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에서 자연스럽게 분석 상담을 받고 있는 모습(영화 속에서 인용) 

 

문명대(vs) 정신병

 

문명과 정신병은 비례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정신병은 많아지고 심각한 정신병이 발병하게 된다. 프로이트100년 전에 그의 저서 문명과 불만(Freud, 1930)에서 이것을 예견을 했다. 정신병이 19세기말보다 20세가 초반이 그리고 20세가 초반보다 20세기 후반이 점점 더 심각한 정신병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프로이트가 예견을 했다. 바로 이것이 정신병의 역사이다 라는 것을 정신의학의 진화가 스스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아래를 보라). 과학 문명이 인간을 편리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인간을 반드시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사회복지제도가 잘 발달한 나라들이 북부 유럽의 국가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들이다. 이들 나라들이 자살비율이 세계 1로 나타나 있다(2023, 3, 4: 위키피아). 필자는 지금까지 독일어로 쓴 정신분석이 프로이트가 나치로부터 추방되어 영국으로 갔기 때문에 정신분석의 씨앗이 영국에 뿌려졌고 그리고 미국으로 확대되어 미국과 영국이 정신분석의 메카가 되었다 라고 여러 번 지적을 했다. 독일어가 영어로 번역되어져서 정신분석의 정본이 되었기 때문에 정신분석을 연구하는 독일 사람들은 거꾸로 영어를 독일어(ego, id, superego는 독일어에 없기 때문에 영국의 작가, 문필가, 정신분석가인 제임스 스트라취(James Strachey)가 만든 신조어)로 다시 번역해야 한다는 난센스를 이야기를 했다(Ernest Jones, 1953를 보라). 정신병을 알려고 하면 문명의 발달을 보면 된다, 문명을 알면 정신병들이 감자를 캐듯이 줄줄이 역겨 나오게 된다는 말이다(아래를 보라). 이제 그 여행을 시작해보자.

 먼저 문명과 문화의 정의부터 시작해보자, 문화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든 것, 정치. 경제 사회, 언어, 풍습, 습관 등등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고 문명은 문화의 진화, 문화의 역사를 의미한다 라고 이해하면 쉽게 정리가 될 것이다.

 필자가 최근에 새로 알게 된 것은 시대정신(zeitgeist)이 프로이트를 수용할 수 있도록 성숙했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 정신이 프로이트를 요구를 했고 프로이트가 그 시점에서 최고적합한 시기에 등장하게 되었다 라는 말이 된다. 그 사람이 아무리 새로운 이론을 발표한다고 해도 그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으면 사장(死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프랑스의 신경과의사, 정신과의사인 오그스트 모렐(Augustin Morel)1852년에 그의 정신의학 교과서에서 조발성 치매(demence precoce)(정신분열증, 조현병)를 발표를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빈도수가 드물어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45년 후에 1897년에 독일의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in)이 발표를 함으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반세기(45)가 지나가면서 환자들의 수자가 급증했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과학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조현병이 의사들과 과학자들의 눈에 빈번하게 되었고 관심을 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대정신이 프로이트를 요구했다 라는 말을 무엇으로 어떤 근거로써 설명할 것인가?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프로이트는 1900년에 그의 최고의 걸작품꿈들의 해석을 발표를 함으로써 20세기를 끌고 나갈 3명의 대표자(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로 선정이 되었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하루 아침에 만든 것은 아니다. 이미 영국의 신경과 의사인 존 휴글 잭슨(Hughlings Jackson)신경증 환자를 연구하려고 하면 꿈을 분석해보면 알 수 있다(Meares, 2012: 주㈜: 참고) 그리고 베네틱(Benedikt)신경증 환자들의 심층에는 섹스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니체섹스의 욕구를 억압하면 죄의식을 유발한다 라는 이론들의 통합을 통해서 프로이트가 꿈해석을 창조하게 되었다(Brown et al., 2000: 이 책은 영국의 정신분석과 심리치료 대학인 타비스톡(Tavistock) 대학(매년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1년에 2천명씩 입학해서 4년의 대학생활에서 총 8 천명의 재학생)의 교재로 9개국 언어로 번역되어진 심리치료학 교과서). 더 붙여서 프로이트는 꿈의 형성과정신경증의 현성 과정동일하게 본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섹스학과 심리학의 통합인 섹스심리학이다(Greenberg & Michell, 1983: 주㈜: 참고)

필자는 최근에 프로이트의 꿈들의 해석을 다시 공부를 하면서 정리하게 되었다. 꿈들의 해석 안에는 프로이트의 꿈이 44개 그리고 환자들의 꿈이 70가 수록되어져 있다(프로이트는 꿈 해석 안에서 그의 꿈들과 환자들의 꿈들을 흘려 쓰기(이태리 글자체)를 했기 때문에 쉽게 카운트를 할 수 있다). 이 책은 10년 동안 프로이트가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를 한 이후에결과를 가지고 꿈으로 신경증을 어떻게 치료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쓴 책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꿈들을 해석을 했다. 꿈은 꿈꾸기 이전의 꿈자극이 과거의 경험을 끄집어내기 때문에 꿈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극인 환자들의 일상생활이 자연스럽게 거론되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고로 꿈의 분석에서 그 당시 비엔나(Vienna)(독일어 빈)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알 수 있었다.

비엔나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제국의 수도로써 제 1 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럽의 최고의 강대국의 중심지였다. 중심 도시 비엔나는 세계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한 최고의 도시였다. 전 세계의 중심도시로 문화와 문명의 중심지였다. 그 시점에서 신경증 환자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라는 말이다.

환자들의 꿈들의 분석에서 130년 전의 그 당시의 문화들이 어떠했는가? 를 유추할 수 있었다. 한 경찰관 환자의 꿈을 분석하면서 그가 62세에 연금을 받게 되는데 2년이 모자란다 라는 말이 나온다. 130년 전에 비엔나에서는 노후를 위한 연금제도가 있었다. 프로이트는 친지, 친구 혹은 제자들의 부고를 신문에서 읽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침 조간신문들, 석간 신문들처럼 그들이 신문으로 사회의 소식들을 전달하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기차를 타고 이태리로 여행하면서 그의 옆자리에 앉은 한 중년의 한 부부가 귀족처럼 고상한 제스처를 보여주었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스타일에서 노동자의 신분이 금방 탈로 난다는 프로이트의 꿈 그리고 비엔나 사람들이 유리로 된 소변 통(오줌통)을 소유하고 다녔다(수세식의 발달 이전), 한 젊은이의 꿈 분석에서 그가 홍등가(매춘부 촌)을 다녀와서 성병에 걸렸다 라는 이야기, 그리고 프로이트가 거대한 호화 유람선의 선상 식탁에서 최고의 음식을 맛보는 이야기의 꿈 분석 그리고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한 아가씨가 사귀고 있는 연인이 알코올을 너무 많이 마시기 때문에 결혼을 보류한다는 내용 그리고 한 부인이 이태리에 성당에서 연례 행사에 참가하는 내용의 꿈들을 통해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의 해외 여행이 오늘 날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자유로웠다 라는 그 당시 비엔나의 모습을 상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특별히 언론들의 활약은 오늘날과 유사했다. 1894년 당시에 프랑스에서 뒤프레스(Dreyfus) 사건이 터졌다. 유태인 포병 대위인 뒤프레스가 간첩혐의로 군법에서 종신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유태인으로 군사 종합대학에서 우수한 성적(9)을 받았으나 -유태인의 정서 때문에 차별대우로 성적이 중간이 되었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학교에 또 한 사람의 유태인 청년의 성적과 뒤프레스의 성적이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적들은 우수했지만 성격에서 감점이 된 것을 알고 학교장에게 항의를 했을 때 그 학교장이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면서 내가 그것을 마음대로 수정할 수 없다고 실토를 했다 그 당시에 군부의 실세들과 카톨릭 정치 실제들이 좌지우지했기 때문에 자신이 수정할 수 없다고 고백을 했다. 뒤프레스는 프랑스 주제 독일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를 하고 있을 때 청소부 여성(첩보원)이 파쇄된 쓰리기 통 안에서 프랑스의 총기비밀이 독일에 넘겨졌다는 흔적을 발견하고 군수사대의 조사결과 뒤프레스의 첫 글자인 D라는 글자체가 글씨체 감정가의 식별에 의해서 그의 이름의 첫 글자라는 증거로 기소되어 종신형으로 악마의 섬에서 투옥된 것이었다(2023, 3, 11: 위키피아).

이 시점에서 에밀 졸라(Emile Zola)가 등장한다. 그는 프랑스의 작가, 극작가, 언론인으로써 뒤프레스 사건이 조작되어 반-유태인 열풍에 희생된 것을 알고 그가 그 당시에 로로르(우리말로 여명) 신문사를 찾아가서 대통령에 고함이라는 글을 출판하려고 했다. 그 당시에 그 신문의 편집인이었던 조지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총리가 된다)나는 고발한다 라고 바꾸는 것이 좋겠다 라고 조언으로 그의 로로르 신문의 첫 페이지 전면나는 고발한다라고 대서특필하게 된다(1898, 1, 13). 졸라는 뒤프레스가 무죄임을 그리고 -유태인으로 억울하게 투옥된 것을 고발을 하게 된다. 여기에 그 당시 프랑스의 유명인사들이 100서명을 해서 동참을 했다. 작가인 아나돌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겜, 화가 모네, 과학자 파스퇴르, 심리소설 잊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마르셀 푸르스트(Marcel Proust)(마음은 복수 심리로 여러 개의 자아들로 구성, 성격은 순간순간적으로 변한다. 상황과 장소, 만나는 사람에 달려 있다)(심리학에 공헌: Ellenberger, 1970: 주㈜ 참고) 등이 서명을 했다.

그 당시에 10만부의 로로르 신문30만부로 폭발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우익정치 세계를 뒤 흔들었다. 재수사 결과 범인은 에스트라지 소령으로 밝혀지고 그는 영국으로 도망을 갔다. 졸라 역시 군부의 명예를 훼손한 죄로 처벌을 받았으나 영국으로 도망을 갔다가 이후에 귀국하게 된다. 뒤프레스는 1906년에 대통령의 사명으로 석방되었고 군대에 복귀하게 된다. 이후에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게 된다. 이 사건으로 좌익과 우익으로 프랑스의 정치가 극도로 양분되었다(2023, 3, 4: 위키피아).

필자가 여기에서 그 당시의 프랑스는 오늘 날 우리나라의 언론들처럼 무관의 제왕, 사회의 목탁(이 경구는 필자의 고교시절에 국어 교과서에 실린 구절언론의 힘을 비유적으로 표현)으로 구석구석의 부정부폐를 고발했다 라는 점이다. 그것이 비엔나에서도 널리 확대되어져 있었다. 또 한가지는 여기에서 필자는 1911년에 제 2 회 국제정신분석학회가 와이마르에서 3일 간 개최되었다. 그 때 전세계에서 55명의 정신분석가들이 참가를 했다. 그 때 그들이 찍은 단체 사진에서 남자들은 넥타이와 양복을 입고 그리고 여성들은 머리를 기르거나 파마로 양장으로 단장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랬다. 123년 전에 그들의 정장 차림들이 오늘날 우리의 정장 차림과 차이가 없었다 라는 점이다. 그들의 생활은 오늘날과 비교해서 비행기, 자동차, 컴퓨터를 제외하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과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

필자가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 당시의 비엔나의 문화가 이러한 신경증 환자를 쏟아내고 있었다 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요약을 하면 130년 전에 전 세계의 중심지였던 비엔나는 현대병인 신경증 환자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생산지의 중심이었다 라는 말이 된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는 123년 전에 그가 치료를 하면서 분류한 환자들의 진단불안신경증, 불안 히스테리아(공황장애), 신경쇠약 신경증, 섹스 신경증, 전투신경증, 강박사고 신경증 등을 진단 분류를 하고 전문적으로 치료를 하고 있었다 라는 것이 꿈들의 해석(1900에서 인용)에서 등장하는 그 이유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1914년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폭발하게 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에 의해서 암살됨으로써 1914, 7, 28일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그리고 오스만 터키의 대제국들과 맞서서 싸우게 된 영국, 프랑스, 이태리일본 등의 소수국가들이 1914-1918년까지 4년동안 전쟁을 하게 된다. 이 전쟁으로 850만의 군인들과 1300만명의 민간인 사망하게 된다(2023, 3, 4: 위키피아).

여기에서 미국이 등장하게 된다. 미국은 전쟁 초반기에 중립으로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이 잠수함 공격으로 미국의 상선들이 침몰하게 되면서 드디어 1917, 4, 6에 종전 1년 전에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여기에서 토마스 우드로우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이 등장하게 된다. 그는 존 홉킨스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은 학자로써 프린스턴 대학에 총장이었다(뉴저지지에 있는 프린스턴 대학은 뉴욕의 컬럼비아대학보다 8년 먼저 둘 다 장로교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이후에 민주당에 가입함으로써 뉴저지주의 지사로 그리고 이후에 그가 미국의 28대 대통령(1913-1921)이 된 것이다.

