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에서 자연스럽게 분석 상담을 받고 있는 모습(영화 속에서 인용) 

 

 이상(李箱)의 날개와 정신분석

 

이상의 날개를 접해보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필자 역시 고등학교 시절에 이상의 날개를 여러 번 읽어본 기억이 난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박제를 한 천재를 아시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개야 돋아라라는 구절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 당시에 평론가들이 쓴 글들로써 그는 모더니즘을 연구하기 위해서 모인 구인회의 한 멤버로서 그의 글은 자아-의식(self-conscious) 적인 단편 소설로써, 초현실주의를 그린 것으로, 의식의 흐름과 관계 있다 라는 것이 전부였다. 모더니즘(modernism)은 영어사전에서 현대주의 라는 말로 현대소설의 뜻으로 그리고 초현실주의(surrealism)이라는 말은 현실을 초월한, 현실위에 있는 것으로 그리고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 라는 것으로 영어 글자의 사전적 해석이 전부였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필자가 심리치료와 정신분석을 40년간 연구하고 치료를 하면서(필자는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1982, 8, 3일에 미국에 유학해서 10년동안 심리과학과 가족치료를 그리고 귀국후에 30년간 정신분석을 연구하고 치료를 하고 있는 사람) 정신의학의 장애들 중에서 가장 늦게 등장해서 가장 빠르게 급증하고 있는 대인공포증(social phobia) 환자들이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과 비슷하다 라는 것을 발견하고 이상의 날개를 다시 재조명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는 모더니즘, 초현실주의, 의식의 흐림의 시대적 흐름에 따른 그 용어들의 전문성이상의 생애와 이상이 살았던 그 시대적인 배경 그리고 날개의 작품대인공포증의 특징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으로써 이 글의 내용을 전개해 보려고 한다.

자아-의식, 초현실주의, 의식의 흐름 등의 전문용어들은 모두가 심리학자들 정신분석가들에 의해서 개발되어 등장한 용어들이다. 이 용어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먼저 철저하게 이해를 해야 이상의 삶과 날개의 내용이 잘 이해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모더니즘의 열풍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이다 라는 점이다. 우리가 한 사람의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삶의 과정과 그가 받았던 시대적인 영향력이 이해되어진 이후에 그의 작품이 충분히 이해되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우선 모더니즘의 등장과 이 용어에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먼저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모더니즘상징주의·초현실주의·입체파·소용돌이파 등의 총칭이다. 모더니즘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에 융성했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2022, 7, 16: 다음 백과). 모더니즘은 19세기 후반 시작해서 제 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9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2022, 7, 16: 위키피아).

20세기 초반기에 20세기를 이끌어 나갈 3대 사상가들은 바로 니체,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였다. 니체는 1900년에 사망을 했지만 그의 열풍은 1890에서 1910 동안 유럽의 지식층들을 열광케 했다. 니체는 현대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으로 그가 프로이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김종만, 1999, (정신분적학적인 관점에서 본 자아의 성장, pp. 620-626를 보라).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매춘부 집에 갔다가 매독에 감염되어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매독은 고대와 중세 중반기에는 없었다. 매독의 시작은 바로 1492년에 컬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인디언들과 가진 섹스의 접촉애서 세계로 퍼진 섹스질병이다. 그렇다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왜 이상이 없었던가? 세균들은 그 세균을 보유한 숙주에게는 서로 공생하기 때문에 이상이 없다, 숙주를 파괴시킨다면 그 세균 자체가 살아남을 수 없지 않는가? 고로 에이즈, 혹은 코로나-19 등의 바이러스들도 어떤 숙주에서 살고 있다가 인간에게 전염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정확한 숙주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숙수의 몸에서 이방인으로 전달되면 그 이방인에게는 치명적이 된다 라는 것이다(Ellenberger, 1970). 매독은 1909년 독일의 세균학자인 파울 에들리히(Paul Ehrlich)에 의해서 살바르산 약물에 의해서 매독 문제는 해결이 된다. 그는 이미 면역학의 공로로 1908년에 노벨의학상을 받았던 사람이다. 매독은 임산부에게서 태아로 탯줄을 타고 감염되기 때문에(에이즈도 마찬가지)매독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는 선천성 매독으로 뇌 세포가 파괴되어 백치로 태어나게 된다. 매독이 정신의학의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들 중에 하나가 초반기에는 뇌의 질병이 병균에 의해서 생기는 것으로 오판했기 때문이었다. 매독에 의해서 뇌가 파괴된 것에서 정신병도 세균에 희한 감염 때문이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매독은 1, 2, 3, 4기로 나눠진다. 1기에는 섹스 접촉 후에 성기 주변이 붉은 열집이 생기고 가렵다 이후에 사라진다 나은 것으로 착각을 하기 쉽다. 2기는 붉은 열집이 몸 전체로 확대된다 3기는 잠재기로 증세들이 사라진다. 4기는 뇌의 세포막을 뚫고 뇌세포를 파괴시킨다. 고로 정신이상 증세들을 보이게 된다. 매독에 희생된 천제들이 많다. 콜럼버스는 만년에 정신이상자로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사망하게 된다, 천제 음악가인 베토벤은 만년에 귀머거리, 장님이 된 것이 바로 매독 때문이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일, 화가 모네, 시인 볼테르, 소설가 모파상 등이 매독으로 희생된 사람들이다(2922, 7, 16: 위키피아). 매독의 병균이 발견됨으로써 매독은 정신의학에서 제외된다. 정신장애는 외부의 침입 물질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내면의 심리적인 혹은 생화학적인 신경학적인 문제로 국한되어 지게 된다.

독일의 철학자인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자본론이라는 저서로써 1848년에 프레데릭 엔젤서(Friedrich Engels)와 함께 공산당 선언서를 발표해서 공산주의를 설계한 사람이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둘 다 유태인으로 전자는 유물론과 물질에 집착한 사람으로 후자는 유심론과 섹스에 집착한 사람으로 둘 다 영국에서 사망을 했다. 프로이트의 제자인 비엔나 대학의 사회학박사인 베른필드(Bernfeld)와 러시아의 철학자 유리네프Yurinets)정신분석과 공산주의 이론에 논쟁에서 시작된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철학이 탄생 된다(Ellenberger, 1970). 이후에 러시아의 마르크스 정신분석가인 질카인드(Zalkind)에 의해서 계속된다 특별히 과격파 정신분석가빌헬름 레이크(Wilhelm Reich)에 의해서 1929년에 변증법적인 유물론과 정신분석 그리고 정신분석가인 오토 페니첼(Otto Fenichel)1934년에 변증법적 유물론과 미래의 심리학이 그리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사회학 박사로서 정신분석가가 된 에릭 프롬(Erich From)에 의해서 프로이트-마르스크 철학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등장해서 이후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자리를 잡게 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이론을 썼지만 그의 공산주의 이론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 바로 레닌(Vladimir Lenin) 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를 전 세계에 전파시킨 장본인이다. 그러나 50년의 실험 이후에 공산주의는 밥을 먹고 살기 힘들다 라는 인식 때문에 북한과 쿠바를 제외하고 모든 나라들이 공산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니체와 마르크스의 명성은 20세기 후반에 시들어져 갔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TIME 잡지사가 20세기 백 년(1900-1999)의 기간 동안에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공적을 남기 과학자, 사상가, 철학자 등을 100명을 선발하기 위해서 전 세계의 석학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프로이트가 1위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2위로 설정된 것이 1999, 3, 29, TIME표지 만화로 프로이트에게 카우치에 누어서 정신분석 치료를 받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이 실리게 된다(클릭을 하면 그 TIME의 표지를 볼 수 있다).

다시 모더니즘으로 되돌아가보자, 모더니즘에 대표적인 예술가들 있다. 시인으로 엘리엇(T.S. Eliot)1922의 황무지가 있다. 우리가 자주 입에 달고 다니는 유명한 구절인 “4월은 잔인한 잘, 죽은 땅에도 라일락을 피게 하고 ----" 구절은 황무지의 첫 구절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학부과목으로 미국 문학작품(4학점)을 들었을 때 엘리엇의 황무지의 시은 짧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논평을 한 글들이 영어 사전만큼 엄청난 것에 놀랬다. 소설가로서는 영국의 작가인 로렌스(D.H. Lawrence)차틀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이 있다. 이 소설은 프로이트의 섹스 이론에 영향을 받는 박품으로 영국에서는 50년간 출판 금지당했다. 이태리(1928), 프랑스(1929)에 출판되었으나. 영국, 미국, 호주, 일존, 인도에서는 1960년에 출판을 허용 받게 된다. 2015년에 영화로 상영되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영국의 귀족가문의 남작인 차털리와 결혼을 한 부인이 상류사회의 호화로움 속에 살고 있지만 제 1 차 세계 대전에서 총상으로 성기가 불구가 된 남편에게 섹스의 욕구만족에 불만으로 그 가문에서 하인으로 있는 청년과 밀회를 즐기다가 두 사람은 탈출하게 된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아무리 풍부한 물질과 호화로움도 인간의 기본 본능인 섹스 욕구의 해결이 없다면 삶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화가로서 유명한 피카소(Pablo R. Picasso)가 있다. 그의 대표작품인 1937년에 제 1 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그린 게르니카(Guernica)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이 필요한 작품이다(“높이 3.49m, 7.76m회색, 검은색, 흰색 그림은 폭력과 혼돈으로 인한 심리적인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정강이뼈가 있는 말, 황소, 비명을 지르는 여자, 죽은 아기, 토막 난 군인, 그리고 불꽃이다”: 2022, 7, 16: 위키피아에서 인용).

이제 모더니즘의 시대적 흐름의 대강은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모더니즘에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써 시작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초현실주의과 의식의 흐름의 영향력이 맞물려서 이상의 날개의 이해(자아-의식적인 정신의 이해)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좀 더 상세하게 더 붙이고자 한다.

1848년에 프랑스의 사회학자, 철학자인 콩트(Auguste Comte)가 사회과학이 실험실에서 증명되어 지지 않으면 과학으로 인정할 수 없다 라는 실증주의(positivism)를 천명하게 된다. 이 실증주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치명타를 날리게 된다. 프로이트의 핵심 이론인 오디프스 콤플렉스는 실험실에서 증명되어질 수가 없다. 고로 프로이트의 개인의 머리 속에서 나온 소설로 치부되었다. 1950년대 이후에 등장한 컴퓨터로 프로이트 이론이 한가지씩 실험실에서 증명되어지면서 지금은 과학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Bollas, 1999: 주㈜: 참고).

 프로이트는 비엔나 의과대학 신경학과에서 철저하게 허먼 밴 헤몰츠(Hermann von Helmholtz)의 동료들(독일 물리학회의 전신)에 의해서 과학적인 교육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면서 분석가의 의견이 환자의 자유연상과 뒤엉켜서 혼란하지 않도록 분석가의 마음 속에서 빈 공간(blank screen)를 만들어서 환자의 느낌, 상상, 생각, 감각들이 비치게 하도록 했다. 그리고 관찰과 탐색의 과정을 소상하게 객관적으로 기술해서 똑 같은 기법으로 다른 사람이 그 현상을 기술해서 결과가 똑 같이 나오면 진실로써 인정하도록 했다. 심리학이 주관적인 학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객관화하기 이한 방법이었다(Moore, 1999, 정신분석 안에서 현실의 창조를 보라).

다시 실증주의로 되돌아가보자, 실증주의에 의해서 등장하는 과학화의 물결은 이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별히 스위스 출신의 언어학자인 페르난도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가 프랑스에서 구조주의 언어학을 창설하게 된다. 그의 이론은 구조주의 언어학 혹은 건축주의 언어학(Structuralism)으로 불리게 된다. 언어의 과학화를 선도한 사람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이러한 거대한 표준화된 과학화에 반기를 들고 크고 표준화된 거대한 것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시작된다. 포스트모던작가들은 이원론을 흑백사고 타파를 주장한다 그리고 구성주의의 해체로서 탈구성수의로 콩트가 주장한 사회학이 실험실에서 증명해야 과학으로 인정한다는 이분법에 반대를 했다(Aron, 1996: 주㈜: 참고). 

조그만 시냇물들이 모여서 큰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데 작은 지류들은 무시되어질 수 없다변증법적으로 작은 것들이 모여서 큰 것이 되는 것이다고로 작은 것의 소중함으로 마이크로 미세학을 주장을 한다. 즉 작은 것의 경이로움,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게 된 사람들이 포스터모더니스트 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작가들은 소서사, 소서술(작은 미세한 서술)을 중요시한다(Aron, 1999). 이것을 명쾌하게 설명한 한 개의 구문을 소개한다.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사회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 Francois Lyotard)의 용어로소서사(Petit Narrative)의 개념이다. '거대서사'란 원래 역사주의에서 사용되는 용어로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이해되도록 설명해주는 커다란 '이야기 틀'을 의미한다예를 들면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역사란 각기 다른 형태의 생산이 부단히 반복되는 것이며사회주의적 혁명으로 귀결되는 계급투쟁이 되는데역사에 대한 바로 그러한 설명을 거대서사(Master Narrative)라고 한다

리오타르는 바로 그 거대서사의 개념을 예리하게 비판하며 자신의 이론을 시작하고 있다그는 거대서사란 마치 타자를 허위와 이단으로 배제해온 절대적 진리처럼온갖 작은 서사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무시하는 19세기의 유물이며 전체주의적 횡포라고 비난하며 거대서사 사대의 종언을 선언한다지금은 중심부의 거대서사보다는 주변부로 밀려난 작은 서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바로 그것이 탈중심 이분법적 서열을 해체하는 포스트모던 인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리오타르의 거대서사 이론은 곧 마스터 텍스트(Master Text)와 연결된다포스트모던 문학에서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유일한 원본인 마스터 텍스트보다는 수많은 복사본들의 가치를 인정한다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서문에서 자신의 소설을 삼중번역이라고 한 이유나토머스 핀천이 『제49호 품목의 경매(The Crying of Lot 49)』에서 원본 찾기의 부질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이다. '거대서사'는 궁극적으로 모더니즘 시대의 '절대적 진리'와 상통하는 개념으로서많은 소서사들을 억압하고 보이지 않게 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거대한 대의명분(Grand Cause)'을 앞세워 개인적 상황이나 사적 공간을 소홀히 했던 한국의 1980년대 이념과도 상통한다리오타르는 거대서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그러한 소서사들의 중요성을 인정하며포스트모던 시대는 다양한 소서사들의 목소리들을 경청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김성곤)(주㈜네이버 영어 사전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을 인용).

포스터모던의 영향은 구석진 곳에서 눈에 띄지 않는 소수자들의 문제로 카오스(Chaos)이론에서 지적하는 혼돈의 기본 원리인 나비 효과는 결정론적 비선형 시스템의 한 상태에서 작은 변화가 어떻게 후자의 상태에서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행동에 대한 비유는 브라질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나비가 텍사스에서 토네이도(태풍)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2022, 7, 16: 위키피아 인용) 라는 것처럼 우리 조상들이 한 개의 파도가 만개의 파도를 만들어낸다 라는 일파만파의 명언대로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포스터모던의 여파는 정신의학에서 거대한 대규모 정신병원에 반대, 가부장적인 남성의 사회에 대한 반대로 페미니즘, 이성섹스에 대한 반대로 동성애주의 그리고 거대 정부에 대한 개개인의 인권존중과 소수민족의 인권주의인 1960-1970년의 민권운동(Civil Right Movement)으로 이어지게 된다.

첫 번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신분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스위스 제네바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소쉬르의 언어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는 마구아레트 세게하이(Marguerite Sechehaye)가 소쉬르의 아들로 정신분석가가 된 레이몬드 소쉬르(Raymond de Saussure)의 권유로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학을 배우고 정신분석가가 된다. 그녀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신경증 환자에게 만 국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반대로 정신분열증이 어린시절의 심리적인 상처와 연결되어져 있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정신분석과 스위스의 심리학자 진 피아제(Jean Piaget)의 어린이 인지이론을 접목을 해서 16세의 정신분열증(조현병) 소녀를 치료하면서 그녀의 치료 과정을 기술한 르네(Renee)의 진실한 이야기를 출판하게 된다. 그녀는 연대기적으로 일기형식의 도입해서 정신분열증 치료에 선구적인 개척자가 된다(Stone, 1983: 정신분열증 치료: 정신분석 치료적인 접근을 보라).

그녀의 이론은 이후에 영국의 정신과의사이자 런던의 타비스톡 크리닉(Tavistock Clinic)에서 정신분석과 심리치료를 공부하고 정신분석가로 그리고 실존주의 치료사가 된 라잉(R.D. Laing)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가 쓴 유명한 분열된 자아: 정상과 미침의 한 개의 실존적인 연구를 탄생시키게 된다. 라잉에 의해서 탈정신병원의 시작은 그가 1965년에 런던의 가장 유명한 킹슬리 홀(Kingsley Hall)에서 필라델피아 연합회를 창설하고 환자들과 치료사들이 함께 하는 정신의학 지역사회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2022, 7, 16: 위키피아). 여기에서 탈 정신병원의 운동이 시작된다. 이 영향력이 미국으로 연결되어진다.

이 탈정신병원이 운동 이전에 미국에서는 정신과의사로서 1871년에 유럽의 46개의 정신병원을 방문하고 미국에 돌아온 필레니 에리에(Pliny Earie)매사추세츠 주립 정신병원 원장으로 획기적인 정신병원의 개혁자가 된다 그는 독일에서 배운 교육과 능동치료기법으로 정신병원이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면서 환자들이 규칙적으로 노동을 하도록 해서 개개인에게 통장을 만들어서 돈을 적금하도록 하는 방법을 도입을 해서 이 정신병원과 교육과 노동의 치료기법이 유행하게 된다. 환자들은 퇴원을 해서 농장에 노동자로 일자리를 얻게 되고 자신감을 얻어서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한편으로 주정부는 환자들과 정신병원에 지출되는 재성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거양득의 방법이 유행하게 된다(Minuchin, 1992, 정신병원 안에서 미침을 보라).

그런데 이 시점에서 탈정신병원의 물결이 밀려들게 된다. 환자들의 인권문제와 노동착취 문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농업의 쇠퇴는 산업사회의 등장으로 공장 노동자의 우세로 농장에서 배운 농업의 기술이 공업사회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한몫을 하게 된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대규모의 정신병원이 정신병 환자의 치료가 아니고 감금과 사회적 격리로써 오히려 환자들의 정신병을 악화시킨다는 탈정신병원 운동에 휘둘리게 된다.

더 붙여서 1962년에 케세이(Ken Kesey)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사람(One flew over the cuckoos’nest)1972년에 잭 니콜슨의 주연으로 영화로 등장하면서 탈정신병원에 한몫 하게 된다. 뻐꾸기 둥지는 미국인들의 정신병원의 속어이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사람이 아니고 죽어서 영혼이 정신병원 위로 날아간 사람이라는 뜻이다. 작가인 케세이는 그가 캘리포니아 먼로 팍(Menlo Park)의 정신병원에서 스텝으로 야간 근무를 하면서 직접 환자들의 관찰하고 환자들의 복용약물들을 직업 스스로 복용한 경험들권위주의와 강압적인 인권유린 등을 기록한 내용을 1959년에 탈고하고 1962년에 출판된 책이다. 이 책이 1963년에 뉴욕의 브로드웨이 극장가에서 연극으로 그리고 1972년에 영화로 미국의 대규모 정신병원을 해체하고 환자들을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022, 7, 16, 위키피아).

