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분석(조부모, 부모, 나): 치료 기법 소개

 

프로이트가 비엔나 의과대학 레지던트 4학년 때 그 대학에서 처음으로 우수한 레지던트 학생들 중에 3명을 선발해서 6개월의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서 프랑스의 살페트리에(Salpetriere) 병원(그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병원, 지금은 솔본 대학 부속병원)(Ellenberger, 1970: 주㈜: 참고)으로 1884 10월에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 병원에는 그 당시에 히스테리아(hysteria)(몽유병, 미침, 발작 등의 증세를 가진 모든 정신병의 총체적 의미(조현병은 등장 이전))를 최면으로 치료를 하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가르코트(Charcot)에게 최면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6개월간 그곳에 머물면서 가르코트가 시범으로 보여주는 최면을 통해서 히스테리아(정신병)의 원인어린시절의 강간(성폭행), 신체적 학대, 감정적 학대, 박탈과 방기(방치해서 포기) 등의 심리적인 상처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귀국 후에 4명의 여성 환자(그 당시에 히스테리아는 여성의 질병)를 최면으로 치료를 하면서 2명은 최면으로 그리고 2명은 최면에 걸리지 않아서 최면과 유사한 기법으로 카우치에 누워서 눈을 감고 머리 속에 떠 오르는 상상, 지각, 감각, 생각 등을 걸러내지 말고 나오는 대로 이야기를 하라고 하는 방법인 자유연상으로 치료를 해서 그 결과를 1895년에 히스테리아의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한 것이 정신분석의 탄생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 번 밝혔다(Ernest Jones, 1953: 주㈜: 참고).

프로이트는 최면은 반쪽 치료이다, 고로 온전한 치료가 되기 위해서는 카우치에 누워서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찾아내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최면의 원리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프로이트는 독일의 물리학계의 거물인 그의 스승인 부케(Brucke)의 철저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교육을 받은 대학생). 그는 그리스시대의 철학자인 에피쿠리우스(Epicurus)의 쾌락설을 인용해서 즐거움의 이론을 개발을 했다. 모든 동물들은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취한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망각으로 지워진 것이 아니고 기억 속에서 억압되어져 있다. 이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서 마음의 위계이론(의식, 전의식, 무의식)이 탄생을 하게 된다. 무의식 속에서 감추어진 상처들은 세월이 흘러가서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의식에서 경험되어지는 유사한 상처가 연결되어 과거의 상처가 형태가 변형되어 증세들로 등장하게 된다. 이것을 찾아내어서 그 환자가 그것을 깨닫게 만들어주고 그리고 그 상처와 관계된 감정과 고통들을 말로써 표현을 하도록 하면 그 증세가 사라진다는 치료의 원리를 개발하게 된다. 최면은 그 당시에 프로이트의 스승이자, 후원자이자, 동료인 브로이어(Breuer)(히스테리아의 연구의 공동작가)에 의해서 과거의 상처로써 카타르시스(catharsis: 그리스어로 설사) 효과이다 라는 것이 밝혀져 있었다.

프로이트는 최면의 효과가 무의식 속에 묻혀 숨어있는 과거의 상처를 깨닫게 하고 그 상처에 포함되어진 긴장의 방출이 전부이다, 고로 최면 기법은 일시적으로 긴장의 방출은 그 시점에서는 효과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다시 누적되어진 긴장은 다른 증세들의 재발로 재등장 한다라는 것을 알고 나서 최면을 포기했다.

그는 최면 대신에 욕구 이론(Drives 이론)으로 바꾸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구를 타고 난다. 동양에서는 5 7정이다(5개의 욕구와 7개의 감정). 식욕, 성욕, (), 명예, 수면욕(화엄경)이 그것이다. 서양에서는 식욕, 성욕, 안전과 안정(여기까지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안정), (식욕), (안전)의 의미)이다. 여기에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 돈에 대학 욕구, 지식에 대한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소속감에 대한 욕구 등등으로 약 28개의 욕구들이 있다(마슬로우(Maslow)의 욕구 위계설을 보라). 어린시절의 발달 단계에서 이러한 욕구들이 상처로써 성장이 중지되면 어른이 되어서 평생동안 그 욕구 충족에 매달리게 된다는 욕구의 상처이론이다.

여기에서 정신분석의 발달 이론이 등장한다. 0- 1세는 입과 입술이 중심이 된다. 수유를 할 때 따뜻한 엄마 품에 안겨서 안아주기와 눈길주기 등의 신체접촉으로 즐거움의 누적(이것이 바로 사랑이 아닌가?)은 신체적인 성장(우유)과 정신적인 건강함(마음)으로, 과도한 수유와 너무 일찍 젖떼기는 박탈과 학대로 인한 불쾌감의 누적은 심리적인 상처로 연결된다. 이것이 구순기 이다. 1-3세는 대소변을 가리는 신체적인 컨트롤을 그리고 주변 환경의 탐색으로 이 과정에서 즐거움의 누적은 몸과 환경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의 극복으로 연결된다, 반대로 과도한 처벌과 강압과 고통은(강압된 대소변 훈련, 질서정연하고 깨끗한 환경의 강조) 신체적 긴장의 누적과 주변 환경의 두려움으로 이후에 사회환경에 두려움과 불안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바로 항문기이다. 3-5세는 아들은 아버지처럼 강한 남자가 되겠다, 딸은 어머니처럼 현모양처가 되겠다 라는 동성 부모의 동일시로 이성부모에게는 친밀감으로 연결된다. 이 시점에서 부부갈등과 혼란은 아버지의 동일시 거부, 어머니의 동일시로(아들), 어머니의 동일시 거부, 아버지의 동일시(여성)은 동성애로 연결될 수 있고 그리고 나약한 여성적인 아들과 남성적인 톰보이적인 딸로 성장하게 된다. 이것이 오디팔기 이다. 6-12세는 또래 집단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소통하는 학습의 기간인 학동기(유치원, 초등학교)가 된다. 이 시점에서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면 소외감으로 외톨이로 그리고 학습의 부진과 기능의 부진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잠재기이다. 13- 19세는 사춘기, 청소년기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사회로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너무 강한 부모와 자녀 관계 그리고 사회성의 결여는 가족 밖의 생활의 회피로 연결되어져서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성기기 이다. 여기에서 프로이트의 5개의 발달 단계가 마지막으로 어른이 됨으로써 완료가 된다 즉 구순기, 항문기, 오디팔기, 잠재기, 성기기(사춘기)이다. 여기에서 초반기 최면학의 확대로 시작된 정신분석은 이제 새로운 학문으로써 온전한 정신분석이 탄생하게 된다.

1905섹스에 대한 3개의 논문(프로이트가 가장 애지중지 했던 글들은 의 꿈의 해석(1900), 섹스에 대한 3개의 논문(1905), 토템과 터부(1913)(Ernest Jones, 1955: 주㈜: 참고)에서 유아 성욕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어린이들은 3-5세 사이에 본능적으로 타고 나는 섹스 욕구가 표면화 된다. 남자 어린이는 페니스가 발기하는 것을 알게 된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남자는 페니스가 있다, 여자는 페니스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섹스에 대한 호기심이 증가하게 되고 부모님이 섹스 관계를 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게 된다. 엄마는 페니스를 가진 아들을 딸은 페니스를 가진 아버지와 가깝게 된다. 이 시점에서 동생이 태어나게 되고(3살 터울) 자신은 엄마 품에서 쫓겨나서 자신의 방으로 가게 된다. 이러한 어린이의 섹스 욕구는 어른의 섹스 유혹에 쉽게 끌리어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유혹이론이다. 어른들이 어린이들의 섹스 욕구를 자극해서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이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어린시절의 강간(성폭행)과 같은 섹스의 상처의 근원이 된다. 오디팔 기간에 이런 섹스의 상처들에 의해서 어른들의 변태성욕의 이론과 치료가 등장하게 되면서 정신분석의 치료의 범위가 확대되어진다. 본능적인 욕구에 섹스 이론의 첨가로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섹스심리학(psych-sexual)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Greenberg & Mitchell, 1983: 주㈜: 참고).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이론이 프로이트 한 사람의 머리 속의 상상에서 나온 소설과 같다고 비난을 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과학은 실험실에서 나오는 진실의 발견이 있고 그리고 또 하나는 관찰로써 주도면밀 한 기록으로 그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반복으로 똑 같은 사실로 밝혀지게 되는 서술적 진실이 있다 라고 천명을 했다(Moore, 1999: 주㈜: 참고). 그는 치료 사례들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다른 사람들이 똑 같은 과정을 통해서 똑 같은 결과를 나눌 수 있도록 철저한 기록을 했다. 그는 정신분석이 과학이 되도록 연구를 하면서 수많은 과학자들의 논문들을 읽고 인용을 했다. 여기에서 무의식 속에서 밝혀낸 어린시절의 상처가 오리지널로 원형으로 남아 있는가? 혹은 변형된 것인가? 에 대해서 기억 학자들의 논문들을 통해서 어른으로써 어린시절에 기억의 상처를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1917년에 심리적 현실(Psych Reality)이라는 용어를 신조어로 사용을 했다. ego가 원형으로 남아있지 않고 변형되어지는 것처럼 과거의 상처의 기억 역시 오리지널이 아니고 변형되어진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는 유혹 이론을 포기를 했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를 찾아내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과거의 상처에서 오리지널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꿈 분석 혹은 상상의 면밀한 분석을 통해서 씌워진 껍질들을 벗겨내고 알맹이를 찾아낼 수 있다는 이론을 고수를 했다(정신분석은 0-5세까지의 상처를 찾는 것에 초점). 그는 발달의 단계에서 어린이들이 부모의 사랑과 미움과 분노를 통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상상으로 만들어낸 상처라는 오디프스 콤플렉스 이론으로 탄생하게 된다. 어머니, 아버지, 어린이 사이에서 갈등과 밀착과 상처와 미움이 만들어낸 상처로써 실제로 어린이의 상처가 아니고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상처가 오디프스 콤플렉스 이론이다(Moore, 1999). 정신분석 치료는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상상의 수정과 개선과 새로 배움이 초점인 이유가 이것이다. 여기까지가 욕구이론으로 본능적인 욕구가 중심이 되는 이론이다.