미국의 참전은 전쟁을 조기에 끝내는 쪽으로 결정적으로 연합군의 승리를 가져오게 된다. 1919, 6, 28일에 파리의 베르사유스 조약(Treaty of Versailles)으로 전쟁이 끝나고 윌슨 대통령은 민족의 자결주의를 선포한다 그 영향으로 1919년에 우리나라의 3. 1 만세 운동이 등장하게 된다. 윌슨 대통령이 처음으로 국제 연맹(국제 연합인 UN의 전신)을 창설해서 전쟁을 막으려고 16년 동안 노력을 했으나 강대국의 불참으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2023, 3. 4: 위키피아).

여기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8분의 1로 영토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비엔나는 약탈과 방화와 파괴 그리고 부모를 잃은 고아들과 비행청소년들로 넘쳐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정신분석가로 교사였던 오그스트 아치혼(August Aichhorn)쉼터를 새우고 비행청소년의 치료에 나서게 된다(Ernest Jones, 1953, 1955, 1957를 보라)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의 문화의 중심지였비엔나는 빛을 잃게 되고 그 중심이 제 1차 세계 대전의 주도적인 역할을 영국의 런던으로 이동하게 된다.

영국의 런던은 정신분석가들을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이루지고 있었다. 런던은 이미 1882년에 영국의 심리학자들이 모임을 가지고 심리학 연구를 위해서 학회를 조직하게 된다(Brown et al., 2000). 한편으로 비엔나에서는 1909년에 제 1회 국제정신분석학회의 창설이후에 3년마다 한번씩 국제 정신분석학회가 개체 되면서 1911-1913년 사이에 제 각각 대도시들 안에서 정신분석 학회들이 조직이 된다. 비엔나학회, 베를린학회, 스위스학회, 런던학회, 부다페스트 학회 등등이다. 영국신경과의사인 어네스트 존(Ernest Jones)1908년에 프로이트를 만나고 정신분석학회에 가입하게 된다 그 시점에서 작가이자 문필가인 제임스 스트라취(James Strachey)와 그의 부인 알렉스 스트라취(Alix Strachey)프로이트 밑에서 2년 동안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정신분석가의 자격을 얻어서 귀국하게 된다(그들은 이후에 프로이트의 독일어 정신분석을 영로 번역하게 된다). 동시에 외과의사인 에드워드 글로브(Edward Glover)와 형님인 제임스 글로브(James Glover)비엔나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독일을 정신분석가인 칼 아브라함에게 개인분석 치료를 받고 나서 두 명 형제가 귀국하게 된다 또한 이 시점에서 또 한편으로 1908년에 런던에서는 런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제 1차 세계대전 동안에 왕립적십자사 의료 장교가 된 여성 분석가, 실비아 페인(Sylvia Payne)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정신분석가가 되어 런던에 귀국하게 된다. 이어서 여성 분석가로 영국의 정신분석에 공로자(프로이트의 독일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게 된다)조안 리비에(Joan Riviere)가 등장하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변호사이고 어머니는 목사의 딸로서 태어났다. 그녀는 17살에 독일에 가서 문학과 예술을 공부하고 독일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 그녀가 어네스트 존을 알게 되었고 1916년에 존의 개인분석 치료를 받다가 제자리걸음으로 치료에 전전이 없게 되자 어네스트 존이 프로이트를 소개시켜주게 되었고 그녀는 프로이트에게 개인 분석을 받고 비엔나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런던에 귀국해서 어네스트 존에게 개인 분석치료를 받아서 정신분석가가 된다.

1차 세계 대전 직후에 그들이 합심해서 영국 정신분석학회로 이름을 개칭하고 런던정신분석학교에서 인재들을 배출하기 시작한다, 조안 리비에의 개인분석을 받은 사람들로서 작가인 수잔 이삭(Susan Isaacs), 해군사관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캠브리지 의과대학을 졸업한 정신과의사인 애착이론의 대가존 볼비(John Bowlby), 소아과 의사로 개인분석 치료를 받고 정신분석가가 된 위니코트(Winnicott). 여기에 한나 세갈(Hanna Segal, 하버트 로젠필드(Heart Rosenfeld)(두 사람은 아래를 보라) 등이 조안 리비에의 개인 분석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다. 1919년에 어네스트 존이 영국 안에서 정신분석의 논문집을 출판하기 위해서 국제 정신분석 논문집을 출판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에 정신분석과 심리치료를 위한 타비스톡 클리닉(Tavistock Clinic)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메디컬 심리학 논문집을 발간하기 시작을 했다(Brown et al., 2000).

드디어 1926년에 독일에 활동하고 있는 소아 정신분석의 개척자인 멜라니 크레인(Melanie Klein)어네스터 존과 여성분석가인 조안 리비에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하고 나서 영국에 귀화하게 된다. 그녀의 연구에 힘을 입어서 대상 관계 이론대상관계 분석가들속속 등장하게 된다.

1차 세계 대전 직후에 영국은 이미 정신분석을 흡수하고 치료를 위한 만만의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영국에서 수많은 신경증 환자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정신분석의 소비자들이 등장하면서 공급자인 정신분석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어서 독일의 나치정권이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국들이 너무 많은 전쟁부담금으로 억울함을 그리고 복수를 외치는 나치 정권에 동조해서 제 2차 세계 대전을 준비하게 된다(Ellenberger, 1970). 1933, 4, 5에 나치 정권이 독일 안에서 아리안계가 아닌 사람들은 전문직에 종사할 수 없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934년에 독일에서 유태인 말살 정책이 시작되면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정신분석가와 정신과의사들(대부분이 유태인으로 나치 정권이 정신분석을 유태인 학문으로 지칭)이 대거 탈출 소동이 벌어지게 된다(Ernest Jones, 1953, 1955, 1957,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을 보라)

미국으로 탈출한 유태인 정신분석가들미국에서 정신분석의 뿌리를 내리게 된다(아래애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에서 정신병 환자들의 쓰나미(해양지진으로 생기는)를 보라).

독일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로, 프로이트의 비밀 핵심 6인방의 한사람인 막스 에팅곤(Max Eitingon)팔레스타인(이스라엘)로 탈출해서 이후에 이스라엘 정신분석 치료소와 정신분석학교를 세우게 된다.

베를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다가 정신분석가가 한스 샤크(Hanns Sachs) 그리고 비엔나 의과대학의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가 된 헬렌 도이치(Helene Deutsch)보스턴 정신분석학교로 탈출을 했다.

스위스 쥬리히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가 된 허먼 넘버그(Hermann Nunberg), 독일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 졸업 후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가 된 에디스 제이곱슨(Edith Jacobson), 비엔나대학 예술학 박사로 정신분석가가 된 어네스트 크리스Ernst Kris), 폴란드 출신으로 문헨 의과대학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가 된 루돌프 로웬스테인(Rudolph Loewenstein), 비엔나 의과대학 정신과의사로 정신분석가인 헤인즈 하트만(Heinz Hartmann), 제나 의과대학 소아과 의사로 정신분석가가 된 마가레트 몰러(Margaret Mahler)뉴욕 정신분석학교로 탈출을 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사회학 박사로 정신분석가가 된 에릭 프롬(Eric Fromm)뉴욕에서 신-프로이트 정신분석학교(월리엄 알렌 하이트 정신분석학교)로 그리고 그의 전처인 독일 코닝겐 의과대학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인 프리다 프롬-레이크만(Frida From-Reichmann)미국의 메릴랜드의 록크빌(Rockville) 밤나무골 정신병원(Chestnut-Lodge)에서 정신분열증 치료에 도전하게 된다

베를린 의과대학 정신과 출신의 정신분석가인 된 어네스트 심(Ernest Simmel)은 칼 아브라함과 막스 에팅곤과 함께 베를린 정신분석학교와 정신분석 치료센터를 세우고 정신분석가들을 교육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1920-1930년의 10년 동안 무료로 환자들을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그 기간에 1,955회의 컨설팅이 일어났다. 그는 병원에 입원한 정신분열증 환자의 치료를 시작하면서 카우치에 누워서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마주보고 치료를 하는 치료 기법을 고안했다. 이 치료 기법은 이후에 뉴욕의 정신분석가들이 정신분열증 환자의 치료에 응용하게 된다(Stone,1983: 정신분열증 치료에 분석적 접근을 보라) 심멜은 나치정권의 박해로부터 미국으로 탈출해서 L.A. 정신분석학교를 창설하고 정신분석 치료를 하게 된다.  

베를린 의과대학의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로 베를린 정신분석교 교수인 카렌 호르니(Karen Horney)뉴욕에서 -프로이트 학파의 정신분석학교를 세우고 정신분석 치료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에 스위스에서 시작된 다다이즘(Dadaism)학파의 한 사람으로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인 리처드 헬백(Richard Hulbeck)이 함께 하게 된다.

영국으로 탈출한 유태인 정신분석갸들을 살펴보자. 독일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을 졸업한 정신과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폴라 헤이먼(Paula Heimann)멜라니 크레인의 비서가 되어 반전이의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한 분석가가 되었다. 폴란드 와르소 의과대학을 졸업한 한나 세갈(Hanna Segal) 그리고 독일 문헨 의과대학을 졸업한 정신과의사인 허버트 로젠필드(Herbert Rosenfeld)영국에서 정신분석 학교를 졸업하고 조얀 리비에의 개인분석을 받아서 정신분석가가 되어 멜라니 크레인 밑에서 한나 세갈, 외과 의사로 정신분석가가 된 비용(Bion) 함께 정신분열증의 연구에 도전한 3인방이 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마이켈 벨린드(Michael Balint)일반 의사로써 치료를 하다가 나중에 부인이 된 앨리스(Alice)로부터 프로이트를 소개받게 된다. 헝가리 정신분석학회 회장으로 그리고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의 첫 번째로 정신분석학 교수가 된 샌도르 프렌치(Sandor Ferenczi) 한데서 벨린트와 그의 부인 엘리스가 함께 개인수련을 받고 정신분석가가 된다. 프렌치의 사망 이후에 벨린트는 부다페스트의 정신분석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나치 정권의 유태인 학대를 피해서 1938년에 부인 엘리스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해서 타비스톡 정신분석 치료소에서 정신분석가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에 그는 기본 결함(Balint, 1969)이라는 정신분석학 저서를 출판해서 대상관계의 창설자의 한 사람이 된다 그는 1968년에 영국 정신분석 학회 회장이 된다.

제자들의 탈출 권고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여생을 비엔나에서 보냈겠다 라고 거부를 했다 그러나 1938, 3, 11에 나치 정권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게 된다. 유태인 출국 금지명령으로 프로이트가 갇히게 된다.

프로이트의 구출작전이 시작되었다. 영국에서 어네스트 존이 비엔나로 달려와서 프로이트의 제자들 특별히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로 나폴레옹의 증손녀인 마리아 보나파르트(Marie Bonaparte)과 함께 구명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프랑스의 미국 대사인 윌리엄 불리트(William, Bullitt)가 그의 친한 친구였던 미국의 제 32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서 연락해서 미국 주재 독일 대사에게 특별 전화를 통해서 구명운동을 한 결과 나치 정권이 그의 주치의와 가정부를 포함해서 프로이트 직계가족만 허용추방명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1938, 6, 4 비엔나를 떠나서 기차로써 파리에 도착해서 1주일 동안 마리아 보나파르트의 저택에서 휴식 후에 기선으로 도버 해협을 건너서 66일에 런던에 도착하게 된다(Ernest Jones, 1957,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을 보라)(마리아 보나파르트에 의해서 프로이트의 4명의 여동생가족들의 구명운동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그들은 나치의 아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1939, 9, 1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1939-1945)이 시작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은 독일과 이태리(무솔리니의 파시즘)일본이 주축이 된 전쟁에 대항해서 영국, 프랑스, 미국의 연합군 사이에 전쟁으로 다른 나라들이 함께 합세함으로써 7년 동안의 전행에서 제 1차 세계대전의 10배가 넘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포함해서 무려 7천만명-85백만명이 재난을 당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1941, 12,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유럽과 태평양의 양쪽에서 전쟁을 하는 총체적 전면전쟁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1944, 6, 6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미국의 첫 5성 장군인 아이젠하워(35대 미국대통령)가 지휘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히틀러는 1945, 4, 30에 자살을 했고 독일은 1945, 5, 7에 항복을 했다(2023, 3, 5: 위키피아).

 2차 세계 대전은 미국이 유럽과 태평양 양쪽의 전쟁을 수행을 하면서도 전세를 승리로 이끌어 나갔다. 남자들이 전쟁으로 비운 일자리를 여성들이 채우게 된다. 미국의 물량공급이 양쪽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의 원천이 된 것은 부언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정신분석의 이동과 변화 그리고 세계 대전을 소상하게 언급한 이유는 바로 1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영국의 런던의 중심부에서 2차 대전을 주도한 미국의 중심부뉴욕으로 문화의 중심이 이동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부터-1980년까지 40년 동안에 미국의 정신병 환자의 쓰나미가 시작된다, 아래를 보라).

 여기에서 이야기의 초점이 방향을 바꿔서 개개의 정신병의 등장이 바로 문명의 발달과 직결되어진다는 이야기로 돌려보자. 우울증을 제외한 모든 정신병들은 산업혁명 이후에 등장하게 된다. 그 이전에는 정신병이 없었다(중세 1000년의 귀신이론, 빙의 현상은 아래를 보라)(Ellenberger, 1970).