다시 뻐꾸기 중지위로 날아간 사람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이 이야기의 내용은 맥(잭 니콜슨)이라는 젊은이가 법을 무시하면서 감옥에 갈 것을 두려워해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 바로 정신병원에 들어가면 감옥 대신에 편할 것이다 라는 생각에서 심리검사를 할 때 엉터리로 정신이상의 증세들을 가지고 있다고 거짓 기술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당직 근무 이외에는 스텝들이 모두 집에서 쉰다는 점을 간파하고 병원 안에서 환자들을 선동을 해서 트럭에 환자들을 태우고 야외에서 파티를 열고 춤과 노래로 축제를 벌리게 된다. 저녁에 병원에 귀가해서 조용하게 지나다가 드디어 병원 안에서 토요일과 일요일에 축제와 파티를 열어서 엉망진창이 되어 월요일에 출근한 스텝들이 병원의 일상의 룰이 파괴된 것을 알게 된다 특별히 이 병원의 매니저인 행정 간호사인 레치트(루이스 플레처)의 눈에 가시가 된다.

그녀는 차갑고 냉정하고 권위주의 적인 엄마 간호사로 통하는 인물로 그 병원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힘겨루기는 결국 맥이 감옥에서는 정해진 형기가 끝나면 사회로 복귀할 수 있지만 정신병원에서는 정신과의사가 정상인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다는 서명이 없으면 병원에서 퇴원할 수가 없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었다. 점점 난폭해지고 병원의 룰들이 난장판이 되면서 맥은 강압으로 구속복이 채워지고 침대에 묶이고 주사로 약물 투입으로 반쯤 식물인간이 된다. 맥은 그 병원에서 입원한 인디언 거인에게 자신이 반신불수가 되면 죽여 달라 라는 소망을 이야기하고 맥이 의식불명이 되면서 인디언은 맥의 입을 막아 살해하고 병원의 담을 넘어서 탈출을 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미국 전역에서 정신병원의 실태와 환자들의 인권을 고발한 영화로써 민권운동에 화약고가 되었다. 이 털정신병원의 운동이 미국의 첫 40대 나이의 대통령으로 자신의 여동생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케네디 대통령1963년에 지역사회 정신건강 보호법에 싸인 함으로써 대규모 정신병원이 해체되면서 지역사회 정신건강 치료센터(Community Mental Health Center Construction Acts)의 건립으로 정신건강이 지역사회 치료소로 이전되어진다(Framo, 1982, 결혼과 가족 치료 안에서 탐색들 보라).

이제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초현실주의는 정신병과 정신분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좀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자. 초현실주의는 제 1 차 세계대전으로 등장한 다다이즘(Dadaism)에서 시작된다.

1 차 세계 대전은 유럽의 최대의 강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랜시스 페르난도(Francis Ferdinand)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의 청년에 의해서 암살됨으로써 1914, 6, 28일에 발발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제국은 독일어를 주로 자용했기 때문에 독일이태리동맹국으로 그리고 프랑스, 영국, 러시아연합국으로 주축이 된 전쟁으로 나머지 전세계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서 양쪽에 합류함으로써 전 세계의 전쟁으로 4년 동안 9백만명의 군인들이 죽고 5백만명의 민간이 들이 희생된 세계대전으로 1918, 11, 11, 베르사유스 조약으로 끝나게 된다(2022, 7, 17: 위키피아). 이 전쟁에 1917, 4월에 미국이 개입해 승리를 이끌어내면서 우르르 윌슨(Woodrow Wilson)대통령이 공포한 민족의 자결주의는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쳐서 1919 3, 1 전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인 삼일절과 연결되어져 있다는 것은 국사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1 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한 지식인들의 비관과 허무주의와 전쟁의 참사에서 미래를 상실한 젊은 지식인들 중에 한 사람인 트리스탄 트자라(Tristan Tzara)가 루마니아의 군의관 앞에서 그의 질문들에 무조건 (yes), (yes), (yes)로 대답을 한다. 마치 정신병자처럼 행동을 한 것이 유형이 되어 그를 중심으로 다다이즘(Dadaism)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 대부분은 탈영병들로 예술가들, 시인들, 음악가들이 모여서 스위스의 쥬리히의 오래된 골목에서 모임을 가지게 된다. 그들을 다다이스트로 불리게 된다. 이들 중에 한 사람인 리처드 후샌벡(Richard Hulsenbeck)은 이후에 정신분석을 공부해서 뉴욕에서 정신분석가가 된 사람이다(Ellenberger, 1970). 그들의 모임은 쥬리히로부터 프랑스로 이동이 된다. 이들 멤버들 중에서 정신과의사인 앙드레 브레톤(Andre Breton)에 의해서 1920년에 초현실주의의 모임이 시작된다.

그가 1 차 세계대전 때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이상한 행동을 하는 한 젊은 군인을 발견하게 된다. 1 차 세계 대전은 특징이 참호를 파고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소총과 박격포를 쏘아 대는 참호전이 특징이었다. 박격포가 날아오는 와중에 한 젊은 군인이 참호 밖으로 뛰어나가서 교통정리를 하는 것처럼 날아오는 포탄이 이곳에 떨어져라, 저곳에 떨어져라 하고 지시를 하는 젊은이를 발견하고 그의 정신을 연구하기 위해서 브레톤이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는 이후에 정신과 의사를 포기하고 이후 30년동안 초현실주의를 리더 하게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특별히 그 당시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유행을 해서 그들이 무의식과 몽유병, 최면과 정신이상에 관심을 가졌다. 정신분석가인 오토 랭크(Otto Rank)는 무의식은 창의성의 보물창고라고 했다. 인간의 내면의 신비적인 무의식의 영역에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알려지지 않는 내면의 심리적인 에너지의 힘으로부터 예술의 창의성이 나온다 라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꿈의 분석을 통해서 어두운 내면의 세계에 접근을 한다. 여기에서 꿈과 가장 가까운 것이 최면과 몽유병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한마디로 미침에 매혹되어 의식적으로 몽유병에 들어가서 마음의 창의성에 접근하는 것이다. 브레톤을 중심으로 약 30여명이 모여서 그들 중에 10명은 최면과 몽유병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정신병을 의식적으로 모방하게 된다. 여기에 자동 글쓰기(automatic writing)가 첨가된다. 최면상태에서 나오는 대로 글을 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인들이 신의 목소리로 알려진 방언으로 알려진 것을 글로 쓰는 것이 바로 자동 글쓰기이다.

정신병리학은 증세의 원천을 무의식의 상처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동시에 초현실주의 예술은 그 기원을 무의식적인 청의성의 원천에서 찾는다. 공통점이 무의식을 창의성의 원천으로 본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초현실주의는 스스로 신비를 만들어낸다 의식적으로 영감을 만들어서 지배를 한다, 대신에 정신병 환자는 이 영감에 압도되어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신비함 속에서 포로가 되어 컨트롤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Ellenberger, 1970, 무의식의 발견: 역동적정신의학의 진화와 역사를 보라).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상의 날개는 초현실주의의 작품이 아니다. 이상의 오감도가 초현실주의작품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오감도는 원래 조감도를 까마귀의 오자로 바꿨다 라는 논평이 있다. “오감도는 1934, 7, 24 -8,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작품으로 원래는 30회를 목표로 연재를 시작했으나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더 이상 연재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15회로 중단을 했다. 이때 조선중앙의 학예부장으로 오감도의 연재를 기획을 했던 9인회의 멤버인 이태준이 독자들의 항의 때문에 사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15회까지 밀고 나갔지만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고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라는 일화가 있다((위키백과의 글에서 인용).

 오감도1연은 13인의 아이들이 도로를 질주함, 2연-3연은 13인의 아이들이 모두 무섭다고 , 4연은 이이들의 상태는 상관이 없음, 5연아이들이 도도를 질주하지 않아도 좋음(위키백과에서 인용). 오감도의 감상은 초현실주의의 특징을 기술했으니 작품의 이해와 감상은 생략하고자 한다.

 이제 그 다음 차례인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에 대해서 이야기의 방향을 돌아가보자. 의식의 흐름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사람은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인 윌리엄 제임즈(William James)이다. 그는 하버드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였다 그러나 의사가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10여년 동안 방황을 하면서 정신증에 가까웠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정신분석가인 에릭슨(Erikson)이 그의 저서인 주체성의 위기에서 상세하게 미국인 윌리엄 제임즈와 영국인 조지 버나드 쇼(G.B. Shaw)를 다루고 있다. 에릭슨은 13세-19세의 청소년기를 주체성 형성 (vs) 주체성 혼란으로 설명을 한다. 이 시기에 자아가 내 몸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삶의 방향을 내가 잡고 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실패하면 주체성 혼란으로 방황하게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Erikson, 1967, 어린이와 사회를 보라). 그는 1968년에 쓴 주체성 위기에서 그는 주체성이 모든 젊은이들이 13-19세에 형성되는 것은 아니고 어떤 사람은 10년 동안 혹은 수십년 동안 방황한 이후에 주체성이 형성되는 사람들로 있다 이들을 주체성 유예, 주체성 잠복기라고 부른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윌리엄 제임즈죠지 버나드 쇼이다. 제임즈는 10년 동안에 그리고 조지 버나드 쇼는 60년 동안 방황을 한 사람으로 나이가 70대에 들어서서 명성을 얻게 된다. 쇼는 하루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늘 글을 써서 모았다 그것이 70세가 되면서 섹스피어 이래 가장 유머적이고 사회비판적인 극작품을 쓴 작가로 그의 작품의 공연을 본 사람들이 공연이 끝나고 나서 돌아보면서 그것이 바로 그들 자신들을 비판한 내용임을 알게 된다는 일화들이 있다.

다시 윌리엄 제임즈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그는 10년 동안 방황을 했다. 제임즈의 아버지는 낙천적이어서 아들의 방황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는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강에서 낚시를 하면서 그리고 영국의 신경학자로 최초로 자아(self)라는 말을 사용한 존 휴글링 잭슨(Jhon Hughlings Jackson)을 만나서 서로의 유사점을 토론을 했다(Mearles, 2005: 주㈜: 참고). 그리고 프로이트를 만나서 의견을 나누고 프랑스의 가르코트(Charcot)의 최면학교를 방문하고 그의 강연회에 참가를 했다. 그는 최면을 배워서 환자들을 최면치료를 했다. 1870년에 드디어 그가 쓴 심리학의 원리가 출판되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세계적인 심리학자가 된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미국에서 최초로 심리학 강의를 했다.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러나 그는 심리학 교수는 아니고 철학교수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심리학 교수의 1호는 제임즈 카텔(James Cattell)이다. 그는 독일의 심리과학의 창설자인 분트(Wundt) 밑에서 심리학 박사가 되어 미국에 돌아와서 1889년에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미국에서 제 1호 심리학 교수가 된다.

 다시 제임즈로 되돌아가 보자 제임즈는 최초로 인간의 내면의 관찰을 통해서 의식은 흐름이다 라고 발표를 했다. 인간의 의식은 중지되어 지지 않는다생각들이 흘러 들어온다. 우리가 잠을 잘 때도 무의식은 깨어나 있다. 꿈을 꾸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의식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지고 중지되어 지지 않는다, 항상 흐름의 연속이다 라는 것을 밝혀낸 심리학자이다. 그의 의식의 흐름은 제임즈의 동생인 소설가 헨리 제임즈(Henry James)의심의 흐림의 기법을 소설에 도입하게 된다. 의식의 흐름의 기법으로 작품을 쓴 유명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소설가 제임즈 조이스(James Joyce)유리시즈(Ulysses)이다 그의 유리시즈을 읽고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단편소설로 쓴 작가영국의 여성작가인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 1, 25-1941, 3, 28)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7형제와 어머니의 8형제의 혼합 가족에서 태어난다 그녀가 13살에 엄마의 죽음으로 심각한 우울증과 조증의 반복으로 정신병으로 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고 2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작가로서 1925년에 그녀가 쓴 돌로웨이(Mrs. Dalloway)부인은 정신분석 단골로 자주 등장한다(Shengold, 1991. 영혼의 살인을 보라). 그녀는 여성들이 자유로웠던 런던 대학에서 고전과 역사를 전공해서 최초의 페미니스트 운동의 아버지가 된다. 그녀는 결혼 후에 남편과 함께 호가리스(Hogarth Press), 출판사를 경영하게 된다 이 호가리스 출판사는 영국에서 번역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논문의 출판을 독점하게 된다. 돌로웨이 부인의 출판 이후에 16년 후에 그녀는 스스로 주머니에 돌을 각득 채우고 1941년에 59세로 자살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여기에서 단편 작품, 51세의 돌로웨이 부인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이 의식의 흐름을 명료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돌로웨이 부인의 단편작품은 그 주인공의 하루만의 일상을 의식의 흐름의 기법으로 쓴 것이다. 돌로웨이 부인은 저녁에 파티 준비를 위해서 시장을 보러 간다, 시간이 앞으로 뒤로 흘러간다 수많은 뒤엉킨 개인의 일상의 경험들이 서술로 나타난다 그녀는 늘 하는 중, 상류층 영국의 부인들이 늘 파티와 사교에 열을 올리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그녀는 시장에 가면서 옛날 결혼 시점에서 A씨를 선택하지 않고 현재의 남편 B씨를 선택한 것을 회상을 한다(의식의 흐름이 과거 회상으로 흘러간다) 그녀는 A씨는 우유부단하고 자아가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남편을 선택한 과거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남편은 지금 사업에 몰두에서 늘 옆에 가까이 없었다는 것을 회상을 한다 A씨는 동인도에서 무역을 하다가 실패해서 지금은 그녀의 인근에 살고 있다. 오늘 저녁에 파티에 나올 것이다.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이 있다. 그는 1 차 세계 대전에 참전 용사로써 이태리 출신의 신경증 부인과 함께 노년에 인근의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동료인 친구를 구하지 못해서 그가 전사한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과거속에서 살고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가진 노인이다.

부부의 과거 회상을 인근애서 지쳐보는 사람이 바로 A씨이다.

다시 그녀는 시장을 보고 되돌아오면서 다시 그녀가 결혼 전에 키스를 했든 친구 C양을 회상을 한다 그녀와 키스는 가장 강력하고 섹시한 최고의 키스여다(레즈비언) 그 여자 친구는 결혼을 해서 4명의 자녀들을 가지고 있다 그녀 역시 저녁 파티에 참가할 것이다.

여기에 한 정신과의사가 그 노년의 외상 후 스트레스를 가진 재향군인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이다 그는 그 노인에게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충격에 그 노인이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자살을 한다. 저녁 파티에서 그 노인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여기에서 핵심은 돌로웨이 부인은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이야기가 과거의 회상 혹은 현재의 자아로 왔다 갔다 이동을 하는 의심의 흐름을 보어 주고 있다 것이 핵심이다.

두 번째 의식의 흐름의 기법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이 미국의 남부의 작가인 윌리엄 포거너(William Faulkner)이다. 그의 작품 음양과 분노(The Sound and Fury)1929년의 작품으로 1949년에 노벨상을 받게 된다. 그는 남부의 미시시피, 요크나파타파의 한 과거 남부의 귀족가문인 켐프슨 가문(Compson Family)재정적 파괴, 종교적인 믿음의 상실로 인한 붕괴과정30년 기간 동안에 4개의 분리된 구분으로 서술하고 있다.

1 번째는 1928, 4, 7일에 33세의 저능아 벤지를 그리고 있다. 2번째는 1910, 6, 2일에 벤지의 형님으로 가장 똑똑한 하버드 지망생이지만 여동생의 난잡한 성관계 때문에 고민하다가 그녀를 보호해주지 못한 오빠의 책임으로 자살하게 된다. 3번째는 1928, 4, 6일로 벤지의 냉소적인 남동생을 그리고 있다. 4 번째는 1928, 4, 8일로 자신감 있고 당당한 흑인 하인을 그리고 있다(2022, 7, 17 위키피아).

위의 두개의 작품을 통해서 의식의 흐름은 하루 동안에 의식이 과거 회상에서 현재와 왔다 갔다 라는 끊임없이 의식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것을 소설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상의 날개를 이해하는데 충분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들의 예술 작품은 그들의 삶의 역사와 그들의 시대적 영향력의 산물이 아닌가? 그들의 작품은 바로 그 작가의 삶의 경험이 축적된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상의 삶의 역사를 되돌아가서 먼저 이상의 생애를 그리고 이상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 그리고 이상의 성격과 이상의 작품의 특징을 소상하게 서술해 보기로 한다.

이상의 생애:

인터넷에서 소개되어진 이상의 자료들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2022,7,21: 위키백과)

 

한일합방의 해에 서울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하는 아버지와 고아 출신 엄마와 결혼으로 출생, 어려운 형편 때문에2살 때 부모와 헤어져 살다가 큰 아버지 집에 양자로 입양- 큰 저택에서 고종 때 증조부가 정 3품의 벼슬 -강릉 김씨의 증손자 큰 아버지는 총독부의 기술관리 아버지도 총독부에서 기술관리로 일하다 손가락이 잘림 –> 이발소를 차렸으나 잘 되지 않았다. 술집에서 만난 기생 금홍과 제비 다방을 개업 실패 후 69 다방개업 실패 이화여전 출신 문학작가 변동림과 1936년에 결혼 19372월에 동경에 건너갔다고 불량 조선인으로 체포후에 1달만에 석방된 후에 동경제대대학 병원에 입원후에 4, 17일에 부인 옆에서 사망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2022, 7, 23: 다음백과)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본관은 강릉(江陵). 서울 출신. 아버지는 김연창(金演昌)이며, 어머니는 박세창(朴世昌)으로 2 1녀 중 장남이다. 3세 때부터 부모 슬하를 떠나 통인동 본가 큰아버지 김연필(金演弼)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를 거쳐 1926년에 동광학교(東光學校: 뒤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병합).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 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각혈로 기사의 직을 버리고 황해도 백천(白川) 온천에 요양을 갔다가 돌아온 뒤에 종로 다상 제비를 차려 경형을 하였다. 이 무렵에 이곳에서 이태준(李泰俊), 박태원(朴泰遠), 김기림(金起林), 윤태영(尹泰榮), 조용만(趙容萬)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小說家仇甫氏) 1(一日)」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카페 ‘쓰루[], 다방 ‘무기[]’ 등을 개업하였으나 경영에 실패하고 1936년 구본웅(具本雄)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彰文社)에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퇴사하였다.

그해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 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 활동은 1930년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 12일」을 연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시 요약해보자. 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이상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통해서 이상의 성격의 형성과정을 유추해보기로 한다.

이상은 강원도 강릉에서 강릉 김씨의 후손으로 증조부가 고종 때 정 3품의 벼슬을 한 양반집 가문의 후손으로 한일합병이 일어난 1910년에 2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혜경이다. 아버지는 고아인 어머니와 결혼을 했다. 2살(혹은 3) 때 큰 아버지집으로 양자로 가게 된다(과거에는 아들이 없는 경우에 대를 이어아기 위해서 형제들의 자녀를 입양). 이상은 경성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자로 근무를 했다. 큰아버지는 조선 총독부에서 근무를 했고 아버지 역시 총독부에서 일하지가 손가락이 잘려서 그만두고 이발소를 경영했으나 실패를 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어머니가 고아였다 그리고 형제가 213명이었다. 한일합병의 시점에서 의사들이 드물었고 그리고 산하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7-10명정도가 보통이었다. 이상의 가장 친한 친구인 김유정은 26녀로 8남매의 형제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이상이 2(3) 때 큰아버지 집에 양자로 같기 때문에 엄마를 상실하게 된다. 엄마가 고아 출신, 형제가 3명 그리고 2살 때 입양(엄마 상실)정신분석에서 치명적인 심리적인 상처로 본다.

