 프로이트는 여행 중에 쉬면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그의 많은 이론들이 여행 중에 구상한 것으로 그 스스로가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 취미이고 여행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개발했다고 밝히고 있다. 미나 역시 여행을 좋아했고 건강 때문에 요양지를 자주 찾았다 그녀는 프로이트와 함께 여행을 하거나 혹은 따로 여행을 하다가 같은 여행지에서 자주 만나서 프로이트의 글들과 논문들을 교정해주고 도와주었다.

여기에서 일부 독자들은 같이 여행을 하면 자연스럽게 섹스 관계로 발전할 수 있기 않겠는가?라는 의구심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미나는 한 가족 구성원으로 평생을 같이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딸과의 관계로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딸에게 섹스 욕구를 느끼고 발기를 하면 그 아버지는 변태성욕자가 틀림없다.

치료자는 중학교 2학년인 A 양이 IMF 이후에 실직한 아버지를 위로 하면서 아버지의 어깨와 팔다리를 주물러주면서 아버지의 발기된 성기에 깜짝 놀래서 이후에 그것의 상처 때문에 치료자에게 1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사례가 있다. A양과 아버지가 근친상간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사춘기의 딸에게 섹스 욕구를 느낀다고 하면 그것은 아버지가 변태성욕이 틀림없다고 확신을 한다. 아들은 엄마와 누나를 보고 섹스 요구를 느끼고 개발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딸은 아버지를 통해서 섹스 욕구를 개발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거세 불안) 때문에 엄마를 포기하고 이성 쪽으로 딸은 엄마 때문에 아빠를 포기하고 사춘기에 이성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는 것이 오디프스 콤플렉스가 아닌가? 그러나 아버지가 딸에게 섹스 욕구를 느끼거나 엄마가 사춘기 아들에게 섹스 욕구를 느끼는 것은 다르다.

이후에 미나는 녹내장으로 수술을 받았고 노년에 요양소에 거주하다가 나치가 프로이트 가족을 추방하면서 같이 오스트리아에서 영국으로 함께 따라가게 된다. 미나와 프로이트가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을 프로이트의 제자들은 다 알고 있었고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두 번째 프로이트와 평생동안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프로이트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리스의 공주이자 덴막의 공주인 마리에 보나파르트(Marie Bonaparte) 이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어 프로이트와 함께 대학원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를 했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임종 시에 어네스트 존과 함께 임종을 시켜본 사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이트를 추종한 사람이다.

첫 번째 이벤트는 프로이트가 브로이어(Breuer)와 관계 즉 스승 겸, 친구 겸 그리고 보호자 겸의 돈독한 두 사람의 관계가 프로이트의 신경증의 원인이 섹스라는 이론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서로 결별하게 되면서 이후에 프로이트가 2살 연하의 독일의 비이인후과 의사인 프레이스(Fliess)10년간의 돈독한 관계로 발전하면서 프로이트의 유아기 섹스 이론의 절대적 지지자로 격려와 칭찬을 했던 친구 프레이스에게 그 동안에 보냈던 284 통의 편지들이 1928년에 프레이스의 사망으로 그의 미망인 스타할(Reinhold Stahl)이 프로이트에게 이 편지가 넘어가지 않는다면 조건으로 한 서점 상인에게 그 편지들을 판매한 것을 보나파르트가 그것을 알고 100 파운드로 재 구입을 해서 비엔나의 로스차일트(Rothchild) 은행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게 되면서 이것을 다시 덴막의 공사에게 맡겨두었다.

보나파르트가 프로이트에게 이 편지들을 재 구입해서 가지고 있다고 말을 했을 때 프로이트가 분노해서 그것을 절반 값에 프로이트에게 다시 팔아라 라고 제의를 했지만 그녀는 이 편지가 파괴될 것을 예견하고 그리고 이 편지들이 정신분석의 연구에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해서 거부를 했다.

이후에 제 2 차 세계 대전으로 혼란해지자 그 편지의 보관이 어렵게 된 것을 알고 이 편지를 영국으로 발송할 때 그 편지가 독일의 U-보트 공격(잠수함의 무차별 공격으로 4척의 영국 화물선의 침몰)으로 파손되어질 것을 우려해서 방수로써 포장을 해서 영국의 프로이트 가족으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이후에 안타 프로이트와 정신분석가 크리스(Ernest Kris)에 의해서 그 편지들이 출판 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벤트는 나치의 오스트리아 점령으로 1938, 3, 11일에 나치의 친위대원들이 프로이트 짐에 침입해서 가족들을 구금하고 집안을 수색하게 되면서 프로이트가 위험에 직면하게 되면서 그녀가 연락을 받고 3, 17일에 파리로부터 프로이트의 집에 도착을 했다. 그녀가 어네스트 존과 그리고 프랑스 미국 대사인 불릿(Bullitt)과 합동으로 프로이트 구출 작전에 뛰어들게 되었다. 비엔나로 가는 비행기가 단절되자 개인 비행기로 비엔나에 도착한 어네스트 존은 프로이트와 친밀관계를 가지고 정신분석에 흥미가 있었던 프랑스 미국 대사인 불릿(Billitt)에게 부탁을 해서 그의 절친한 친구인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전화를 걸어서 프로이트의 구출을 호소했고 그가 워싱턴의 미국 주제 독일 대사에게 부탁을 해서 마침내 프로이트가 나치로부터 프로이트의 직계 가족만 출국하도록 허용되었다. 동시에 어네스트 존이 영국으로 달려가서 영국의 내무장관에게 프로이트의 입국허가와 취업 이민 허가를 받아내서 프로이트 가족들을 무사히 출국시키게 되었다(상세한 구출 작전은 프로이트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 17 편을 보라).