1923에 프로이트는 ego와 원초자아 라는 논문으로 새로운 획기적인 변화가 정신분석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 프로이트는 몸을 컨트롤하고 관리하고 이끌고 나가는 3마리의 말(마차를 끌고 가는 3마리의 말)에 비유해서 마음의 삼두마차 이론이 탄생하게 된다. 승용차의 대중화는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다(2021, 2, 6: 위키피아 참고) 1920년대는 마차가 유일했다. 이것에 마차에 그리고 ()들은 마음에 비유를 한 것이다. 타고나는 본능의 욕구들은 원초자아(id)로 그리고 3-5세 사이에 등장하는 부모님의 처벌과 동일시는 양심의 등장으로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의 구분이 명확해진다. 이것이 초자아(superego)가 된다. 원초자아는 0세에서 그리고 초자아는 5세에서 골격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ego는 미완성으로 21(법적인 성인)로써 성숙한 인간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Ego 21년 동안 부모님의 보호를 받고 부모님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그리고 동료들과 관계를 통해서 학교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배움으로 머리 속에 경험으로 누적이 된 것이 ego가 아닌가? 고로 청소년으로 미성년자이고 미성숙한 인간으로 보호자가 필요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ego의 등장이 1-3세로 항문기로 보았다. 0-1세는 엄마 품에 엄마 등에 업혀서 엄마의 분신으로 자라난다. 그러나 1세부터 일어서기 걸음마와 걸어 다니는 환경의 탐색으로 가 내가 대소변, 내가 밥을 먹겠다, “” “가 등장하게 된다. 7개월-9개월 때 낯선 사람과 엄마 얼굴을 구분해서 엄마에게 매달리는 낯선 사람 불안과 낯가림이 등장하게 되고 1.5-2세에 거울에 비친 나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고로 항문기에 나(ego)가 등장하게 된다. ego 21세가 되면서 어른으로 인정을 받고 스스로 성숙한 인간이 된다 고로 이 21년 동안의 기간에서 ego가 어떻게 성숙하느냐? 라는 ego 심리학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여기에서 수많은 정신분석가들의 연구와 이론을 통해서 새로운 가지들이 뻗어나게 된다. 비엔나 의과대학 정신과 의사인 하트만(Hartmann)은 프로이트의 제자로써 ego(현실적 자아) 대신에 자아(self)라는 용어를 등장시켰다. 즉 너와 나의 나를 대표하는 것은 self 이고 현실적 기능인 행정기능(입법, 사법(초자아), 행정(ego)의 삼권분립에 비유)을 담당하는 기능으로 ego의 기능이 원초자아와 초자아 사이에 조정과 균형을 만들어낸다. 3개의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서로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하는 것이 ego이다. 삶의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능력으로 마음의 3개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 ego의 기능으로 ego의 발달에 문제가 생긴 것이 신경증으로 정의를 했다.

다시 말해서 ego는 삶의 과정에서 환경에 적응의 역할, 갈등의 조절의 역할, 학습의 역할, 자아(self)방어하고 보호하는 역할, 선택하고 판단하고 결정을 하는 역할, 소속감에서 고립과 외로움을 벗어나는 역할, 충동을 조절하고 좌절에 참고 견디는 기능들 즉 관계하는 역할 등등이 상처받은 것으로 치료에서 ego의 개선 초점을 맞추는 ego심리학이 등장하게 된다. ego심리학의 등장으로 신경증사회환경에 조정에서 부적응으로 정의가 되어진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사회 문화의 요소가 빠진 것을 직접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서구와 동양적인 양육에서 공통점들을 기록하고 관찰해서 어린이와 사회(1956)의 저서를 쓴 에릭슨(Erikson, 1956, 1968: 주㈜: 참고) 7개의 방어이론을 쓴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1937)(프로이트의 막내 딸) ego 심리학의 개척자들이 된다. 프로이트의 욕구이론즐거움의 원리에 따르는 원초자아 이론에서 현실의 원리에 따르는 ego 심리학의 탄생으로 ego의 기능의 치료와 개선으로 정신분석의 치료의 범위가 확대되어지게 된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한 사람의 심리학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심리학의 갈래가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수제자인 항가리 정신분석학회 회장인 샌트로 프렌치(Sander Ferenczi) 한데서 13년 동안 개인분석 치료와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나서 독일정신분석학회 회장인 칼 아브라함(Karl Abraham)밑에서 3년 동안 분석치료와 정신분석을 공부(아브라함의 사망으로 중단)멜라니 크레인(Melanie Klein)에 의해서 소아 정신분석학이 등장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어른의 신경증을 치료를 했다. 그는 성인의 신경증을 치료 하면서 어린시절의 기억의 한계가 최하 2세까지였다는 것을 알고 꿈 분석을 통해서 0-3세까지의 상처 기억을 더듬어갔다. 그런데 크레인이 어린이들을 치료하면서 꿈분석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놀이 치료를 고안을 했다 꿈의 분석을 통해서 어른들의 어린시절의 상처들을 해석으로 깨닫게 하는 것 대신에 크레인은 놀이의 해석을 통해서 어린이들에게 상처를 치유해 나가면서 프로이트의 오디프스 콤플렉스가 어린이들에게는 적용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나갔다.

어린이들은 출생 시에 ego의 능력을 타고 나는 것으로 엄마의 유방이 최초의 인간 접촉으로 엄마 유방의 좋고 나쁨에 유아의 마음 즉 자아의 좋고 나쁨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엄마와 아기는 서로 거울반사로써 엄마의 마음이 아기의 마음이 되고 아기의 마음이 엄마의 마음이 된다, 이것이 크레인의 투사 동일시라는 신조어로 등장하게 된다. 엄마의 기대와 소망이 아기에게 전달되어져서 아기의 마음 속에서 엄마의 기대와 소망이 싹이 트게 된다. 좋은 양육과 수유는 좋은 젖꼭지, 좋은 엄마 그리고 좋은 자아(건강한 자아), 반대로 나쁜 양육과 나쁜 수유는 나쁜 젖꼭지, 나쁜 엄마 그리고 나쁜 자아(병든 자아)로 연결시켰다. 크레인은 프로이트의 단계 이론 대신에 ego의 발달의 기능을 표현하는 용어를 사용을 했다.

신생아들은 출생의 초반기에는 모든 사물들이 생명을 가진 것으로 본다. 걸음마 할 때 부딪치는 걸상과 베개 와 이불 등이 자신을 해코지하는 것으로 울면서 엄마에게 호소를 한다. 엄마가 그 물건들을 야단을 치면서 아기를 달래준다. 크레인은 이러한 현상은 아기의 자아(self)가 살아남기 위한 쪼갬, 분열(splitting)의 방어로써 보았다. 자신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탓이 아닌 상대방 즉 대상(object)의 탓으로 돌린다. 이 시점에서 엄마, 아빠가 거울처럼 비쳐진 아기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고로 아기는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된다. 마치 자신이 전지전능한 것처럼, 마술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아기는 사랑과 미움이 반대의 감정으로 이것을 통합할 능력이 없다, 고로 쪼개, 분열시켜서 어느 한쪽으로 반응하게 된다. 엄마, 아빠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 시켜주면 엄마, 아빠가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된다 100%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대신에 엄마, 아빠가 욕구 충족을 못해주면 나쁜 사람으로 100%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너와 내가 쪼개져서 한쪽으로 만 보게 된다. 고로 아기는 자아가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녀는 에딘버러에서 정신과의사로써 정신분석가가 된 페비안(Fairbarin)과 접촉에서 그의 저서 욕구들로부터 자아까지의 자아 이론(Grotstein, 1994, 1981: 주㈜: 참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은 출생 시에 두 개의 뇌를 가지고 탄생을 한다. 좌뇌와 우뇌이다 출생 시에는 좌뇌와 우뇌는 서로 분열되어져 있다. 출생 4개월 시점에서 두 개의 뇌는 뇌량(뇌의 다리)을 통해서 서로 연결로 통합이 된다. 이 시점에서 유아는 인간 얼굴로 향하게 된다. 방긋방긋 웃는 미소반응이 특징이다(우리나라에서 100사진을 찍을 시점) 마찬가지로 신경세포들은 모두가 분열된 상태에서 통합으로 하나로 연결되어진다. 프로이트가 가소위츠 어린이 병원에서 의사로 일할 때 기억상실증언어장애를 연구할 때 뇌의 언어 지역에서 운동기억 상실증, 감각기억 상실증, 활모양 다발 기억상실증, 완전기억 상실증의 4가지 기억상실증감각신경 세포들수용신경 세포들분열로써 발생한다는 논문들에서 신경세포의 방출과 수용은 통합되어져서 우리가 귀를 통해서 듣고 즉시 말을 하는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진 것으로 논문을 썼다(Ernest Jones, 1957, 주㈜: 참고). 여기에서 어린이들의 모든 신경조직이 분열에서 통합으로 향하게 된다는 페비안의 이론은 크레인의 편집증 이론과 통합되어져서 편집증-자아분열 유형(ego의 기능의 정도)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탄생시켰다.