 산업혁명1760년부터-1840년까지 100년 동안을 역사가들은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부른다. 산업혁명의 시발점은 우리가 어린시절에 과학자들의 전기 전집에서 늘 읽어왔던 스코틀랜드의 발명가, 기계 엔지니어, 화학자인 제임즈 와트(James Watt)가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뚜껑이 펄떡거리면서 흔들리는 것을 보고 수증기의 힘의 아이디어로 1776년에 증기 기관차를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것은 상식으로 알고 있다.

필자(75)는 어린시절에 어머니와 누나들이 물레(목화에서 실을 뽑는)를 손으로 돌리면서 실을 뽑아내고 그리고 그것을 나무로 만든 배틀(천을 짜는)을 손과 발로써 조작해서 옷감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그것이 기계화로써 방직 공장이 들어서게 되고 생산된 천을 잘라서 디자인으로 옷을 만드는 봉제공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것들이 확대되어지면서 스팀엔진, 방직공장, 철강, 화학으로 거대한 공장들의 산업혁명이 바로 전 세계로 확대되어지게 된 것이다.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노동자들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게 되고 그 결과 거대한 도시가 형성되고 그리고 빈민가가 등장하고 공장의 열악한 노동 환경(희미한 전기불들, 먼지투성이 공기, 바느질로 손가락을 찔리는 등등)에 의해서 신체적 질병정신적인 고통들신체질병과 정신질병을 유발하게 된다는 사회적 질병 이론을 최초로 지적한 사람이 바로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알프레드 에들러(Alfred Adler)이다 (Ellenberger, 1970의 무의식의 역사: Alfred Adler의 부분을 보라).  

산업혁명의 100년 동안에 등장하는 거대한 사건들을 주목해야 한다. 이 사건이 바로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1789-1799년의 10년 동안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혁명으로 귀족계급이 사라지게 된다. 귀족의 계급들은 대대로 농토를 포함한 영지를 대물림으로 물러 받아서 농노들, 노예들의 노동으로 풍부한 삶을 살아왔다. 여기에서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일부 귀족들 중에서 물리학 연구실에서 연구로 공헌을 한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프랑스의 명문 귀족3명의 푸이세이그 형제들이다. 장남인 마르쿠스 푸이세이그(Marquis de Puysegur)(1751-1825)는 포병 대장으로 메즈머(Mesmer)의 동물자장이론을 연구를 하고 치료를 했다(메즈머는 중세의 귀신이론, 악마이론으로 다른 사람의 악령이 몸에 들어와서 귀신에 씌게 되었다는 빙의 이론으로 퇴마의식을 하는 것을 귀신이 아닌 정신병으로 그리고 자석치료를 한 최초의 의사이다. 그는 제자를 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등장 100년 후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의 저서들을 읽은 푸이세이그 형제들이 이것을 지석 치료를 연구하면서 계승자가 된다). 그의 부하 장병 중에 빅토르가 군대 사열행사 도중에 발짝으로 쓰러진 것을 자석으로 치료를 해서 회복하게 도와주게 된다. 이러한 연구를 하면서 이름을 인공 잠(artificial sleeping)으로 개칭하고 학회에 보고하고 연구소를 설립해서 200명의 제자들을 양성하게 된다(1842년에 영국의 외과의사가 인공감을 그리스의 잠의 여신인 히포(hypo)의 이름을 따서 최면(hypnosis)로 명명).

프랑스 혁명으로 귀족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푸이세이그는 2년 동안 감옥에서 수감된 이후에 박애정신과 무료로 환자들을 치료한 공로로 석방해서 그 도시의 시장에 당선되어 최면학의 발달에 공헌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정신적인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가 그들을 치료를 해준 것이었다(여기에서 산업혁명이전에 중세의 1000년 동안의 정신병들은 빙의 현상으로 귀신병으로 불러졌기 때문에 의학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에서 정신과 의사들에 의해서 치료를 하게 된 시점에서 정신병이 시작된다는 것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산업혁명의 기간이 끝나면서 인구증가와 소득의 증가 그리고 경제의 확대의 결과10년 후에 1849칼 마르크스(Karl Max)프레데릭 엔젤스(Friedrich Engels)공산당 선언서로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귀족 계급의 몰락으로 자리를 채운 부르주아 계급(, 상류층)과 산업혁명으로 새로 등장한 노동자, 농민의 계급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등장이다(모든 정신병들은 1852년 이후에 등장한다, 위에서 언급한 조발성 치매의 등장이 1852년에 프랑스의 신경과의사, 정신과의사인 모넬(Morel)의 참조).

산업혁명의 종결이후에 20년 만에 거대한 역사적인 이벤트가 등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남북전쟁이다. 미국의 남북 전쟁은 16대 링컨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노예해방의 문제로써 시작된다. 필자는 미국에 유학을 준비하면서 영어의 독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부산의 미국 문화원(USIS)의 도서관 회원으로 많은 서적들을 대출해서 읽었다 그 중에서 에이브라함 링컨의 전기의 6권을 일일이 단어를 찾아가면서 정독을 했다. 시카고의 시인, 작가, 문필가인 칼 샌드버그(Carl Sandberg)가 쓴 6권의 전집은 링컨의 초원의 시절(어린시절)(1-2) 그리고 전쟁의 시절(대통령으로 남북전쟁과 사망)(3- 6)4권을 읽었다. 그는 링컨 전기로 퓰리처상(1939)을 받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노예 해방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북부의 공업지대남부의 농업지대전쟁이었다.

남부지역은 한 개의 농장에서 수백명의 노예들이 일을 했다 노예들이 일손이었고 노예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노예해방은 농민들의 생존의 문제였다. 남북전쟁의 시작은 남군이 북군의 진지(Fort Sumter)에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남군에는 남부연맹으로 13개주들로 구성된다. 남군은 버지니아주가 주동이 된다. 북군은 34개주로 매사추세츠주가 주동이 되었다. 남부군의 총사령관은 로버트 이 리(Robert E. Lee) 장군으로 그리고 복부군의 총사령관율리시스 그란트(Ulysses S. Grant)장군으로 두 사람 다 뉴욕의 웨스트 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다. 리 장군이 14년 선배였다. 리 장군은 전쟁 발발 직전에 그는 노예 해방에 반대해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고향인 버지니아주의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남군의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한다고 선포하고 그의 농장 소유의 수백명의 노예들을 먼저 해방시켰다.

칼 센드버그는 그의 저서에서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이민을 온 청교도의 나라이다. 그들이 서로가 한쪽은 전쟁의 승리로 노예를 해방시켜 달라고 하느님에게 기도를 하고 다른 한쪽은 농장을 보호하고 노예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전쟁의 승리를 하느님에게 기도를 했다고 똑 같은 하느님에게 서로의 모순된 기도를 노트를 했다.

초반기에는 남군이 우세를 했으나 그러나 후반기에 케티스버그(Gettysburg)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판가름이 났. 이 전투의 승리에 축하 연설로써 링컨 대통령의 유명한 명연설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의 명언이 등장하게 된다. 그란트 장군은 이후에 미국의 제 18대 대통령이 되고 그리고 50달러 화폐의 등장 인물이 된다. 전쟁은 대 재난을 몰고 오게 된다. 남군은 29만명 그리고 북군은 365천명의 사망자로서 총 65만명의 사망자를 냈다(2023, 3, 11: 위키피아). 재난의 후유증으로 정신장애들이 하나씩 등장하게 된다. 정신장애들의 흔적을 추적해보자.

미국의 남북전쟁 동안에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컬럼비아 내과외과 대학을 졸업한 신경과의사이자 정신과 의사인 조지 비어드(George M. Beard)가 군의관으로 전역한 이 후에 의사로써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신경쇠약증(neurasthenia)학계에 보고하게 된다. 신경이 약해서 생긴 정신병으로 등장하는 증세들로는, 에너지소진, 불면증, 입맛 상실, 피곤함, 조그만 소리에 깜짝깜짝 놀람, 불안, 두통, 발기부전, 우울증을 보고를 했다. 그는 처방전으로 충분한 휴식을 그리고 영양분의 충분한 공급, 목욕과 휴식을 통한 에너지 회복을 권유를 했다. 신경쇠약증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서 의사들의 중요한 진단 항목이 되었다가 1980년의 DSM-에서 신경 에너지 소진의 근거가 없다는 과학적 연구에 의해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신경쇠약증의 등장 3년 후에 1871년에 미국 남북 전쟁의 군의관으로 복무한 다 코스타(Da Costa)300명의 군인들이 공통된 증세를 가진 것을 보고를 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현기증, 구도, 어지러움, 좌불안석(앉거나 서지 못하고 불안해서 우왕좌왕하는 것) 어린애처럼 울거나, 심하면 기절하는 것 등이다. 그는 이 병은 심장이 짜증났다 심장 항진증으로 이름을 붙였다. 이후에 1 차 세계 대전으로 군인들이 포탄에 놀라서 포탄 쇼크로 불리다가 전생신경증이 된다 이 전쟁신경증과 분리되어 1980년 DSM-에서 전생신경증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심장 항진증은 공황장애로 분리된다.

같은 해 1871년독일의 정신과의사인 웨스트팔(Karl Friedrich Otto Westphal에 의해서 광장공포증(agoraphobia)이 등장하게 된다. 넓은 공간 즉 교회, 극장, 시장 등의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가면 현기증, 어지러움, 메스꺼움, 구토가 나타나고 불안해서 좌불안적이 된다. 그는 이 증후군을 광장공포증(agora는 그리스어의 시장의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드디어 신경증의 마지막은 1903년프랑스의 정신과의사인 피에르 장(Pierre Janet)이 그의 논문에서 강박증을 보고하게 된다. 강박증은 자신의 의지로 컨트롤할 수 없는, 아무리 멈추려고,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도 손을 씻거나 체크를 하거나 그리고 머리 속에 노래소리 혹은 이상한 말들이 침투하는 것으로 새로운 신경증의 등장이 바로 강박사고 강박행동 신경증의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1900년에 꿈들의 해석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10년 동안 꿈들의 분석을 통해서 이들 다양한 신경증들의 환자들을 제 각각 치료를 했다. 그는 불안 신경증을 처음으로 신조어로 사용을 했다. 프로이트가 쓴 불안장애는 독일어angst로 두려움과 무서움의 특징인 이 용어가 영어로 번역하면서 anxiety불안이 강조되는 불안장애가 된다(Balint, 1999). 프로이트는 불안 신경증, 불안 히스테리아(불안 공격의 특징인 공황장애를 지칭), 전쟁 신경증, 섹스 신경증, 강박행동 신경증 그리고 신경쇠약 신경증을 치료를 했다. 이것으로써 20세기 초반에 신경증들의 장애들이 거의 다 등장을 하게 된다.

드디어 1897년에 독일의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in)에 의해서 조발성 치매 즉 젊은이의 뇌의 질병으로 치료 비율이 2%가 등장하게 된다. 이 정신병은 1911년신경의학, 심리과학 그리고 정신분석학을 통합한 유럽의 전설적인 인물인,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인 유진 블루러(Eugen Bleuler)에 의해서 젊은이의 뇌 질병(조발성 치매)이 아니고 정신분열증(조현병)으로 4가지 종류로 분류(그는 이후에 정신분석학회에서 탈퇴)되어져서, 치료 비율이 60%라는 정신분열증의 실체가 밝혀지게 된다. 이후에 1 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정신분열증(조현병) 등장 이후에 27년 후에, 프로이트 사망 1년 전1938년새로운 신경증의 등장정신의학계에 보고되어진다.

정신과의사로, 정신분석가인 아돌프 스턴(Adolph Stern)기존의 신경증의 증세와 완전히 다른 심각한 새로운 신경증을 보고하게 된다. 그는 신경증의 보드라인 그룹 안에서 정신분석의 탐색이라는 논문을 발표를 했다(Chessick, 1983). 환자들이 기존의 신경증 환자와 달리 불안하지 않을 때는 기존의 신경증 환자와 같은데 심각하게 불안하면 현실적 자아(ego)가 붕괴되어 자산감이 납작해지고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해서(전문의학 용어로 depersonalization)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늘 익숙한 현실이 낯설게 보인다(derealization) 그러나 현실과 상상은 구분을 하기 때문에 정신증(정신분열증, 조울증, 편집증)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돌 아이(미친 사람으로)가 되어가고 있다고 호소를 하는 환자들이 줄을 지어 등장한다는 보고를 했다 그는 기존의 고전적 신경증보다 심각하고 그리고 환청과 환각이 없는 정신분열증은 아닌 환자들을 기술을 하면서 신경증과 정신증의 근처에 해당하는 보드라인(경계선) 장애로 명명을 하게 된다.

같은 해에 1938년프랑스의 실존주의자로 소설가인 사르트르(Sartre)구토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그 작품의 주인공인 젊은이는 어느 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느끼면서 그리고 그가 늘 자주 가던 커피 숍에서 익숙한 환경들이 낯설게 보이면서 갑자기 구토, 메스꺼움과 두통이 생기면서 미쳐가고 있다고 호소하게 된다. 여기에서 새로운 신경증 즉 보드라인이 새로운 신경증으로 등장하게 된다. 스턴과 사르트르가 보고한 새로운 신경증은 보드라인 혹은 경계선 장애로 이러한 장애들이 봇물처럼 밀려들게 된다(아래를 보라).