나치의 출국허가를 마침내 받아냈으나 나치는 프로이트에게 지금까지 없었던 출판 인쇄 비용 명목으로 $4,824의 거액의 돈을 지불할 것을 요구를 했다. 프로이트는 그러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보나파르트가 이 돈을 지불하고 프로이트가 영국에 도착해서 이 돈을 환불을 했지만 그녀는 이 돈을 영국에서 논문집 출판사 설립에 기부를 했다.

세 번째 이벤트는 프로이트가 평생동안 위험 부담으로 상당량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반출할 수가 없었다. 보나파르트가 그리스 대사를 찾아가서 그리스 왕의 특사로 급송하도록 도와주어서 프로이트가 상당한 량의 금액을 무사히 영국으로 반출할 수 있었다.

네 번째 이벤트는 프로이트가 오스트리아에서 추방으로 기차를 타고 파리를 지나갈 때 프랑스주제 미국 대사인 불릿과 보나파르트의 환영을 받았다. 프로이트 가족은 파리 근교의 보나파르트의 아름다운 저택에서 12시간의 휴식을 가진 후에 도바 해협을 건너가는 기선을 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나파르는 1939년에 프로이트의 암 수술이 재발해서 사망이 임박해지자 그녀는 거의 영국에서 살다시피 거주를 하면서 프로이트의 병환을 지켜보았다. 9 23일에 몰핀 3분의 1을 주사로 프로이트는 고통 없이 영면을 할 때 존과 함께 임종을 시켜본 장본인이었다.

 세 번째 여성이 프로이트와 24년 동안 서신 교환으로 프로이트와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한 로 살로메(Lou Salome)로써 프로이트가 그녀를 존경하는 편지들을 교환을 했다. 그녀는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제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인간적인 매력에 그리고 프로이트의 인간적인 매력에 순수하게 이성으로서 인격과 존중으로 교재를 한 것으로 프로이트가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니체와 그녀 사이에 진실한 결속을 자랑했던 여성으로 프로이트를 인간적으로 좋아했다. 그녀는 마당 발로 유명한 사교계의 여왕으로 통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반지를 선물한 4명의 여성 가운데 한 명이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제자들 즉 항가리의 정신분석학회 회장인 샌드로 프렌치, 독일의 정신분석 학회 회장인 칼 아브라함, 프로이트의 집사로써 모든 사무적인 일을 맡아서 도와준 사람으로 의과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고교 졸업으로 청소년 분석가가 된 오토 랭크, 그리고 변호사로써 정신분석가가 된 한스 샤크, 의과 대학생으로 프로이트에게 감명을 받아서 프로이트 집을 방문해서 프로이트와 저녁 산택으로 정신분석을 배운 이후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테인에서 독립국가를 세우면서 이스라엘로 달려가서 이스라엘 정신분석학회를 세운 찰스 에팅곤 그리고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에너스트 존에게 모두 5명에게 특수 반지를 선물을 했다. 위의 5명은 프로이트의 비밀 조직으로 정신분석을 반대하는 외부 세력들로부터 정신분석을 지켜낸 사람들이다.

프로이트가 여성들에게 반지를 선물한 사람들이 있다. 첫 번째 여성으로써는 막내 딸인 안나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의 후계자로써, 그리고 마리에 보나파르느, 루 살로메 그리고 어네스트 존의 부인이 유일하게 프로이트로부터 반지를 선물 받은 사람이었다.

 루 살로메가 사망했다는 부고를 받은 프로이트는 살모메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녀의 추도사를 직접 쓰기도 했다.

 네 번째 여성이 바로 하버드 법과대학 이사회의 이사장으로 있었던 맥(Mack)판사의 딸인 루스 브룬위크(Ruth Brunswick)였다. 그녀는 하버드 대학 졸업 후에 오스트리아와 건너와서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해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브룬스위크의 첫 번째 이벤트는 특별히 프로이트가 구강암에 결러서 32회의 수술을 받으면서 입안에 철판을 깔고 식사를 해야 하는 고통을 평생동안 달고 살았다. 이 보철이 맞지 않아서 평생동안 고통에 시달리는 프로이트를 위해서 미국 하버드 치과 대학 교수였던 세계적인 보철 전문가인 카자니안(Kazanisan)이 베를린 세계 치과 학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 맥 판사에게 애걸해서 카자니안이 비엔나로 와서 프로이트의 보철을 만들어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을 해서 그가 20일 동안 비엔나에 거주하는 비용과 보철 이용으로 6,000 $의 비용을 그녀가 부담을 했다. 그러나 그 보철은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후에 프로이트가 6,000달러를 보내주었지만 그녀는 그 돈을 그 당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프로이트의 개인 출판사(프로이트는 개인적으로 정신분석 연구들을 위한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다)에 기부를 했다.