유아기에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이 아닌 대상의 탓으로 그리고 자아의 분열들은 쪼개져서 (splitting) 분열되어진 상태에서 통합으로 향하게 된다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4개월-7개월 정도의 기간으로 보았다. 이 시점에서 아기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어진 것이다. 사라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라는 소멸과 존재의 사고 방식이다. 장난감이 이불 밑에 들어가버리면 장난감을 사라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가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어린이들은 이후에 어른이 되어서 통합되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편집증 장애(모든 잘못을 자신의 잘못이 아닌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자아분열, 정신분열증(자아소멸에 대한 공포를 막기 위해서 원시적 방어들을 사용)이 된다. 전지전능한, 과거와 현실이 통합되지 않는, 이상화와 평가절하, 너와나의 하나됨의 원시적인 방어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자아가 분열되어져 통합에 실패한 사람들이 정신분열증 환자들이다.

 7개월에서 9개월의 시점에서 엄마의 이미지가 생기면서 엄마를 알아보게 되고 엄마에게 매달리는 이 시점에서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분리불안이 등장할 때 아기는 자아와 엄마가 분리된 것을 알게 된다. 엄마의 이미지가 잘 형성되어진 경우에는 마음 속에 생겨난 엄마의 이미지를 가지고 엄마를 대신해서 혼자서 자아를 달래고 위험에 대처할 능력이 생기게 된다.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를 두 사람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이다 즉 한 사람이 장점과 단점을 가진 사람으로 통합되어진다. 사랑과 미움은 통합이 된다, 전지전능, 이 세상에서 내가 최고, 마술적인 원시적인 방어 대신에 성숙한 방어들 즉 억압, 부인 그리고 합리화, 승화와 같은 현실에 적당한 방어들로 대체되어 바뀌게 된다. 좋은 엄마의 이미지는 좋은 자아의 이미지로 이것이 내면의 마음 속에서 확고하게 되면 엄마가 옆에 없어도 아기를 두려움과 불안을 달랠 수 있다. 반대로 엄마의 이미지가 나쁜 이미지이면 아기는 나쁜 자아의 이미지로써 불안해서 두려움으로 세상을 두려워하는 어른이 된다. 이것을 크레인은 우울한 유형 ego라고 불렀다.

페비안은 프로이트의 욕구 이론을 거부하고 인간을 태어날 때부터 엄마로 향하게 된다. Ego는 엄마를 찾게 된다. 모든 포유 동물들의 새끼들이 엄마 품에서 자라나는 것을 지적한 정신분석가인 볼비(Bowlby)애착이론이 한몫을 하게 된다. 크레인과 페비안의 이론은 영국의 유명한 대상관계(Object Relations Theory)이론으로 탄생하게 된다. 대상관계 이론의 등장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신경증 치료로부터 정신증(편집증, 조울증, 정신분열증(조현병))으로 치료의 길이 열리게 된다.

여기에 수많은 학자들이 가세해서 이론적인 정교화가 이루어진다. 코넬 의과대학의 정신과 의사인 다이넬 스턴(Daniel Stern: 1977, 2004: 주㈜: 참고) 16mm 영사기 필름으로 0-6개월까지의 유아들을 24시간 찍어서 분석을 했다. 신생아는 핏덩어리가 아니다 스스로 자아를 돌볼 능력이 있다. 엄마의 눈을 통해서 감각을 전달받고 소통을 한다. 신생아에게 엄마의 놀란 표정, 행복한 표정, 공포증적인 표정 들이 아기의 얼굴에 반사되어 아기가 유사한 표정을 보인 사진들이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밝혀지게 된다(Lachman & Beebe, 2002: 주㈜: 참고). 2001년에 이태리의 신경학자인 지아코모, 로솔레티(Giacomo Rossolatti, 2001)가 짧은 꼬리 원숭이의 뇌를 연구하다가 우연히 그가 먹은 아이스크림을 원숭이가 흉내를 내는 것을 보고 그 부분인 전두엽 앞부분 운동 회백질에 거울반사 신경 세포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정신분석가들의 거울반사가 실험실에서 증명된 것이다(Mearles, 2012, 주㈜: 참고).

독일에서 문헨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소아과 의사로써 정신분석가가 된 마가레트 몰러(Mahler, 1976: 주㈜: 참고)가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뉴욕 정신분석학교 교수로 정신분석학을 가르치면서 1950년 초반에 그녀가 세운 마스트 어린이 센터에서 양육환경을 실험실로 만들어서 생후 4개월의 어린이들 5명을 3년 동안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어린이들의 성장 과정을 10년 동안 연구를 해서 자아의 발달의 과정을 분리와 개인화 하는 과정을 세분화로 이론화해서 1976년에 유아의 심리적 탄생이라는 책을 발표하면서 프로이트의 이론이 실험실에서 확인이 되었다.

그녀의 분리-개인화와 함께 영국의 대상관계 이론은 엄마와 관계가 어린시절의 자아 형성에 결정적이다 라는 개념으로 프로이트한사람 심리학엄마와 아기두사람 심리학으로 관계의 정신분석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대상관계 이론프로이트의 욕구 이론과 대인관계 이론의 사이에서 그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이론으로 정신분석의 범위가 신경증 치료에서 성격장애 치료(보드라인 치료)로 그리고 정신증 치료(편집증, 조울증, 그리고 조현병(정신분열증))로 확대 발전하게 되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Tuttman et al., 1981: 주㈜:참고).

여기에서 크레인의 3명 제자들이 정신분열증의 연구에 뛰어들게 된다. 폴란드 태생의 의사로 정신분석가가 된 한나 세갈(Hanna Segal, 1979, 1993, 2004: 주㈜: 참고), 독일에서 정신과의사가 되었으나 아리안 계통이 아니면 전문직에 종사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영국에 돌아와서 정신분석가가 된 허버트 로젠필드(Hebert Rosenfeld, 1987: 주㈜: 참고), 그리고 외과 의사로써 정신분석가가 된 비용(Bion)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소아과 의사로써 크레인 밑에서 수련을 받은 위니코트(Winnicott)가 정신증 연구에 공헌을 남기게 된다. 그들의 연구가 엄마와 어린이의 양육 환경의 중요성으로써 무장하면서 정신분석이 뇌의 질병이라는 조발성 치매(젊은이의 뇌의 질병)의 개념은 유아기에 양육 환경에서 생긴 결함의 결과라는 것으로 수많은 학자들에게 새로운 치료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여기에서 또 한 갈래의 심리치료가 등장하게 된다. 센도르 프렌치는 프로이트의 수제자로써 프로이트가 포기한 유혹 이론을 버리지 말고 계승할 것을 주장하면서 프로이트의 정통파들로부터 눈총을 받았다(Ernest Jones, 1953). 그는 부모와 자녀의 실제 상처들에 의해서 심리적 장애가 발생한다는 것을 강조를 했다. 자녀들의 증세들은 부모의 거울 반사로써 부모의 문제를 반사시키는 것이라고 주장을 했다. 어린이들의 상상에 의한 오디프스 콤플렉스뿐만 아니라 부모의 실체 상처가 엄청난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개발해 나갔다. 프로이트는 1909년에 클라크 대학 초청으로 미국을 한번 밖에 방문하지 못했다. 프렌치는 자주 미국을 방문하면서 그의 유혹 이론을 개척해나갔다. 첫 번째 제자가 바로 멜라니 크레인이다 그녀는 엄마와 아기의 관계를 이론화 했다. 두 번째가 미국에서 의사로써 정신분석가가 된 클라라 톰슨(Clara Thomson)이다.  그녀는 정신분석에 사회, 문화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신프로이트 학파(Neo-Freudian)인 셀리번(Sullivan)과 에릭 프롬(Erik Fromm), 그리고 프롬 레이크만(Fromm-Reichmann)영향을 미쳤다. 톰슨은 자신의 건물을 하사해서 1943년에 윌리암 하이트 알랜 연구소(정신분석학교)를 공동으로 설립하게 된다(이 정신분석학교는 뉴욕의과대학의 부속 정신분석학교가 되었다). 여기에서 대인관계 정신분석이 탄생하게 된다. 뉴욕 의과대학의 정신과 교수인 사무엘 슬립(Samuel Slipp, 1984: 주㈜: 참고)은 그의 저서 대상관계 이론과 가족치료 사이에 흐름에서 가족 치료의 아버지는 샌도르 프랜치라고 노트를 했다. 실제로 가족을 함께 치료한 것은 프로이트의 첫 공포증 치료 사례인 리틀 한(Little Hans)의 사례로써 5살의 소년이 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는 것을 그의 아버지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엄마와 애착에서 아버지의 거세불안 때문에 생긴 오디프스 콤플렉스의 결과로써 프로이트가 출판해준 것이 가족구성들을 통해서 치료를 한 최초의 논문으로 본다(Bowen, 1985). 프로이트는 가족구성원들을 치료에 관계시키게 되면 전이가 오염된다고 반대를 했다. 고로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상상들과 기억들을 분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후에 수많은 분석가들이 치료를 신경증으로부터 정신증 환자들에게 확대시키게 되면서 점점 가족들과 환자의 어린시절의 양육에 초점을 맞춰지게 된다.