여기에서 제 2차 세계대전 동안에 미국의 존 홉킨스 의과대학 소아정신과 의사로 정신분석가인 레오 케너(Leo Kenner)1943년11명의 이상한 어린이들로 자폐증을 보고하게 된다. 1년 후에 1944년비엔나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인 한스 아스퍼거(Hans Asperger)언어 능력은 손상이 없으나 애착 형성을 싫어해서 내면속으로 숨어버리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발표하면서 이것이 자폐증으로 분류되어졌다. 이후에 2013년에 DSM-Ⅴ에서 아스퍼거 증후군은 어린이 애착장애와 유사하다는 평가에서 어린이 애착장애로 흡수되어지고 자폐증에서 사라지게 된다.

프로이트가 사망 후에 28년 후에 그리고 정신분열증(조현병)의 등장 이후에 56년 후남아공 출신으로 영국 런던 의과대학 정신과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가장 큰 정신병원인 무드셀라(Bethlem-Maudsley) 정신병원에서 레지던트를 받고 있는 이삭 마크(Isaac Marks)가 새로운 장애로 사회적 불안장애(social anxiety disorder)를 발표하게 된다. 같은 불안장애지만 사람들을 피하고 혼자 있으려고 하는 장애로써 이것이 DSM-Ⅲ에서 사회적 불안장애이다. 이 장애는 불안장에 속에 포함되어서 사용해오다가 1987년에 DSM--R(DSM-Ⅲ의 수정본)에서 회피적 성격장애와 유사하다는 것으로 함께 혼용으로 같이 사용하다가 1994년에 DSM-Ⅳ에서 드디어 사회 공포증(social phobia)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것이 바로 대인 공포증이다. 특별히 동료들과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불편하고 긴장되고 불안이 치솟게 되면서 어지럽고 현기증이 나고 메스꺼운, 심한 경우에 기절하는 증세로써 사람들을 피하고 혼자 있으려고 하게 된다. 혼자서는 외롭고 심심하기 때문에 전자 오락, 영화, 게임에 빠지게 된다 이 대인 공포증이 정신분열증(조현병)의 시발점이 된다.

 현재 일본에서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게 된 심각한 정신병이 바로 히키코모리로 우리말로 은둔 외톨이가 그것이다. 이 장애는 이미 이지매(왕따) 그리고 혼밥족(화장실에서 혼자서 밥을 먹는 대학생) 그리고 점점 심해지면 히키코모리로 연결이 된다. 2019년의 일본에 히키코모리가 120만명으로 보고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에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중, 고교생의 자퇴생으로 은둔 외톨이가 22만명으로 1년에 6만명씩 증가하고 있다고 보고를 했다. 1년에 6만명이 7년 동안에 42만명과 22만성을 합치면 모두가 2023년에 70만명으로 추산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이미 등장을 한 것이 아닌가?

이제 1 그리고 2 차 세계 대전 이후에 미국에서 쏟아져 나온 정신병의 쓰나미(바다 밑에서 화산 폭발로 밀려오는 폭풍의 물결)로 돌아가 보자. 이 정신병의 등장으로 미국의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이 어떻게 대응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의 아래에서 기술이 될 것이다.

미국의 정신과의사이자 정신분석가로서 1 아브라함 브릴(Abraham Brill)이다. 그는 몇 푼의 동전으로 미국에 이민 온 유태인으로 컬럼비아 내과외과대학(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신과의사로서 세계 최고의 정신병치료를 했던 스위스의 부르고졸리(Burgholzli)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게 된다. 그곳에서 영국의 신경과의사인 어네스트 존(Ernest Jones), 독일의 정신과의사인 칼 아브라함(Karl Abraham) 그리고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Jung)을 만나게 된다. (Jung)의 소개로 프로이트를 알게 되었고 브릴과 존1908년에 프로이트를 방문하고 정신분석학회에 회원으로 등록하고 정신분석가가 된다. 프로이트와 융(Jung)이 미국의 매사추세츠주, 웨체스트에 클라크 대학 20주년 기념일에 총장인 스탠리 홀(Stanley Hall)(미국의 심리학 박사 제 1, 미국심리학회 제 1 대 회장)초청으로 1909년미국을 방문했을뉴욕의 항구에서 두 사람이 프로이트를 마중하고 안내를 하게 된다.

3년 후에 1911에 브릴은 뉴욕에서 정신분석학교를 세우고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20년 후에 1930년헝가리 부다페스트 의과대학의 정신과의사로, 정신분석가인 프란츠 알렉산더(Franz Alexander)시카고에 정신분석학교를 설립하고 그리고 정신분석 치료를 하면서 정신분석가를 배출하기 시작한다, 1년 후에 1931년에 알렉산더는 보스턴에 정신분석학교를 설립하고 치료를 하고 정신분석가들을 배출하기 시작한다.

1936에 중부지역인 캔사스주의 토페카에 메닝거 클리닉(Menninger Clinic)(메닝거 클리닉은 1919년에 메닝거 3부자: 아버지가 정신과의사로 아들 칼 메닝거와 그의 동생 육군 준장으로 군의관인 윌리엄 메닝거가 정신과의사로 정신치료를 시작)에서 유럽에서 이민 온 유태인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인 어네스트 심멜(Ernest Simmel)에 의해서 메닝거 클리닉에 정신분석학교가 설립되고 치료를 시작하게 된다.

1942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캘리포니아 정신분석학교가 설립된다.

1943에 뉴욕에서 신-프로이트 학파인 셀리번(Sullivan), 프롬(From), 호르니(Horney) 그리고 프리다(Frida From-Reichmann)에 이해서 뉴욕 윌리엄 앨선 하이트 정신분석학교(William Alanson White Institution) 가 설립이 된다.

1945에 뉴욕의 컬럼비아 의과대학 부설 정신분석학교부다페스트 의과대학 정신과의사로 정신분석가인 산도르 라도(Sandor Rado)에 의해서 설립되어진다.

1946캘리포니아 정신분석학교(샌프란시스코 정신분석학교)에서 분리로 유럽에서 망명한 정신과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오토 페니첼(Otto Fenichel), 어네스트 심멜(Ernest Simmel)L.A. 정신분석학교가 설립된다.

1950알렉산더남 캘리포니아 의과대학(USC)에 교수로 오면서 의사들만 가입할 수 있는 남 캘리포니아 정신분석학교가 설립된다. 여기에 UCLA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정신분석가가 된 유명한 랄프 그린슨(Ralph Greenson)이 함께 했다. 그는 미국의 유태인으로 그 당시에 유태인은 의과대학에 금지 때문에 유럽의 스위스 베른(Bern)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미국의 제 1세대 분석가인 빌헬름 스타켈(Wilhelm Stekel)에 의해서 개인분석을 그리고 오토 페니첼(Otto Fenichel)에 의해서 개인분석을 받고 정신분석가가 된다.

그린슨L.A.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배우들인 말라린 몬로(Marilyn Monroe), 프랑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비비안 리(Vivien Leigh), 토니 커티스(Tony Curtis)들이 그의 내담자들이었다. 그는 1963년의 영화인 캡틴 뉴먼(의사 Captain Newman)주인공으로 영화로 만들어진다(그레고리 팩이 주연).

그린슨은 정신분석학에서 유명한 작업 동맹(working alliance) 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장본인으로 그의 2권의 저서인 정신분석이 탐색정신분석이 기법이 있다. 구두어 커뮤니케이션의 특별한 유형으로 그의 유명한 명언인 정신분석가환자의 대화를 경청해서 공감직면명료화 그리고 정확한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정신분석 교과서로 인기가 높다(Greenson, 1978: 주㈜: 참고).

1950년에 이르러서 미국의 전역에 정신분석 학교들이 설립되어지고 정신분석치료가 전국으로 확대되어지게 되면서 본격적인 정신병 환자들의 치료가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1955년정신과 약물들이 등장하기 바로 직전미국의 정신병원은 최악의 상태가 된다. 1955년에 미국 전국에 주립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숫자는 599,000명으로 정신병원의 역사상 최악이었다(주㈜: Becker & Schulberg, 1976). 그 시점에서 1955년의 뉴욕의 주립정신병원의 입원환자의 숫자는 93,000명으로 미국 전국의 정신병원 입원 환자6분이 1이었다(Minuchin & Elazar, 1992).

이 숫자는 사립 정신병원의 입원환자들은 제외된 숫자이다. 하버드 의과대학정신병원맥클린 병원(McLean Hospital)은 미국 내에서 가장 큰 정신병원으로 전문가들정신과의사들, 정신분석가들, 심리치료사들, 임상사회복지사들200명이 근무하는 대형 병원이다(Gunderson, 2003, 주㈜: 참고) 그리고 예일 의과대학 정신병원, 스탠포드 의과대학 정신병원 등의 사립 정신병원 입원환자를 합친다면 70만원의 정신병원 입원환자들로 추산이 된다. 물론 1955년에 정신과약물들이 등장하면서 주립정신병원의 입원환자들의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들게 된다(Bernheim,1979: 주㈜: 참고).

여기에서 2 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의 문화의 중심지런던에서 뉴욕으로 이동하게 되면서(앞부분의 문명의 발달 과정을 보라) 불과 10년 만에(1945-1955) 미국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 주립과 사립 정신병 입원 환자들의 숫자가 약 70만명이라는 유추가 나온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은 일상생활이 어려운 환자들로 주변사람들에게 위험하기 때문에 감금한 것이 아닌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거대한 정신병원에 감금된 환자들의 비판들 결과로서 이어지는 탈 정신병원의 움직임을 보라).

정신분석가들이 아무리 양산이 된다고 해도 1명의 개인 환자를 정신분석치료로 3-4년 동안 치료를 하는 정신분석의 한계점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정신분석가들 중에서 정신병의 쓰나미에 놀라서 역동적 정신의학에 혁명을 시작하는 정신분석가들이 아래에서 소개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시점에서 프로이트의 고전적 신경증 환자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희귀한 종족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보드라인 환자(경계선 환자)이고 정신증 환자들로써 정신분석 치료(고전적 정신분석은 신경증 환자의 치료에 국한)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일상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위험하기 때문에 그리고 고립을 강압당하게 된 환자들이 바로 정신병원의 만원을 초래하게 된 결과로 위의 입원 환자들의 숫자가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여기에서 1950년부터 1980년의 30년 동안에 정신분석의 단점을 개선하는 역동학적인 심리치료들이 무려 30여종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역동학적인 심리치료들의 등장을 따라가 보자.

 이미 베를린에서 영국으로 가서 귀화한 멜라니 크레인(Melanie Klein)에 의해서 등장한 대상관계 이론과 치료로써 그녀의 제자들이 정신분열증의 치료에 도전이 시작되어 1940-1950년에 대상관계 이론이 빛을 보게 된다. 1955년에 스코틀랜드의 외진 곳에서 혼자서 정신분석을 연구하면서 고아원 원생들 그리고 부랑아들을 치료를 하면서 프로이트의 고전적 이론을 개선해서 대상관계 이론의 창시자가 된 페비안(Fairbairn)걸어 다니는 정신분열(조현병)으로 자아분열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게 되고 이들 환자들의 치료 이론과 치료기법을 등장하게 된다(Grotstein, 1977: 주㈜: 참고).

미국 안에서는 1940년대 후반에 뉴욕의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인 나탄 아크만(Nathan W. Ackerman)이 정신분석의 약점을 개선해서 어린이들청소년들이 함께 참가하는 가족치료를 시작하게 되면서 정신분열증 치료에 획기적인 치료 결과를 발표를 했다.

 독일에서 소아정신과 의사로 정신분석가로 나치정권을 피해서 뉴욕의 정신분석학교 교수가마가레트 몰러(Margaret Mahler)1950년대 초반에 미국정신건강연구소(NIMH)의 연구자금의 지원으로 뉴욕의 마스트 어린이 센터에서 4명의 신생아 어린이들을 3년 동안 관찰하고 분석하는 실험 연구를 통해서 유아들과 엄마와 상호작용의 관계를 연구하게 된다. 그녀는 이 연구를 10년 동안 정리를 해서 1975년에 인간 유아의 심리적 탄생이라는 저서를 출판하게 되고 이것이 그녀의 분리-개인화의 이론으로 보드라인과 정신분열증의 치료에 기초를 제공하게 된다(Mahler, 1975: 주㈜: 참고).