 두 번째 이벤트는 프로이트가 러시아의 귀족의 아들로써 강박증으로 프로이트에게 치료를 받은 23세의 청년이 그의 주치의사를 대동하고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러 왔다. 그가 바로 프로이트가 강박증 치료 사례로써 유명한 연구인 늑대인간(Wolfman, 1918)의 장본인이다. 그는 4살 때 늑대 공포증으로 10살 때까지 계속되었다 6살 때 신성 모독(입에서 신에 대한 욕설들이 튀어 나온다) 그리고 17살 때 임질 증세들로 자아가 붕괴되었다. 그리고 2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옷을 입거나 식사를 하거나 하는 일상생활이 전혀 안 되는 사람이었다. 첫 번째 치료 회기에서 프로이트에게 항문 섹스를 요구하는가 하면 그의 머리에 똥을 싸달라고 요구하는 이상한 돌 아이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프로이트에게 4년 동안 분석 치료를 받았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1914, 7월에 프로이트가 여름 휴가로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다는 통고에서 깜짝 놀라서 회복이 되어 건강하게 러시아로 되돌아갔다. 이후에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으로 재산들을 몰수당하고 알몸으로 부인과 함께 비엔나로 도망을 온 것을 프로이트가 6개월 동안 생활 비용과 재발한 두 번째 치료를 무료로 해주어서 그의 정신 건강은 회복이 되었다.

이후에 잘 지내다가 프로이트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재발해서 다시 분석치료를 받으러 왔을 때 이번에는 프로이트가 아닌 프로이트의 제자인 브룬스위크가 2번이나 약 3년 이상 그를 치료를 했다. 그 이후에 그는 회복을 했다. 브룬스위크가 어떻게 치료를 했는지?를 소상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섯 번째 여성이 바로 영국의 첫 여성 정신분석가가 된 죠아 리비(Joan Riviere) 이다. 그녀는 어네스트 존의 소개로 1920년에 처음 프로이트를 만난 후에 프로이트에 매료되어서 1922년까지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해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녀는 그 당시에 대부분의 분석가들의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나 의과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분석가가 된 몇몇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다. 그녀는 이후에 영국에서 어네스트 존과 함께 런던에 정신분석학교와 영국 정신분석학회의 창립에 공헌을 했고 이후에 메라니 크레인을 영국으로 초대를 해서 대상관계 정신분석을 창조하는데 공헌을 했다.

프로이트의 죽음 이후에 어네스트 존이 리비에가 프로이트를 처음 보았을 때 첫 인상을 적은 글을 소개 하고 있다.

나는 제 1 차 세계대전 이후에 1920년에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 정신분석 총회에서 프로이트 교수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예외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써 인상을 주었다. 그의 모습은 한 의사의 전형적인 것은 아니었다. 혹은 그것은 특별히 유태인 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재빛 수염과 그리고 꾸부정한 어째를 가진 긴 창백한 얼굴이 한 지식인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사람의 학식 있는 교수의 인상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두 개의 다른 필수적인 특징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그의 꾸부정한 그리고 넓은 그리고 강한 인물로 오히려 완고한 인상 그리고 확정적인 턱이 존엄과 감추어진 힘의 한 개의 커다란 비축된 불굴의 끈질김이었다. 그는 어떤 점에서 초연해 보였다. --------생략----- 그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앞쪽으로 내민 그의 머리였다. 그리고 그의 날카롭게 쳐다보는 눈들의 비판적인 탐색적인 응시적인 눈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오히려 두렵게 고무되는 모습이 한 개의 매혹적인 유머의 번쩍임에 의해서 빛이 났다. 항상 잠재적이고 계속적으로 그의 전체 인격체가 그가 말을 할 때 반사되어 나왔다.

나는 이미 그의 깜짝 놀라는 문학적인 지식을 그의 글로부터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기억, 특별히 섹스피어, 그리고 그의 다른 입맛들, 그의 그리스, 로마의 골동품들의 그의 사랑, 그리고 초반기 문화들과 예술 등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내가 처음 그의 영어의 놀랄만한 구사력을 알게 되었다.