한편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치료를 하고 있던 정신분석가들 중에서 환자들에 가족들의 영향력의 중요성이 커지게 되면서 환자들과 가족들을 함께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가족 치료학파가 형성되어지게 된다. 예일 의과대학에서 리즈(Lidz), 뉴욕에서 에크만(Ackerman), 나지(Nagy), 휘티커(Whitaker) 그리고 잭슨(Jackson), 보웬(Bowen), 웨인(Wynne), 프라모(Pramo), 스티어(Satir) 등의 학자들은 정신분석학자들로써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 하다가 만나게 된 공통점으로 가족 치료를 창립한 가족 치료 학자들이다.

샌프란시스코의 팔로 알토(Palo Alto)에서 문화 인류학자인 베이트슨(Bateson)과 정신과의사인 잭슨(Jackson)이 치료심리학자인 헬리(Haley, 1963, 1986: 주㈜: 참고)와 위클랜드(Weakland)와 함께 정신건강 연구소를 설립하고 정신분열증 환자의 가족을 연구한 결과 1956년에 이중구속, 이중 속박(double bind)이론을 발표를 했다. 정신분열증 환자 가족들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어느 쪽으로 소통을 해도 결과적으로 패배하는 대화 속에서 정신분열증이 발생 한다는 소통의 중요성이 등장을 하게 되었다. 구두어와 표정어의 불일치, 말을 해도 처벌받고 말을 하지 않아도 처벌이 되는 모순적인 의사소통으로 커뮤니케이션 즉 대화의 중요성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다 정신과의사인 보웬(Bowen, 1985: 주㈜: 참고)이 국립정신건강연구소(1954-1959)에서 정신분열증 환자의 가족들을 모두 함께 생활하도록 배려한 정신병동에서 2년 혹은 3년간 그들의 상호작용을 비디오와 오디오를 24시간 동원에서 5년간 가족 관계들을 연구를 했다 그리고 이어서 죠지타운 의과대학으로 옮겨서 1960-1965년까지 죠지타운 메디컬 센터에서 정신분열증 환자와 가족들을 함께 모아서 치료를 했다. 정신분열증환자(조현병)의 치료 결과는 탁월했다. 그는 가족들과 삼각관계 갈등들을 연구를 했다. 한편으로 뉴욕의 시라쿠스 의과대학에서 정신의학 그리고 심리학과에서 심리학 박사의 2개의 학위를 받은 휘티커(Whitaker, 1982: 주㈜: 참고)가 위스콘신 의과대학에서 가족 치료학으로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치료면서 환자부모 그리고 조부모3대 분석이 등장하게 된다.

치료자는 미국에서 10년 동안 가족 치료학을 전공하고 귀국해서 정신분석학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정신증 환자들의 치료에 도전하게 된 것은 여러 번 밝혔다. 치료사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치료실 안에서 환자들의 심리를 잘 다독거려서 집에 가면 가족들과 관계에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치료실에서 치료의 효과가 집에서 가족들과 관계에서 파괴되어 치료 효과가 반감된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초, , 고교 생들을 제외한(미성년자로 부모의 보호) 대학생들과 일반인들은 집에서 부모와 분리해서 독립해 나오도록 하는 치료 기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 바로 3대 분석 치료기법이다. 이 기법은 가족치료 학자들인 보웬과 휘티커의 이론에서 따오게 된 것이다. 가족들로부터 분리는 부모와 관계의 단절이 아니다, 치료의 시작 때 부모의 간섭을 차단시키고 자아의 개발을 통해서 다시 부모들과 관계를 개선해 나가면서 독립심과 자치심을 배양해서 혼자서 사회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치료 기법으로 시간과 돈을 절약하는 치료기법으로 핵심은 혼자서 생활해 나가는 자아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아래에서 소개되는 8명의 환자들은 성공한 치료 사례들로써 이미 여러 번 다른 글들에서 다루어진 사례들이다. 여기에서는 환자, 부모 그리고 조부모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문제의 핵심을 포착하고 원인을 찾아내서 해결해 나갔는가? 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첫 번째 환자는 50대 초반의 대기업의 핵심 간부 A로써 치료자(필자)1999년에 쓴 저서,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서울: 한림미디어)을 읽고 나서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서 치료자의 전화 번호를 알고 직접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받고 싶다고 요청을 해서 치료자에게 1주일에 2회로 1회기당 2시간으로 1주일에 4시간씩 1년 동안 심리치료를 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강한 치료 동기를 가진 사람으로 치료자를 찾아와서 첫 번째로 한 말이 선생님, 내 안에 악마를 치료해 주세요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고질병인 폭력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털어 놓았다. 그의 치료의 과정은 폭력의 대물림(3대 분석)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더욱 더 소상한 치료 과정의 부분은 20년 전에 치료의 핵심 내용을 요약한 아래의 소개를 보라).

먼저 그의 가족상황을 소개하면서 시작해보자. 그의 아버지는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의 최고의 대학의 법학과(xx 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한 지식인으로 지방의 명문 대학에서 법대 교수였다. 그의 어머니는 일제시대에 지방에서 명문 여고인 xx 고녀(高女)(그 당시는 여고라는 말 대신에)를 졸업한 여성으로 두 사람이 결혼을 해서 4명의 자녀들이 태어났다. 장남은 지방의 명문 대학에서 교수, 둘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잘 살고 있었다. 세 번째는 A였다. 네 번째는 여동생으로 출가했었다. 겉으로 보면 지식인의 가족으로 부모님이 일제시대에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었다.

A씨의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선비의 집안 출신으로 중부지방에서 유학자였다. A씨의 기억에는 할머니의 가족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결혼 후에 첫 번째 자녀로 A씨의 아버지가 태어났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외도로 첩을 두게 되면서 그 첩이 정실부인을 몰아내고 할아버지의 본처로 행세하면서 자녀들이 태어나고 할머니는 쫓겨나게 되었다. A씨의 아버지는 어린시절에 어머니와 함께 쫓겨나서 외톨이로 성장한 것이 밝혀졌다. 할아버지는 본처에 대해서 지원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평생을 농사를 지으면서 혼자서 아들인 A씨의 아버지를 키우면서 살아온 것이었다.

사건 1: 아버지가 4-5살 시점에서 그의 아버지(할아버지)가 부인(할머니)을 마당에 멍석(돗자리) 위에 무릎을 꿇어 앉치고 윗도리 옷을 벗게 하고 알몸에 채찍으로 매질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었다. 그것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를 모르겠지만 A씨의 아버지는 어린시절에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학대, 폭력, 구타를 당하는 장면을 목격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 평생을 혼자 살았다. 시골의 외딴곳에서 겨우 농사로 연명을 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A씨의 아버지는 머리가 명석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아들을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의 최고의 대학을 졸업을 하도록 지원을 해주었다.

A씨의 아버지는 자신이 법학을 전공하게 된 것이 틀림없이 정의, 평등, 질서에 대한 어린시절의 버림받은 어머니에 대한 한 맺힘이 아니겠는가? (치료자의 유추). 그러나 아버지는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부당함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3-5세 시점에서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매질을 당하고 어머니는 한마디도 항의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는 무의식 속에 남아있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 것이 아래의 분석에서 밝혀지게 된다.

A씨의 아버지는 대학졸업 후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 시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투표로 승산이 없게 되자 1972년에 유신헌법으로 통일주체 국민회의라는 것을 만들어서 체육관에서 99%의 찬성으로 대통령을 계속하게 된다(2021, 2,20, 다음 백과 참고). 여기에 대한 군사정권, 독재타도의 목소리가 전국으로 펴져 나갔고 학생들의 반정부 투쟁과 일부 지식층들의 반대가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74년에 동아일보 180명의 기자들이 중앙정보부의 검열에 반대해서 자유언론 실천선언이 따르고 정보부의 탄압으로 신문광고 해약으로 백지신문이 탄생하게 된다. 해직된 40여명의 기자들이 1987년에 한겨레 신문을 창간하게 된다(2021, 2, 20, 위키백과 참고).

A씨의 아버지가 여기에 관계되어 해직 교수가 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격렬하게 투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한마디 한 것이 정보부의 귀에 들어가서 미운 털이 박히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어린시절에 억압되었던 아버지의 아버지 즉 A씨의 할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방향이 바뀌어서 정의, 평등과 질서에 대한 독재자로 흘러간 것으로 유추되었다. 그러한 유추의 이유는 아버지는 격렬한 반정부 시위에 참가하거나 주동자는 아니었다. 강의 시간에 독재반대, 부당한 탄압과 해고에 대한 몇 마디가 정보원의 귀에 들어가서 해석 교수가 된 것이 그 이유이다.