엄마는 이미 상처를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어린시절에 형제들이 적었기 때문에 대인관계에서 친밀감의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오늘 날 부모님의 맞벌이와 자녀가 1-2명으로 유아방, 영아원에서 맡겨지는 것 등이 유사)(아래의 대인공포증을 보라).

이상이 건축학과를 선택한 것은 세심하고 치밀하고 빈틈이 없는 성격으로 조선건축 표지 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된 인재였다. 졸업하는 해인 1929년에 총독부에서 기사로 근무하다 1933년에 떠난 것으로 보아서 4년 동안 근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 그는 기행 금홍과 제비”, “69”다방을 경영했으나 실패를 했다. 69다방은 섹스의 체에서 그리고 제비 다방은 제비족이라는 연상으로 섹스와 연결되어진다(그는 분명히 프로이트의 섹스 이론과 정신분석을 꿰뚫고 있었다: 아래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보라).

 특별히 그는 사업에서 실패 후에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창문사에 취업했으나 얼마후에 그만두었다 라는 말로 보아서 이상은 조선총독부에 근무 시절을 제외하면 그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질 수가 없었다. 고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는 이화 여전 출신의 문인인 변동림과 결혼을 했다. 결혼 기간을 유추해보면 최소 1년에서 최대 2년정도의 기간으로 자녀가 없었다는 점이다. 보통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결혼 후에 1년 정도가 되면 자녀들이 출생을 한다 그런데 이상은 자녀가 없었다. 그 시점에서는 남녀가 99%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는 이상은 경성공업고등학교 졸업이고 부인은 이화여전 출신의 문인으로 부인이 학력이 높다는 점이다. 물론 두 사람은 우리나라의 최고의 지식인으로 서로의 인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이 경제력이 없다는 것은 총독부 퇴사인 1933에서 사망한 1937년까지 4년 동안에 다방들의 경영에서 실패, 창문사에서 일자리를 구했으나 그만두었다 라는 것으로 보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렸다 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남자의 경제적인 능력이다 경제력은 남자의 가족부양 능력을 말한다, 경제력이 없으면 결혼을 하기 어렵다 오늘날 청년들의 평균경혼 연령이 10년마다 1살씩 뒤로 밀려서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남자가 33세 여자가 31세의 평균결혼 연령으로 나타나 있다. 결혼이 늦어지는 것은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 어려가지 요소들 중에서 한가지로 꼽힌다.

정신분석에서는 남자의 자신감 = 경제적 능력 = 섹스로 본다. 이상은 경제적으로 무능력함, 학력이 부인이 더 높다, 결혼 후에 자녀가 없었다 등으로 미뤄볼 때 이상은 자위행위는 혼자가 할 수 있었겠지만 발기부전의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결혼은 남성은 자신보다 한 수 아래의 여성을 그리고 여성은 자신보다 한 수 위의 남성을 선택한다. 이것은 남편이 부인에 대한 자신감을 그리고 여성은 자신보다 한 수 위의 남편을 선택함으로써 좋은 후손을 얻겠다는 진화론이 깔려 있다. 그런데 발기부전의 남자들의 특징이 자신보다 한 수 위의 부인을 위해서 부인에게 잘 해주어야 하겠다는 심리적인 부담감이 발기부전의 원인이 경우가 대부분이다. 잘해야 한다라는 심리적인 긴장감은 발기에 적이다. 발기는 부교감신경이 담당하게 된다. 그런데 김장감과 불안과 두려움이 높은 경우에는 교감 신경이 작동하기 때문에 발기가 안된다 리는 것은 본인들을 모른다. 페니스의 발기는 긴장이 풀린 긴장의 이완의 상황에서 그리고 발사는 교감신경 조직이 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들은 바로 그의 작품이 날개 안에서 소상하게 세부적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

 또 한가지는 그는 대인관계에서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 라는 점이다. 그가 여러 개의 직업들 즉 총독부 근무, 다방경영 그리고 취업 등에서 오래 견디지 못한 것으로 보아서 인간관계에 상당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은 자신의 성격이 괴팍하고 까다롭고 주도면밀 하다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명으로 이상(李箱)이라는 이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날개라는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이상한 작가, 이상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이상의 사진을 보면 수염이 더부룩하고 마른 체형으로 보인다. 그는 다른 사진에서는 넥타이를 매고 신사복의 모습이었으나 얼굴에 살이 없는 광대뼈가 나오고 볼이 파인 모습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세밀한 주도면밀함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의 소설 날개에서 주인공의 자아-의식적인 면들로 소상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는 이상이 일본에 갔을 때 사상불순자로 감금되었다 풀려났다. 이상은 작품이나 그의 글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윤동주는 시로써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 고로 풀려났지만 그의 인상이 까다롭고 경직되고 괴짜로 보였기 때문에 사상이 불순한 사람으로 오인되어진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이상의 대인관계를 좀 더 소상하게 기술해보자 그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는 유일하게 김유정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김유정에 대해서 조금 더 소상한 설명이 필요하다. 김유정은 10살 때 부모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특별히 엄마의 정을 그리워했다 그는 늘 엄마 사진을 가슴 속에 품고 다니면서 동료들에게 우리 엄마가 예쁘지! 라고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그 시점에서 예술가 즉 작가, 미술가, 음각들 등등 이들이 그들의 전문직에서 밥 먹고 살기는 어려웠다. 김유정은 누나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누나는 노동자들의 밥을 해주는 일을 하면서 최고의 지성인으로써 놀고 있는 김유성에게 제발 일자리를 얻어서 밥벌이를 하라고 애원을 했을 때 김유정이 그러면 일본에서 노동이라도 헤 볼까? 라고 말을 했을 때 누나는 김유정이 건강이 좋지 않다 라는 것을 알고 사과를 하고 서로 사죄하고 타협을 했다(2022, 7, 24: 위키백과).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김유정이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을 때 명월관의 기생이자 남도창을 하는 박녹주에게 연애 편지를 보냈다. 수많은 연애 편지들을 전달되었으나 박녹주는 잃어보지 않고 쓰레기 통에 내다버렸다. 소식이 없게 되자 직접 찾아가서 애원, 위협, 협박을 했으나 나는 이미 결혼을 했으니 학생은 공부나 열심히 공부나 하라라는 냉대를 받고 결국은 포기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2022, 7, 24: 위키백과). 이것은 김유정틀림없이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는 마리아 릴게(Maria Rilke)(1875, 12, 4-1926, 12, 29)러시아 출신의 작가, 여행가, 수필가, 철학자, 역사가이자 정신분석가로써 프로이트의 여성 제자들 중에서 5인방의 한 사람인 루 살로메(Rou Andreas-Salome)열애사건을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릴게는 21(김유정은 19)로써 37세였던 살로매(박녹주는 32)에게 목을 매게 된다 그런데 살로매는 16살 아래의 릴게를 가부하지 않고 그를 엄마처럼 따뜻하게 수용해주고 러시아어를 가르쳐주어서 릴게가 톨스토이, 토스또예프스기 등의 러시아 문인들의 작품들을 읽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결혼을 제회하고 릴게를 아들처럼 따뜻하게 수용해주어서 릴게는 그녀를 나의 뮤즈(muse) 즉 사랑의 수호신으로 가슴에 새기고 그녀에 대한 수많은 사랑의 편지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릴게외 살로메의 플라톤적인 사랑은 여러 나라 말로써 번역되어져 있다(2022, 7, 24: 위키피아). 우리나라의 번역본으로 살모메의 사랑과 생애부재로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1997. 2 5, 피터(H.F. 패터스 작김희정 옮김관음출판사)가 있다: 2022, 3, 5: 다음 백과 소개).

김유정이 죽고나서 박녹주가 애정문제에 뒤엉켜서 자살 미수 사건이 터졌을 때 9인회의 한 멤버인 안회남이 그녀를 찾아가서 김유정이 죽은 것은 당신 때문이요, 그가 죽을 때 벽에 당신을 사랑한다 라는 혈서가 벽에 붙어 있었소라고 항의를 했을 했다. 후일에 그녀는 회고록에서 그가 이름난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에게 따뜻하게 위로의 말을 해줄 것을 그리고 그 죄과로 내가 평생 자식이 없는 것이 틀림이 없다 라고 후회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022, 7, 24: 나무위키).

김유정과 이상, 두 사람은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을 하려고 했으나 김유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상은 병마에 희생되는 것보다 스스로 자살을 통해서 병에 정복당하지 않는 천재의 용기를 보여주자고 김유정을 설득한 내용이 그의 작품 설화(그의 자서전 적인 소설)에서 소개되어진다(2022, 7, 23: 나무위키). 김유성은 이상 보다 2살이 많다(1908년에 출생). 김유정은 8남매(26) 7번째였다. 김유정의 부모님이 둘 다 10살 때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결혼한 누나집들로 전전했다. 김유정은 연희전문 문과를 중퇴였다. 이상과 김유정은 둘 다 폐결핵을 가지고 있었다. 김유정이 죽고 나서 19일 뒤에 이상이 폐결핵으로 사망을 했다 두 사람은 동료 문인들에 의해서 같은 공동 묘시에 묻혔다(2022, 7, 23: 위키백과).

 폐결핵은 공기로 전염되는 질병으로 특별히 도시의 밀집한 빈민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이상과 김유정이 살던 그 시대인 1929- 1939년은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의 시점으로 전 세계가 경제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폐결핵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그 시대에는 치료가 어렵고 약물이 없었다(2022, 7, 23: 위키피아).

유일한 치료는 조용한 요양원에서 영양공급을 통한 휴식 치료로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이상과 김유정의 비슷한 시점에서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인 앙드레 그린(Andre Green)는 유태인으로 아버지가 상당한 재산가였다. 그의 누나가 폐결핵에 걸려서 그의 가족이 살고 있던 이집트에서 누나를 프랑스의 요양원에 입원을 시키고 4년간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의 재산이 기울어져서 정작 그가 대학에 진학 때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기술하고 있다(Green, 1999: 주㈜: 참고).

이제 이상의 성장과정의 사회, 문화적 환경으로 초점을 돌려보자. 이상과 김유정은 일본의 식민지 시절에 태어났기 때문에 조선어 즉 우리말을 금지당 했다. 일본어가 모국어였다 고로 일본어에 능통했다.

여기에서 좀더 설명이 필요하다. 프로이트가 최면학으로 히스테리아 환자를 치료하다가 최면을 포기하고 순수한 정신분석 이론으로 전향하게 되면서 제일 먼저 들고 나온 것이 리비도(libido) 이론으로 오디프스 콤플렉스이다. 이 이론은 1905년에 섹스에 대한 3개의 논문을 출판하면서 시작된다. 그 때 프로이트는 이 책을 1000부를 출판했으나 매진에는 4년이 걸렸다. 그리고 10년 후에 1915년에 두 번째 출판에서는 즉각 매진이었다. 그리고 6개국 언어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프로이트의 생애에 6번이나 반복해서 출판되어지게 된다. 1915년 두 번째 출판 때 독일어로 쓴 그 책은 영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헝가리어, 체코어, 일본어 6개국으로 번역되었다(Ernest Jones, 1957,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을 보라).

일본은 이미 명치유신으로 서양의 문물을 빨리 도입했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가장 먼저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었다 라는 것은 이미 국사에서 배웠다.

그런데 일본의 지식인인 야베(Yabe)가 프로이트의 전집 40권을 번역을 시작해서 제 7 번째로 번역한 책들을 가지고 19304월에 프로이트를 방문을 하고 그 일본어 번역을 한 책들을 선물을 했다. 프로이트는 야베의 해박한 정신분석의 지식에 깜짝 놀랬다 라고 옆에서 지켜보던 존(Jones)이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19348월에 스위스의 루세르네(Lucerne)에서 열린 국제 정신분석학 총회에서 4개의 국가들이 정신분석 학회에 가입하게 된다.

첫 번째가 보스턴 정신분석학회이다. 미국에서는 1911년에 뉴욕에서 뉴욕정신분석 학회가 아브라함 브릴(Abraham Brill)에 의해서 처음으로 창립된다. 20년 후에 1930년에 프랜츠 알렉산더(Franz Alexander)에 의해서 시카고 정신분석학회가 그리고 1년 후인 1931년에 하버드 대학의 심리치료 센터의 소장인 헨리 머리(Henry Murry)(TAT: 주제 통각 검자지를 만든 장본인)와 프렌츠 알렉산더가 함께 공동으로 보스턴 정신분석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3년 후에 보스턴이 국제정신분석학교에 가입한다(미국은 그 당시 도시별로 정신분석학회를 운영),

두 번째가 네덜란드 정신분석 학회 그리고 세 번째가 팔레스타인 정신분석학회이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이전으로 프로이트의 제 1세대 정신분석가, 5명이 프로이트를 지키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게 된다 그 5명 중의 한 사람이 막스 에팅곤(Max Eitingon)이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정신분석학교를 1934년에 세우고 즉각 국제 정신분석학교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네 번째로 바로 일본 정신분석학회국제 정신분석학회에 가입하게 된다(Ernest Jones: 1957: 주㈜: 참고) 그 때 일본인들은 정신분석의 저서들을 번역해서 지식인들이 공부를 하고 치료에 응용을 하고 있었다 라는 점이다.

더 붙여서 필자가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인 앙드레 그린(Andre Green)70회 기념으로 그의 이론을 인용한 미국과 영국의 정신분석가들이 그린(Green)죽은 엄마 증후군(1983)에 영향을 받은 정신분석 치료 기법으로 쓴 글들을 모은 책으로 죽은 엄마(1999)의 저서에서 1930년대 일본 헤이사쿠 코사와(Heisaki Kosawa) 사람비엔나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교를 졸업하고 리차드 스텔라(Richard Sterba)에 의해서 분석을 받고 그리고 퍄울 페드론(Paul Federn)에 의해서 슈퍼비전을 받고 나서 일본으로 돌아와서 정신분석을 치료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Green, 1999에서2 , 영국의 정신분석가인 Michael Parsons이 쓴 심리적 현실, 부정, 그리고 그 분석적인 세트를 보라)’

우리나라는 필자가 미국에서 귀국해서 대학에서 심리학 강의를 하고 있던 기간에(2003년의 시점) 어느 날 신문의 아래부분의 광고에서 한국영어영문학회의 도움으로 프로이트의 전집이 한국어로 번역이 완료되었다 라는 광보를 본 것이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의 한국영어영문학회는 1952년에 7명의 영문학자들이 처음으로 한국 영어영문학회를 조직하게 된다. 영어로 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영문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일본이 1934년에 번역이 완료되어 출판된 것을 유추해보면 약 70년 늦게 정신분석의 한글판 번역이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인 상황으로 비춰보면 이상은 정신분석을 꿰뚫고 있었다. 이상의 글에서 정신분열증이라는 낱말이 눈에 띄는 것이 그 증거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더 붙여서 그는 초현실주의가 무엇인가? 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인식을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감도이다. 그 다음에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 기법을 사용해서 날개 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당시 9 인회 멤버들은 모더니즘의 연구를 통해서 프로이트의 섹스의 3개의 논문을 확실하게 잘 알고 있었다. 특별히 이상이 쓴 날개는 섹스 이야기들이 작품에 녹아서 스며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김유정은 그의 작품들 속에서 매춘을 하는 농촌 부인들과 동백꽃의 작품에서 점순이가 너의 아버지가 고자라지—---라는 말은 발기가 되지 않는 사람의 속어이다. 그리고 보리밭에서 정사를 하다가 발기가 되지 않는 파트너를 보고 이 배냇병신아!”라고 욕설을 한다 타고날 때부터 발기가 안되는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이효석의 작품인 메밀꽃 필 무렵에서 장돌뱅이(시골에서 5일장이 서면 장사꾼들의 짊 들을 옮겨다 주는 마차꾼) 동이의 마차를 타고 가는 노인, 허생원은 동이와 대화를 통해서 그가 젊은 시절에 물레 방아간에서 성서방의 처녀와 섹스를 나눴고 사생아를 낳은 그 처녀는 집에서 쫓겨나서 지금 동이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때 물레방아 간에서 정사의 결과로 동이가 태어난 것을 알게 된다. 동이의 왼손잡이의 말채찍에서 자신도 역시 왼손잡이로 동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되지만 그 사실을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고 아들과 아버지의 이심전심이 전해지는 달빛에 비친 메밀 꽃밭을 지나가는 밤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효석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법학과 문학과)에 영문과를 졸업하고 경성농업고교에서 교사를 하다가 이후에 평양의 숭실대학교에서 영문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들을 썼다. 이효석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병으로 고생하지 않고 가장 행복한 글을 썼던 사람으로 보인다(2022, 7, 23: 위키백과).

이 시대는 3.1 운동 직후였기 때문에 섹스의 담론이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그들의 작품들로 미루어 볼 때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으로 섹스의 담론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살아서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제 간단하게 이상의 날개의 작품을 간단하게 들여다보고 전체의 이야기를 대강 살펴보기로 하자.

이상의 첫 번째 문장의 박제가 된 천재를 아세요!”라는 말이 나온다. 박제가 된 인간이라는 말은 첫 문장의 시작에서 서론처럼 등장한다. 이 낱말에 날개의 전체 내용이 숨겨져 있다. 박제는 죽은 독물을 내장을 꺼내고 알코올로써 처리를 해서 겉모습은 실물의 살아 있는 모습이지만 속은 비어 있는 죽은 동물이 아닌가? 이것은 바로 정신분석에서 자아의 고착(fixation)을 의미한다. 고착이라는 것은 자아의 성장이 중지된 것을 말한다. 자아가 상처를 받아서 그 시점에서 자람, 성장을 중지한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전문 용어이다.

우리의 몸은 음식을 먹고 성장을 한다. 몸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장을 한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즉 자아도 자란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것은 자아 즉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치료자는 심리치료를 하면서 고착이라는 용어를 환자들에게 많이 사용을 한다. 치료자가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치료자는 환자 대신에 손님으로 부른다) 손님은 자아가 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알고 있다는 사람은 드물다. 이 때 예를 들어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초등학교 저학년의 행동을 할 때 우리가 보통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라고 물어보면 미성숙하다 라고 부릅니다 라고 대답을 한다. 나이에 걸맞게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는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라는 것은 대부분이 알고 있다.

미성숙한 사람은 나이는 먹었지만 행동을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미성숙하다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미성숙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 미성숙한 행동의 시점에서 자아가 자라나지 않고 고착이 된 것이다. 고착이라는 낱말은 프로이트가 생물학에서 따온 말이다. 동물들 뿐만 아니고 식물들로 고착된 식물들이 많다. 나무나 식물들이 물을 너무 많이 주거나 혹은 물을 너무 적게 주었을 때 잘 자리지 못하고 시들어지거나, 노랗게 자라나지 않고 쪼그라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고착이라고 부른다.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은 나이는 26세이지만 그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3-5세의 어린이들의 행동과 사고와 유사하다. 이상은 이것을 박제라는 표현으로 그가 묘사하고 있다. 그의 주인공은 결혼을 한 26세이지만 행동과 생각이 미성숙해서 과거의 3-5세의 나이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를 할 것이라는 말을 박제하는 말로써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능이 3-5세라는 말은 아니고 천재라는 말을 더 붙임으로써 사고와 생각과 자아를 관찰하는 자아-의식은 성인의 수준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의식은 자아 관찰을 말한다. 내 자아의 행정 기능인 ego가 한쪽에서 내 자아(self)를 잘하고 있는가? 못하고 있는가? 를 스스로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3-5세의 어린이는 실제로 추상적인 이러한 관찰을 할 수가 없다 고로 박제가 된 전재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여러 번 밝혔다.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이야기를 과거 회상의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의 일은 바로 주인공이 부인에게 마지막 은화를 손에 쥐어 주고 집을 나와서 경성역(서울역으로 향한다). 경성역은 이전에 그가 늘 갔는 곳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과 물건들이 내리고 타는 곳으로 주인공 한데는 가장 번화한 곳으로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그는 미스코시(백화점) 옥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에 그 순간에 과거에 날개가 돋아났던 곳에서 날개가 돋아남을 느낀다.