이들 인상들은 1922년에 내가 그와 함께 연구를 했을 때 확정이 되었다. 그의 심리학처럼, 그의 성격은 진실로 그 자체가 개인들과 관계를 하는 것이었다. 그 교정은 결코 차갑지도, 혹은 건방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표면상에 무관심은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가 깜짝 놀랄만한 흥미와 주의관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소상하게 포착하는 한 사람의 생생한 열정적인 마음을 만났다. 그의 커다란 에너지의 그 흐름의 필수성이 느껴졌다. 그가 어떻게 머리말, 서두를 싫어했는가? 나의 첫 그와 분석적인 시간은  - 룰들과는 반대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마음을 열었다. “글세 나는 당신에 대해서 이미 어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략---- “나에게 가지고 싶은 것을 위해서 한 개의 요약을 주세요.” ----생략--------------

그의 침투적인, 주의관심의 눈들은 한 어린이의 죄 없는 명료한 모습과 그 단순성 한 개는 사람을 위해서는 너무 작은 것은 없다는 것---생략----거기에는 역시 그들 안에서 한 개의 성숙한 인내심과 조심이 ---생략 ----반쯤 응시적인 그리고 반쯤 꿰뚫는 응시는 무거운 눈썹 밑에서 그 표면의 밑을 보기 위한 한 개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평범한 지각의 영역을 넘어 갔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환자를 위한 한 개의 주의 깊은 주도 면밀함 -----생략-----다시 말해서 거의 차가운 회의주의는 냉소주의 혹은 염세주의로 잘못 읽어질 수 있다. 거기에는 그 안에서 한 개의 끝없는 흔적에 대한 사냥꾼의 체크하고 수정을 하는 지속적인 부동의 감시자와 같은 한 개의 연결이었다. ----생략 ----불굴의 용기와 끈질김은 흔들리지 않는 정직함과 합쳐져서 관찰의 그의 재능들을 지지해 주는 그 인격적인 것이었다. 그의 용맹한 상상과 깨달음은 그의 커다란 성취로 연결 되었다. ----생략----우리가 그의 커다란 업적에 빚을 지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에게 그를 사랑 받게 하는 그의 성격은 많은 인간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글들의 모방할 수 없는 건조한 유머는 일반적인 교제 안에서 대부분의 상황들 안에서 즐거움을 찾기 위한 능력과 한 개의 매력 있는 유쾌함이 되었다. 비록 그가 참을성이 있고 그리고 철학적이지만, 그는 인내심이 없음과 참을성이 없음의 양쪽 다가 될 수도 있었다.

그의 유머는 종종 위트가 넘쳤다. 그리고 가시가 있는 신랄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성낼 수 있고 노여워할 수 있고 그리고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가 어리석음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일 안에서 한 사람의 위대한 사람이 될 운명으로 강압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의 사적인 생활을 한 평범한 사람으로써 그의 사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그런 종류의 삶을 믿고 있었다. ----생략 ----종교는 삶을 흙 혹은 백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복잡성과 타협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 안에서 주체는 과학적인 심리학의 문제이다. 정치적인 토픽들에 한 개의 열띤 논쟁이 일어 났을 때 그는 흙이나 혹은 적이냐? 혹은 파시스트냐 혹은 사회주의냐?로 비난하지 않았다. 그의 즐거운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아닙니다. 사람은 신선한 색깔이어야 합니다 “ ---생략--- 그는 특별히 문학적인 세계 안에서 수 많은 저명한 동시대의 헐뜯는 은둔자는 아니었다. 이들 사이에는 눈에 띄게 로만 롤랜드(Romain Rolland), 토마스 만(Thomas Mann), 아놀드(Arnold) 그리고 스테판 제위그(Stefan Zweig). 그러나 어떤 진실된 탐구적인 방문객은 항상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하고 그리고 친절한 수용으로 만났다. 그 인터뷰의 결과가 어떠했든지 간에 ---생략---사람들은 그 안에서 그들의 고립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무엇 보다 프로이트는 완전히 괴롭힘이 없었다. 그는 실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본성 안에서 속임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의 이정표가 핵심적인 정직함이었다. ----생략---두려움이 없음을 표현한다. 진실의 그 수용과 그것의 사랑은 그를 특징지었다. 그리고 그의 연구 안에서 영감으로 남아 있었다.

여섯 번째가 도로시 불링함(Dorothy Burlingham)이다. 그녀는 고급 보석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의 티파니 회사(Tiffany & Co.)의 창설자인 찰스 티파니(Charles Tiffany)의 손녀로 외과 의사와 결혼 했으나 그가 조울증으로 결혼생활이 어렵다는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이혼을 했다. 이후에 4명의 자녀를 양육하면서 그녀의 한 아들이 심인성 피부 질환(습진=아토피)으로 밝혀짐으로써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기 위해서 1925년에 4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비엔나로 이사를 와서 안나 프로이트에게 치료를 받았다. 아들의 피부질병뿐만 아니라 3명의 자녀들의 신경증들이 치료되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녀는 의과대학을 졸업하지 않는 사람으로 이후에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녀는 1938년에 나치로부터 프로이트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프로이트 구출 작전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녀는 1938년에 런던으로 이사를 했다. 그녀는 안나 프로이트와 의형제를 맺고 이후 40년간 안나 프로이트와 함께 소아 정신분석을 개척을 했다. 프로이트 사후에 1940년에 프로이트 가족이 되어 함께 살면서 제 2 차 세계 대전 동안에 런던에 안나 프로이트와 공동으로 햄프스테드(Hampstead) 전쟁고아 보육원을 창설해서 이후에 햄프스테드 치료소(Hampstead Clinic)로 변경되었다. 이후에 이 치료소는 안나 프로이트 치료 센터로 이름이 변경되었다(안나 프로이트 센터는 이후에 안나 국립 어린이와 가족 치료 센터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2009, 10월 현재 72명의 직원과 50명의 자원봉사자로 구성되어진 어린이 정신건강 연구센터가 되었다(위키피아, 2018, 6, 23).