이후 복직 때까지 16년의 세월 동안에 아버지는 술과 폭력으로 어린시절에 억압된 분노가 폭발해서 가족 구성원들에게로 흘러간 것이 밝혀졌다. 아버지는 매일 같이 술로써 가족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A씨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실직으로 생계가 어려워지자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4명의 자녀들이 대학, 고교, 중학교 학생으로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갈 시점에서 아버지의 실직으로 가정 형편 때문에 어머니가 막노동부터 가정부까지 해보지 않은 없었다고 회고를 했다.

사건 2: 아버지가 매일 같이 술로써 세월을 보내는 것을 보고 안쓰러워해서 어머니가 그 당시에 인기 있던 가발장수에게 머리채를 잘라서 몇 푼의 돈을 아버지에게 용돈으로 제공을 했다. 그런데 그 돈으로 술을 마신 아버지가 어머니의 밥상을 뒤엎고 폭력을 행사한 것을 고교 1학년이던 A씨가 목격을 한 것이었다. A씨는 그것을 보고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몸으로 대들면서 항의를 했다. 아버지 그 돈이 어떤 돈일 줄 아십니까?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돈으로 술을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어떻게 남편으로, 한 가장으로 매일 같이 음주와 폭력으로 --- 이것은 부당합니다. 왜 아버지가 법을 전공한 교수로써 부당하게 폭력으로 세상을 살아갑니까? 이것이 아버지가 외치던 정의, 평등 그리고 질서입니까? 라고 거칠게 항의를 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비참했다. 어머니가 아들의 편을 든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편을 들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무리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해도 아들은 아버지에게 맞대응 하거나 비판을 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불효이다 라고 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도록 했다. A씨는 굴욕, 모욕을 참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다.

16년 동안 아버지의 술 주사는 자녀들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큰 아들은 심각한 강박증으로 온 가족이 고통을 받았다고 A씨가 술회를 했다. 정리정돈이 되지 않으면 온 가족이 난리가 갔다. 그는 결백증으로 조그만 실수 혹은 더러움에 참을 수가 없는 신경증 환자로 대학교수로 있었지만 기 그 직책을 겨우 유지해 나가는 살얼음 판이 되었다고 A씨가 회고를 했다. 둘 째 아들은 일찍 해외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형제들 중에서 가장 덜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에서 살 잘고 있다고 했다. 막내 여동생은 결혼 후에 생계가 어려워서 A씨가 매달 봉급에서 일부를 지원해주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16년 후에 복직으로 대학에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된 음주는 복직 5년 후에 음주로 인한 교통 사고로 숨지게 되었다. 결국 경제적인 문제들은 A씨를 비켜가지 않았다. A씨가 장남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형님은 대학 교수였지만 자신의 몸 가누기에 바빠서 집안을 돌볼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방향을 돌려서 A씨의 부부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A씨는 키가 크고 근육질 몸매에 달변가로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는 많은 여성들이 결혼을 원한다고 구애를 했다고 했다. 그런데 부인을 만나게 되었고 옷 가계를 운영하던 부인의 적극적인 구애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문제를 결혼 이후에 A씨가 음주와 폭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었다. 폭력은 아버지대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건 3: 결혼 이후에 부부 관계에서만 폭력이 행사가 된 것이 아니었다. A씨는 30대 후반에 동료들과 회식 자리에서 사소한 말다툼으로 회식 상차림을 뒤집어 엎어버린 사건을 회고를 했다. 동료들과 관계에서도 폭력은 여전했다.

사건 4: A씨는 비슷한 시점에서 한 동료와 말다툼으로 번져 서로 일대 일로 주먹싸움을 한 것을 회고를 했다. , 중학교 시절에는 서로 주먹다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인이 된 30대 후반에 비슷한 폭력의 전과가 있는 친구와 일 대 일로 격투로 주먹싸움을 한 것을 실토하면서 부끄러워했다.

사건 5: A씨는 결혼 후에 사소한 부부 갈등으로 수 많은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고 실토를 했다. 부부싸움으로 부인의 코뼈를 그리고 최근에는 부인의 뺨을 때리면서 부인의 귀의 고막이 터졌다고 스스로 실토를 했다. 그 결과로 집에서 쫓겨나서 지금은 3개월째 노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A씨는 고교 3 아들이 수능시험의 결과를 기다리는 아들이 어머니의 편에서 아버지의 음주와 폭력에 항의를 하는 것이 대경실색을 했다(A씨의 1학년 때 아버지에게 반항이 아들 한데서 반복 되는 것의 지적에 깜짝 놀랬다).

 아들이 어느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 를 알아보기 위해서 집에 전화를 해도 부인이 일체 거부하고 전화를 받지 않게 되자 분노해서 집에 찾아가서 도어문을 부수고 폭력을 행사한 것에 대해서 아들이 거칠게 아버지에게 항의를 한 것이었다.

사건 6: A씨는 스스로 외도를 했다고 털어 놓았다. 6개월의 점에서 부인에게 들통이 난 것이다. 그는 부인이 보는 앞에서 외도 여성과 키스를 하면서 부인을 화내게 했다. A씨는 스스로 대한민국에서 남자가 외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남편이 한번 외도를 했다고 그렇게 더러운 괴물 쳐다보듯이 하는 것에 분노했다. 할아버지의 외도가 손자 한데서 되풀이 되고 있다.

사건 7: 부인은 아파트는 부인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해 놓고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당한 유산을 바탕으로 남편을 내 쫓았다고 분노했다. A씨는 부인이 경제적으로 남편이 없어도 어려움이 없다는 것에 분노했다 그리고 부인은 남편에게 앞으로 폭력과 음주의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집에 들어올 수 없다고 경고를 하고 관계를 단절했다. 이후에 전화 번호를 바꾸고 관계를 끊었다고 분기탱천했다.

A씨는 자신의 폭력의 근원을 찾아서 그의 폭력적인 충동 욕구를 치료하고 싶다고 했다. A씨의 폭력은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가 부인인 할머니를 폭력을 행사한 것에서 시작된 것은 밝혀졌다. 즉 폭력의 대물림이 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잠깐 정신분석가들의 폭력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도록 하자. 심리치료에서는 폭력은 대물림 된다. 즉 어린시절에 자녀들은 부모의 폭력을 무의식적으로 보고 배운 것으로 본다. 폭력에 대한 유명한 논문은 프로이트가 1905년에 쓴 논문에서 acting out 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다. 이 용어는 무의식적인 갈등을 기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말로써 구두어로써 표현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정의를 했다. 그 이후에 수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충동 행동에 연구가 이어지게 된다. 프로이트는 그 충동, 폭력의 행동의 근원을 분석으로 밝혀내고 그것을 환자가 깨닫게 하고 그 충동을 컨트롤 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치료로 제시를 했다.

대표적인 논문이 프로이트의 막내 딸인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가 쓴 공격자 동일시이다. 피해자는 자신이 약하고 힘이 없기 때문에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강자가 되면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해서 공격자를 동일시해서 강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고로 폭력의 피해자는 그 자신이 폭력의 가해자가 된다. 자신이 강하면 아무도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게 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항상 공격자가 된다.

여기에서 또 다른 학자들의 논문들이 등장한다(Abtet al., 1996, acting out: 이론과 실제: 주㈜: 참고). 정신분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지 말고 말로써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신체적 폭력(구타, 몸싸움), 언어 폭력(욕설, 저주), 눈맞추기 거부, 삐쳐서 말을 하지 않는 것(물어도 대답이 없다), 두문불출(잠을 잠그고 관계의 거부), 뛰쳐나가는 것(자리를 피하는 것), 가출, 묵묵무답, 응시(째려보는, 노려보는), 눈 싸움(기싸움) 등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행동보다는 Acting out는 어린시절의 기억의 상실 때문에 구두어가 아닌 행동으로 충동을 표현하는 것이라기 보다 충동적 성격으로 본다. 한 개의 장애로 본다.

여기에 또 한가지 원인으로는 좌절, 지연에 참을 수가 없다는 성격이다. 충동적인 행동의 표현을 즉각적인 욕구만족이 따라온다. 2-3세의 어린이들이 원하는 것을 엄마가 돈이 없다고 사주지 않는 경우에는 땅바닥에 데굴데굴 굴려서 뒹굴게 되면 즉각 엄마가 들어주는 것으로써 습관화된 것이다. 폭력의 행사는 즉각적 욕구 만족을 가져다 준다. 자신의 욕구를 말로써 표현하는 데는 언어 사용의 어려움과 시간이 지연된다.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즉 유아기의 행동이 어른이 되어서도 남아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개의 이유는 부모님의 acting out를 보고 배운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문제들 즉 어려움을 어떻게 말로써 표현하는가?를 부모로부터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이 없다(아래의 여러 명의환자들의 폭력의 대물림을 보라)

다시 A씨의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폭력은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로 그리고 A씨에게 대물림이 된 것은 밝혀졌다. 그런데 A씨의 핵심 문제가 또 한가지 더 밝혀지게 된다. 폭력보다 오히려 그 문제가 근본적인 A씨의 상처의 근원이었다.