여기에서 날개가 돋는다 라는 말은 정신분석에서 유아기의 0-1세 사이에 나르시즘이 최고가 되는 지점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어린이가 원하는 것을 부모님이 모두 다 즉각적으로 욕구 충족을 시켜 주기 때문에 어린이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전지전능함으로 느낀다. 이 세상이 마지 자신의 것으로 안되는 일이 없는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느낀다. 이후에 2-3세로 걸음마를 배우고 대소변을 하게 되면서 자신이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컨트롤 하려고 할 때 온 세상이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물활론으로 자신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업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부모님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보면서 부모님이 전지전능하게 보인다 그의 나르시즘적인 자아는 최고의 자리에서 최하의 자리로 추락하게 된다. 그래서 어린이는 부모님처럼 훌륭하게 되기 위해서 부모님의 행동을 동일시를 하는 것이다(Kohut, 1984, 나르시즘 자아를 보라).

날개의 주인공은 어린시절의 나르시즘적인 시점으로 회상을 하게 된다. 그 때 그는 이 세상이 자신의 것으로 희망적이고 안 되는 것이 없는 자신감이 충만하게 된다. 과거에 날개가 돋아났던 자리는 어린시절에 나르시즘의 최고의 피크를 회상하는 것이다. 정신의학에서는 우울증은 심각할 때는 자살을 할 에너지가 고갈되어져 없다 고로 자살이 드물다 그러나 우울증 환자의 에너지가 회복될 때 자살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는 하루를 보내면서 과거의 회상으로 생각이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낯 시간에는 외출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는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인관계의 결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하는 행동은 부인이 외출하고 없으면 늘 부인의 방에서 돋보기로 종이를 태우거나 부인의 화장품의 향기를 맞아보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3-5세의 어린이의 행동이다. 그는 결혼으로 부부가 되었지만 정상적인 부부들처럼 남편과 부인이 대등한 관계로써 서로 대화를 나누고 타협적으로 의사를 결정한다. 그런데 이 날개의 주인공은 남편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엄마와 어린이의 관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에서는 결혼한 부부들이 남편과 부인의 대응한 관계 대신에 그들이 상호관계의 기능들이 마치 엄마와 아들(어린이)의 기능 혹은 아버지와 딸의 기능을 혹은 두 사람의 마주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치고 받고 싸우는 부부들을 분석하게 된다. 작품의 주인공은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3-5세의 남자 어린이의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다. 부인은 현실적인 사람이고 남편은 과거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하루를 살면서 지금까지 부인과 함께 살면서 비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회상을 하고 있다. 33번가는 매춘지역으로 홍등가이다는 것을 주인공의 회상으로 보여준다. 젊은 여성들이 33번가의 주변에 많이 잘고 있지만 자신의 부인이 가장 예쁘다. 부인의 방에는 벽에 화려한 예쁜 옷들이 결려져 있다. 남편으로써 주인공은 골댄 바지 한 벌 뿐이다 그리나 원망을 하지 않는다 그는 경제력이 없기 때문에 부인을 부양할 능력이 없다. 부인은 식사는 차려준다 그는 그것을 닭모이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그의 부부 관계를 수평적인 관계가 아닌 수직적인 관계로 설명한다. 남편은 부인에게 아첨과 복종으로 즉 부인의 비위를 맞추고 눈치를 보면서 야단을 맞을 것이 아닌가? 라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매일같이 하루를 보내는데 늘 지루하고 하는 일은 비슷하다.

부인이 매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분노하거나 야단을 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경제력이 없고 무능하기 때문에 부인에 벌어오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외출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혹시 아는 사람이 자신이 놀고먹고 일을 하지 않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이 발각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는 부인이 호객행위를 할 시점에서 집을 비우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거나 혹은 경성역에 간다 그 시잠에서 늘 12시에 통행금지 때문에 12시 직전에는 돌아와야 한다. 조금 일찍 들어왔다가 부인과 고객과 섹스 행위를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몇 번이나 있었다 라고 회상을 한다. 그는 돈을 벌려고 궁리를 하지 않고 그리고 돈을 사용할 줄을 모른다. 부인이 주는 용돈을 모아서 부인이 사준 벙어리 저급통에 넣는다. 이후에 귀찮아서 변소의 똥통 속에 던져버린다 그리고는 손에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을 아쉬워한다. 그는 스스로 부인과 결혼 생활을 절음발이 부부로, 불구적인 관계로 표현하고 있다. 부인은 남편과 섹스 욕구 만족을 호객들에게 그리고 돈을 받고 매춘으로 풀고 있다.

인은 남편이 너무 자주 고객과 섹스를 나누는 장면에서 방해가 되자 아스피린이라는 해열 진통제를 먹도록 했다. 이후에 주인공이 잠이 온다 라는 것을 느끼면서 그 약물이 아닐린이 아닌가? 의심을 한다 아날린은 수면제이다 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한꺼번에 6알을 털어 넣고 잠이 들었다. 하로 종일 잠을 자고 일어난 것을 깨어나서 알게 된다. 그는 분노하면서도 부인과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부인의 호객행위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다 욱 더 긴장하고 조심하게 된다. 이러한 긴장과 불안과 조바심이 극치에 이르게 되면서 드디어 낮 시간에 부인이 잠이 든 시간에 용기를 내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부인의 머리맡에 놓아주고 경성역으로 간다 그러나 늘 하던 대로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드디어 백화점의 옥상에 올라온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부인의 행동에 대해서 분노하기 보다 자신의 무능력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무능력함, 자신의 자아존경심이 바닥이 났다 그리고 삶에서 희망이 없고 과거지향적으로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의미없게 살아가면서 그 분노가 부인에게, 부모님에게 흘러가지 않고 자신의 자아 쪽으로 흘러가서 미스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올라간 것이다.

그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 나도 어린시절의 나르시즘이 최고였을 때 이 세상에서 내가 최고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나도 남자가 되고 싶고 남자답게 사회생활을 하고 싶다 내가 인간답게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다 라고 외치면서 마지막 순간의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정신장애에서 가장 늦게 등장해서 가장 빠른 속도로 산불처럼 펴져 나가고 있는 대인공포증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어 보자.

20세기에 들어와서 등장한 정신장애들이 가장 치명적인 정신장애 들이다 라는 것으 여러 번 소개를 했다.

1911년에 등장한 정신분열증(조현병)이 그것이다. 정신분열증은 심리과학의 창설자인 분트(1879년에 심리과학의 탄생)의 제자였던 에밀 크레펠린(Emile Kraepelin)이 분트 밑에서 철저한 실험심리학을 공부를 했다. 그는 과학적인 기초에 근거한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그가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독일의 정신의학 교과서를 6번쩨 개정판에서 1897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라는 이름으로 등장을 한다.

크레펠인은 조발성 치매를 조울증과 다르다. 조울증은 감정장애로 그리고 조발성 치매사고장애이다 라는 구분을 하고 조발성 치매의 치료 비율이 2%라고 보고를 했다. 조발성 치매라는 말의 dementia라는 말은 독일어로 정신병이고 praecox라는 말은 젊은이, 청소년이라는 말로써 젊은이의 뇌의 질병이라는 뜻이다.

조발성 치매라는 이 용어는 크레펠린의 용어 이전 약 50년 전에 1853년에 프랑스의 신경과 의사이자 정신과의사인 베네틱 오그스트 모렐(Benedict Augustin Morel)이 프랑스어로 demence precoce로써 demence는 미침, 발광의 뜻이고 precoce는 조숙한, 젊은이의 뜻으로 젊은이의 미친, 정신병 뜻이다. 그러나 의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정확하게 44년 후에 1897년에 정신의학계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Ellenberger, 1970).

그러나 조발성 치매는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라는 것이 1911년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현대적 정신병원으로 그리고 정신병을 현대적으로 연구하고 치료를 한 스위스의 부르고졸리(Burgholzli)5총장으로 30년동안 그 병원의 원장으로 뇌의 신경의학과 역동의학을 통합한 정신의학의 전설적인 인물유진 블루러(Eugen Bleuler)에 의해서 16년 동안 연구한 결과가 1911년에 발표되면서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schizo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분열의 뜻이고 phren는 마음 그리고 ia는 병이라는 뜻으로 정신분열증이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블루러는 정신분열증(조현병)의 치료 비율이 60%로 회복 가능하다, 22%는 평생 정신병원에 입원을 한다, 18%는 입원과 회복을 반복한다 라고 발표를 했다. 그는 영어의 첫 글자인 A의 글자를 따서 정신분열증의 특징을 4A로써 표현을 했다. 양면 감정의 분열(사랑과 미움의 반대감정), 생각과 감정의 분열, 그리고 연상의 분열 그리고 내면세계로 자폐적으로 철수라는 표현으로 기술을 했다. 그의 4A는 지금도 간이 정신분열증(조현병)의 진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블루러의 연구는 1966년에 정신과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Wing)에 의해서 40명의 여성정신분열증 환자를 40년간 추적 연구한 결과 67%가 회복되고 7%가 평생정신병원에 입원을 그리고 26%가 회복과 입원을 반복한다는 연구 보고서가 블루러의 연구와 거의 일치됨을 보여주고 있다.

20세기에 두 번째로 치명적인 정신장애가 등장하게 된다. 1943년에 존 홉킨스 의과대학 소아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레오 케너(Leo Kanner)에 의해서 11명의 이상한 어린이로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폐증(autism)이다. 그들은 관계를 하지 않는다, 유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안아주기 쓰다듬어주고. 눈맞추기를 피한다. 즉 유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신체접촉, 피부접촉을 회피한다고 발표를 했다. 그는 11명의 어린이들의 엄마들의 공통점이 지식적으로는 높은 수순을 보이지만 감정이 거의 없는 냉장고 엄마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후에 1950년대에 정신분석가자폐증의 세계적인 대가인 영국의 프란시스 투스틴(Frances Tustin, 1975, 1986: 주㈜: 참고)자폐증 어린이를 쓰다듬어주고 끌어안고 신체접촉 그리고 눈길주기 등으로 70% 정도의 회복을 보이면서 그녀가 쓴 저서 자폐증 어린이와 정신증(1975), 신경증에서 자폐증적 장애(1986)을 통해서 자폐증 어린이는 자아가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마음이 빈 블랙홀이다. 자폐증 어린이들이 0-3세에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딱딱한 물건을 손에 쥐고 하루 종일 그 물건에만 집착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몸의 유체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이는 유형으로 딱딱한 물건은 자아를 대신한 것이다 라는 발표를 했다. 태어나지 전에 태아기 동안에 5감각의 분열로 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하버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신분석가가 된 조지 워싱턴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워싱턴 정신분석학교 교수스텐리 그린스펜(Stanley Greenspan, 1989: 주㈜: 참고)은 자폐증 어린이들의 치료를 안아주기, 눈길주기, 쓰다듬어주고, 신체접촉, 피부접촉을 통해서 자아를 밖으로 끌어내고 5감각의 통합으로 심각한 자폐아들을 70%의 수준으로 정상적으로 회복시킨 것을 보고를 하고 있다.

자폐증의 등장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왜 하필 1943년인가? 라는 것에 대한 의문은 이 시점에 미국이 1941, 12, 8일에 일본에 선전포고로써 제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게 된다. 남자들의 징집에 비워진 일자리를 여성들이 메우게 되면서 자녀들이 엄마의 손을 떠나서 조부모 혹은 유아원, 영아원으로 맡겨지면서 1941년에 태어난 어린이가 3살의 시점에서 부모님들이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의학계에 등장한 것으로 본다(2022, 7, 30: 위키피아).

이제 세 번째로 가장 늦게 등장한 정신장애가 바로 대인공포증이다. 대인공포증은 사춘기, 청소년기에 등장하게 된다. 물론 세밀한 분석은 유치원시절에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증세로써 부모님이 인식하게 되는 시점인 사춘기 시점이 된다. 이것은 앞에서 자폐증의 등장의 한 개의 원인인 제 2 차 세계대전으로 남자들의 일자리를 여성들이 대신하게 되면서 자녀들의 양육이 엄마의 손을 떠나게 되면서 그들이 사춘기 초반인 15-16세의 시점에서 이 장애가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자폐증, 대인공포증은 전업주부 한데서 성장한 어린이들 한데서도 등장한다. 핵심은 자녀양육에 있다 그런데 엄마의 손에서 양육이 벗어난 어린이들의 비율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아래의 양육과정을 보라).

등장의 시기를 보면 제 2차 세계대전의 시점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이 15-16세의 청소년 기간의 시점인 1969년에 영국에서 아프리카의 남아공의 케이타운 출신으로 런던 의과대학을 졸업한 정신과 의사이삭 마크(Isaac Mark)가 런던 의과대학 무드셀리(Maudsley Hospital)(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신병원) 정신병원에서 정신장애를 연구하면서 사회적 불안장애(social anxiety disorder)불안장애, 공황장애는 질적으로 다르다 라는 것을 보고를 했다.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는 프로이트에 의해서 1896년에 불안 신경증 그리고 불안 히스테리아로 등장을 했다. 프로이트는 불안 공격을 불안 히스테리아로 이름을 붙였다(상세한 것은 치료자의 블로그, 공황장애 뿌리 뽑기? 를 보라) 불안 공격의 불안 히스테리아는 1980년에 미국의 DSM-Ⅲ에서 공황장애로 공식화된다(Barlow, 2001: 주㈜: 참고).

그런데 하버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신분석가가건드슨(Gunderson,2001: 주㈜: 참고)이 보드라인 장애 즉 신경증보다 심각하고 정신증(편집증, 조울증, 정신분열증(조현병)보다 약한 양쪽의 경계선이 있다는 말로써 보드라인 혹은 경계선장애로 불리는 장애를 16년 동안 연구를 통해서 그는 보드라인 장애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하버드 의과대학 부속 정신병원인 멕클린 병원(McLean Hospital)(신경정신과의사들, 정신분석가들, 심리치료사들, 임상사회복지사들 등의 전문가들이 200여명이 근무하는 정신병원)의 보드라인 센터의 치료 국장으로 있으면서 성격장애를 연구를 해서 그의 연구가 1980DSM-Ⅲ에서 10개의 성격장애로 채택되어 나타나게 된다.

 1987DSM--R에서 미국 정신의학회가 이삭 마크(Isaac Marks)가 보고한 사회적 불안장애가 성격장애의 분류에서 회피적 성격장애와 유사하다는 것을 인정을 하고 혼합해서 사용하다가 1994DSM-에서 공식적으로 사회적 불안 장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불안장애와 구분하기 위해서 사회 공포증(social phobia)으로 인정을 했다 사회 공포증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인 공포증이라는 용어가 쉽게 이해되어진다는 의미에서 대인공포증으로 기술하고 있다. 대인공포증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피하려고 하는 정신장애이다.

불안장애와 공황장애와 비교한다면 대인 공포증은 그들보다 약 100년 후에 등장하게 된다(1896년 프로이트의 불안신경증과 불안 히스테리아와 비교) 그런데 최근에 가장 늦게 등장한 대인공포증이 가장 심각한 정신장애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대인공포증의 원인에 대해서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프로이트 시대에는 대인공포증이 없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 시점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들 혹은 의사들의 부재로 산아 제안이 없이 자연스럽게 자녀를 낳았기 때문에 보통 자녀들의 숫자가 7명에서 -9명으로 많았다. 프로이트는 유태인으로 종교적이 이유인지를 불확실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전처 소생으로 2명 그리고 부인의 사망으로 40세 초반의 프로이트의 아버지가 21세의 프로이트의 엄마와 재혼을 하면서 프로이트가 장남으로 7명의 자녀들로 전부 9명의 형제들을 가지게 된다. 프로이트는 결혼 후에 6명의 자녀들을 가지게 된다. 형제들이 많았기 때문에 대인공포증은 등장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1947년에 출생을 했다 그 시점에서 7명의 형제들을 가지고 있다. 어린시절에 2명의 사망으로 모두 9명의 형제들이 있다. 고로 형제들이 서로 갈등하고 다투고 성장을 하면서 대인공포증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는 말이다.

2 차 세계대전 이후로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늘어나게 되면서 자녀들의 숫자는 1-2명으로 줄어들면서 그리고 맞벌이로 아빠와 엄마가 일을 하게 되면서 자녀들은 조부모의 손에서 혹은 유아원, 영아원 등에서 성장하게 된다. 대소변 혹은 먹은 것과 병이 났을 때 병원에 가도록 하는 양육으로 초점이 맞춰지게 되면서 아기와 엄마의 친밀관계에 문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정신장애의 첫 등장이 분리 불안 그리고 침투 불안이다. 분리 불안 7개월-9개월의 시점에서 엄마의 얼굴을 알아보고 엄마에게 매달리면서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분리 불안이다 전업주부인 엄마의 손에서 양육이 되어진다고 해도 엄마가 불안하게 되면 그 불안은 아기에게 전이가 된다. 아기가 1-3세의 나이에 대소변을 가리고 주변 환경을 탐색하게 될 때 과도하게 불안한 엄마는 아기가 뒤집어버리고 어질어버리고 뒹굴고 놀이를 하는 주변 환경에 지나치게 아기가 다칠 수 있는 위험한 물건들에 신경이 곤두서게 되어 정리정돈과 깨끗한 환경을 강조하게 되면 아기는 주변 환경을 탐색하려고 마음대로 장난을 하게 되는 것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1=2세의 어린이들은 세상의 만물이 물활론으로 생명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들을 컨트롤함으로써 자신감을 얻어야 하는데 과도한 불안과 위험으로 엄마가 아기를 지나치게 보호를 하게 되면 아기를 주변환경을 자신의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에 제동이 걸리게 되면서 환경을 두려워하게 된다. 과도한 정리정돈과 청결에 신경을 쓰는 것이 불안장애로써 강박사고 강박행동이 된다.

프로이트는 아기들의 정상적인 분리를 강조했다. 엄마로부터 욕구불만족이 아기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쪽으로 혼자서 마음데로 하려고 하는 욕구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엄마가 먹어주는 것에 불만족이 스스로 숟가락으로 음식을 먹으려고 하고 엄마의 제한에서 벗어나서 마음대로 주변 환경을 컨트롤 하려고 하는 ego의 발달로 그리고 현실의 원리를 개발하게 된다 고로 어린이의 과잉보호로 부모의 과도한 억제와 모든 것을 부모가 다 해결해주는 어린이의 과도한 욕구만족은 아기로 하여금 엄마에 의존해서 의존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기의 발달의 나이에 따라서 엄마가 아기의 ego를 성장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영아원, 유아원에서는 한 사람의 보모가 7-9명의 어린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업무 때문에 아기와 일대 일로 놀이를 할 수가 없다. 울면 달래고 대소변과 습식과 위험한 놀이와 질병에 대한 돌봄으로 초점이 맞추어 지기 때문에 어린이들의 놀이문화가 실종되어 지게 된 것이다. 유치원에서도 그리고 각종 학원 그리고 학교에서도 배움에 초점이 맞춰진다 고로 조용하게 앉아서 학습하는 것 때문에 어린이들을 갈등을 해결하고 충동과 욕구를 컨트롤하는 것을 배울 기회가 점점 줄어들면서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대인공포증은 사춘기 시점인 청소년기에 등장한중학교 1학년에서 고교 1학년의 기간에서 주로 표면화된. 어른들과 관계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 어른들과 관계는 수직 관계이다. 물으면 대답을 하고 시키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대인 공포증은 동료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불평을 한다. 동료들과 어떻게 갈등을 풀고 친밀한 의사 소통을 하고 어떻게 어울리는가 하는 것을 잘 모른다. 고로 그들은 혼자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위의 시점에서 학교에 갈 때가 되면 동료들이 괴롭힌다 라고 불평을 한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있는 경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학교에 갈 시간이 되면 몸이 아프다, 배가 아프다 혹은 소화가 안된다, 설사가 나온다 등으로 불평을 하는 어린이들은 대부분이 미래의 대인공포증 예비 어린이이다.