1957샌프란시스코의 팔로 알토(Palo Alto)에서 포드 재단의 후원으로 정신건강 연구소가 설립이 되고 문화인류학자, 언어학자, 기호학자인 베이트슨(Bateson), 정신과의사인 잭슨(Jackson), 심리치료사인 헬리(Haley),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심리학자 위즐위크(Watzlawick), 임상사회복지사 스티어(Satir) 등이 공동 연구팀으로 참가해서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가족단위를 연구한 결과 가족구성원들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에 결함이중구속(Double Bind) 이론을 발표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1959년스탠포드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는 해리 하알로우(Harry Harlow)위스콘신 대학 교수로 동물실험실을 운영하면서 인공 엄마 실험을 하게 된다. 붉은 털 원숭이가 태어나지 말자 엄마를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철사 엄마헝겊 엄마를 만들어서 철사 엄마에게 우유병을 그리고 헝겊 엄마에게는 폭신폭신한 부드러운 털옷을 입혔다. 하알로우는 영국의 정신분석가인 볼비(Bowlby)애착이론을 실험하게 된 것이다. 볼비는 신생아들이 엄마를 찾는 것은 엄마의 젖(우유) 보다 엄마에 안기고 매달리고 쓰다듬어주는 엄마 품을 더 좋아한다 라는 이론을 하알로우가 실험으로 검증을 한 것이었다. 실험의 결과 신생원숭이는 배가 고플 때는 철사 엄마 한데 가서 우유를 빨아먹고 나서 늘 헝겊 엄마에게 매달리고 안기고 비비고 업혔다. 소리가 나거나 위험을 감지하면 재빨리 헝겊 엄마에게 매달리고 안기었다. 엄마 품에서 자라지 못한 원숭이는 어른이 되어서 사회적 관계에 결함으로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가 되었다. 섹스로 암놈을 짝을 지어 주었을 때 어떻게 섹스를 하는지? 모르고 피했다.

이 실험으로 유아들은 먹여주고 입혀주고 대소변을 갈아주는 것 보다 엄마 품에서 안긴 아기를 엄마의 젖을 먹으면서 엄마 얼굴과 엄마 몸을 만지면서 엄마의 눈을 통해서 반사되는 엄마의 마음으로 아기의 자아가 형성된다는 정신분석의 이론들이 등장하게 된다.

1960년대와 1970년대로 진입하면서 수많은 정신분석가들이 새로운 정신병인 보드라인과 자아분열 그리고 정신분열증의 치료에 도전하게 된다.

오토 컨버그(Otto Kernberg) 칠레에서 정신과의사로 미국에 귀화해서 컬럼비아 의과대학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로서 영국의 멜라니 크레인대상관계 이론과 미국의 몰러의 분리-개인화통합해서 1970년대에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고안하여 보드라인과 정신분열증 치료에 공헌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시카고 정신분석학교 교수인 코호트나르시즘 환자들과 보드라인 환자들 그리고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치료의 기법으로 자아심리학을 창설하게 된다.

같은 시점에서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과의사로서 보스턴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그리고 정신분석가가건드슨(Gunderson)보드라인 환자의 치료기법의 연구로 보드라인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는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로 멜클린 정신병원의 치료 국장으로 DSM-Ⅲ에서 처음으로 10개의 성격장애를 분류해서 소개하게 된다.

1970테네시 의과대학의 정신과 의사로써 메닝커 클리닉에서 정신분석을 공부를 했던 보웬(Murry Bowen)워싱턴 D.C에 조지타운 의과대학에서 4명의 정신분열증 환자의 가족구성원들이 모두 함께 생활하도록 입원실을 설치하고 6명의 통원치료 환자들의 가족들을 3년 동안 연구를 해서 정신분열증 환자의 치료에 획기적인 성과를 발표하게 된다. 그는 1970년에 창립된 가족치료 학회의 제 1대 회장으로 봉사하게 된다.

동시에 아르헨티나에서 정신과의사가 된 미뉴친(Salvador Minuchin)미국에 귀화해서 뉴욕의 아크만(Nathan Akerman) 연구소에서 가족치료를 연구하고 그리고 뉴욕의 윌리엄 알랜 하이트 연구소(-프로이트학파의 대인관계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분석학자가 된다 그는 비행청소년의 정신과의사로서 가족들과 함께 치료를 하는 구조주의 가족 치료 기법을 창안해서 가족 치료사가 된다. 그러나 그는 정신분석을 포기하고 가족치료사로써 실험에 착수해서 1965년부터 1975년꺼지 필라델피아 어린이 가이던스 병원에서 치료 국장으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부모들과 함께 치료를 하는 가족치료의 핵심 멤버가 된다.

같은 시기에 위스콘신 의과학에서 휘티크(Carl Whitaker)뉴욕의 시라쿠스 의과대학 그리고 심리학 박사 양쪽의 학위를 가진 정신과 의가로써 그가 환자와 가족들 특별히 환자, 부모, 조부모까지 3대가 함께 참여하는 대규모 가족 치료정신분열증 치료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이들이 모여서 가족치료의 학회가 1970년대에 조직되고 미국에서 가족 치료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전 세계로 확대되어지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의 종결 시점에서 미국의 정신병 문제는 이미 미국의 정신의학과 정치지도자들의 핵심 관심사가 될 만큼 심각해졌다. 드디어 미국의 역사상 처음으로 4번의 대통령을 역임한 제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임기 도중에 사망함으로(미국 의회가 미국 대통령을 2회로 헌법 수정) 부통령이 하리 트루만(Harry Truman)이 제 33대 미국 대통령이 된다, 1946년에 정신건강보건법률이 의회에서 통과되면서 트루만 대통령이 서명하고 공포하게 된다. 이 법률에 의해서 정신건강의 모든 것을 책임지게 될 국립정신건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NIMH)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미국에서 유일한 국립으로(미국은 국립이 없고 사립이 특징) 국가에서 정신병퇴치와 연구에 국가적인 지원이 본격화된다. 이후에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직전에 1963년지역사회 정신건강보건법이 통과되면서 주립의 대형 정신병원들이 지역사회의 보건 지소로 이동하게 된다. 케네디 대통령은 자신의 여동생이 정신분열증(조현병으로) 심리외과수술(전두엽 절제수술)로 정신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에 정신건강에 관심이 많았다. 이러한 정신병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위에서 설명한 정신병의 쓰나미가 이해가 될 것이다. 이후에 NIMH27개의 부속기관을 포함하는 거대한 국가 기관이 된다.

이제 방향을 돌려서 개개의 역동학적 심리치료가 어떻게 30년 동안에 등장하게 되는가? 를 자세히 들려다 보자.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분석가는 마음 속에 빈 공간 스크린을 만들어서 자유 연상을 통해서 치료를 받는 사람들의 생각들, 상상들, 느낌들, 감정들, 아이디어들이 비치게 하고 분석가의 느낌과 감정을 자체해야 한다 라는 빈 공간 스크린 이론으로 출발을 했다. 그러나 역동학적인 심리치료들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은 단점을 수정해서 짧은 시간에 치료사가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으로 치료를 안내하고 그 결과 치료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정신분석 안에서 이러한 운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비엔나에서 신경학자,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가 된 파울 스차일트(Paul Schilder)1928년에 미국 존 홉킨스 의과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된다 그는 이미 비엔나 정신분석학교 교수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신경생리학정신분석학통합한 학자로써 비엔나에서 그의 강의는 100명이 청중들이 모일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는 ego의 원천을 신체적 이미지가 원천이 된다 라는 신조어(신체 ego)를 만든 장본인이다(Ernest Jones, 1953, 1955, 1957: 주㈜: 참고).

그가 1929년에 뉴욕 의과대학으로 이동하면서 그는 뉴욕에서 가장 큰 정신병원으로 정신병의 대명사 병원인 벨뷰 병원(Bellevue Hospital)치료 국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 병원은 이후에 초반기에 1787년에 컬럼비아 의과대학과 뉴욕 의과대학 교수들이 처음으로 이 병원에서 합동으로 근무를 한 25층의 건물로 이 병원의 전문 의사들이 1, 200 그리고 5, 500명의 병원의 스텝들이 근무하는 병원으로 매년 50만명의 환자들이 방문하는 거대한 정신병원이 되었다(2023, 3, 12: 위키피아).

스차일트가 처음으로 이 병원의 정신과 환자들을 대상으로 정신분석 그룹 치료를 시작하게 된다. 6명-7명의 환자들을 집단으로 정신분석치료 기법을 고안하게 된다. 그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이미 정신병 환자들이 밀물듯이 밀려올 것을 예견을 했다. 그의 치료 기업들은 이후에 영국의 정신과의사로 정신분석가인 포울커(S.H. Foulkes)에 의해서 대물림이 된다.

포울커독일의 하이델벨그 의과대학에서 정신의학 이후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허먼 넘버그(Herman Number)로부터 개인분석을 받아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정신분석학교의 치료소장으로 재직 중에 나치정권의 유태인 학대로 어네스트 존(Ernest Jones)의 도움으로 영국에 귀화해서 정신분석가가 된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에 영국의 노스필드(Northfield) 육군병원 정신과에서 그룹 치료를 시작하게 된다. 6명-7명의 정신과에 입원한 재향 군인들(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을 한 개의 그룹으로 그들에게 각자의 의무를 제공해서 책임을 지도록 함으로써 의존적인 수동적인 환자의 역할에서 벗어나게 해서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역할 놀이로 치료의 성공을 보고를 했다. 이후에 그는 정신분석 그룹치료 학교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그룹 치료 분석가들을 양성하게 된다. 그 결과 정신분석 그룹 치료가 탄생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비엔나 의과대학을 졸업한 정신과의사인 모렌노(Jacob Moreno)가 뉴욕으로 정착해서 사이코드라마를 소개를 했다. 그는 비엔나 의과대학 학생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강의를 수강하게 되었다. 프로이트가 그에게 지명을 해서 그로 하여금 발표를 하게 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환자들의 꿈을 분석하고 치료를 합니다 그러나 나는 환자들이 꿈을 꾸도록 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치료실에서 환자들을 분석하는데 나는 길거리의 현장에서 환자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일상을 함께 하면서 그들을 치료하고 싶습니다.”라고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정신분석을 거부하고 길거리에서 역할 놀이 혹은 놀이치료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그 환자의 심리적 상처를 역할극으로 관중들이 참가자로 그리고 비평가로 함께하는 사이코드라마를 개발을 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가 1932년미국 정신의학회에 집단 심리치료를 소개를 했다. 그는 사이코드라마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양성해서 그룹 심리치료, 사이코드라마, 역할 놀이 등의 개념들을 확대시키는데 공헌을 했다. 여기에서 사이코드라마는 역동정신의학의 한 치료 이론과 기법으로 정착되었다.

1945시카고 대학에서 심리학교수로로서 칼 로저스(Carl Rogers)카운슬링 센터를 설립하게 된다. 로저스는 뉴욕에서 유니온 신학교 입학해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그만 두고 컬럼비아 사범대학 치료 심리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어린이와 청소년 문제를 치료하는 치료사가 되었다. 그는 정신분석가인 프로이트의 제자인 오토 랭크(Otto Rank)의 수련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신분석을 포기하고 그는 초 중, , 대학생들의 문제는 굳이 정신과의사에게 정신분석가에게 가지 않고 학교에서 카운슬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다. 그는 1947년에 미국 심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어서 각 대학에서 카운슬링 학위 과정들을 설립하도록 도와주었다 그 결과 각대학에서 카운슬러들이 박사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1970년데 그는 인본주의 심리학을 창설하고 내담자 중심치료(client center therapy), 인간중심 심리치료(person center psychotherapy)를 설립하고 상담사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1982년에 미국 내에서 심리치료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들칼 로저스가 1,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2위(아래를 보라) 그리고 프로이트가 3로 나타났다. 인간중심 심리치료 학교가 설립되고 전문가가 배출되기 시작하게 된다.

또 하나의 심리치료의 등장은 엘버트 엘리스(Albert Ellis)이성감정행동 치료(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 REBT)의 등장이다. 그는 뉴저지의 락터 대학(Rutgers)(뉴저지 주립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정신분석을 포기하고 이성감정행동치료 포함되는 REBT치료기법을 창안해서 1967년애 뉴욕에서 REBT 학교를 세우고 치료사들을 배출하기 시작을 한다(그의 상세한 소개는 아래를 보라). 그는 모든 심리치료는 반드시 이성, 감정, 그리고 행동포함되어져야 한다고 강조를 했다.

또 하나의 역동적 심리치료가 엘리스(Ellis) REBT에 영향을 받아서 아론 백(Aron Beck)에 의해서 인지 치료(cognitive therapy)가 등장하게 된다. 예일 의과대학을 졸업 후에 필라델피아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분석을 공부하다가 그만 두고 인지치료(cognitive therapy)를 개발한 다, (Beck)은 펜실베니아 대학에 정신과 교수로써 행동 치료를 포함해서 인지-행동치료를 개발하게 된다. 그는 우울증 환자들의 인지적 사고 방식의 개선으로 좋은 치료 결과들을 발표를 했으나 정신분석학회에서 인정을 거부했기 때문에 정신분석과 관계를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인치치료를 개발해서 펜실베니아에서 명예교수로 재직하면서 비영리재단으로 인지치료 센터 그리고 이후에 인지-행동치료 센터를 설립하고 제사들의 양성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의 이론과 치료학교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이제 방향을 돌려서 행동주의 치료로 되돌아가보자. 독일의 심리과학은 1879년분트에 의해서 실험실에서 심리과학의 창설되어진다 이것이 1904년에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Pavlov)에 의해서 개의 위에 구멍을 뚫어서 고기를 주면 입에서 나오는 침과 위액을 카운터하고 그리고 0.5초 후에 빛 혹은 벨소리를 제공하면 빛, 벨 소리에 침을 흘리게 된다. 이것을 수학적으로 측정한다. 고기 à 반복된 빛()과 고기에 연결에 의해서 나중에 (벨소리)à 으로 연결되어진다. 여기에서 빛(벨소리)이 고기와 짝이 되면서 새로운 뇌의 신경세포에 빛()이 침으로 회로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조건학습이다. 이 조건 학습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1950년까지 미국의 심리학 교실에서 실험 심리학이 유행하게 된다. S(자극)à R(반응) 심리학이 된다. 이것은 심리과학이지만 그러나 역동학적인 심리치료(50분간 대화치료)는 아니다.