불링함은 이후에 소아 정신분석가와 교육가로써 유아와 어린이 분석치료에 평생토록 헌신을 했다. 정신분석의 비판가들은 불링함과 독신으로 평생을 살아간 안나 프로이트가 혹시 동성애가 아닌가? 의심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을 그러한 관계가 아니고 의형제로써 평생을 같이 보낸 친구이자 동업자로 밝혔다.

엘렌버그의 프로이트에 대한 연구에서 어네스트 존과 안나 프로이트가 서로 좋아했던 연인 사이로써 결혼을 하려고 했으나 그 당시에 안나가 16살의 소녀라는 이유로 프로이트가 존에게 여성으로 보지 말고 사춘기의 여동생으로 보라는 말에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고 노트하고 있다. 안나 프로이트는 독신으로 살았고 소아 정신분석의 개척자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앞의 블로그에서 밝힌바 있다.

불링함은 이후에 프로이트의 가족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녀가 사망했을 때 화장해서 그녀의 유해는 프로이트 가족 묘지에 안장되어져 있다고 어네스트 존은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에서 노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본 것처럼 프로이트는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깨끗하고 정직하고 여성들을 존경하고 존중한 전형적인 남성다운 남성미가 넘치는 남자였다.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프로이트는 미래의 부인과 연애를 4 8개월 동안 했고 900여 통의 연애 편지를 썼으니 사랑을 주고 받는 욕구들이 충분히 충족되었기 때문에 사랑의 욕구의 고착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에 목을 매지 않았다고 본다. 사랑에 목을 매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사랑에 한이 맺힌 사람들로써 치료자 역시 그러한 남녀들을 많이 치료를 해 보았다.

결혼 이후에 원만한 부부 생활로써 프로이트는 사랑과 섹스에 맺힌 한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에 만 매진할 수 있었고 심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었다. 프로이트가 청년 시절에 신경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제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정확하게 어떤 신경증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가 고통을 받았던 그 신경증은 그의 자아분석 기간인 1890-1900년까지 그 자신의 꿈 분석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고 프로이트 자신이 밝히고 있다. 고로 프로이트를 만났던 여성들은 한결같이 그가 섹스 이론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섹스적으로 깨끗한 사람이었고 부인에게 평생동안 일부일처로 헌신한 대표적인 남자로써 기록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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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참고: 에너스트 존(Ernest Jones)의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 제 Ⅰ권(1953), 제 Ⅱ 권(1955), 제 Ⅲ 권(1957)의 저서들

           : 헨리 엘렌버그(Henri Ellenberger, 1970)무의식의 발견: 역동적인 정신의학의 진화와 역사의 저서

     위의 저서들은 우리나라 말로 전체 저서가 완전히 번역되어 소장하고 있으니 치료자의 전문서적 안내에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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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분석 치료 사례는 우울증으로 3년 동안 고통을 받아온 한 미혼 여성의 치료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녀는 3년 동안 두문불출로 방안에 갇혀서 살아 오다가 인터넷에서 치료자정신분석 심리치료 홈페이지를 보고 분석 치료를 2년 동안 받고 회복되어 정상적인 직장 생활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카우치에 누워서 정신분석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과 분석가

대상: 20대 초반의 전직 간호사인 H

증세: 우울증, 불안증, 대인 공포증

접촉: H양은 치료자의 홈페이지를 방문한 후에 여러 치료 사례들을 읽고 나서 심리치료를 받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메일로 여러번 연락이 왔으나 직장에서 사표를 쓰고 나서 퇴직금이 나오지 않아서 치료자와 첫 연락 후에 1달이 지나고 나서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치료 기간: 1회 치료 회기에 2시간 씩 1주일에 1회로 6개월간 치료 계약을 했음

치료 결과: 아래의 분석은 H양이 첫 2시간 인터뷰 상담 후에 그녀의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치료자가 분석한 내용임

 

치료의 과정

 치료자는 그녀가 치료를 받으러 오기 직전까지 남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치료 시간에 치료실 근처에 도착했다는 휴대 전화 연락을 받고 나서야 치료자는 H양이 여자임을 알 게 되었다. H양이 치료자에게 보낸 e-메일을 소개를 하고자 한다. 그녀는 치료가 절실하며 꼭 심리치료를 받아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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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받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되나요?..?

정신분열증진단은 받지는 않았지만

대화치료,심리치료 받아보고싶어서요.

병원이라는 직장에 다니면서 환자들 대하는데에서도 많은어려움을 겪고있고

직장동료들과도 너무나도 관계가 어렵습니다. 도와주세요 ..

비용은 얼마나 하는지요?

꼭 답변주세요 .