A씨의 아버지는 대학 교수가 되었다. 결혼 후에는 경제적인 안정으로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 는 몰라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어머니 즉 A씨의 할머니를 시골에서 모시고 와서 가족들과 함께 살지 않았다. 할머니의 반대? 혹은 고부 갈등으로 A씨의 어머니가 반대? 때문이지 모르지만 할머니는 평생을 시골에서 겨우 농사로 연명을 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불쌍하고 외로운 어머니를 위해서 태어난 자녀들을 교대로 한 명씩 할머니에게 보냈다. 할머니가 손자들을 보고 외로움과 고통을 잊어버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형님들의 차례가 지나가고 A씨가 3-7세까지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보낸 경험들이 분석의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시골의 외딴 곳에는 유치원도 없었다. 무엇 보다 또래 친구들이 없었다. A씨의 할머니는 다정다감한 사람이 아니고 차갑고 말이 없고 늘 혼자 생각에 잠겼다(A씨의 회고). A씨는 따뜻한 엄마의 가슴과 사랑을 박탈당한 것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늘 외로웠다고 회고를 했다. 할머니가 손자와 같이 놀면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나누고 매일 같이 손자와 함께 놀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라고 아버지가 아들 A군을 할머니에게 보냈지만 할머니는 농사일에 바빠서 손자와 놀아주지 않았다.

사건 8: 할머니 집에 어쩌다 한번 손님이 찾아오면 A씨가 그 손님의 신발을 감추었다. 빨리 가지 말고 시간을 더 보내고 가라고 자신이 손님의 신발을 숨겼다고 실토를 했다. 그는 늘 외롭고 쓸쓸했다. 결국은 초등학교 입학의 나이가 되어 학교에 가기 위해서 할머니 집에서 벗어나서 가족의 품으로 귀가 했다. 가장 중요한 3- 6세까지 오디팔 기간을 박탈당한 것이 그의 핵심 문제로 그러란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부인과 A씨 사이에 핵심 갈등으로 이것이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분석에서 밝혀낼 수 있었다.

여기에서 A씨 부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돌려보자. 치료자는 A씨의 부인과 만나지 않았다. 아래의 부인에 대한 A씨의 기술을 통해서 A씨의 부인의 가족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들의 부부싸움은 남편 A씨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인과 문제가 뒤엉킨 것이었다. 부부 문제는 한 파트너의 100% 문제가 아니다. 물과 부부는 서로 유사하게 흘러간다. 부부는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만난다 라는 것이 부부치료사들의 공통된 지적이다(Niper, 1988: 주㈜: 참고).

A씨의 부인은 오빠, 언니 그리고 A의 부인으로 3남매로써 부인의 아버지가 외도로 바람을 피우게 되자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을 했다. 어머니가 재혼을 하게 되면서 갈등이 커졌다. 오빠와 언니는 엄마의 재혼을 극구 반대했다. 어머니는 재혼을 했고 오빠와 언니를 지금까지 엄마와 관계를 단절했다. 자녀가 사춘기 때 부모가 재혼을 하는 것을 가장 반대 한다 왜냐하면 반대성 부모의 섹스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A씨의 부인은 엄마의 재혼을 허용했고 그 결과 어머니로부터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특별히 부인은사춘기 때 외도한 아버지 때문에 부모님이 이혼으로 갔다. A씨의 부인은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외도 문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무의식적인 분노가 깔려 있다. 아버지의 외도가 가족을 해체시킨 원인이 아닌가? 남편의 외도 이후에 부부싸움을 폭발하게 된 것이 분석으로 A씨가 깨닫게 된 것이다. 폭력, 외도 그리고 3-7세까지 오디팔 기간의 박탈 A씨의 근본적인 핵심 문제로 드러났다.

 여기에서 좀 더 상세하게 A씨의 분석으로 들어가보자. A씨의 부인은 사춘기 시점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대신에 A씨는 3-7세 사이에 엄마를 잃었다. A씨는 분석의 과정에서 자신이 어린시절에 잃어버린 따뜻한 엄마의 품이 그립다고 스스로 실토를 했다. 자신이 힘들과 외로울 때 옆에서 지원을 해주는 부인(엄마)이 필요 했다고 스스로 기술을 했다. 반대로 부인은 사춘기 때 아버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옆에서 가족의 울타리가 되어줄 아버지가 필요했다, 남편은 아내가 엄마가 되어주기를 그리고 부인은 남편이 아버지가 되어주기를 무의식적으로 갈구한 것이다. 왜 부인이 남편에게 구애로써 적극적으로 매달렸는가? 그리고 A씨는 많은 구혼자들 중에서 왜 부인을 선택했는가? 가 밝혀지면서 A씨는 무릎을 쳤다(남편과 부인의 무의식적인 공모 즉 정신분석학적인 전문 용어로 투사 동일시가 결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A씨의 치료는 그 시점에서 치료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여기에서 심리치료사들이 명심해야 하는 중요한 핵심 기법이 있다. 환자의 어린시절의 소망인 사랑의 고착이 드러나면서 그 환자의 한이 맺힌 소망을 충족하도록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그가 원하는 것이 부인의 엄마 같은 사랑이기 때문에 부인으로부터 혹은 치료사로부터 그 사랑을 제공해서 환자의 한()을 풀어주어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프로이트가 경고한 것을 심리치료를 하는 사람이 알아야 한다. 그것을 분석으로 밝혀내서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욕구 충족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이다. 즉 채워도 채워 넣어도 끝이 없기 때문에 욕구충족으로 가지 못하게 브레이크를 걸어서 환자가 그 충동욕구를 컨트롤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부부 문제에서 A씨와 A씨의 부인의 요구되로 부부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부부 관계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형성된다. A씨가 소망하는 데로 부인이 엄마의 역할을 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엄마와 아들(어린이) 관계가 된다. 부인의 소망대로 하면 아버지와 딸(사춘기) 관계가 된다. 이러한 부부 관계는 결국은 파경으로 간다(치료자의 부부관계 홈페이지에 아들처럼 사는 남편, 딸 같이 사는 부을 보라, 어린시절의 부모와 관계가 부부관계에서 재연을 보라).

아래의 사례는 20년 전에 치료자가 A(사례에서는 Y)를 치료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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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40대 후반의 대기업의 부장인 Y

증세: 술을 마시면 폭군으로 변한다. 부인을 자주 폭행하여 부인으로부터 쫓겨나 별거로 혼자서 생활하고 있음

접촉: Y씨가 서점에 가서 치료자저서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을 보고 학교로 연락해서 치료자의 전화 번호를 알아서 치료를 받고 싶다고 연락을 해 옴

진단명: 충동 컨트롤 장애, 우울증

치료 기간: 1 2시간 상담으로 1년 동안 치료를 받음

치료 결과: 충동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었으나 감정 표현 문제를 다루다 3개월간 해외 출장으로 치료를 종결했음

 

치료의 과정

 40대 후반의 대기업의 부장인 Y씨는 가족 폭력 문제로 치료자를 찾아 왔다. 자녀는 1명으로 현재 고등학교 3년에 재학 중이다. Y씨는 2년 전에 외도를 가졌고 이것이 부부 사이에 폭력으로 발전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부인 몰래 약 6개월 간 외도를 가졌고 부인은 이것을 눈치채고 심부름 센터에 의뢰하여 남편을 미행하고 있었다. 결국 술에 취한 남편이 외도 중인 파트너와 키스를 부인이 보는 앞에서 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외도가 표면화 된 것이었다. 이것이 대형 부부 싸움으로 번졌고 남편은 집에서 쫓겨나와서 Y씨 어머니와 함께 2지내다가 다시 재 결합한 후 6개월간 지내다가 다시 대형 부부 싸움으 번져서 이번에는 남편이 칼을 들었다가 다시 쫓겨나서 6개월 정도 Y씨 어머니와 함께 지내다가 치료자를 찾아온 것이었다.

  남편과 부인은 서로 같은 직장에서 만났다. 부인이 남편을 너무 좋아해서 Y씨를 좋아하는 다른 여성들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Y씨는 부인 A와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결혼 1년 후에 아들이 태어났고 아들은 40대 중반의 이웃 할머니가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약 7년 동안 양육해 주었다.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부인 A씨는 11년 동안 운영하던 옷 가계를 처분하고 아파트를 사서 현재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었다. 결혼 후에도 두 사람 사이에 조그만 갈등은 많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갈등이 시작된 것은 4년 전에 부인이 남편과 같이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현기증을 일으켜서 정신과에 진찰 결과 공황 장애라는 진단을 받았으나 치료는 받지 않았다. 부인은 가계를 정리하고 나서 심리학을 공부한다며 심리학 책을 사서 보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남편에 대한 불평 불만이 급증하게 되었다고 했다.

남편을 통해서 부인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외도로 어머니와 이혼을 했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심한 사춘기 갈등을 겪게 되었다고 했다. 오빠와 언니는 어머니의 재혼에 반대해서 지금도 어머니와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갈등 관계로 남아있으며 부인은 심리학을 공부하면서부터 어머니와 사이가 좋아져서 어머니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유산 받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양부와 함께 산지 1년 후에 이복 남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양부는 집을 나갔고 이 후에는 서로 별거 생활로 같이 살지 않고 지금까지 헤어져서 살고 있다고 했다. 구체적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부인은 친부와 양부로부터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질 수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분석 되었다.