그들은 중학교 3학년으 시점에서 검정고시를 하겠다고 주장을 한다. 집에서 열심히 해서 검정고시로 고교를 뛰어넘어서 월반으로 빨리 대학에 갈 것이라고 부모님에게 졸라 댄다. 검정고시는 합격을 한다고 해도 혼자서 게임에 빠지거나 휴대폰, 컴퓨터에 빠지게 된다. 진실로 혼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갈 능력이 있는 자녀들은 대인공포증이 아니다.

 여기에 한몫을 하는 것이 전자오락이다. 혼자 있으면 외롭다 고로 전자 오락기기들 즉 컴퓨터, 휴대폰의 게임을 통해서 시간을 잘 보낼 수 있고 게임을 통해서 외롭지 않다 고로 게임중독으로 번지기가 쉽다. 전자오락은 주의집중력을 요구하는 놀이이기 때문에 뇌의 회전비율을 300배 빠르게 가동시키기 때문에 2시간-3시간의 전자오락 게임은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뇌의 과부화를 초래하게 된다.

 대인공포증의 이름이 다르게 변장으로 등장한 것들이 있다 일본에서 먼저 유행해서 우리나라에 건너온 이지매(따돌림)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약 30년 먼저 서구화되었다. 대인공포증은 일본어의 용어로 이지매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따돌림, 왕따 돌림 등으로 불인다. 대인공포증과 따돌림의 차이점은 따돌림은 가해자가 있다는 점이다 서로 대인관계 갈등을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청소년들이 폭력으로 강압을 사용해서 복종이가 아첨을 강요하는 것이 다로 따돌림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혼밥족으로 화장실에서 혼자서 도시락을 먹는 대학생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화장실에서 혼자 밥 먹는 대학생들 Ⅰ

[채널A] 입력 2014-03-18 15:43:00 | 수정 2014-03-18 15:57:54


편의점에서 산 김밥 한 줄과 음료수를 화장실에서 먹는다. 이게 우리 대학생 아들이 점심 풍경이라면 어떠십니까? 꿈에 그리던 대학 캠퍼스에서 혼자 밥 먹는 혼밥족의 모습입니다. ? 혼자 먹어? 하시죠. 아직 학교 또래 친구들과 한 교실에서 생활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 익숙해서 적응을 못했고 친구는 못 만들었는데 정작 혼자 밥 먹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취업준비와 아르바이트 탓에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스스로 단저하고 혼자 밥을 먹는 자발적 혼밥족도 있답니다.글쎄요. 저는 어느 쪽이든 인생 선배로 마음이 편치 않네요. 어른들이 뭔가 잘 못해 온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채널 A 뉴스: 2014, 3, 18, 15: 43).

화장실에서 혼자 밥 먹는 대학생들 Ⅱ

혼밥'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혼자 밥 먹는다'라는 뜻인데, 요즘 대학 캠퍼스에서 이런 '혼밥족'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화면으로 보겠습니다.밥과 반찬들, 학창시절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과 비슷한 데요. 자세히 보면 이 밥이 놓여있는 곳, 다름 아닌 화장실 변기입니다.
또다른 사진을 볼까요? 라면과 김밥이 구석진 창가에 놓여 있죠. 혼자 끼니를 때우는, 이른바 '혼밥족'들이 인터넷에 올린 인증 사진 입니다. 새학기를 맞아 활력이 돌아야 할 캠퍼스의 한 구석에 이렇게 점심을 혼자 먹는 대학생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한 교실에서 같은 일정으로, 짜여진 대로 생활했던 중고교 시절에 익숙해져 있다가 자유로운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혼자 식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구석진 자리를 찾는 학생들도 있는 반면, '자발적 혼밥족'도 늘고 있습니다.'밥을 같이 먹을 사람을 찾는데 쓸 에너지를 아끼고 수업준비 등 생산적인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는게 그들의 얘긴데, 최근 대학가엔 이런 혼밥족을 위한 식당도 부쩍 늘고 있다고 합니다.(YTN 뉴스, 2014, 3, 18, 12:04)

화장실에서 혼자 밥 먹는 대학생들 Ⅲ

캠퍼스의 ‘혼밥族’…대학생활 부적응자들, 텅 빈 강의실 등서 서러운 ‘한술’

17일 수업을 마친 서울의 모 대학 2학년생 남모 씨(20)가 찾은 곳은 1.6m²에 못 미치는 화장실 칸이다. 편의점에서 산 김밥 한 줄과 음료수가 남 씨의 점심 메뉴였고 뚜껑을 닫은 세라믹 변기가 식탁이었다. 학과 및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아 친구가 적은 남 씨는 신입생이었던 지난해부터 이렇게 화장실에서 점심을 때울 때가 많다. 혼자 밥 먹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선택한 습관이지만 간혹 ‘왜 숨어서 식사해야 하나라면서 서러워할 때가 있다.

새 학기를 맞아 활력이 도는 캠퍼스의 한구석에는 점심을 ‘혼밥(혼자 먹는 밥을 뜻하는 은어)’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숨기기 위해 화장실이나 빈 강의실 등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찾아 헤매는 이들이 있다. 이런 ‘혼밥족’ 중에는 남 씨처럼 또래 친구들과 한 교실에서 같은 일정으로 생활했던 중고교 시절에 익숙해져 있다가 대학 생활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지난 학기 복학생 임모씨(25)는 “정신을 차려 보니 한 학기가 다 지나가도록 휴대전화에 대학 친구의 전화번호가 10개도 저장돼 있지 않았다 ”라고 말했다.

화장실에서 혼자 밥 먹는 대학생들 Ⅳ

 "화장실에서 음식을 먹은 행위를 금지 합니다." 얼마 전에 도교 대학 건물 안에 화장실에 붙은 문구이다. 화장실에서 음식을 먹지 말라니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인데 보고도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아사히 신문이 이 내용을 1면 기사로 다루자 일본의 매스컴들도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을 했다. 이후 사전에는 변소와 밥을 합쳐 놓은 단어 "벤죠 메시"라는 단어가 벌써 등록이 되어 있을 정도이다.

 벤죠 메시는 혼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이 친구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화장실에서 도시락을 먹은 행위를 말한다. 대학의 구내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장면이 들통이 났다가는 친구가 없는 불쌍한 이미지로 각인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중략 -------

 정신과 의사인 마치무라 씨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부모의 과잉 보호나 휴대폰 중독 등을 이유로 친구와 지내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대인관계에 대한 능력이 저하되었다. 상담을 통해서 속내를 솔직히 털어 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전했다(인터넷에서 인용: 화인제팬(finejapan.com, 2014, 3, 13).

화장실에서 혼자 밥 먹는 대학생들의 심리분석

 우리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숨겨져 있던 대인 공포증의 심각성이 드디어 언론 매체들을 통해서 사회 문제화되어지고 있다. 위의 신문과 TV 뉴스에서 보는 것처럼 초, , 고등학교 뿐만 아니라 대학교까지 대인공포증의 심각성이 누적되어 드디어 일반인들의 눈에 띄게 되고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위의 신문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아사히 신문에서 1면 기사로 보도되었고 이후에 각종 일본의 매스컴들이 특종으로 보도하면서 이미 크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음을 경고한 것에서 보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치료자는 이미 왕따 홈 페이지에서 , , 고등, 대학생들의 심각한 대인 공포증의 문제들을 31년 동안 연구하고 치료를 해 오면서 그 심각성을 오래 전에 예고를 했다(2016년 왕따 홈페이지에서 인용).

 화장실에서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은 정신 의학적으로는 "대인 공포증"에 해당하는 심각한 대인관계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들은 대인관계가 어려워서 동료들과 어울림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면 긴장되고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그들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심장이 뛰고 호흡이 빨라져서 숨이 막히려고 하고 심하면 현기증이 나고 어지럽고 극단의 경우에는 기절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그룹으로 모임에서 참가를 해서 견딜 수 있는 최대의 시간은 평균  2시간 정도가 최대이다. 2 시간을 넘어가면 이들은 현기증을 느끼거나 극단의 경우에는 기절, 졸도, 실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들은 동료들이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안절부절하게 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 집중이 되지 않고 소외감으로 소속감이 없어져서 외톨이로 느끼게 되기 때문에 사람 들과의 모임을 피하게 된다.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점심 시간이고 휴식 시간이다. 또 초, , 고등학교 시절에는 야외학습(소풍, 수학 여행 등)이다. 야외 학습, 수학여행 혹은 점심 시간, 쉬는 휴식 시간에는 친한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잡담을 하게 될 때 대인공포증을 가진 사람들은 혼자서 외톨이가 된 모습을 친구들이 보고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스스로 의식을 하게 되기 때문에 긴장이 극도로 올라가서 참을 수가 없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친구들이 자신을 보고 비웃는다. 비난한다. 이상한 돌아이라고 눈총을 준다는 생각들에 휩싸이게 되어 이것이 오랜 장기간 지속이 되는 경우에는 그러한 사람들의 비난 소리들이 환청으로 귀에 들리게 되는 정신분열증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정신분열증이 아니더라도 심한 성격장애로 연결되어 회피적 성격장애, 자아분열 성격장애 등으로 연결 되기도 한다. 더 붙여서 이들은 심하게 긴장이 누적되어진 사람들로 심각한 불안증을 가진 사람들이다. 대인공포증은 원래 불안증 안에 속해 있는 장애이다. 고로 신체적인 긴장이 누적이 오랜 시간이 지나가면서 각종 심인성 질환들을 함께 가지게 된다. 천식, 아토피 습진, 그리고 비염, 변비, 설사, 소화성 궤양(십이지장 궤양), 궤양성 대장염, 크론 질(Crohn's disease) 등을 함께 가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혼자서 밥을 먹는 "혼밥"의 경우에는 한가지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다. 대학생들 중에서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동료들과 같이 어울려서 잡담이나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어서 혼자서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혼자서 행동을 하는 경우에는 대인공포증에 속하지 않는다. 이들은 같이 어울릴 시간이 없기 때문에 혼자서 식사를 하는 것이지 대인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일부러 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직장에서 일을 할 때 동료들과 잘 어울리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일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대인공포증을 가진 사람들은 아예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하고 피하는 사람들로 그들이 아르바이트나 일자리를 구한다고 해도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 이 직장에서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른 직장으로 옮겨 다니는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대인공포증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인간 관계를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대인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피하려고 하고 상대의 눈치를 보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초반기에는 화기애애 하고 친하게 지내지만 언젠가는 그 대상에 대한 분노, 미움, 노여움이 쌓이게 되면 그들을 배신자로 미워하거나 관계를 단절해 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대상에게 지극 정성으로 원하는 것을 대 제공해주었는데 그 대상은 오히려 그를 이용하고 그를 등쳐먹은 사람으로 보고 더 이상 관계를 할 수 없는 나쁜 악인으로 매도해 버리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그들을 피해서 도망을 가게 된다. 이들의 공통점이 자아가 약하다, 그리고 자신감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따라가는 사람들로 겉으로 보면 착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말이 별로 없고 대화가 없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갈등 문제, 대응해 나가야 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기술이 부족해서 피해서 도망을 가 버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대인공포증이 된 것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모델 어린이들로서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모델 어린이들이 많다. 쉽게 말하면 Yes 맨들이다. 그들은 부모님의 과잉 보호로 모든 것을 부모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자신의 의사나, 욕구나, 자신의 원하는 것을 제대로 자기 주장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 한가지는 부모님의 맞벌이로 자녀들과 의사 소통을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항상 가족들의 대화를 분석해 보면 수직적인 대화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감정, 느낌, 지각, 상상, 생각 등을 자유롭게 표현을 하도록 들어주고 자녀의 의사와 의견들을 마음 대로 표현을 하도록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니고 항상 대화의 스타일이 문답식이다. xxx 과목의 숙제를 했니? , 혹은 아니요, xx 학원에 갔다 왔니? , 혹은 아니요 등등으로 Yes, No의 대답을 요구하는 닫힌 대화를 하는 가족들이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시간이 없고 자녀들의 보채는 요구들을 들어주려고 하기 보다 "길 게 구질구질 하게 말하지 말로 요점만 요약해서 말해라" 혹은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하게 핵심만 말해라"라고 다그쳐서 자녀들의 입을 막아 버리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그런 대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자녀들은 자신의 감정, 느낌, 생각, 사고, 지각 등을 표현을 하는데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더 붙여서 오늘날 자녀들은 1명 혹은 2명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양육하려고 한다. 부모님의 의사를 잘 따르는 자녀가 효자이고 부모님의 말에 순종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어져서 자신의 주장, 자신의 욕구, 자신의 의견을 마음대로 표현을 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말하는 것을 무조건 수용하면서 자라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면 부모님처럼 모두 상대가 알아서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상대가 알아서 잘 해결해줄 것으로 믿기 때문에 갈등을 해결해 나갈 능력에 결함이 생긴 사람들이다. 이들은 좌절에 참을성이 없다. 고로 즉각적인 욕구 충족이 되지 않으면 폭력적이 되거나 충동적이 되어 버려서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 그 결과 관계는 단절이 되고 그 사람과는 더 이상 다시 대면을 하지 않고 피하게 된다. 여기에다 자녀들은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아지고 게임이나 전자 오락 등에 빠지게 되어 대인관계에 기술을 배울 기회가 부족하게 된다.

 동료들과 놀이 문화들이 사라진 것도 한몫을 한 것이다. 놀이 문화들은 동료들과 놀이를 통해서 갈등이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들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데 유치원 시절부터 각종 학원으로 내 몰리면서 공부하고 배우는 것 때문에 놀이 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또한 과거에 대 가족 사회에서는 형제들이 7-10명으로 많아서 형제들끼리 서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들을 배우고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지만 오늘날 자녀들이 1명 혹은 2명으로 줄어들었고 자녀들이 다투는 것을 부모님이 싫어한다는 것 역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울려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동료들과 갈등을 일으키거나 싸우게 되면 무조건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해서 "그 놈과 사귀지 말라" "그 놈을 멀리 하라" 등으로 피하도록 교육을 시킨 것이다. 동료 들과의 관계의 어려움들을 부모님에게 하소연을 하면 "너는 공부만 잘하면 된다." "공부 못하는 놈들과는 어울리지 말라" 등으로 갈등을 피하도록 무의식적으로 교육을 시킨 것이다.

 대인공포증의 정신분석학적인 심리치료는 단순하지 않다. 성장의 과정을 분석하고 결함을 찾아 내어 수정하고 새로 배우고 상처받은 것들을 마음의 정화를 시키는 복잡한 과정이다. 구체적으로 요약을 한다면 어린 시절의 발달 단계를 분석해서 어느 단계에서 발달에서 성장이 중지가 되었는지를 분석해서 찾아 내어서 다시 그 성장이 중지된 자아를 발달을 재개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의사 소통 훈련을 받아야 한다.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갈등을 풀어 가는 능력을 배양하고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지 말고 말로써 표현을 하는 것을 새로 배워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하고 다른 사람 들과의 대화 훈련을 새로 배워서 자아가 목소리를 내도록 하고 자신감을 쌓아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한마디로 표현을 하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문제들을 대응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자퇴하고 은둔 형 외톨이로 집에서 놀고 있는 학생들이 28만 명이 넘어서고 있다는 여성 가족부의 발표가 있었다. 한 해에 6만 명씩 학교를 떠난다고 보고되었다(2015, 5, 12, EBS 뉴스)

히키코모리 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일본어로 '방에 틀어박히다'(매일 경제 닷컴에서 인용)라는 말이다. 다음(Daum) 백과 사전에 나와 있는 히키코모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가 되어지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 히키코모리 현상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0년대였다. 1990년대초 일본의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더욱 급증하기 시작하여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6개월에서 심하게는 10년 넘게 외출도 하지 않고 가족과의 의사소통도 거의 없이 생활한다. 방 안에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게임에 빠져서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하기도 한다. 증상이 심해지면 우울증에 빠지거나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일본후생성은 이러한 증상을 6개월 이상 지속하는 사람을 히키코모리로 분류한다다양한 상담과 체험 프로그램, 정신과 치료 등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학교를 떠나는 위와 같은 중, 고등학교 학생들은 왕 따 때문에 동료들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이 동료들과 관계가 되지 않고 동료들을 만나면 할 말이 없고 껄끄럽고 불편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혼자 있고 싶어하기 때문에 학교를 기피하게 된다는 것을 부모님들이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학교에 가면 동료들이 괴롭히고 학교에 가면 무시당하고 거부당하고 이상한 돌 아이로 본다는 생각들 때문에 동료들과 함께 하면 불편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어쩔 줄 몰라서 소변이 잦고 입이 마르고 공부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학교에 가기 싫다는 불평들만 늘어 놓기 때문에 그리고 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혼자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아이들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을 하기가 쉽다.

이런 학생들이 학교에 갈 시간이 되면 두통, 복통, 설사 혹은 가려움증, 현기증 등의 신체적 이상을 호소하는 어린이들이 많아서 병원에 가서 종합 검사를 하면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잘 알고 있는 몇몇 친구들과는 잘 지내는 것을 보면서 부모님은 집에서 혼자 놀고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겉으로 보면 몇몇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을 보면서 부모님들은 친구 관계에 이상이 없다고 판단을 하는데 사실은 이런 학생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어가는데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정신장애의 괴물인 대인 공포증 등장

아래의 기사를 잘 읽어보면 히키코모리 장애인은 대인관계(대인공포증)가 되지 않는 사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 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015, 5, 23, 조선일보).

중년이   은둔형 외톨이 '가족  야쿠자' 군림(도쿄=김수혜 특파원 )[오늘의 세상] 70만명 '日사회 시한폭탄되다 - 20 가까이  틀어박힌 40


"
나이 들수록 사회적응 어렵고 한층 공격적이 되는 경우 많아"
부모에 폭언… 흉기까지 휘둘러 

한국도 남의  아니다 . 국내 은둔형 외톨이 30 추정… 2012년엔 연쇄범죄 저지르기도

23  자기 방에 틀어박힌 남자 A(41)씨가 18년간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않은  불혹을 넘겼다 평짜리 방에서 70㎏짜리 역기로 근육을 단련하고  곳곳에 매직으로 '테노오샤(低能者·능력 없는 인간)'라고 썼다70 부모에게 "내가 이렇게   당신들 "이라며 "능력 있는 내가 능력 없는 당신들을 지배한다" 했다.

 남자를 정신과 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 지난 15 아침 도쿄 근교 작은 소도시에 앰뷸런스가 도착했다건장한 요원 4명이 두툼한  보호대를 찼다. A씨가 흉기를 휘두를 경우 동맥을 지키는 보호장구다정신 질환자 병원 이송 전문가 오시카와 다케시(押川剛·48)씨는 취재팀에 "상황이 급박해지면 기자를 보호할 여유가 없다스스로 안전을 도모하라" 했다경찰차  대가 따라왔다동네 할머니가 겁이 나는지 눈물을 보였다. "수십년 알고 지냈지만  댁에 이런 아들이 있을  몰랐어요."