그리고 상담받을려면 직접가야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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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양의 삶의 배경

 H양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를 잃어 버렸다. 아버지는 50대 초반으로 전기 기술자로 일하고 있고 2살 아래인 남동생이 있는데 그는 지금 고 3으로 태어날 때부터 정신박약으로 고통을 받아왔고 최근에 남동생과 싸움으로 남동생에게 심하게 폭력을 당했다는 하소연을 몇주일 전에 e-메일로 상세하게 전해와서 치료자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엄마가 떠난 자리를 그녀가 대신해서 맡아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떠난 자리는 H양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그녀는 초등학교 1학년-2학년 시절에는 수학 경시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은 적도 있고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여러 차례 상도 받은 적이 있다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녀는 학업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 집중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남동생은 5살 쯤에 외할머니의 집에 친척벌 되는 할머니가 데리고 가서 4-5년 동안 지내다가 초등학교 입학 시쯤에서 집으로 와서 같이 살 게 되었고 그 때부터 남동생은 아버지와 H양의 골치거리가 되었다. 늘 남동생을 옆어서 돌보아주어야 하는 형편이었고 늘 생때를 쓰고 트집을 하고 성질을 부리는 남동생이 불쌍하기도 하고 한편 미워서 남동생과 많이 싸웠으나 이제는 남동생이 신체적 골격이 사춘기를 넘어가는 시쯤에서는 싸우면 늘 H양이 남동생에게 얻어 맞는 결과 발전했다고 쓸쓸해 했다.

 아버지는 엄마의 죽음 이후에 H양이 4학년의 시쯤에서 이웃에 사는 어떤 유부녀를 좋아해서 내통을 하는 바람에 그 부인의 남편이 H양의 집에 와서 자신의 마누라를 내 놓으라면서 행패를 부리는 고통스런 기억을 회상을 했다. 아버지는 남편과 자식들이 있는 그 유부녀를 좋아해서 같이 정을 통하는 행각을 하다가 그녀가 이혼을 하고 아버지의 호적에 입적해서 같이 1년 정도 살다가 이혼을 하게 되었고 그 부인은 다시 그녀의 과거의 가정으로 되돌아갔다고 했다. H양은 그 부인과 같이 살던 1년이 고통스러웠다고 회고를 했다. 그녀에게 엄마라는 말을 해 보지 못했고 할 수가 없었고 정면으로 눈을 맞추고 쳐다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후에 그녀는 처음의 그녀의 가족으로 복귀를 하고난 후에도 그녀의 동네에 지금까지고 살고 있어서 한편씩 마주칠 때면 서먹서먹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않절부절하지 못한다고 털어 놓았다.

 왜 이사를 가지 않고 이웃에서 같이 살면서 서로 고통스런 대면을 지금까지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사를 가지 못하고 있는 사연을 눈물을 글썽이면서 다음과 같이 털어 놓았다.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가 아버지가 유부녀와 내통을 한 직후에 이웃에 살면서 그녀의 집에 자주와서 H양과 남동생을 돌보아주고 같이 쇼핑도 하면서 잘 챙겨주어서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고모의 씀씀이가 커서 한편 슈퍼마킷에 식품을 사러가면 10만원씩 사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 고모는 남자 친구와 함께 H양의 집에 늘 드나들면 H양과 남동생을 돌보아주는 척 했다고 했다. 어느 날 그 고모와 남자 친구가 종적을 감추었고 그 다음에 아버지와 H양은 그 고모가 아버지의 신용카드를 여러개 만들어서 여기 저기에서 돈을 대출하고 나서 줄행랑을 친 것을 알 게되었다고 했다. 모두 아버지의 신용 카드로 사체 업자에게 대출을 받은 돈이어서 매달마다 대출금 독촉장이 여러장씩 날아들어오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봉급은 그 사체 이자를 갚는데 다 들어가 버리고 사체 업자에게 전화 독촉과 위협에 시달리는 세월이 무려 7년이나 흘러갔다고 했다. H양이 초등학교 6학년 쯤에서 고모가 사체를 얻어쓰고 도망을 간 후에 H양이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무려 7년이나 사체 업자들의 위협과 협박에 시달리면서 돈을 갚아 나가다가 할 수 없이 아버지는 파산 신청을 하고 그녀와 아버지가 살던 빌라는 법원에 경매로 나온 것을 아버지가 다시 매수를 하는 방식으로 큰 고모의 이름으로 그 빌라를 다시 사게 되었는데 그 큰 고모가 먼 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그 매매 서류들을 가지고 가 버리는 바람에 팔지도 못하고 그곳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 큰 고모는 만약에 그 서류를 H양의 가족이 가져가게 되면 은행에 대출을 받고 돈을 갚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H양의 가족과 연락을 끊어 버리고 서로 연결이 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H양은 7년 동안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고 했다. 전화가 오면 절대로 받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신신당부를 들었고 또 협박 전화 때문에 전화 노이로제에 걸렸었다고 했다.