시카고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가진 존 왓트슨(John B. Watson)1913년행동주의자가 본 심리학이라는 특강으로 행동주의(behavior)라는 말이 신조어로 등장한다. 그는 꼬마 엘버트(Little Albert)라는 실험을 소개하면서 그가 11개월된 앨버트에게 흰쥐를 보여주면서 쇠막대로 탕 소리를 내면서 꼬마를 놀라게 했다. 이후에 이것이 흰 토끼, 흰 개 등으로 일반화되면서 공포증을 개발했다.

조건학습의 공포증 실험을 유심히 듣고 있던 컬럼비아대학 사법대학 부교수로 있던 마리 커브(Mary Cover)왓트슨의 공포증 실험흰 토끼를 두려워하는 3살된 피터(Peter)공포증을 치료하는데 거꾸로 조건학습을 이용하게 된다. 그녀는 두려움의 위계를 만들어서 멀리서 조금씩 접근해가면서 과자를 주고 달래 주면서 마침내 흰 토끼를 만질 수 있게 했다. 이 실험의 결과는 감각박탈로 이름이 붙여졌다. 이 리틀 피터로(Little Peter)의 논문은 1922년에 박사 논문으로 제출했다. 그녀는 이후에 존(John)과 결혼으로 두 사람이 함께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으로 발달심리학 교수로 갔다 그녀는 더 이상 행동치료 연구를 하지 않았다.

그녀의 감각 박탈은 50년 동안 묻혀 있다가 1970년대에 남아공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신과의사이자 정신분석가가 된 조셉 울프(Joseph Wolpe)군인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치료를 하다가 정신분석에 흥미를 잃고 마리 커브-존의 실험을 발견하고 이것을 행동치료로 개발하게 된다. 그는 마리 커브 존을 행동주의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미국에 이민으로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로써 행동치료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된다. 그는 쌍방-억제의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긴장 이완과 불안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에 긴장하면 이완을 시켜서 다시 직면으로 접근하는 방법으로 점차적으로 공포증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갔다. 그리고 마리 커브가 창안한 점진적 감각 박탈탈조건화의 기능들을 개발해서 1980년에 행동치료의 저서를 출판하고 행동 치료 학교를 설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어서 영국에서 남아공 출산으로 영국의 런던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삭 마크(Isaac Marks)가 행동주위 치료를 개발하게 된다 그는 영국에서 가장 큰 정신병원인 무드셀라(Bethlem-Maudsley Hospital) 정신병원에서 그는 노출치료(exposure)와 비보(vivo) 그리고 홍수요법 (flooding) 의 치료 기법을 고안했다. 특별히 강박증 환자들에게 불결한 것에 대한 결백증 때문에 더러운 오염으로 손을 반복해서 씻어내는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더러운 오염 물질을 만지게 하고 손을 씻는 반복행동을 하지 못하게 반응 차단(response prevention)을 하도록 해서 실제로 손을 씻지 않아도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방법이다. 비보, 홍수요법은 예를 들어서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얕은 물에 집어넣고 바둥거리게 해서 물에 익숙하게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감각을 박탈시키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손을 씻으면 그 씻는 부분에 피부가 예민해지게 되고피부의 부위에 면역기능인 호산구가(백혈구 안에서) 증가하게 되면서 더욱 더 가렵고 씻어야 하는 반복행동이 계속된다는 것을 최근에 인식하게 되었다 고로 마크(Marks)반응 차단(response prevention)강박행동 신경증에 효과적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백증 환자에게 손을 씻지 못하게 차단을 시키게 되면 호산구가 증가하지 않게 됨으로써 강박증의 치료가 효과가 있다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Patterson, 2009, 의과대학 알레르기 질병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패터슨의 알레르기 질병을 보라).

 또 한가지 심리치료로 1970년대에 게스탈트 치료(gestalt therapy)가 등장한다. 독일의 정신과의사로 정신분석가인 피츠 펄(Fritz Perls)이 개발한 게스탈트 심리치료이다, 그는 1927년에 정신분석가인 빌헬름 레이크(Wilhelm Reich)에게 개인분석을 받아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돈이 많이 든다는 단점을 보완해서 감정을 행동으로 직접 표현하도록 초점을 맞춘 것이 게스탈트 심리치료이다. 카우치 대신에 분석가 옆에 빈 의자가 있다 라고 생각핵서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직접 감점을 표현하도록 하는 빈 의자 기법이 있다.  분노를 신문지로 혹은 스폰지 막대로 때리게 하거나 주먹으로 베개를 치게 해서 감정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도록 하는 기법이다. 게스탈트 치료의 핵심은 현재의 감각, 지각, 신체적 감정과 감정, 행동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관계는 자아와 그 환경 그리고 다른 사람과 접촉을 함께 강조한다.

1933년 나치 정권을 피해서 독일을 탈출해서 남아공화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게스탈트 심리치료소를 세우고 치료를 했다. 게스탈트 이론은 단순한 조합보다 1+1 = 2가 아니고 3이다 라는 시너지 효과를 강조하는 이론에서 시작되었다. 1946년에 뉴욕으로 이사를 와서 카렌 호르니 정신분석학교에서 호르니와 레이크와 만나게 된다. 1960년에 뉴욕을 떠나서 캘리포니아에 에살란 연구소(Esalen Institute)에서 게스탈트 치료를 위한 워크숍을 열었다. 1969년에살란을 떠나서 캐나다 밴쿠버 섬의 코위찬 호수에서 게스탈트 공동체를 설립하고 게스탈트 치료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화 제작사인 스탠리 폭스가 감독한 케스탈트 치료에 대한 8편의 교육영화르 만들게 된다(2023, 3, 12: 위피키아).

 또 하나의 심리치료는 1970년대에 등장한 윌리엄 글래즈(William Glasser)현실 치료(Reality therapy)가 있다. 글래즈는 UCLA 의과대학에서 정신과의사로 그리고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는 비행청소년들의 치료를 하다가 과거의 어린시절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용되는 것을 줄이고 지금 현재의 문제 그리고 미래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는 1970년에 현실 치료 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론과 치료를 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심리치료로 교류분석이 등장한다. 캐나다 태생으로 정신과의사로 그리고 에릭슨에게 개인분석을 받아서 정신분석가가 되었으나 정신분석을 포기하고 교류 분석transactional analysis)을 창조한 에릭 번(Eric Berne)이다. 그는 프로이트의 원초자아, 현실적 자아 그리고 초자아 대신에 마음 속에서 부모(parents), 어린이(child) 그리고 어른(adult)3 사람이 살고 있는 것으로 그들 사이에 서로 상호교류로 상호작용 관계를 분석하는 교류분석, 거래분석을 창조하게 된다. 교류 분석은 에들러(Adler) 쪽에 가깝다. 10회기의 단기 치료이다. 무의식이나 어린시절의 상처를 다루기 보다 현재의 갈등 문제를 주로 다룬다.

예를 들어서 아토피 환자는 몸에 가려움 때문에 피부를 긁어서 후유증으로 제 1차 감염을 일으키게 된다. 피부를 긁어서 연고를 바르고 시원함을 느끼는 것 그 자체는 부모가 어린이의 사랑의 갈구를 달래주는 행동이다. 신체의 가려움 그 자체는 유아기 긴장으로 보채는 욕구불만이 된다. 피부에 연고를 바르는 것은 부모가 어린이의 피부를 신체접촉으로 사랑을 주고 돌보아주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해석을 한다. 유아가 긴장을 부모의 신체접촉으로 해결하고 있지 않는가! 그 환자의 마음 속에서 부모가 피부를 마사지하고 접촉을 하고 있고 가려움 그 자체는 어린이의 보챔과 욕구불만족의 상황을 해석해 준다. 그 아토피 환자가 그 자신의 가려움의 원인을 이해하도록 해서 피부를 긁어서 생기는 제 1차 감염을 막고 스스로 자아가 달래주도록 해서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게 함으로써 긴장을 방출하고 불안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생리학적으로 말을 하면 피부를 긁어 가려움증을 유발하게 되면 호산구가 증가해서 계속해서 조그만 먼지 진드기, 곰팡이 꽃가루 등에 예민하게 되고 이것이 악순환으로 가려움의 습진(아토피)가 악화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을 깨닫게 한다. 고로 피부를 긁어서 부모의 신체접촉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피하고 치료사가 해석으로 이것을 내담자에게 이해시키고 내담자가 스스로 신체적 긴장을 풀어내고 운동으로 불안을 줄이는 방법으로 교류분석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필자가 최근에 배운 것).

또 하나는 직면 그룹, T-그룹이 있다. 이 치료는 1960년대 스탠포드 대학원 학생이었던 마이켈 머피(Michael Murphy)딕 프라이스(Dick price)가 캘리포니아 빅서에 위치한 비영리 수련원이자 인문학 대안 교육에 중점을 둔 인간 잠재력 개발 학교로써 에살렌 연구소(Esalen Institute)를 설립하게 된다. 여기에서 직면그룹(Encounter Groups) 혹은 - 그룹(T-group)이 운영되어지게 된다. 한 개의 그룹이 8명에서 18명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다. 그들이 함께 느낌들과 문제들을 직면하면서 탐색하는 것이다.

 프라이스는 스탠포드를 졸업하고 인간 잠재력을 공부하기 위해서 하버드 대학에 갔으나 그의 부모가 그가 정신적으로 혼란하다고 판단해서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1년동안 입원을 시켰다. 이 상처 경험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되돌아와서 중국인 도교 교사(자푸평)와 함께 동서양의 집에 머물게 된다.

한편으로 머피는 인도의 사원들을 방문하고 인도의 수행자의 마을에서 수개월간 머물게 된다. 귀국한 머피는 인도인이 운영하는 문화통합의 집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되어 스탠포드 대학에 비교 종교학과 인도학을 연구하는 프레데릭 스피젤베르그(Frederic Spiegelberg) 교수와 함께 하면서 에살렌 연구소를 구상하게 된다.

그들은 도교, 불교, 종교, 철학, 대체의학 몸과 마음 등을 함께 통합을 위한 학교를 세우게 된다. 여기에서 게스탈트 치료의 창설자인 피처 펄(Fritz Perls)를 초대해서 게스탈트 훈련을 함께 하게 된다. 펄은 5년 동안 (1964-1969)이 곳에서 머물면서 그들과 함께 수련생들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이것을 확대시켜서 산업체 안에서 관리자, 경영자들의 심성개발을 도와주는 T-그룹으로 확대시켰다. 에살랜은 개인의 성장, 명상, 마사지, 게스탈트 실습, 요가, 심리학, 생태학 영성 및 유기농 식품을 포함한 연간 500개 이상의 워크샵을 제공을 하게 된다 2016년에는 약 15,000의 사람들이 워크샵에 참가하게 된다(2023, 3, 12: 위키피아)

 에살렌은 영국의 타비스톡 정신분석과 심리치료 대학에서 인간관계 기술의 훈련 실험실의 장립으로 그리고 그룹 역동학의 상호작용의 연구로 이어지게 된다(Brown, 2000).

또 한가지 심리치료로 바이오에너지((Bioenergetics) 치료가 있다. 프로이트의 제자로 혁신적인 창의적인 분석가로써 이름난 빌헬름 레이크(Wilhelm Reich)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로써 바이오기능의 치료라고 부른다, 그는. 리비도의 불완전한 방출, 부자연스러운 섹스가 불안으로 전환이 된다고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서 성교의 차단이다. 그는 신체적 긴장과 자세는 바로 방어로 보았다. 이것들은 직면 되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억압된 느낌이 해석되어지고, 그 결과로 상상들이 나타나게 된다고 보았다.

또 다른 치료로 원시적 비명치료(primal scream)가 있다. 창설자인 아더 야노버(Arthur Janov)UCLA의 임상사회복지학과 석사학위(MSW)와 클레망 대학원 대학(Claremont Graduate School)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해커(Hacker) 베버리 힐 정신병원에서 레지던트 그리고 벤트우드(Bentwood) 신경정신병원에서 레지던트를 완료했다.