중년이  '은둔형 외톨이' 일본 사회의 시한폭탄이 됐다. 1980~1990년대 등교를 거부하고 방에 틀어박힌 아이들 이제 40 접어들었다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10대의 문제'라고 안이하게 대응한  오판(誤判)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0 일본 내각부 조사에 따르면일본 전역의 은둔형 외톨이는 696000명이고 그중 26.9% 35 이상이었다상당수가  상태 그대로 40대에 접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송팀은 공격 대비  보호대 차고… - 15 오전 도쿄 인근 소도시 마을에서 18년간 자기 방에 틀어박혀 지낸 41 은둔형 외톨이 A씨를 정신과 병원으로 입원시키기 위한 작업이 진행됐다요원들이 이날 속옷 차림으로 집에 있는 A씨에게 다가가고 있다요원들은 A씨가 흉기를 휘두를 경우를 대비해 두툼한  보호대를 찼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구속복을 입고 들것에 누운 A씨를 요원들이 앰뷸런스에 싣고 있는 모습경찰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오시카와씨는 "스무  무렵 은둔형 외톨이였던 사람  둘에 하나는 마흔이 넘어도 은둔형 외톨이"라면서 "모두가 위험한 정신 질환자라곤   없지만상당수가 나이 들수록 공격적으로 변해 '가족 내의 야쿠자' 군림한다" 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일본재단  여러 공익법인·시민단체가 은둔형 외톨이의 사회 복귀를 돕고정부와 지자체가 ·간접 지원한다하지만 본인과 가족이 참여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정부가 억지로 입원시키거나 훈련시킬 수도 없다.

연로한 부모가  이상 이들을 돌볼  없게 되면이들은  안에서 굶어죽거나먹을  찾아  밖으로 나와 사건을 일으킨다반대로 이들의 행패를 견디다 못해 가족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은둔형 외톨이의 원인은 아직 불분명하다. A 부모는 경제적으론 넉넉했지만 부부관계는 냉랭했다아버지(73) " 엄마가 아들을 싸고돌아서 이렇게 됐다" 했고어머니(72) " 아빠가 무관심해서 아이가 엇나갔다" 했다.

A
씨는 그들에게 아들이 아니라 '공포'였다. A씨는 수많은 규칙을 만들었다. ' 안에서  먹을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내가 깨어 있는 동안은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마라매일 내가 적어주는 대로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워놔라….' 이런 규칙을 어기면 폭언을 퍼붓고때로는 주먹과 칼을 휘둘렀다부모는 아들 방을 들여다볼 엄두조차 못냈다진작 전문가와 상의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송 요원은 "체면(世間잃는  겁낸  같다" 했다보다못한 A씨의 형이 작년 12 오시카와씨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전문가들은 "한국도 남의 일이 아니다" 했다국내 은둔형 외톨이는 20~30만명으로 추산된다. 2012년에는 이들에 의한 연쇄 범죄가 발생하기도 했다4년째 집에 틀어박혀 살던 윤모(당시 27)씨가 이유 없이 수퍼 여주인을 흉기로 찔러 중상 입혔다서울 신림동 고시촌   방에 수년간 혼자 살던 김모(당시 30)씨도  직장 동료를 찾아가 흉기 휘둘렀다. (묻지마 살인과 폭력범 –필자가 삽입)

이날 오시카와씨 등은 A씨의 부모를  밖으로 나오게  , A 혼자 있는  안에 뛰어들었다팬티 바람으로 아침을 차리던 A씨는 반항할 기회를 놓쳤다오시카와씨는 A씨를 제압한 , "지금처럼 살아가면 건강과 생명을 지킬  없다병원에 가자" 설득해 이송 차량에 태웠다. A씨는  와중에도 정신이   팔려 있었다. "지웠어야 하는데…. 지웠어야 하는데….  휴대폰 보지 ."


50 '히키코모리자식 돌보는 80 부모남의 일일까(한국일보,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2021.11.27. 04:30),


, 장년이  ‘히키코모리: 일본 고령 사회 문제를 반면교사로
 일본에서는 사회와 담을 쌓고 방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을 ‘히키코모리(ひきこもり틀어박히다’는 뜻의 일본어 동사의 명사형)'라고 한다같은 집에 사는 가족 이외에는 사회적 접촉이 없다학교에도 가지 않고 직업도 가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 나가기 어려운 사람들이다1980년대에 등교를 거부하는 10대를 지칭하는 말로 처음 등장했는데1990년대 이후에는 학교나 직장사회적 교류를 일절 거부하는 사람을 폭넓게 뜻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일본 정부에서는 사회 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상태가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를 히키코모리라고 정의하는데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120  이상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다만집에서  발자국도 나가려 하지 않는 중증  편의점에 다녀오는 외출 정도는 감수하는 경증한때는 버젓한 직장 생활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외출을 꺼리게  사회적 부적응자의 경우까지 패턴이 다양해서실제로는 정부의 추정치를 한참 웃도는 히키코모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2019년에는 70 부친이 자택에서 40 중반의 장남을 살해한  자수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부친은 명문대를 졸업하고 정부 중앙 부처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차관급 고위직에 오른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였다아들은 아예  밖으로 나가지 않는 중증은 아니었지만10 가까이 이렇다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히키코모리 상태였다학업과 직업에서  차례 실패를 경험한  부모의 경제적 원조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인데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자주 폭력적 성향을 드러냈다장남이 쏟아내는 격렬한 분노를 견디기 어려웠던 아버지가 남들에게 해를 끼치기 전에 차라리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으로 아들을 해친 것이다

이제 다시 대인공포증의 정리로 되돌아가보자.

정신분열증(조현병)의 전조현상이 대인공포증에서 시작되는 것은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다. 정신분열증 환자들 가운데서 게임중독이 아닌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대인공포증의 특징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뒷담을 한다, 자신의 경직된 모습을 비판하고 비난한다고 불평을 한다 이것이 자신을 바보라,이상한 동아리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기 귀에 들리게 되면서 환청으로 조현병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대인공포증이 정신분열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린시절의 상처의 요소들, 부부의 갈등의 요소들 등이 관계되어지는 핵심 요소들 중에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이상의 날개와 대인공포증을 비교해 보자

위에서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이상은 어린시절에 엄마가 고아였다 그리고 형제가 3으로 그리고 2살에 큰집에 양자(입양)로 갔다 라는 점은 이상이 대인공포증 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날개의 3-5세의 유아기로 고착은 이상이 어린시절의 고립과 외로움으로 친구가 없이 혼자서 돋보기로 종이를 태우거나 큰엄마의 화장품을 장난감으로 만지면서 놀았던 그의 어린시절의 한 조각이 포함되어진 것으로 유추되어진다 이상은 날개를 쓸 시점에서 26세로 결혼을 했었다. 그가 부인과의 부부 관계는 이상이 날개에서 그와 부인과의 관계를 매춘부를 등장시켜서 묘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대인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성숙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던 이상 자신의 부부관계를 묘사한 것으로 유추된다. 그와 부인 사이에는 섹스가 전무하다. 그는 어떻게 부인과 친밀관계를 나눠야 하는가? 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상은 혼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그리고 섹스의 3개의 논문들 그리고 모더니즘의 작품들을 읽고 초현실주의와 의식의 흐름이 무엇인가? 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리 속은 세계적인 지식사회의 흐름을 꿰뚫을 정도로 박시하고 추장적으로 최고의 엘리트로 손상이 없었지만 경제적 고립과 지식인으로 무능력함을 고착이론과 부부 관계를 묘사한 작품이 날개로 볼 수 있다. 그는 스스로 그와 부인과 부부관계절음발이 부부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로써 명망 있는 앙드레 그린(Andre Green, 2003: 주㈜: 참고)은 그의 자서 죽은 엄마에서 어린시절에 엄마가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는 심한 우울증 환자의 손에서 성장한 어린이를 죽은 엄마 증후군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정신과의자이자 정신분석가이다. 엄마가 갑자기 어떤 사건 때문에 우울하게 될 때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엄마가 그 어린이의 출생이전에 자녀의 사망 혹은 유산으로 애도를 거치지 못하거나 엄마의 아버지, 어머니의 사망으로 정상적 애도의 과정을 상실한 엄마의 손에서 성장하는 어린이들은 엄마의 알 수 없는 우울증 때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엄마의 우울함은 거울반사로 아기에게 반사되어진다. 이런 경우에 아기는 텅 빈 공허감속에 빠지게 된다 그는 이 공허감을 불안으로 거세불안(사랑의 상실, 버림받음, 처벌)과 달리 존재의 불안으로 보았다. 이러한 불안을 그는 텅 빈 정신증으로 이름을 붙였다. 그는 예술가들의 정신분석 치료를 많이 경험한 치료 사례들을 통해서 프랑스에서 예술가들이 특별히 창작 활동이 중단된 사람들을 정신분석으로 치료를 하면서 그들의 창작 활동이 멈춰서 진행이 되지 않을 때 그들의 마음 속에 텅 빈 불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채워도 채워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 존재의 텅 빈 공간의 불안을 기술하고 있다.

이상은 엄마가 살아 있었지만 2살 때까지 죽은 엄마 증후군에 그리고 2살 때 큰집에 입양으로 엄마를 상실함으로써 신체접촉, 피부접촉을 통한 친밀한 대상관계를 습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폐결핵으로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유아기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26세까지의 삶에서 자아의식을 통한 고통들결혼직후의 내면의 고통들살을 찢고 피를 뽑아서 뼈를 깎아서 날개라는 작품을 창작을 했다.

일반사람들은 5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6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한다 그들은 일반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 듣지 못하는 것들, 냄새를 맞지 못하는 것들, 촉감으로 잠지하지 못하는 것들을 느끼고 보고 감지를 한다 고로 그들은 일반인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내면의 고통들을 살과 피로 뼈를 깎아서 만든 그들의 작품들이 우리를 공감하고 감동하고 느끼게 만들어주는 예술품들이 아닌가?

이상은 어린시절에 자신의 고립, 외로움, 공허한 텅 빈 불안 그리고 성장의 과정에서 느끼는 어른으로서 무기력함과 무능함 그리고 결혼 후에 이상한 부부 관계들을 조각들로 모아서 날개라는 작품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27세로 사망을 했다

그가 죽고 나서 100년 후에(정확하게는 86) 우리사회에서 터져 나오는 대인공포증의 인간 군상들을 정확하게 예견한 것이다. 프로이트가 20세기에 가장 인류에게 공헌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는 것은 그가 100년 잔에 기술한 이론들이 오늘날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100년을 앞서 예견한 것이 아닌가?

이상은 전채임에 틀임이 없다 그가 날개의 서두에서 박제가 된 천제를 아시요, 그래도 유쾌하오 라고 말을 붙인 것은 자신이 살아온 27년의 고통스러운 내면의 자아 관찰을 하면서 왜 유쾌하다고 말을 했는가?

이상은 양반집 자손으로 어린시절부터 한학을 공부했음이 틀림이 없다, 일제시대에 조선어는 금지되었다 고로 그는 공자의 논어의 첫 귀 절학이시습지면 불역열효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말에서 배우고 익히면 이 또한 즐겁기 않는가! 에서 그의 고통스러운 삶의 내용을 한 개의 작품으로 만드는 소재가 된 과거의 고통이 그대로 한 가닥의 글을 쓰는 즐거움을 제공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진통제아스피린수면제아닐린을 복용하는 것과 오늘날 대인공포증 환자가 복용하는 진통제타이레놀수면제 프로포폴(Propofol)(우유주사)차이점이 무엇인가?

이상은 어린시절에 죽은 엄마 증후군으로 내면의 텅 빈 불안의 공간에 압도당해서 포로가 된 것이 아니고, 속에 최신의 지식들로 채워 넣었다. 그는 자신의 심리적 고통들세상을 살아오면서 경험한 갈등들을 살을 찢고 피를 뽑고 뼈를 깎아서 작품을 창조를 했다. 그것이 100년 후에 우리의 사회적인 인간 군상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본토에서 모택동의 공산주의와 싸우던 민주주의의 장제스(장개석)이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투척으로 일본의 백천 대장의 눈을 박살된 쾌거를 접하고 그가 한 명언을 인용하고자 한다, “살아서 백 년을 가기 어려운데 당신은 죽어서 천년을 갔습니다라는 말이 떠 오른다. 이상의 날개는 대입 수능에 3번이나 출제되었다고 한다(위키백과). 이상이라는 이름은 앞으로 계속해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한국의 현대 소설을 개척한 선구자로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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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건드선(Gunderson). 치료 되는 자아(1989), 보드라인 환자의 치료 안내서(1984), 보드라인 성격장애(1984), 보드라인 환자의 치료 사례집(1984)

보웬(Bowen, 1985). 치료적인 실제 안에서 가족치료

무어(Moore, 1999). 정신분석 안에서 현실의 창조

바알로우(Barlow). 불안과 불안장애(2001), 공황장애와 공포증(1989).

에릭슨(Erikson). 어린이와 사회(1976), 주체성 위기(1968)

페니첼(Fenichel, 1945). 신경증의 정신분석학적인 이론

미뉴친(Minuchin). 정신병원 안에서 미침(1992), 심리신체와 가족: 맥락 안에서 거식증(1979)

그린(Green). 에로스의 체인(2003), 죽은 엄마(1999), 사적인 미침(1996)

엘렌버그(Ellenberger, 1970). 무의식의 발견: 역동학적 정신의학의 진화와 역사

미아레(Mearles). 친밀감과 고립(2005), 놀이의 상징(2005), 보드라인 장애의 해리 모델(2012), 보드라인 장애의 대화 모델(2012)

센골드(Shengold). 영혼의 살인(1991), 영혼의 살인 재 방문(2000), 일상생활에서 망상(1992)

코호트(Kohut). 어떻게 분석이 치료를 하는가(1984), 자아의 분석(1971)

투스틴(Tustin).

그린스펜(Greenspan, 1999). 발달에 근거한 심리치료

프라모(Framo, 1982), 결혼과 가족 치료 안에서 탐색

스톤(Stone, 1983). 정신분열증 치료: 분석 치료적인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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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저서들은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져 있으니 치료사의 홈 페이지에 있는 전문서적 안내에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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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이상의 날개 원문 첨부

날개[1]
이상, 1936년 《조광(朝光)》 지 발표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 — 만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위트와 패러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하고 고매하리다.

19
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도스토옙스키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일 것 같소. 위고를 불란서의 빵 한 조각이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지언인 듯싶소. 그러나 인생 혹은 그 모형에 있어서디테일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께 고하는 것이니…….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생채기도 머지않아 완치될 줄 믿소. 굿바이.” 감정은 어떤포즈’. (포즈의 원소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지 나도 모르겠소.) 그 포우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합네다.

나는 내 비범한 발육을 회고하여 세상을 보는 안목을 규정하였소.

여왕봉과 미망인세상의 하고 많은 여인이 본질적으로 이미 미망인이 아닌 이가 있으리까? 아니, 여인의 전부가 그 일상에 있어서 개개미망인이라는 내 논리가 뜻밖에도 여성에 대한 모독이 되오? 굿바이.

33번지라는 것이 구조가 흡사 유곽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한 번지에 18가구가 죽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서 창호가 똑같고 아궁이 모양이 똑같다. 게다가 각 가구에 사는 사람들이 송이송이 꽃과 같이 젊다.

해가 들지 않는다. 해가 드는 것을 그들이 모른 체하는 까닭이다. 턱살밑에다 철줄을 매고 얼룩 진 이부자리를 널어 말린다는 핑계로 미닫이에 해가 드는 것을 막아 버린다. 침침한 방안에서 낮잠들을 잔다. 그들은 밤에는 잠을 자지 않나? 알 수 없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잠만 자느라고 그런 것을 알 길이 없다. 33번지 18가구의 낮은 참 조용하다.

조용한 것은 낮뿐이다. 어둑어둑하면 그들은 이부자리를 걷어 들인다. 전등불이 켜진 뒤의 18가구는 낮보다 훨씬 화려하다. 저물도록 미닫이 여닫는 소리가 잦다. 바빠진다. 여러 가지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비웃 굽는 내, 탕고도오랑내, 뜨물내, 비눗내.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도 그들의 문패가 제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이다.

18가구를 대표하는 대문이라는 것이 일각이 져서 외따로 떨어지기는 했으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도 닫힌 일이 없는, 한길이나 마찬가지 대문인 것이다. 온갖 장사치들은 하루 가운데 어느 시간에라도 이 대문을 통하여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이네들은 문간에서 두부를 사는 것이 아니라, 미닫이를 열고 방에서 두부를 사는 것이다. 이렇게 생긴 33번지 대문에 그들 18 가구의 문패를 몰아다 붙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어느 사이엔가 각 미닫이 위 백인당이니 길상당이니 써 붙인 한 곁에다 문패를 붙이는 풍속을 가져 버렸다.

내 방 미닫이 위 한 곁에 칼표 딱지를 넷에다 낸 것만한 내아니! 내 아내의 명함이 붙어 있는 것도 이 풍속을 좇은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러나 그들의 아무와도 놀지 않는다. 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사도 않는다. 나는 내 아내와 인사하는 외에 누구와도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내 아내 외의 다른 사람과 인사를 하거나 놀거나 하는 것은 내 아내 낯을 보아 좋지 않은 일인 것만 같이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만큼까지 내 아내를 소중히 생각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내 아내를 소중히 생각한 까닭은 이 33번지 18가구 속에서 내 아내가 내 아내의 명함처럼 제일 작고 제일 아름다운 것을 안 까닭이다. 18가구에 각기 빌어 들은 송이송이 꽃들 가운데서도 내 아내가 특히 아름다운 한 떨기의 꽃으로 이 함석지붕 밑 볕 안 드는 지역에서 어디까지든지 찬란하였다. 따라서 그런 한 떨기 꽃을 지키고아니 그 꽃에 매어달려 사는 나라는 존재가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거북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나는 어디까지든지 내 방이집이 아니다. 집은 없다. — 마음에 들었다. 방안의 기온은 내 체온을 위하여 쾌적하였고, 방안의 침침한 정도가 또한 내 안력을 위하여 쾌적하였다. 나는 내 방 이상의 서늘한 방도 또 따뜻한 방도 희망하지 않았다. 이 이상으로 밝거나 이 이상으로 아늑한 방은 원하지 않았다. 내 방은 나 하나를 위하여 요만한 정도를 꾸준히 지키는 것 같아 늘 내 방에 감사하였고, 나는 또 이런 방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아서 즐거웠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하는 것을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행복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다고 불행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그날을 그저 까닭없이 펀둥펀둥 게으르고만 있으면 만사는 그만이었던 것이다.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속에서 뒹굴면서, 축 쳐져 있는 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다.

이 절대적인 내 방은 대문간에서 세어서 똑 일곱째 칸이다. 러키세븐의 뜻이 없지 않다. 나는 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훈장처럼 사랑하였다. 이런 이 방이 가운데 장지로 말미암아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그것이 내 운명의 상징이었던 것을 누가 알랴? 아랫방은 그래도 해가 든다. 아침결에 책보만한 해가 들었다가 오후에 손수건만 해지면서 나가 버린다. 해가 영영 들지 않는 윗방이 즉 내 방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볕드는 방이 아내 방이요, 볕 안드는 방이 내 방이요 하고 아내와 나 둘 중에 누가 정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평이 없다.