 H양은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교 공부에 전념할 수가 없었고 공부에 신경을 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H양과 남동생에게 폭력적었고 말을 듣지 않으면 자주 폭력을 행사를 했다. 고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복종적이 되었고 H양은 자기 주장을 할 수 없었다. 늘 남동생의 돌보아주어야 했고 남동생에 한데는 그의 분노의 표적이 되어왔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도 공부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강조를 하는 것은 늘 집안 청소였고 항상 청소를 해도 집안은 늘 깨끗하지 않았다. 학교 성적은 중간 정도에서 왔다 갔다 했다. 학교 공부 만으로도 그녀는 보통 수준은 유지를 했다. 실업계 고교를 선택한 후에 그녀는 고교 졸업 후에 간호 조무사 자격을 얻어서 xxx 종합 병원에서 2.5년 동안 일을 해 오다가 지난 달에 병원 근무를 그만두게 되었고 했다.

 남동생은 지금 몇 살 늦게 인문계 고등학교에 3학년으로 다니고 있다고 했다. 장애자 학교가 아니고 왜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느냐는 치료자의 질문에 그녀는 이웃 사람들이 장애자 학교보다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야 정상적인 학생들과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권유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그 학교에서 특수반에 들어가서 특수반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한번씩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하거나 매일 아침 동생의 등교 준비에 골머리를 앓아왔다고 털어 놓았다.

 H양의 집에는 한가지 특이한 것이 있었다. 그녀는 고양이를 16마리나 키우고 있고 개도 2마리나 함께 생활을 하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그 고양이들이 오줌 똥을 가리는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줌 똥을 아무데나 갈기고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H양이 청소를 하는데 질려서 이제는 집안을 돌보지 않고 그대로 방치를 하고 있다고 하소연을 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처음에 도둑 고양이가 집으로 들어와서 잘 돌보아주었더니 그 고양이가 새끼를 4마리 낳고 그 새끼들이 다시 커서 또 새끼들을 낳아서 이제는 16마리나 되었는데 며칠 전에 아버지가 4마리를 가방에 넣어서 버린다고 하면서 가지고 나간 다음에는 지금은 12마리가 남아 있다고 했다. 개가 두 마리나 된 것은 큰 고모가 이사를 가면서 이사를 가는데는 개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는 속설에 그 개를 H양의 집에 맡기고 난 것이고 한 마리는 길거리에서 떠돌이 개로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데리고 와서 같이 살 게 되었다고 했다.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남동생과 그녀가 개와 고양이를 무척좋아는 하는데 문제를 그들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방치를 해서 이제는 고양이와 개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 완전히 지저분하고 대소변이 여기 저기에 방치되어 있어서 청소에 질려 버리고 자포자기로 변했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을 사귈 수가 없었다고 했다. 엄마가 없어서 용의가 단정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것을 친구들이 더렵다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피하는 것에 질려 버렸다고 원통해 했다. 친한 친구가 생기면서 단짝 친구의 험담을 하게 된 것이 단짝 친구의 귀에 들어가서 그 다음부터 학급 동료들에게 친구의 뒤담을 하는 학생으로 낙인이 찍혀서 이후에는 혼자서 초등학교 6학년 내내 따돌림을 당했다고 했다. 친구들이 H양의 옷차림과 깨끗하지 못한 용의가 불결한 학생으로 낙인이 찍혀서 친구들이 멀리하게 되면서 더욱 고립 속에서 초등학교를 보냈다고 고통스러움을 하소연을 했다.

 H양은 지금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는 할머니와 삼촌과 함께 살고 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전기 기술자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으로 두 사람이 만나면 별로 말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주로 만나서 식사를 하거나 영화는 보는 것이 늘 하는 일과라고 이야기를 했다. 치료자에게 대화를 하는 기술을 배워서 연인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xxx 종합 병원에서 산부인과와 소아과에 근무를 하면서 그녀가 겪었던 고통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환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하는 점을 자아 비판쪼로 이야기를 했다. 시키는 일도 유연하게 여유롭게 하지 못하고 늘 빈잔을 듣는 경우가 많아서 자신감이 떨어지고 도저히 그곳에서 더 이상 근무를 할 수 없어서 그 병원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 두고 나왔다고 했다.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이론적 근거

 H양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를 잃어 버리고 엄마의 대역으로 가정일을 돌보아야 했고 장애인 동생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문제는 뒷전이었다. 아버지가 집안 일들을 H양에게 떠 맡기는 바람에 그녀는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정식으로 재혼을 해서 집안 살림을 맡을 사람을 구하지도 않고 이웃집 유부녀와 바람을 피운 탓에 그 유부녀의 남편이 H양의 집에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고 삿대질을 하는 바람에 동네 사람들에게 챙피하고 낯 부끄러웠다고 털어 놓았다. 고스란이 심리적 고통들이 H양에게 어린 시절에 짊으로 지워졌고 이후부터 남의 비위를 맞추고 남의 눈치를 보는 복종적인 태도가 습관화된 것이었다. H양은 초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집안 일들 때문에 찌들려서 공부나 자신을 스스로 돌볼 여유가 없었다. 늘 같은 옷에다 꽤째재한 용의가 불량한 학생으로 동무들과 선생님들에게 낙인이 찍혀서 기가 죽어서 자신감이 낮아진 것이었다. 동료들에게 자신의 집안 사정을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눈치만 늘어나게 된 것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생활을 거의 비슷했다. 말이 별로 없고 친구들도 몇이 없어서 늘 외톨이로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 공부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지만 학교 성적은 중간을 유지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그녀는 일찍 감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전문대학에 들어갔고 간호사가 되어서 일자리를 구해서 xxx 병원에서 2.5년 동안 근무하다가 대인관계의 고통 때문에 직장을 최근에 그만 두게 된 것이었다.