비명은 집중적인 고통에 의해서 유아기 안에서 생산된 그러나 적당한 감정지원 안에서 충분하게 표현되어 지지 못한 것으로 본다 그 결과로 목 졸린 감정으로 봉인된 것이다. 치료 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욕구를 경험한다. 그리고 한 개의 퇴행한 상황 안에서 일부는 출생과 같은 신체 감각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는 개인 심리치료를 하면서 어린시절의 억압된 느낌들과 고통스러운 표현을 원시적인 비명을 지르도록 하는 원시적 비명 지르기 심리치료 연구소를 1980년에 L.A. 웨스트 할리우드에 노스 아몬드에 설립을 했다. 그는 연구소 소장으로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또한 L.A 베니스 1205 아보트 킨니 불리버드에 야노버 비명 지르기 치료 센터가 있다. 그는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펀드(fund) 기금으로 치료를 해주었다.

그의 저서로는 원시적 비명(1970)이 있다. 그에게 치료를 받은 유명인은 음악가인 존 레논(John Leon)와 그의 일본인 부인 요코 오노가 있다(2023, 3, 13: 위키피아).

 이 밖에도 여러가지 치료들이 정신분석의 단점들을 개선해서 정신병의 쓰나미에 대처하게 되어 지금까지 밝혀진 역동심리 심리치료가 30여종이 넘어간다 보고되었다(Brown, 2000). 더 상세한 것은 타비스톡 정신분석과 심리치료 대학에서 사용하는 9개국으로 번역된 심리치료학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공식적인 역동심리 치료의 리스트를 참고하기 바란다.

 미국의 정신의학은 1980년대 DSM-에서 온전하게 체제가 정립되어진다. 이후에는 몇 개씩 새로 등장하거나 소멸된 정신장애들로 정리되어지면서 크게 획기적인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뉴욕이 전 세계의 문화의 중심지가 된 1945년부터 1980년까지 40년 동안에 정신병의 쓰나미가 언급이 되었다.

 지금까지 문명의 발달이 정신병을 몰고 온다 라는 것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했다. 여기에서 문명과 문화의 어떤 요소들이 정신병을 양산하는가? 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보자.

여러 개의 요소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의학의 발달로 자녀들의 수가 1-2으로 줄어들게 된다. 맞벌이유아들이 엄마의 품에서 영아원, 유아원으로 이동한다, 과학의 발달은 자녀들에게 더 많은 기술을 배우도록 강압한다. 학교들은 교육을 통해서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구성원들을 배출하는 것이 아닌가? 고로 어린이들은 많은 기술을 배워야 한다(우리나라는 초등학교 저학년에 이미 영어와 컴퓨터가 부가된다). 핵가족의 붕괴로 이혼이 증가하면서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이혼 비율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또한 미국은 이민의 나라로써 시작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온 사람들이 청교도가 아닌가? 고로 미국의 성골 진골앵글로 색손(영국) 청교도 백인이다. 1차 세계 대전과 제 2차 세계 대전의 재난을 피해서 전 세계의 이민자들이 미국에 몰려오게 된다.

 필자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민자들의 자녀들의 어린시절의 삶이다(정신분석이 0-6세를 강조하는 이유). 미국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두 사람을 소개를 하면서 그들의 자서전을 통해서 그들의 어린시절의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웠는가? 를 유추를 통해서 정신병 환자들의 쓰나미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의 인물은 1982년에 여론 조사에서 미국과 캐나다에서 심리치료에 공헌한 최고의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이성감정행동치료(REBT)를 개발한 엘버트 엘리스(Albert Ellis)이다(다른 한 사람은 칼 로저스(Carl Rogers).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유태인으로 어머니는 폴란드 유태인으로 이민 온 사람들로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직전(1913)뉴욕에서 3자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5살-7살 때 8번을 병원에 입원을 할 만큼 병약했다. 가장 긴 입원은 1년 동안 병원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입원한 그를 방문해서 위로해준 적이 거의 없었다 라고 회고했다. 그는 10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는 집을 떠났고 어머니가 3명의 자녀들을 양육을 했다. 아버지는 브로커로 집에 거의 없고 출장을 다녔다 아버지는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이 없고 역할 모델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엄마의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다고 적었다. 엄마는 아침에 피곤해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가 자명종으로 시간을 맞춰서 동생들을 깨우고 학교에 보냈다. 저녁에는 엄마는 늦게 귀가했기 때문에 엄마의 얼굴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라고 노트를 했다. 그의 엄마는 조울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종합검사에서 신체적인 원인이 아닌 심리적인 신경증으로 밝혀지면서 전공을 경영학에서 심리학으로 바꿨다. 컬럼비아 사범 대학 치료 심리학을 전공해서 1947년에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는 -프로이트학파에 흥미로 뉴욕의 카렌 호르니(위의 글을 보라)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정신과의사로 프랑스에서 다다이즘(dadaism)의 멤버로 정신분석가가 된 로버트 헬백(Robert Hellbeck)에게 개인분석을 받아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러나 정신병의 쓰나미를 예견하고 정신분석을 포기하고 1967년뉴욕에서 이성감정행동치료 학교를 세우고 전문가들을 영성하면서 심리치료를 했다. 그의 이론은 이후에 인지치료를 개발한 펜실베니아 의과대학 교수인 아론 백(위에서 보라)에 영향을 비치게 된다. 그는 어린시절에 병약함을 극복하고 장수로 93세의 일기로써 심리치료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 그의 어린시절의 8번의 병원 입원은 그의 어머니가 맞벌이로 엄마 풀에서 자란 것이 아니고 유아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심리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 기능의 약화로 볼 수가 있다.

두 번째의 인물은 1954(미국에서 정신병원의 만원시대(위에서 보라)에 태어나서 1980년에데 활동을 한 흑인으로써 백만장자가크리스 가드너(Chris Gardner)이다. 그는 2003년에 미국의 ABC 방송국에서 20/20프로그램의 초대에 출현해서 그의 성공담을 밝히고 2006년 5월에 그의 자서전이 출판되고 12월에 영화행복의 추구(pursuit of happiness)라를 영화로 개봉되었다. 그는 영화에 제작지원을 했고 마지막 장면에 까메오로 출현을 했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해서 막대한 부를 창조를 했다. 그는 박애주의자로 많은 헌금과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그의 영화는 1981년에 그가 노숙인으로 생활하면서 1년 동안의 삶을 영화로 만든 것이었다. 그의 어린시절의 삶을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 요약해보자(2023, 3, 18: 위키피아).

그는 위스콘신의 밀워키에서 태어났다. 그의 엄마는 이미 첫 번째 결혼해서 딸이 있었다. 두 번째 결혼에서 크리스가 태어나게 된다. 엄마는 이혼을 했고 아버지는 떠났다. 엄마가 세 번째 결혼으로 두명의 딸을 낳았다. 크리스는 3명의 씨 다른 형제들 중에서 유일한 아들이었다. 3살 때 계부가 엄마와 자녀들을 폭행으로 두려워했다. 계부는 엄마를 복지연금에 사기죄로 고발해서 감옥에 가면서 그의 형제들이 쉼터로 이동을 했다. 이후에 다시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왔으나 남편의 폭력에 견디지 못해서 불을 질러서 남편을 살해 시도에 감옥에 갔다. 그리스가 8살 때 자녀들은 입양 기관으로 보내졌다. 그 시점에서 그는 3명의 외삼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헨리 외삼촌이 그에게 역할 모델이 된다. 그는 해군에 입대해서 삶에 도전한 청년이 되었다. 그가 9살 때 그 외삼촌이 미시시피 강에 빠져 사망을 하게 된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엄마가 간수를 대동하고 나타났을 때 엄마가 감옥에 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외삼촌과 엄마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아의 힘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배우고 익혀야 함을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다. 세상에 백마의 기사는 없다 고로 너의 자아를 키워야 한다 라는 믿음을 심어주게 된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하게 된다 4년 동안 해군 의무병으로 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했다. 전역 때 다행히도 그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의과대학(종합대학 속이 외과대학인 아닌 의과대학 한 개의 대학으로 서부의 명문 의과대학)심장 외과 실험실 의사의 로버트 엘리스(Robert Ellis) 교수를 소개받고 그의 실험실에서 매니저로 발탁되어 연구 보조를 하게 된다. 그 시점에서 그는 부인 재키를 만나게 되고 결혼을 하게 된다. 그의 부인은 수학교육의 전문가였다. 이 시점에서 미국의 제 39대 카터 대통령에 의해서 의료에 종사해서 경험을 쌓아도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의과대학을 졸업해야 한다는 의료법이 통과되면서 그의 의사의 꿈을 포기를 해야 했다.

그 시점에서 그는 치과대학 여학생과 외도를 하게 되었고 아들이 태어나게 된다. 외도녀와 아들과 함께 잡을 나와서 생활을 시작했으나 3사람의 생활비에 조달에 어려움으로 그는 실험실을 포기하고 전재산을 투자해서 뇌 스캐너(간이 MRT검사기)를 구입해서 의사들에게 판매를 하게 된다. 그 기기를 2대를 팔면 한달 생활비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을 잘 되지 않았다. 재키 부인이 아들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그녀와 갈등으로 그가 폭력혐의로 구치소에 갇히게 되고 폭력의 혐의에서 풀려 났으나 주차 위반 딱지가 쌓이게 되어 1,200$ 가 미납된 것을 지불할 수 없게 되면서 10일 구치소에 갇히는 것으로 지불을 대신하게 된다.  10일 후에 집에 되어왔을 때 그 동안에 부인 재키가 아들을 데리고 동부로 가버렸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동부로 가서 부인과 타협으로 1.5세의 아들을 데리고 와서 그의 1년 동안의 노숙자 생활이 시작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2023, 3, 18: 위키피아).

 영화는 이미 소개가 되었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가 택시를 타고 가면서 정육면체의 큐빅을 조작해서 색깔을 맞추는 것을 본 승객이 그의 재능에 감탄해서 그의 회사에서 20명의 훈련생을 6개월 무급으로 양성하는데 그 중에서 1명의 정식 직원으로 뽑는다 라는 정보를 얻게 된다. 그가 그곳에 응시하기로 하고 인터뷰에 참가하게 된다. 시점에서 부인 캐치와 소동으로 인터뷰 시간에 차질이 생기게 되자 택시를 타고 가면서 택시 요금이 없어서 도망을 하게 된다 한쪽 신발이 날아가고 그가 가지고 있는 뇌 스캐너를 분실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겨우 정각에 인터뷰 시간에 도착해서 정상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입학에 성공하게 된다. 회사의 20명의 응시자들 중에서 텔레 마케팅(tele marking)으로 최고의 실적을 올린 1명이 뽑히게 된다는 것을 알고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크리스는 아이디어를 짜서 부유한 고객을 친절하게 안내를 해서 그의 환심을 사게 되고 그 사람의 가족구성원과 크리스의 아들이 함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트 야구팀의 응원을 가지게 된다 그 고객의 도움으로 그의 부유한 지인들을 함께 투자의 고객으로 유치하게 되면서 크리스가 최고의 실적으로 6개월의 훈련의 마지막 날에 정규자원으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 영화가 끝나게 된다.  

 크리스의 실제 아들은 1.5세의 유아로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유아였다(영화는 윌 스미스의 주연으로 그의 4살된 아들이 출연). 그는 아들의 유아원 비용을 지불할 돈이 없어서 그 유아원에 페인트칠로 대신하게 된다 그 때 그 집의 이름이 행복의 추구(Pursuit of happiness)였다 그 집의 이름을 영화의 제목으로 인용한 것을 밝히고 있다(행복의 happinesshappyness 로 철자 오기가 된 이유) 그는 1년 동안 무급 훈련으로 이것이 때문에 아들을 영하원에 보낼 돈이 없어서 2 사람이 실제로 노숙자로 그리고 공중 화장실 안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영화에서 소개된다. 그는 이후에 샌프란시스코의 감리교 목사님의 도움으로 그의 시설에서 아들과 함께 보낼 수 있게 됨으로써 그 훈련을 마칠 수 있게 된다. 이후에 그는 그 회사에서 나와서 자신의 투자 회사를 설립하고 성공해서 백만 장자가 된다. 그는 이후에 그 감리교에서 복지회관을 설립하는데 도움을 주고 많은 재정적인 지원을 하게 된다.

 그가 어린시절의 엄마의 3번째 결혼 그리고 계부로부터 폭행, 3명의 씨가 다른 자매들과 생활, 엄마의 감옥 행, 그리고 흑인으로써 소수인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후에 백만 장가로 성공한 것을 ABC의 20/20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이유를 미국의 젊은이들의 어려움들의 극복모델로 보여주기 위함을 밝히고 있다. 어린이들이 부모의 이혼으로, 가출로, 입양 가정의 학대와 폭력, 마약, 알코올 중독, 문맹 등의 역경을 뚫고 나온 그의 젊은 시절의 모델을 미국의 청소년들에게 보여주면서 자아의 개발기술을 습득의 모델을 제시화기 위해서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시 1980년대의 뉴욕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한 개의 학술적인 예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혼, 마약, 범죄, 알코올, 섹스의 유혹에 청소년들 혹은 결혼의 파경으로 이혼한 부부들이 자녀들을 포기하고 입양 기관에 보내지게 된다. 미혼 혹은 결혼의 파경으로 유아들을 포기하는 것은 뉴욕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프랑스 혁명 50년 전에 1740년성당, 수녀원 문 앞에 신생아들이 내버려졌다. 대부분이 사망했지만 그 중에서 일부는 구조되었다. 이것의 빈도가 많아지면서 성당과 수녀원에서 회전문 요람이 설치되었다. 신생아들을 그 요람에 넣으면 요람이 회전을 해서 성당안으로 들어간다 고로 아기가 울면 소리가 들리게 되고 구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제된 아기들이 1740년3,150명으로 그리고 프랑스 혁명 5년전이 1784년40,000명으로 그리고 혁명 50년 후1823년131, 000으로 보고되었다((Minuchin & Elazar, 1992: 주㈜: 참고).