아내가 외출만 하면 나는 얼른 아랫방으로 와서 그 동쪽으로 난 들창을 열어 놓고 열어놓으면 들이비치는 햇살이 아내의 화장대를 비춰 가지각색 병들이 아롱이 지면서 찬란하게 빛나고, 이렇게 빛나는 것을 보는 것은 다시없는 내 오락이다. 나는 조그만 돋보기를 꺼내가지고 아내만이 사용하는 지리가미를 꺼내 가지고 그을려가면서 불장난을 하고 논다. 평행광선을 굴절시켜서 한 초점에 모아가지고 그 초점이 따끈따끈해지다가, 마지막에는 종이를 그을리기 시작하고, 가느다란 연기를 내면서 드디어 구멍을 뚫어 놓는 데까지 이르는, 고 얼마 안 되는 동안의 초조한 맛이 죽고 싶을 만큼 내게는 재미있었다.

이 장난이 싫증이 나면 나는 또 아내의 손잡이 거울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논다. 거울이란 제 얼굴을 비칠 때만 실용품이다. 그 외의 경우에는 도무지 장난감인 것이다. 이 장난도 곧 싫증이 난다.

나의 유희심은 육체적인 데서 정신적인 데로 비약한다. 나는 거울을 내던지고 아내의 화장대 앞으로 가까이 가서 나란히 늘어 놓인 그 가지각색의 화장품 병들을 들여다본다. 고것들은 세상의 무엇보다도 매력적이다. 나는 그 중의 하나만을 골라서 가만히 마개를 빼고 병 구멍을 내 코에 가져다 대고 숨죽이듯이 가벼운 호흡을 하여 본다. 이국적인 센슈얼한 향기가 폐로 스며들면 나는 저절로 스르르 감기는 내 눈을 느낀다. 확실히 아내의 체취의 파편이다.

나는 도로 병마개를 막고 생각해 본다. 아내의 어느 부분에서 요 냄새가 났던가를…… 그러나 그것은 분명하지 않다. ? 아내의 체취는 여기 늘어섰을 가지각색 향기의 합계일 것이니까.

아내의 방은 늘 화려하였다. 내 방이 벽에 못 한 개 꽂히지 않은 소박한 것인 반대로, 아내 방에는 천장 밑으로 쫙 돌려 못이 박히고, 못마다 화려한 아내의 치마와 저고리가 걸렸다. 여러 가지 무늬가 보기 좋다. 나는 그 여러 조각의 치마에서 늘 아내의 동체와, 그 동체가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포우즈를 연상하고 연상하면서 내 마음은 늘 점잖지 못하다.

그렇건만 나에게는 옷이 없었다. 아내는 내게 옷을 주지 않았다. 입고 있는 코르덴양복 한 벌이 내 자리옷이었고 통상복과 나들이옷을 겸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이넥의 스웨터가 한 조각 사철을 통한 내 내의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다 빛이 검다. 그것은 내 짐작 같아서는 즉 빨래를 될 수 있는 데까지 하지 않아도 보기 싫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허리와 두 가랑이 세 군데 다고무 밴드가 끼어 있는 부드러운 사루마다를 입고 그리고 아무 소리 없이 잘 놀았다.

어느덧 손수건 만해졌던 볕이 나갔는데 아내는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요만 일에도 좀 피곤하였고 또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내 방으로 가 있어야 될 것을 생각하고 그만 내 방으로 건너간 다. 내 방은 침침하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낮잠을 잔다. 한 번도 걷은 일이 없는 내 이부자리 는 내 몸뚱이의 일부분처럼 내게는 참 반갑다. 잠은 잘 오는 적도 있다. 그러나 또 전신이 까칫까칫하면서 영 잠이 오지 않는 적도 있다. 그런 때는 아무 제목으로나 제목을 하나 골라서 연구하였다. 나는 내 좀 축축한 이불속에서 참 여러 가지 발명도 하였고 논문도 많이 썼다. 시도 많이 지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잠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내 방에 담겨서 철철 넘치는 그 흐늑흐늑한 공기 에 다 비누처럼 풀어져서 온데간데없고, 한잠 자고 깨인 나는 속이 무명헝겊이나 메밀껍질로 띵띵 찬 한 덩어리 베개와도 같은 한 벌 신경이었을 뿐이고 뿐이고 하였다.

그러기에 나는 빈대가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러나 내 방에서는 겨울에도 몇 마리의 빈대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내게 근심이 있었다면 오직 이 빈대를 미워하는 근심일 것이다. 나는 빈대에게 물려서 가려운 자리를 피가 나도록 긁었다. 쓰라리다. 그것은 그윽한 쾌감에 틀림없었다. 나는 혼곤히 잠이 든다.

나는 그러나 그런 이불 속의 사색 생활에서도 적극적인 것을 궁리하는 법이 없다. 내게는 그럴 필요가 대체 없었다. 만일 내가 그런 좀 적극적인 것을 궁리해내었을 경우에 나는 반드시 내 아내 와 의논하여야 할 것이고, 그러면 반드시 나는 아내에게 꾸지람을 들을 것이고나는 꾸지람이 무서웠다느니 보다는 성가셨다. 내가 제법 한 사람의 사회인의 자격으로 일을 해 보는 것도 아내에게 사설 듣는 것도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될 수만 있으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 버리고도 싶었다.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아내는 하루에 두 번 세수를 한다.

나는 하루 한 번도 세수를 하지 않는다.

나는 밤중 세 시나 네 시쯤 해서 변소에 갔다.

달이 밝은 밤에는 한참씩 마당에 우두커니 섰다가 들어오곤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 18가구의 아무와도 얼굴이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18가구의 젊은 여인네 얼굴들을 거반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내 아내만 못하였다.

열한 시쯤 해서 하는 아내의 첫 번 세수는 좀 간단하다. 그러나 저녁 일곱 시쯤 해서 하는 두 번째 세수는 손이 많이 간다. 아내는 낮에 보다도 밤에 더 좋고 깨끗한 옷을 입는다. 그리고 낮에도 외출하고 밤에도 외출하였다.

아내에게 직업이 있었던가? 나는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만일 아내에게 직업이 없었다면 같이 직업이 없는 나처럼 외출할 필요가 생기지 않을 것인데아내는 외출한다. 외출할 뿐만 아니라 내객이 많다. 아내에게 내객이 많은 날은 나는 온종일 내 방에서 이불을 쓰고 누워 있어야만 된다.

불장난도 못한다. 화장품 냄새도 못 맡는다. 그런 날은 나는 의식적으로 우울해 하였다. 그러면 아내는 나에게 돈을 준다. 오십 전짜리 은화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을 무엇에 써야 옳을지 몰라서 늘 머리맡에 던져두고 두고 한 것이 어느 결에 모여서 꽤 많아졌다 어느 날 이것을 본 아내는 금고처럼 생긴 벙어리를 사다 준다.

나는 한 푼씩 한 푼씩 그 속에 넣고 열쇠는 아내가 가져갔다. 그 후에도 나는 더러 은화를 그 벙어리에 넣은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게을렀다. 얼마 후 아내의 머리 쪽에 보지 못하던 누깔잠이 하나 여드름처럼 돋았던 것은 바로 그 금고형 벙어리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는 증거일까. 그러나 나는 드디어 머리맡에 놓았던 그 벙어리에 손을 대지 않고 말았다. 내 게으름은 그런 것에 내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싫었다.

아내에게 내객이 있는 날은 이불 속으로 암만 깊이 들어가도 비 오는 날만큼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 때 나에게 왜 늘 돈이 있나 왜 돈이 많은가를 연구했다. 내객들은 장지 저쪽에 내가 있는 것을 모르나보다. 내 아내와 나도 좀 하기 어려운 농을 아주 서슴지 않고 쉽게 해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내 아내를 찾은 서너 사람의 내객들은 늘 비교적 점잖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자정이 좀 지나면 으레 돌아들 갔다.

그들 가운데에는 퍽 교양이 얕은 자도 있는 듯싶었는데, 그런 자는 보통 음식을 사다 먹고 논다.

그래서 보충을 하고 대체로 무사하였다. 나는 우선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기에 착수하였으나 좁은 시야와 부족한 지식으로는 이것을 알아내기 힘이 든다. 나는 끝끝내 내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말려나보다.

아내는 늘 진솔 버선만 신었다. 아내는 밥도 지었다. 아내가 밥을 짓는 것을 나는 한 번도 구경한 일은 없으나 언제든지 끼니때면 내 방으로 내 조석 밥을 날라다 주는 것이다. 우리 집에는 나와 내 아내 외의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밥은 분명 아내가 손수 지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나를 자기 방으로 부른 일은 없다. 나는 늘 윗방에서나 혼자서 밥을 먹고 잠을 잤다.

밥은 너무 맛이 없었다. 반찬이 너무 엉성하였다. 나는 닭이나 강아지처럼 말없이 주는 모이를 넓적넓적 받아먹기는 했으나 내심 야속하게 생각한 적도 더러 없지 않다.

나는 안색이 여지없이 창백해가면서 말라 들어갔다. 나날이 눈에 보이듯이 기운이 줄어들었다. 영 양 부족으로 하여 몸뚱이 곳곳의 뼈가 불쑥불쑥 내어 밀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수십 차를 돌쳐 눕지 않고는 여기저기가 배겨서 나는 배겨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이불 속에서 아내가 늘 흔히 쓸 수 있는 저 돈의 출처를 탐색해 내는 일 변 장지 틈으로 새어나오는 아랫방의 음성은 무엇일까를 간단히 연구하였다.

나는 잠이 잘 안 왔다.

깨달았다. 아내가 쓰는 그 돈은 내게는 다만 실없는 사람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까닭 모를 내객들이 놓고 가는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왜 그들 내객은 돈을 놓고 가나? 왜 내 아내는 그 돈을 받아야 되나? 하는 예의 관념이 내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저 예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혹 무슨 대가일까? 보수일까? 내 아 내가 그들의 눈에는 동정을 받아야만 할 한 가엾은 인물로 보였던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으레 내 머리는 그냥 혼란하여 버리고 버리고 하였다. 잠들기 전에 획득했다는 결론이 오직 불쾌하다는 것뿐이었으면서도 나는 그런 것을 아내에게 물어 보거나 한 일이 참 한 번도 없다. 그것은 대체 귀찮기도 하려니와 한잠 자고 일어나는 나는 사뭇 딴 사람처럼 이것도 저것도 다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만 두는 까닭이다.

내객들이 돌아가고, 혹 외출에서 돌아오고 하면 아내는 간편한 것으로 옷을 바꾸어 입고 내 방으로 나를 찾아온다. 그리고 이불을 들치고 내 귀에는 영 생동생동한 몇 마디 말로 나를 위로하려든다. 나는 조소도 고소도 홍소도 아닌 웃음을 얼굴에 띠고 아내의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본다. 아내는 방그레 웃는다. 그러나 그 얼굴에 떠도는 일말의 애수를 나는 놓치지 않는다.

아내는 능히 내가 배고파하는 것을 눈치 챌 것이다. 그러나 아랫방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나에게 주려 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나를 존경하는 마음일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배가 고프면서도 적이 마음이 든든한 것을 좋아했다. 아내가 무엇이라고 지껄이고 갔는지 귀에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다만 내 머리맡에 아내가 놓고 간 은화가 전등불에 흐릿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고 금고형 벙어리 속에 은화가 얼마만큼이나 모였을까? 나는 그러나 그것을 쳐들어 보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의욕도 기원도 없이 그 단춧구멍처럼 생긴 틈바구니로 은화를 떨어뜨려 둘 뿐이었다.

왜 아내의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나 하는 것이 풀 수 없는 의문인 것같이, 왜 아내는 나에게 돈을 놓고 가나 하는 것도 역시 나에게는 똑같이 풀 수 없는 의문이었다.

내 비록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 싫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고것이 내 손가락 닿는 순간에서부터 고 벙어리 주둥이에서 자취를 감추기까지의 하잘것없는 짧은 촉각이 좋았달 뿐이지 그 이상 아무 기쁨도 없다.

어느 날 나는 고 벙어리를 변소에 갖다 넣어 버렸다. 그 때 벙어리 속에는 몇 푼이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고 은화들이 꽤 들어 있었다.

나는 내가 지구 위에 살며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지구가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의 공간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참 허망하였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 해서 한시바삐 내려 버리고 싶었다.

이불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뒤에는 나는 고 은화를 고 벙어리에 넣고 넣고 하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나는 아내가 손수 벙어리를 사용하였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벙어리도 돈도 사실은 아내에게만 필요한 것이지 내게는 애초부터 의미가 전연 없는 것이었으니까 될 수만 있으면 그 벙어리를 아내는 아내 방으로 가져갔으면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내는 가져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내 방으로 가져다 둘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으나 그 즈음에는 아내의 내객이 워낙 많아서 내가 아내 방에 가 볼 기회가 도무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변소에 갖다 집어넣어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서글픈 마음으로 아내의 꾸지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내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않았을 뿐 아니라 여전히 돈은 돈대로 머리맡에 놓고 가지 않나! 내 머리맡에는 어느덧 은화가 꽤 많이 모였다.

내객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일종의 쾌감그 외의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을 나는 또 이불 속에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쾌감이라면 어떤 종류의 쾌감일까를 계속하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불 속의 연구로는 알 길이 없었다. 쾌감, 쾌감, 하고 나는 뜻밖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 흥미를 느꼈다.

아내는 물론 나를 늘 감금하여 두다시피 하여 왔다. 내게 불평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중에도 나는 그 쾌감이라는 것의 유무를 체험하고 싶었다.

나는 아내의 밤 외출 틈을 타서 밖으로 나왔다. 나는 거리에서 잊어버리지 않고 가지고 나온 은화를 지폐로 바꾼다. 오 원이나 된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목적지를 잃어버리기 위하여 얼마든지 거리를 쏘다녔다. 오래간만에 보는 거리는 거의 경이에 가까울 만큼 내 신경을 흥분시키지 않고는 마지않았다. 나는 금시에 피곤하여 버렸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그리고 밤이 이슥하도록 까닭을 잃어버린 채 이 거리 저 거리로 지향 없이 헤매었다. 돈은 물론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돈을 쓸 아무 엄두도 나서지 않았다. 나는 벌써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

나는 과연 피로를 이 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나는 가까스로 내 집을 찾았다. 나는 내 방을 가려면 아내 방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아내에게 내객이 있나 없나를 걱정하면서 미닫이 앞에서 좀 거북살스럽게 기침을 한 번 했더니, 이것은 참 또 너무도 암상스럽게 미닫이가 열리면서 아내의 얼굴과 그 등 뒤에 낯선 남자의 얼굴이 이쪽을 내다보는 것이다. 나는 별안간 내어 쏟아지는 불빛에 눈이 부셔서 좀 머뭇머뭇했다.

나는 아내의 눈초리를 못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체하는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어쨌든 아내의 방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안 되니까…….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엇보다도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불 속에서는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암만해도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걸을 때는 몰랐더니 숨이 차다. 등에 식은땀이 쭉 내배인다. 나는 외출한 것을 후회하였다. 이런 피로를 잊고 어서 잠이 들었으면 좋았다. 한잠 잘 자고 싶었다.

얼마동안이나 비스듬히 엎드려 있었더니 차츰차츰 뚝딱 거리는 가슴 동계가 가라앉는다. 그만해도 우선 살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들쳐 반듯이 천장을 향하여 눕고 쭉 다리를 뻗었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가슴의 동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아랫방에서 아내와 그 남자의 내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기척이 장지 틈으로 전하여 왔던 것이다. 청각을 더 예민하게 하기 위하여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아내와 남자는 앉았던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고 일어서면서 옷과 모자 쓰는 기척이 나는 듯하더니 이어 미닫이가 열리고 구두 뒤축 소리가 나고 그리고 뜰에 내려서는 소리가 쿵 하고 나면서 뒤를 따르는 아내의 고무신 소리가 두어 발짝 찍찍 나고 사뿐사뿐 나나 하는 사이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대문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아내의 이런 태도를 본 일이 없다. 아내는 어떤 사람과도 결코 소곤거리는 법이 없다. 나는 윗방에서 이불을 쓰고 누운 동안에도 혹 술이 취해서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내객들의 담화는 더러 놓치는 수가 있어도 아내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말소리는 일찍이 한마디도 놓쳐 본 일이 없다.

더러 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있어도 나는 그것이 태연한 목소리로 내 귀에 들렸다는 이유로 충분히 안심이 되었다.

그렇던 아내의 이런 태도는 필시 그 속에 여간하지 않은 사정이 있는 듯 시피 생각이 되고 내 마음은 좀 서운했으나 그보다도 나는 좀 너무 피로해서 오늘만은 이불 속에서 아무것도 연구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잠을 기다렸다. 낮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문간에 나간 아내도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흐지부지 나는 잠이 들어 버렸다. 꿈이 얼쑹덜쑹 종을 잡을 수 없는 거리의 풍경을 여전히 헤매었다.

나는 몹시 흔들렸다. 내객을 보내고 들어온 아내가 잠든 나를 잡아 흔드는 것이다.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내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다. 나는 좀 눈을 비비고 아내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노기가 눈초리에 떠서 얇은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좀처럼 이 노기가 풀리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벼락이 내리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쌔근 하는 숨소리가 나면서 부스스 아내의 치맛자락 소리가 나고 장지가 여닫히며 아내는 아내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몸을 돌쳐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개구리처럼 엎드리고 엎드려서 배가 고픈 가운데도 오늘 밤의 외출을 또 한 번 후회하였다.

나는 이불 속에서 아내에게 사죄하였다. 그것은 네 오해라고…… 나는 사실 밤이 퍽 이슥한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것이 네 말마따나 자정 전인지는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너무 피곤하였다. 오래간만에 나는 너무 많이 걸은 것이 잘못이다.

내 잘못이라면 잘못은 그것 밖에 없다. 외출은 왜 하였더냐고? 나는 그 머리맡에 저절로 모인 오 원 돈을 아무에게라도 좋으니 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내 잘못이라면 나는 그렇게 알겠다. 나는 후회하고 있지 않나? 내가 그 오 원 돈을 써 버릴 수가 있었던들 나는 자정 안에 집에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리는 너무 복잡하였고 사람은 너무도 들끓었다. 나는 어느 사람을 붙들고 그 오 원 돈을 내어 주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여지없이 피곤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좀 쉬고 싶었다. 눕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 짐작 같아서는 밤이 어지간히 늦은 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불행히도 자정 전이었다는 것은 참 안된 일이다. 미안한 일이다. 나는 얼마든지 사죄하여도 좋다. 그러나 종시 아내의 오해를 풀지 못하였다 하면 내가 이렇게까지 사죄하는 보람은 그럼 어디 있나? 한심하였다.

한 시간 동안을 나는 이렇게 초조하게 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불을 홱 젖혀 버리고 일어나서 장지를 열고 아내 방으로 비칠비칠 달려갔던 것이다. 내게는 거의 의식이라는 것이 없었다.

나는 아내 이불 위에 엎드러지면서 바지 포켓 속에서 그 돈 오 원을 꺼내 아내 손에 쥐어 준 것을 간신히 기억할 뿐이다.

이튿날 잠이 깨었을 때 나는 내 아내 방 아내 이불 속에 있었다. 이것이 이 33번지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내가 아내 방에서 잔 맨 처음이었다.

해가 들창에 훨씬 높았는데 아내는 이미 외출하고 벌써 내 곁에 있지는 않다. 아니! 아내는 엊저녁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에 외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조사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전신이 찌뿌드드한 것이 손가락 하나 꼼짝할 힘조차 없었다. 책보보다 좀 작은 면적의 볕이 눈이 부시다. 그 속에서 수없이 먼지가 흡사 미생물처럼 난무한다. 코가 콱 막히는 것 같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낮잠을 자기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코를 스치는 아내의 체취는 꽤 도발적이었다. 나는 몸을 여러 번 여러 번 비비꼬면서 아내의 화장대에 늘어선 고 가지각색 화장품 병들의 마개를 뽑았을 때 풍기는 냄새를 더듬느라고 좀처럼 잠은 들지 않는 것을 나는 어찌하는 수도 없었다.