 남편은 어린시절에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아버지가 이념적 성향으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통에 어려운 시절을 보냈형님은 정신증 문제로 일찍부터 가족들에게 어려움을 주었고 결혼 후에도 가족 구성원들에게 지금까지도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 둘째 형님은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고 셋째인 자신이 가족의 가장 역할을 해 오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시집 간 여동생이 형편이 어려워서 매달 용돈으로 얼마간을 보내주고 있다고 했다. 남편 Y씨는 어린시절에 대학을 졸업한 인테리였던 할아버지가 외도로 첩을 두셨고 할머니는 혼자서 살아온 분으로 아버지와 떨어져 시골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들을 교대로 차례 차례로 할머니 댁에 보내서 할머니가 외롭지 않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Y씨는 3살 때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7살 때까지 할머니와 둘이서 시골에서 살았다고 회고했다.

  Y씨는 꿈을 꾸거나 전생 퇴행에서 자신이 늘 외로운 들판에서 홀로서 외톨이로 있는 장면이 연상된다고 했다. 이러한 외로움과 고독감이 부부 사이에서 작동을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남편의 가장 큰 불만은 늦게 퇴근해서 직장에서 동료들과 술을 한잔하거나 파티를 하고 귀가하여 부인으로부터 위로와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듣고 싶은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격려의 말을 간절히 원하고 있으나 부인이 여기에 대응해준 적이 거의 없다고 불만이었다. 부인은 늘 너무나 잔소리가 많아서 언제나 잘못을 따지고 이것 저것을 원하는 통에 집에 오면 질식될 것 같아서 집에 오자마자 들어 누워 잠을 자는 것이 자신의 특징이자 부인이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Y씨는 부인과 싸우면서 부인이 남편의 장점과 단점을 적어서 건네 준 쪽지를 치료자에게 보여 주었다. 부인은 남편에 대한 장점으로는 4 5개 정도로 적혀 있고 110개 정도의 단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부인은 남편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남편 Y씨는 부인과 약 20여년을 같이 살아 오면서 어떻게 좋지 않는 점만 골라서 자신을 비난, 불평, 불만으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 100여 가지를 세밀하게 노트해 놓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부인은 지금까지 남편과 살아 오면서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늘 이야기해 왔다고 했다.

별거 생활이 지속되면서 남편은 한번씩 집에 전화를 하면 부인이 받지를 않는다고 했다. 전화기에 발신 전화 번호 표시가 보이면 부인은 아예 남편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전화 때문에 폭력으로 이어진 사건이 있었다. 아들이 고 3이어서 수능시험을 잘 쳤는지, 어떤 학교에 진학을 할 것인지? 가 걱정이 되어서 전화를 했고 부인이 받았으나 더 이상 전화를 할 필요가 없다는 부인의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남편은 전화에다 대로 심한 언어 폭언을 하게 되었고 화가 풀리지 않아서 술을 마시고 집에 찾아가서 집기를 집어 던지고 폭력을 행사한 전례가 있어서 부인은 이제 남편의 전화를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었고 남편과의 소식을 차단 시켜버렸다고 Y씨는 분노했다.

Y씨는 지금까지 친구가 별로 없고 감정 표현이 미숙하다고 했다.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잘 이야기하지 않고 마음 속에 억압해 왔다고 했다. 직장 동료들은 자신이 부인과 별거하고 있다는 이야기나, 부부 사이에 폭력 등의 이야기는 모르고 있으며 개인적인 수치심으로 생각하고 절대로 친구들의 계 모임이나 술 좌석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아무런 일도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숨기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내면을 숨기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있었다.

남편 Y씨는 첫번째 별거하고 있을 때 필요한 서류를 찾기 위해서 집을 방문해서 서랍을 뒤지다가 부인의 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뜯어보는 도중에 3인 아들이 그것을 보게 되었고 아버지에게 왜 어머니의 편지를 허락도 없이 열어 보느냐는 항의를 받았고 아들이 자신을 좋게 보지 않고 있으며 완전히 어머니 편이 되어있다는 점에 분노했다. 한편으로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 대해서 어린시절에 잘 해 주지 못한 것이 늘 가슴 아팠다고 안쓰러워 하고 있었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의사 소통이 안되고 관계가 소원하다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론적 근거

6개월 동안의 Y씨와의 상담 과정에서 남편 Y씨와 부인 A씨가 어떻게 서로 욕구가 얽혀있는가를 분석해 낼 수 있었다.

결정적인 문제점은 Y씨가 3세에 혼자 살고 있는 친 할머니 집에 가서 7세까지 약 4년 동안 살았던 기간이었다. Y씨는 그 때 동네 친구들과 어울러 논 기억이 없었고 늘 집에서 혼자 놀았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지금도 외로움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호소하고 있고 부인으로부터 따뜻한 감정 지원을 받는 것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의 원천이 바로 이 시절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때에 대한 기억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손님이 오면 좀 더 있다가 갔으면 좋겠다고 손님의 신발을 감추었던 일들을 기억해 냈다. 혼자서 외로움에 젖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3 5세까지는 정신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으로 본다. 이 시기에 어머니와 떨어서 지냈기 때문에 불안하고 공허한 감정이 그 때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잘 해 주어서 할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는 없으나 할머니는 말이 없고 차가운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할머니는 늘 농사를 짓는데만 신경을 썼고 손자가 외로운지, 동료들과 놀고 싶어하는지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할머니가 일하러 논, 밭으로 나가고 나면 어린 Y씨는 늘 혼자서 외로웠다고 회고 했다. 어머니를 상실 했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친밀감을 잃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Y씨는 상담 도중에 지금 현재 같이 지내고 있는 어머니가 차갑고 현재의 자신의 우울한 감정을 토로할 대상이 안 된다고 했다. 저녁에 직장에서 돌아오면 혼자서 소주 1 병은 들고 김치 몇 조각을 놓고 술을 자주 마신 후에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한다고 했다.

집에서 어머니와는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어머니는 늘 시간이 있으면 기도를 하는 편이라고 했다. 어머니와의 애착 관계가 상처를 입었고 남편 Y씨는 이것을 부인으로부터 채우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상관계 이론에서는 이 오디팔 기간을 동료들과 사회성이 길러지는 중요한 시기로 본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탐색으로 어머니가 옆에서 어린이에 대한 안전 감각과 안정 감각을 제공해서 어린이가 마음 놓고 사회 환경을 마스터해 나가는 시기로써 이후 성인이 되어서 심리적 안정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기간으로 본다. 가장 중요한 시기인 0 3세까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3 - 7세 사이에 Y씨는 불안을 경험하였고 세상이 위험하고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배운 것이었다. 결정적 시기에 어머니를 상실한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다양한 심리검사에서 Y씨는 가벼운 불안증, 우울증으로 나타났고 자아 감각이 낮았다. 대인관계에서 자기 주장이 없고 자신감이 납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것의 핵심이 바로 어린시절에서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결혼 후에 Y씨는 늘 외로움과 고독으로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부인과의 가장 큰 갈등이 직장에서 귀가해서 집에 오면 부인과의 아기자기한 대화가 안 된다고 부인은 늘 불평해 왔다는 점이었다. 아들과 친구처럼 지냈으면 하는 소망도 이것과 관계 있다. 남편 Y씨는 자신의 감정을 커뮤니케이션 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가 바로 어머니와의 애착 문제에 걸려 있었다. Y씨는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집에서 어머니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한 적이 기억 나지 않는다고 했다. 언제나 고단한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고 착한 아들로 모범적인 아들로 자신의 일은 자신이 미리 알아서 가족들에게 패를 끼치지 않는 것에만 신경을 써 왔다고 했다.

어린시절에 친밀감을 나누는데 문제가 성인의 부부 관계에서 친밀감을 나누는데 핵심 요소로 등장한 것이었다. 어린시절에서부터 어머니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다 보니 내 욕구와 자아는 뒷전이 된 것이었다. 앞으로 치료에서는 이 문제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하게 하고 자신의 자아를 우선해서 내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어린 아이를 잘 다독거리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데 초점이 모아져야 함을 알게 했다.

부인으로부터 외로움, 고독함을 충족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스스로 내 욕구를 컨트롤하는 훈련이 필요함을 알게 했다. 외톨이 문제는 내 스스로가 해결하도록 치료의 초점이 모아질 것임을 예고했다. 나아가서 Y씨는 부인 A씨를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로 보고 있음을 알게 하였다. 어린시절에 자신을 할머니 댁에 보내서 친밀감과 세상에 대한 불안함을 안겨주었던 어머니,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을 일일이 이야기할 수 없었던 외로움, 고독감을 안겨준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무의식적으로 부인에게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게 했다.