 300년 이후에 뉴욕에서 이렇게 버려지는 아기들이 20,000이 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뉴욕에서는 이러한 어린이들을 뉴욕법률 구조협회에 의해서 위탁양육조직으로 지원하는 쉼터가 운영되고 있다. 이들 어린이들이 입양 가정에 영구적으로 보내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어린이들3개월 동안에 한 어린이65번째 쉼터로 이동한다, 1천명의 어린이들이 최하 5-9회로 이동을 한다고 보고되어졌다((Minuchin & Elazar, 1992).

 위의 정보는 가족 치료사인 미뉴친(Minuchin)의 저서 정신병원에서 미침의 책 속에서 소개되어진 정보로써 그는 환자들을 가족구성원들과 함께 해서 치료를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병원에 입원시켜서 가족과 분리시키면 오히려 정신병을 악화시킨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1960년대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을 많이 가게 된다. 필자가 1982년에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 그 때 L.A의 코리아 타운에서 생활을 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쉴 때 휴게실에 가면 한국일보와 중앙일보가 L.A.에서 한국판 신문과 L.A. 교인들의 생활정보 소식을 한국판으로 첨부해서 판매가 되고 있다. 한국 사람들 역시 이민을 오게 되면 부부가 맞벌이를 하게 된다. 부모님은 4-5살된 어린이를 직장에 데리고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방 안에 음식과 물과 장난감들을 넣어주고 밖에서 문을 잠그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길거리로 혼자 다니면 미국에서는 부모를 처벌하기 때문에 자녀들이 혼자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문 박에서 문을 잠그는 것이다(위에서 소개한 어린이들이 먹고 입고 대소변을 갈아주고 병원에 입원시키는 양육에서 엄마와 아기 관계의 빠진 부분을 잘 보라).

 한 개의 사고가 발생을 했다. 4세-5세 된 한 어린이가 TV의 채널을 돌리다가 TV가 앞으로 넘어져서 TV에 깔려서 사망한 것이었다(그 당시에는 벽걸이 TV가 아니고 그리고 리모컨이 없었다). 집에 귀가한 엄마가 발견하고 통곡을 하면서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내가 잘못해서 아들이 죽었다라고 울부짖었다. 경찰관이 와서 한국어의 번역을 듣고 엄마를 체포를 했다. 엄마가 아들을 죽었다 라고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교민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자식이 죽은 것은 엄마가 양육의 책임 때문에 늘 하는 습관적인 언어임을 설득을 해서 풀려난 사건이 있었다.

 또 한 사람의 아버지는 이혼으로 엄마가 떠나고 5-6섿된 아들을 키우면서 방 안에 음식과 물과 장난감을 넣어주고 밖에서 잠그고 키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민을 온 이유는 자녀들의 교육 때문에 미국에 왔지만 경제적으로 성공을 했지만 자녀 교육에는 실패를 했다고 교민 사회가 스스로 밝히고 있다.

또 한가지 웃지 못할 사연은 이민을 온 부모님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열심해 일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돈을 벌어서 경제적으로 성공을 했다. 대신에 자녀들은 유치원으로 초, , 고등학교에 보내지게 되었다. 그런데 부모는 대부분이 한국 교민들의 일터에서 일을 하게 되기 때문에 직장 안에서 소통이 한국어이다 대신에 자녀들은 영어로 교육을 받게 되어 청년이 된 자녀와 부모님언어 불통으로 유학생들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 번역가 역할을 하는 사건들이 보도되었다.

한국 이민의 대표적인 불행한 사례버지니아 공과대학의 xxx 군의 사건이다. 부모님이 이민을 올 때 그는 초등학교 학생으로 대인관계가 어려웠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가진 어린이들이 고립되고 외톨이로 정신병 환자가 되는 확률이 높다 는 것은 이미 여러 번 블로그에서 밝혔다. 그는 2008년, 4, 16에 두개의 자동 권총으로 32명의 학생들(5명의 교수가 포함)을 살해하고 17명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살을 했다. 사망한 공대학생들은 대부분이 외국의 유학생들이었다(미국인은 공과대학 기피 현상). 그는 NBC에 자필로 쓴 편지에서 나는 예수이다. 부자들을 미워했다. 그들이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내 머리 속에 암세포를 넣었다. 내 심장을 테러화하고 내 영혼을 파괴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했다라고 썼다.

미국에 온 이민의 어린이들이 다 실패한다는 말은 아니다 미국 생활에서 대인관계가 좋고 미국 친구들을 잘 사귀는 대부분의 이민 청소년들은 성공을 한다. 미국의 주립 대학은 학비가 무료이다(그들은 학생 회비만 지불하면 된다 그러나 사립과 유학생들을 1학점당 달러를 지불해야 한다).

필자가 10년 동안 미국 생활을 하면서 미국 사회가 얼마나 복잡하고 다난한 사회인가를 실감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다 너무 바쁘게 생활하면서 그러한 생각을 할 영유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시대정신(zeitgeist)로서 그 속에 파묻혀서 따라갈 수 박에 없다는 것을 실감을 했다.

필자는 입학 후에 늘 국제학생과의 카운슬링 센터를 이용을 했다. 시도때도 없이 어려울 때는 1주일에 몇 번이고 찾아갔다. 어려움을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인 친구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에서 자신감으로 날아가던 영어는 심리학 교실에서는 늘 꼴찌였다. 특별히 10년 동안 심리치료학 전공에서 외국인을 한 사람도 만난적이 없었다. 한 동양인을 만나서 반가워서 어느 나라 출신인가? 라고 물었더니 그는 일본인 3라고 했다. 그는 얼굴만 동양인이지 완전히 미국인이었다. 학교에는 유학생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서로 만날 시간이 없다 개개인의 스케줄로 공부를 하고 알바를 하기 때문에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서 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해도 서로 만나는 일이 거의 없다. 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 때 유학생 모임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최근에 필자는 공부를 하다가 쉴 때 그리고 식사 후에 소화를 위해서 쉴 때 케이블 TV에서 미국 드라마 특별히 FBI, Chicago P.D.(시카고 경찰서 수사과), CSI(범죄수사) 등을 자주 본다. 물론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속에서 등장하는 범죄자들이 대부분이 이혼으로 상처받은 어린이들, 가출, 입양기관에서 학대, 마약, 알코올 중독, 도박. 게임중독 등의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어린시절에 받은 심리적 상처들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특별히 수사관들의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건에 파묻히면서 가정이 깨어지고 이혼을 하고 자녀들이 엄마와 함께 살거나 혹은 아빠와 함께 살면서 갈등으로 양쪽으로 이동하는 모습들이 솔직하게 소개되는 것을 보면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심리적인 고통들이 그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가? 를 실감하고 있다.

특별이 1999년에 한 뇌과학자가 쓴 저서에서 미국의 현재의 상황은 대학을 졸업하는 미국의 여대생들70%가 일을 하게 된다. 1살된 미국의 어린이들의 부모50%가 맞벌이를 하게 된다. 신생아(태어나서 1-3일의 아기)48%가 인친척이게, 30%가 영아원, 유아원그리고 22%가 베이비 시터에게 맡겨진다(버클리대학 신경학교수인 다이아몬드가 쓴 마음이라는 마술의 나무를 보라, Diamond, 1990: 주㈜: 참고)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선진국이 되면서 정신병의 쓰나미가 서서히 밀려오고 있다 것을 느낀다. 학교에서는 체벌이 없어지면서 생활 지도가 어려워지고 그리고 과거에 여성들에게 최고의 인기였던 교사 직업의 인가 떨어져가고 있다. 그리고 학부모들의 교사 폭행과 고소 고발이 늘어나고 그리고 학생들의 문제가 생각해지고 있다. 우리집 아이가 달려졌어요, 혹은 금족 같은 내 새끼에서 어린이들의 문제가 심각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하다고 해서 농경시대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이면자녀양육의 허점을 알고 정신병이 물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녀의 양육에서 허점을 알고 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블로그를 통해서 선진 문화의 단점을 소개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허점을 알면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영국의 타비스톡 대학에서 심리치료 과목의 교과서에 실린 21세기의 역동적 심리치료(최소 50분간의 대화치료)리스트를 소개를 한다. 이 학파들은 그들의 역동심리학의 학교들을 세우고 이론과 치료를 개발하는 학교로 등록된 학교들이다.

---------------------------------------------------

1.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2.  에들러의 개인 심리학

3.  (Jung)의 분석치료

4.  행동 치료

5.  인지 치료

6.  인지-행동치료

7.  가족 치료

8.  현실 치료

9.  실존 치료

10. 게스탈트 치료

11. 인간중심 치료

12. 이성감정행동 치료

13. 사이코드라마

14. 교류분석 치료

15. 다문화 치료

16. 페미니스트 치료

17. 통합 치료

18. 문제해결 치료

19.서술 치료

20. 신경생리학 치료

21. 대인관계 치료

22. 최면 치료

23. 바이오 에너지 치료

24. 컴퓨터 영상 치료

25. 그룹 치료

26. 정신분석 그룹 치료

27. 정신분석 인지 치료

28. 남녀 공동 치료사 치료

29. 사회적 치료

30. 원시적 비명치료

31. 신경언어 프로그램 치료

32. 심리통합 치료

-----------------------------------------------------------------------------

주㈜: 참고

베른헤임(Bernheim, 1979). 정신분열증 환자, 원인, 증세들, 치료들

리즈(Lidz, 1985) 정신분열증과 가족

다이아몬드(Diamond, 1999). 마음이라는 마술의 나무

미아레(Meares). 친밀감과 고립(2005), 놀이의 상징(2005), 보드라인 장애의 해리 모델(2012), 보드라인 장애의 대화 모델(2012)

바알로우(Barlow, 2001). 불안과 불안장애(2001), 공황장애와 공포증(1989)

엘렌버그(Ellenberger, 1970). 무의식의 세계: 역동적 정신의학의 진화와 역사

어네스트 존(Ernest Jones).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 제 1 (1953), 2 (1955), 3(1957) 세갈(Segal). 멜라니 크레인(Melanie Klein, 1989), 꿈과 상상과 예술(1991), 치료적 정신분석(2004)

그린슨(Greenson). 정신분석의 기법(1968), 정신분석학에서 탐색 연구(1978)

스톤(Stone, 1983). 정신분열증 치료: 분석 치료적인 접근

(Beck). 인지치료와 감정장애(1979), 불안장애와 공포증(1985). 성격장애의 인지치료(1984)

헬리(Haley). 시련의 치료(1984), 문제해결치료(1991), 전략적 가족치료(1991), 밀턴 에릭슨 1(1985), 2(1985), 3(1985). 집 떠나는 자녀들(1993), 특이한 치 료(1994)

컨버그(Kernberg). 보드라인 심리치료(1998), 보드라인성격장애의 전이중심 심리치료(1998), 보드라인 장애와 나르시즘 치료(1975), 보드라인 환자의 역동적 심리치료(1989), 심한 성격장애 치료(1984), 대상관계 이론과 치료적인 정신분석(1989)

보웬(Bowen, 1985). 치료적인 실제 안에서 가족 치료

알렉산더(Alexander, 1949). 심인성질환: 원인과 응용

로젠필드(Rosenfeld, 2003). 치료 답보와 해석

그로스테인(Grotstein, 1977). 쪼갬과 투사 동일시, 페비안과 대상관계의 기원

체싱크(Chessick, 1985). 자아심리학과 나르시즘 치료

알렉산더(Alexander). 심인성질환(1949). 심리신체의학의 연구(1945)

코호트(Kohut). 자아 분석(1971), 어떻게 분석이 자아를 치료하는가? (1984)

미뉴친(Minuchin, 1992). 정신병원에서 미침, 심리신체의 가족들: 맥락 안에서 거식증 치료(1979) 페트선(Patterson, 2009). 페트슨의 알레르기 질병

윌리엄(William, 2000). 아토피 피부염

휘티커(Whitaker). 가족이 겪는 호된 시련(1988), 심리로부터 조직까지(1982)

브라운(Brown et al., 2000). 심리치료의 소개

제니커(Jenikes et al., 1986). 강박사고-강박행동 장애

그린베르그(Greenberger, 2009). 패터슨의 알레르기 질병

벨린트(Balint, 1999). 기초적 결함

몰러(Mahler, 1975). 인간 유아의 심리적 탄생

그린베르그와 미첼(Greenberg & Mitchell, 1983). 정신분석학에서 대상 관계 이론

-----------------------------------------------------------------------

위의 저서들은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져 있으니 치료사의  페이지에 있는 전문서적 안내에 들어가 보세요.

주㈜참고

전화번호: 010-4512-1275

e-메일: jongmankim@hanmail.net

홈페이지http://psychclinic.pe.kr --- 정신분석 심리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