견디다 못하여 나는 그만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서 내 방으로 갔다. 내 방에는 다 식어 빠진 내 끼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다. 아내는 내 모이를 여기다 두고 나간 것이다. 나는 우선 배가 고팠다. 한 숟갈을 입에 떠 넣었을 때 그 촉감은 참 너무도 냉회와 같이 써늘하였다. 나는 숟갈을 놓고 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하룻밤을 비었던 내 이부자리는 여전히 반갑게 나를 맞아 준다. 나는 내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번에는 참 늘어지게 한잠 잤다.

내가 잠을 깬 것은 전등이 켜진 뒤다. 그러나 아내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나보다.

아니! 돌아왔다 또 나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상고하여 무엇하나? 정신이 한결 난다. 나는 밤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 돈 오 원을 아내 손에 쥐어 주고 넘어졌을 때에 느낄 수 있었던 쾌감을 나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객들이 내 아내에게 돈 놓고 가는 심리며 내 아내가 내게 돈 놓고 가는 심리의 비밀을 나는 알아낸 것 같아서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다.

나는 속으로 빙그레 웃어 보았다.

이런 것을 모르고 오늘까지 지내온 내 자신이 어떻게 우스꽝스럽게 보이는지 몰랐다.

따라서 나는 또 오늘 밤에도 외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돈이 없다. 나는 또 엊저녁에 그 돈 오 원을 한꺼번에 아내에게 주어 버린 것을 후회하였다. 또 고 벙어리를 변소에 갖다 처넣어 버린 것도 후회하였다. 나는 실없이 실망하면서 습관처럼 그 돈 오 원이 들어 있던 내 바지 포켓에 손을 넣어 한번 휘둘러보았다. 뜻밖에도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있었다. 이 원 밖에 없다. 그러나 많아야 맛은 아니다. 얼마간이고 있으면 된다. 나는 그만한 것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기운을 얻었다. 나는 그 단벌 다 떨어진 코르덴 양복을 걸치고 배고픈 것도 주제 사나운 것도 다 잊어버리고 활갯짓을 하면서 또 거리로 나섰다. 나서면서 나는 제발 시간이 화살 단듯해서 자정이 어서 홱 지나 버렸으면 하고 조바심을 태웠다. 아내에게 돈을 주고 아내 방에서 자 보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좋았지만 만일 잘못해서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갔다가 아내의 눈총을 맞는 것은 그것은 여간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저물도록 길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하면서 또 지향 없이 거리를 방황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좀처럼 피곤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이 좀 너무 더디게 가는 것만 같아서 안타까웠다.

경성역(京城驛) 시계가 확실히 자정을 지난 것을 본 뒤에 나는 집을 향하였다. 그날은 그 일각대문에서 아내와 아내의 남자가 이야기하고 서 있는 것을 만났다. 나는 모른 체하고 두 사람 곁을 지나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아내도 들어왔다. 와서는 이 밤중에 평생 안 하던 쓰레질을 하는 것이었다. 조금 있다가 아내가 눕는 기척을 엿보자마자 나는 또 장지를 열고 아내 방으로 가서 그 돈 이 원을 아내 손에 덥석 쥐어 주고 그리고하여간 그 이 원을 오늘 밤에도 쓰지 않고 도로 가져온 것이 참 이상하다는 듯이 아내는 내 얼굴을 몇 번이고 엿보고아내는 드디어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자기 방에 재워 주었다. 나는 이 기쁨을 세상의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편히 잘 잤다.

이튿날도 내가 잠이 깨었을 때는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또 내 방으로 가서 피곤한 몸이 낮잠을 잤다. 내가 아내에게 흔들려 깨었을 때는 역시 불이 들어온 뒤였다. 아내는 자기 방으로 나를 오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또 처음이다. 아내는 끊임없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내 팔을 이끄는 것이 다. 나는 이런 아내의 태도 이면에 엔간치 않은 음모가 숨어 있지나 않은가 하고 적이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내의 하자는 대로 아내의 방으로 끌려갔다. 아내 방에는 저녁 밥상이 조촐하게 차려져 있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면 나는 이틀을 굶었다. 나는 지금 배고픈 것까지도 긴가민가 잊어버리고 어름어름하던 차다.

나는 생각하였다. 이 최후의 만찬을 먹고 나자마자 벼락이 내려도 나는 차라리 후회하지 않을 것을. 사실 나는 인간 세상이 너무나 심심해서 못 견디겠던 차다. 모든 것이 성가시고 귀찮았으나 그러나 불의의 재난이라는 것은 즐겁다.

나는 마음을 턱 놓고 조용히 아내와 마주 이 해괴한 저녁밥을 먹었다.

우리 부부는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밥을 먹은 뒤에도 나는 말이 없이 부스스 일어나서 내 방으로 건너가 버렸다. 아내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아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그리고 벼락이 떨어질 테거든 어서 떨어져라 하고 기다렸다.

오 분! 십 분!

그러나 벼락은 내리지 않았다. 긴장이 차츰 풀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어느덧 오늘 밤에도 외출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돈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돈은 확실히 없다. 오늘은 외출하여도 나중에 올 무슨 기쁨이 있나? 내 앞이 그저 아뜩하였다. 나는 화가 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굴렀다. 금시 먹은 밥이 목으로 자꾸 치밀어 올라온다. 메스꺼웠다.

하늘에서 얼마라도 좋으니 왜 지폐가 소낙비처럼 퍼붓지 않나? 그것이 그저 한없이 야속하고 슬펐다.

나는 이렇게 밖에 돈을 구하는 아무런 방법도 알지는 못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좀 울었나 보다.

왜 없느냐면서…….

그랬더니 아내가 또 내 방에를 왔다. 나는 깜짝 놀라 아마 이제야 벼락이 내리려 나보다 하고 숨을 죽이고 두꺼비 모양으로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떨어진 입을 새어나오는 아내의 말소리는 참 부드러웠다. 정다웠다. 아내는 내가 왜 우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란다.

나는 실없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사람의 속을 환하게 들여다보는고 해서 나는 한편으로 슬그머니 겁도 안 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 내게 돈을 줄 생각이 있나보다, 만일 그렇다면 오죽이나 좋은 일일까. 나는 이불 속에 뚤뚤 말린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아내의 다음 거동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옜소하고 내 머리맡에 내려뜨리는 것은 그 가뿐한 음향으로 보아 지폐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 귀에다 대고 오늘일랑 어제보다도 늦게 돌아와도 좋다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우선 그 돈이 무엇보다도 고맙고 반가웠다.

어쨌든 나섰다. 나는 좀 야맹증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거리로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리고는 경성역 일 이등 대합실 한 곁 티이루움에를 들렀다. 그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거기는 우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안 온다. 설사 왔다가도 곧 돌아가니까 좋다. 나는 날마다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리라 속으로 생각하여 두었다. 제일 여기 시계가 어느 시계보다도 정확하리라는 것이 좋았다. 섣불리 서투른 시계를 보고 그것을 믿고 시간 전에 집에 돌아갔다가 큰 코를 다쳐서는 안 된다.

나는 한 복스에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주 앉아서 잘 끓은 커피를 마셨다. 총총한 가운데 여객들 은 그래도 한 잔 커피가 즐거운가보다. 얼른얼른 마시고 무얼 좀 생각하는 것같이 담벼락도 좀 쳐다보고 하다가 곧 나가 버린다. 서글프다. 그러나 내게는 이 서글픈 분위기가 거리의 티이루움들의 그 거추장스러운 분위기보다는 절실하고 마음에 들었다. 이따금 들리는 날카로운 혹은 우렁찬 기적 소리가 모오짜르트보다도 더 가깝다.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 번 읽었다. 그 것들은 아물아물하는 것이 어딘가 내 어렸을 때 동무들 이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거기서 얼마나 내가 오래 앉았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 객이 슬며시 뜸해지면서 이 구석 저 구석 걷어치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아마 닫는 시간이 된 모양이다. 열 한 시가 좀 지났구나, 여기도 결코 내 안주의 곳은 아니구나, 어디 가서 자정을 넘길까? 두루 걱정을 하면서 나는 밖으로 나섰다. 비가 온다.

빗발이 제법 굵은 것이 우비도 우산도 없는 나를 고생을 시킬 작정이다. 그렇다고 이런 괴이한 풍모를 차리고 이 홀에서 어물어물하는 수도 없고 에이 비를 맞으면 맞았지 하고 그냥 나서 버렸다.

대단히 선선해서 견딜 수가 없다. 코르덴 옷이 젖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속속들이 스며들면서 치근거린다. 비를 맞아 가면서라도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거리를 돌아다녀서 시간을 보내려 하였으나, 인제는 선선해서 이 이상은 더 견딜 수가 없다. 오한이 자꾸 일어나면서 이가 딱딱 맞부딪는다. 나는 걸음을 늦추면서 생각하였다. 오늘 같은 궂은 날도 아내에게 내객이 있을라구?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집으로 가야겠다. 아내에게 불행히 내객이 있거든 내 사정을 하리라. 사정을 하면 이렇게 비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아주겠지.

부리나케 와 보니까 그러나 아내에게는 내객이 있었다. 나는 너무 춥고 척척해서 얼떨결에 노크 하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나는 보면 아내가 덜 좋아할 것을 그만 보았다.

나는 감발자국 같은 발자국을 내면서 덤벙덤벙 아내 방을 디디고 내 방으로 가서 쭉 빠진 옷을 활활 벗어 버리고 이불을 뒤썼다. 덜덜덜덜 떨린다. 오한이 점점 더 심해 들어온다. 여전 땅이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만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아내는 내 머리맡에 앉아서 제법 근심스러운 얼굴이다.

나는 감기가 들었다. 여전히 으스스 춥고 또 골치가 아프고 입에 군침이 도는 것이 씁쓸하면서 다리팔이 척 늘어져서 노곤하다. 아내는 내 머리를 쓱 짚어 보더니 약을 먹어야지 한다. 아내 손이 이마에 선뜻한 것을 보면 신열이 어지간한 모양인데 약을 먹는다면 해열제를 먹어야지 하고 속생각을 하자니까 아내는 따뜻한 물에 하얀 정제약 네 개를 준다. 이것을 먹고 한잠 푹 자고 나면 괜찮다는 것이다. 나는 널름 받아먹었다. 쌉싸래한 것이 짐작 같아서는 아마 아스피린인가 싶다.

나는 다시 이불을 쓰고 단번에 그냥 죽은 것처럼 잠이 들어 버렸다.

나는 콧물을 훌쩍훌쩍 하면서 여러 날을 앓았다. 앓는 동안에 끊이지 않고 그 정제약을 먹었다.

그러는 동안에 감기도 나았다. 그러나 입맛은 여전히 소태처럼 썼다.

나는 차츰 또 외출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아내는 나더러 외출하지 말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 약을 날마다 먹고 그리고 가만히 누워 있으라는 것이다. 공연히 외출을 하다가 이렇게 감기가 들어서 저를 고생시키는 게 아니란다. 그도 그렇다. 그럼 외출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그 약을 연복하여 몸을 좀 보해 보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날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이나 낮이나 잤다. 유난스럽게 밤이나 낮이나 졸려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잠이 자꾸만 오는 것은 내가 몸이 훨씬 튼튼해진 증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아마 한 달이나 이렇게 지냈나보다. 내 머리와 수염이 좀 너무 자라서 후틋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내 거울을 좀 보리라고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서 나는 아내 방으로 가서 아내의 화장대 앞에 앉아 보았다. 상당하다. 수염과 머리가 참 상당하였다.

오늘은 이발을 좀 하리라고 생각하고 겸사겸사 고 화장품 병들 마개를 뽑고 이것저것 맡아 보았다. 한동안 잊어버렸던 향기 가운데서는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체취가 전해 나왔다. 나는 아내의 이름을 속으로만 한 번 불러 보았다. “연심이—”하고…… 오래간만에 돋보기 장난도 하였다. 거울 장난도 하였다. 창에 든 볕이 여간 따뜻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하면 오월이 아니냐.

나는 커다랗게 기지개를 한 번 켜 보고 아내 베개를 내려 베고 벌떡 자빠져서는 이렇게도 편안하고 즐거운 세월을 하느님께 흠씬 자랑하여 주고 싶었다. 나는 참 세상의 아무것과도 교섭을 가지지 않는다. 하느님도 아마 나를 칭찬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실로 세상에도 이상스러운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최면약 아달린 갑이었다.

나는 그것을 아내의 화장대 밑에서 발견하고 그것이 흡사 아스피린처럼 생겼다고 느꼈다. 나는 그것을 열어 보았다. 꼭 네 개가 비었다.

나는 오늘 아침에 네 개의 아스피린을 먹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잤다.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나는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감기가 다 나았는데도…… 아내는 내게 아스피린을 주었다. 내가 잠이 든 동안에 이웃에 불이 난 일이 있다. 그때에도 나는 자느라고 몰랐다. 이렇게 나는 잤다. 나는 아스피린으로 알고 그럼 한 달 동안을 두고 아달린을 먹어온 것이다. 이것은 좀 너무 심하다.

별안간 아뜩하더니 하마터면 나는 까무러칠 뻔하였다. 나는 그 아달린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산을 찾아 올라갔다.

인간 세상의 아무것도 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걸으면서 나는 아무쪼록 아내에 관계되는 일은 일 체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길에서 까무러치기 쉬우니까다. 나는 어디라도 양지가 바른 자리를 하나 골라 자리를 잡아 가지고 서서히 아내에 관하여서 연구할 작정이었다. 나는 길가의 돌 장판, 구경도 못한 진개나리꽃, 종달새, 돌멩이도 새끼를 까는 이야기, 이런 것만 생각하였다. 다행히 길 가에서 나는 졸도하지 않았다.

거기는 벤치가 있었다. 나는 거기 정좌하고 그리고 그 아스피린과 아달린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머리가 도무지 혼란하여 생각이 체계를 이루지 않는다. 단 오 분이 못가서 나는 그만 귀찮은 생각이 번쩍 들면서 심술이 났다. 나는 주머니에서 가지고 온 아달린을 꺼내 남은 여섯 개를 한꺼번에 질겅질겅 씹어 먹어 버렸다. 맛이 익살맞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 벤치 위에 가로 기다랗게 누웠다. 무슨 생각으로 내가 그 따위 짓을 했나,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나는 게서 그냥 깊이 잠이 들었다. 잠결에도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졸졸 하고 언제까지나 귀에 어렴풋이 들려 왔다.

내가 잠을 깨었을 때는 날이 환히 밝은 뒤다. 나는 거기서 일주야를 잔 것이다. 풍경이 그냥 노오랗게 보인다. 그 속에서도 나는 번개처럼 아스피린과 아달린이 생각났다.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맑스,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 아내는 한 달 동안 아달린을 아스피린이라고 속이고 내게 먹였다.

그것은 아내 방에서 이 아달린 갑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다.

무슨 목적으로 아내는 나를 밤이나 낮이나 재웠어야 됐나? 나를 밤이나 낮이나 재워 놓고, 그리고 아내는 내가 자는 동안에 무슨 짓을 했나? 나를 조금씩 조금씩 죽이려던 것일까?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보면 내가 한 달을 두고 먹어 온 것이 아스피린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무슨 근심되는 일이 있어서 밤이면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정작 아내가 아달린을 사용한 것이나 아닌지? 그렇다면 나는 참 미안하다.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큰 의혹을 가졌다는 것이 참 안됐다.

나는 그래서 부리나케 거기서 내려왔다. 아랫도리가 홰홰 내어 저이면서 어찔어찔한 것을 나는 겨우 집을 향하여 걸었다. 여덟 시 가까이였다.

나는 내 잘못된 생각을 죄다 일러바치고 아내에게 사죄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무 급해서 그만 또 말을 잊어버렸다. 그랬더니 이건 참 큰일 났다. 나는 내 눈으로 절대로 보아서 안 될 것을 그만 딱 보아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그만 냉큼 미닫이를 닫고 그리고 현기증이 나는 것을 진정시키느라고 잠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기둥을 짚고 섰자니까, 일 초 여유도 없이 홱 미닫이가 다시 열리더니 매무새를 풀어헤친 아내가 불쑥 내밀면서 내 멱살을 잡는 것이다. 나는 그만 어지러워서 게가 나둥그러졌다.

그랬더니 아내는 넘어진 내 위에 덮치면서 내 살을 함부로 물어뜯는 것이다. 아파 죽겠다. 나는 사실 반항할 의사도 힘도 없어서 그냥 넙적 엎드려 있으면서 어떻게 되나 보고 있자니까,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 아름에 덥석 안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다소곳이 그렇게 안겨 들어가는 것이 내 눈에 여간 미운 것이 아니다. 밉다.

아내는 너 밤새워 가면서 도둑질하러 다니느냐, 계집질하러 다니느냐고 발악이다. 이것은 참 너무 억울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너는 그야말로 나를 살해하려던 것이 아니냐고 소리를 한 번 꽥 질러 보고도 싶었으나, 그런 긴가민가한 소리를 섣불리 입 밖에 내었다가는 무슨 화를 볼는지 알 수 없다. 차라리 억울하지만 잠자코 있는 것이 우선 상책인 듯시피 생각이 들길래, 나는 이것은 또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툭툭 떨고 일어나서 내 바지 포켓 속에 남은 돈 몇 원 몇십 전을 가만히 꺼내서는 몰래 미닫이를 열고 살며시 문지방 밑에다 놓고 나서는, 나는 그냥 줄달음박질을 쳐서 나와 버렸다.

여러 번 자동차에 치일 뻔 하면서 나는 그래도 경성역으로 찾아갔다. 빈자리와 마주 앉아서 이 쓰디쓴 입맛을 거두기 위하여 무엇으로나 입가심을 하고 싶었다.

커피! 좋다. 그러나 경성역 홀에 한 걸음 들여 놓았을 때 나는 내 주머니에는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을 그것을 깜박 잊었던 것을 깨달았다. 또 아뜩하였다. 나는 어디선가 그저 맥없이 머뭇머뭇하면서 어쩔 줄을 모를 뿐이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그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는 이렇다는 아무 제목도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

나는 또 내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그런 대답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

허리를 굽혀서 나는 그저 금붕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붕어는 참 잘들도 생겼다. 작은놈은 작은놈대로 큰놈은 큰놈대로 다 싱싱하니 보기 좋았다. 내려 비치는 오월 햇살에 금붕어들은 그릇 바탕에 그림자를 내려뜨렸다. 지느러미는 하늘하늘 손수건을 흔드는 흉내를 낸다. 나는 이 지느러미 수효를 헤어 보기도 하면서 굽힌 허리를 좀처럼 펴지 않았다. 등이 따뜻하다.

나는 또 오탁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우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한다. 나는 피로와 공복 때문에 무너져 들어가는 몸뚱이를 끌고 그 오탁의 거리 속으로 섞여 가지 않는 수도 없다 생각하였다.

나서서 나는 또 문득 생각하여 보았다. 이 발길이 지금 어디로 향하여 가는 것인가를…… 그때 내 눈앞에는 아내의 모가지가 벼락처럼 내려 떨어졌다. 아스피린과 아달린.

우리들은 서로 오해하고 있느니라. 설마 아내가 아스피린 대신에 아달린의 정량을 나에게 먹여 왔을까? 나는 그것을 믿을 수는 없다. 아내가 대체 그럴 까닭이 없을 것이니, 그러면 나는 날밤을 새면서 도둑질을 계집질을 하였나? 정말이지 아니다.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발길이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옳은가 이것만은 분간하기가 좀 어려웠다. 가야하나? 그럼 어디로 가나?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