 엄마를 잃고 엄마 대역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지워진 짊이 H양에게는 너무나 무거웠다. 학급 동료들은 공부만 해도 힘든다고 비명을 지르는데 H양은 공부는 뒷전이고 그녀 자신도 돌볼 시간이 없었다. 예습과 복습은 남의 이야기였다. 단지 학교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학교 공부 시간에 선생님에게 들었던 것만으로도 그녀는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고 고등학교는 특수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친가의 형제들을 돌보느라고 정작 자신의 자녀들 H양과 남동생을 제대로 돌보아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전기 기사로 전문직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여동생이 남자 친구와 함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도망을 가는 바람에 여동생의 빛을 감당을 하느라고 H양의 중, 고등학교 시절을 낭비한 결과를 가져왔다. H양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고모의 빚쟁이들의 전화와 협박과 시달 림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정작 공부하고 자신을 돌볼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낭비를 하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족 문제에 얽히면서 자녀들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준 것을 아버지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7년 동안 고모의 빚 문제로 시달리다가 아버지와 남동생과 함께 그녀가 살고 있는 빌라가 법원 경매로 넘어가는 것을 아버지가 큰 고모의 이름으로 다시 그 집을 사게 되어 집을 건질 수는 있었지만 그 문제로 H양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는 앞으로 분석해서 밝혀내야할 과제가 되었다.

 H양은 내면 속에 가족들 특히 친가의 식구들 고모, 삼촌 그리고 아버지, 남동생에 대한 분노가 내면의 마음 속에 많이 쌓여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고모에 대한 분노는 고모 이야기만 나와도 분기탱천했다. 친가의 가족들 특히 큰 아버지는 사회생활을 재대로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독신으로 살고 있고 고모는 최근에도 고모가 타고 다니는 승용차가 폐차를 하면서 아버지가 150만원의 비용을 들여서 고모의 자동차를 폐차시켜 주어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분노했다. 막내 삼촌은 결혼을 해서 인근 도시에 살고 있으나 아버지에게 대출을 해 달라고 요구를 해서 또 다시 가족들과 경제 문제로 얽히게 되지 않을까 H양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문제 해결에 초점

 H양은 먼제 집안의 정리부터 해야 마음 속에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안에 고양이가 12마리이고 개가 2마리로 온 집안에 엉망으로 그녀 자신이 집안 정리와 청소를 포기하고 삶의 의욕을 잃고 우울하게 살고 있는 것이 분석되어졌다. H양의 12마리의 고양이들은 어린 시절에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아서 똥, 오줌을 잘 가리지 못하고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푸념을 했다. 그렇다고 고양이들을 다른 사람에게 분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정작 어떻게 실행을 해야할지를 난감해 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2마리의 개도 마찬가지였다. 고양이와 개는 처음에 떠돌이들을 돌보아주다가 집안에 정착해서 수자가 늘어난 것이었다. 처음에는 고양이와 개들을 돌보아 주다가 숫자가 늘어나는 바람에 이제는 그대로 방치하는 바람에 아무리 청소를 해도 집안에 깨끗하지 않고 지저분하고 냄새가 난다고 아버지가 계속해서 H양에게 집안을 깨끗하게 하라고 잔소리만 늘어나게 되었다고 하소연을 했다. 집안 환경을 정리해서 먼저 고양이를 돌볼 수 있는 컨트롤할 수 있는 적당한 숫자를 줄이고 그리고 자신의 집안 환경을 먼저 컨트롤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H양에게 인터넷에 고양이 까페에 들어가서 고양이를 무상으로 분양하는 광고를 내게 하고 지역 구청에 문의를 해서 고양이를 처분할 수 있는지를 알아 보게 했다.

 두 번째 H양의 내면의 마음 속에 쌓인 분노를 말로써 표현을 하게 해서 긴장을 방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제대로 분노를 말로써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화가 나면 아버지나 동생에게 말을 하지 않고 투정만 부리거나 삐져서 말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 표현해 온 것을 말로써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배우도록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를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의 말에 복종적으로 살아온 것을 되돌아보고 이제부터 H양이 자기 자신을 먼저 돌보게 하고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게 하는 쪽으로 치료의 방향을 세우기로 했다.

 H양이 40시간의 치료를 통과하면서 그 동안에 분석되었던 문제들과 우울증에서 빠져 나오고 있는 과정을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세요.

https://blog.naver.com/psychclinic/221305278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