남편은 직장에서 늘 술을 자주 마셨고 집에 늦게 귀가하면 부인은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잠을 자지 않고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고 남편은 부인에게 다정하게 친밀한 대화가 없이 바로 침대에 쓰러져서 잠을 잔다고 부인으로부터 불평을 늘 들어왔다고 했다. 부인을 무시하고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겉으로 보면 친밀감을 만들 능력이 없기 때문으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부인에게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다정하게 나를 위로해 주지 못하는가? 왜 나에게 따뜻함이 부족한가? 라고 부인에게 불평하고 있고 그 욕구의 불 충족 때문에 부인을 처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밤 늦게까지 기다리며 친밀한 대화를 원하고 있는 부인을 무시하고 처벌해서 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부인에게 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그 다음의 치료 목표가 된다. 치료자와의 치료 과정에서 Y씨는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패턴이 앞으로의 치료 과정에서 다루어질 것이고 이것이 습관화 되면 이후에 귀가해서 부인과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부인과의 갈등을 해소하고 친밀감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부인은 어린시절에 남자들과의 관계가 망가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춘기 진입 직전에 어머니의 재혼은 오빠와 언니에게 마음 속의 상처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유는 오빠 가족과 언니 가족과 어머니와의 관계가 단절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인은 다행히도 어머니와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나 어머니의 삶이 부인의 삶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부인이 고 3 아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서 남편과 별거하고 살고 있는 것어머니가 양부와 별거하고 지금도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과 유사하지 않는? 이러한 분석에 남편 Y씨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장모님의 삶과 부인의 현재의 삶이 똑 같을 수가 있는가? 우연의 일치인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어린시절의 상처가 치료되지 않아서 반복되고 있음을 부인이 모르고 있을 따름이다. 장모님은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아들 하나를 데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이 살고 있다고 했다. 부인은 모든 재산 명의를 부인의 이름으로 해 놓고 남편은 쫓겨났기 때문에 남편 Y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인은 경제적으로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지금도 Y씨는 한 달의 봉급 중에 3분의 2를 아들과 부인의 몫으로 보내고 있다고 했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매입한 작은 농장과 부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으로 경제적 어려움은 없다고 했다. 부인은 재산을 확보한 채 남편을 떠밀어 냈고 이러한 과정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임이 분명했다. 아들 하나와 남편의 재산을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해 놓고 남편을 별거하게 만들어 놓은 것은 어머니의 삶의 반복이 아닌가? 재산에 집착과 자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놓은 것과 별거 후에 관계의 단절 등이 이것을 말해 준다.

해결 과정

Y씨에게 치료자는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애걸복걸하지 말도록 했다. 자신의 성숙된 모습을 부인에게 보여주는 것이 최우선임을 강조했다. 남편은 지금까지 부인과 재결합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전화로 혹은 직접으로 접촉을 시도했고 그 때마다 부인과의 대판 싸움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했다. 부인은 남편과 만날 때마다 아직도 변화된 것이 하나도 없네! 하고 말해 왔다는 것이다. 남편이 근신하면서 무엇인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부인과 재결합할 수 없을 것임을 알게 했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는 내 자아 속에 있다는 점이 강조 된다. 상대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먼저 내가 바뀌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가 바뀐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남편으로 하여금 부인은 이상적인 틀을 만들어 놓고 남편을 그 틀 속에 집어 넣으려고 하고 있음을 알게 했다. 부인은 어린시절에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가 양부와 재혼을 했고 이복 동생을 낳은 후에 양부는 별거해서 이후에 이혼으로 갔기 때문에 정상적인 따뜻한 가족을 가지지 못했다. 이 상처가 결혼 후에 남편과의 관계에서 재연된 것이다. 부인은 남편 Y씨와의 결혼에서 이상적인 가족을 꿈꾸어 왔다. 남편은 치료자가 보기에도 미남에다 체격도 당당해서 여성들에게 외면적으로 인기가 많았다는 남편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부인은 남편의 음주와 흡연은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고 문제 삼지 않았다고 했다. 흡연은 오히려 남자다워 보인다고 좋아했고 음주 문제는 그렇게 심한 문제로 처음부터 보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은 상담 치료 과정에서 치료자에게 하소연을 했다. 왜 같은 직장에서 외도를 한번 한 다른 사람들은 갈등이 있었지만 별 문제 없이 함께 살고 있고 또 많은 남성들이 외도를 한번쯤 안 한 사람이 드물지 않는가? 왜 하필 나만, 그것도 6개월이라는 단기 간에 해프닝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부인의 어린시절의 상처를 건드린 것이 결정적 실수였음을 알게 했다. 부인은 아버지의 외도와 어머니와 이혼 그리고 어머니의 재혼과 양 아버지와 결합과 별거 등에서 사춘기 때 성적인 문제가 걸려 있음을 남편 Y씨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것은 다 용서해도 외도 문제는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어린시절에 심층에 깊이 묻어 놓은 폭탄의 뇌관을 건드린 것임을 모르고 있다. 외도가 있기 전까지 부인은 끊임없이 남편에게 자신의 이상적인 틀 속에 남편을 집어 넣으려고 한 것은 부인의 소망인 이상적인 가족의 실현에서 찾을 수 있다. 이상적 가족에 결정적인 흠집을 낸 것이 바로 외도였다.

부인은 외도 사건 후에 2년 만에 남편에 대한 분노, 적대감정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 것에 대해서 남편은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물론 대형 폭발과 폭력 사건이 여러 번 있었지만 20년 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가 그 정도의 문제로 원수가 되어 지금은 서로 얼굴조차 보기 싫어할 정도로 변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부인이 남편에 대한 분노의 원천은 부인의 어린시절에 억압해 놓고 있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양 아버지에 대한 분노, 적대감정이 바로 남편이 Y씨 한데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게 했을 때 Y씨는 무릎을 쳤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것이었다.

서로 욕구가 어떻게 뒤 얽혀 있는가? 하는 것은 문제를 푸는데 핵심 열쇠임을 알게 했다. 남편과 부인은 서로억압된 감정을 무의식적인 공모를 통해서 방출 시켜주는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20년 동안 결혼 후에 쌓아 놓은 분노의 뇌관을 남편이 터뜨려 주고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남편 Y씨의 분노를 부인 A씨가 방아쇠를 당겨 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 부부는 다시 서로의 욕구를 차단 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편에 대한 부인의 평가가 100% 좋지 않는 것으로 평가절하 된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혼 초기에 100% 좋은 이미지가 20년의 결혼 생활 후에 180도 꺼꾸로 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서로의 공모를 깨는 것이다. 부인이 걸어오는 갈등의 유혹에 걸리게 않게 하는 것이다. 한쪽이 도발을 할 때 걸리지 않으면 갈등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치료에서 다루게 될 것임을 알게 했다. 부인으로부터 도발을 느끼면 그 순간에 내 자아에게 이야기를 하게 하여 스톱을 걸게 한다. 나에게 지금 방아쇠를 당기게 하고 있네! 여기에 걸려들면 파트너의 충동을 내가 만족시켜주게 되는 거야! 여기에 걸려들면 둘 다 파멸이야! 낚시 바늘을 물지 않으면 걸려들지 않는 거야! 라고 그 순간에 자아에게 말하게 하면 제동이 걸린다는 것을 앞으로 치료에서 다루게 될 것임을 예고했다.

심리분석 치료 과정에서 앞으로 계속해서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러한 정보들은 다시 파트너와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에 첨가되어질 것이다. 분석은 깊어지고 치료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자아와 배우자의 자아를 더 깊이 잘 알게 될 것이고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가? 를 알게 되면 될수록 갈등 문제는 줄어져 갈 것이다. 여기에다 동료들과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자신감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스스로 술이나 담배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을 줄이고 취미 생활을 늘리고 스스로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도록 도와주는 일이 덧붙여지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삶에서 즐거움을 찾게 하고 자신감에 차서 누구 앞에서나 당당해지는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김종만, 결혼과 가족과 치료, p140-146페이지 인용, 2003).

치료 종결

Y씨가 치료를 시작한지 1년이 가까이 되던 어느 날 Y씨는 부인 A씨와 직접 대면해서 그 동안에 쌓인 감정을 이야기로 풀 수 있었다. 부인 A씨와 만나고 온 Y씨는 기분 좋아 했다. 장장 7시간을 부인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고 즐거워 했다. 부인은 Y씨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음을 반가워했고 별거 중인 지금의 생활에서 남편 Y씨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치료자는 아직도 재 결합할 시기가 미성숙했다고 보고 남편 Y씨의 감정 표현을 자연스럽게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게 좀 더 시간을 두고 부인과 재 결합을 서두러지 말라고 조언을 했다.

남편도 아직은 부인과 만나서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데 자신감이 없다고 했다. 치료를 자연스럽게 감정을 방출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Y씨는 어린 시절에 경험한 고통스런 경험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이 많았다. Y씨는 취미 생활로 자신이 청년 시절에 작가가 되고 싶어했던 것을 회상하며 자신의 감정을 시()로 써 보고 싶다고 했다. 치료 5개월이 되는 시기에 Y씨는 시간이 허락 할 때 자신의 마음 속에 담아둔 시를 하나씩 써서 치료 시간에 가지고 와서 그 시에 나오는 이벤트와 관계된 감정의 연결 고리를 하나씩 찾아나가게 되었다. 치료 1년 쯤에 제법 한 권의 시집이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 시집을 손으로 만들어서 부인과 아들에게 선물을 하고 치료자에게도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Y씨는 이제 술을 마시는 것을 절제 하고 되도록이면 자신의 감정적 갈등을 도발하는 술 친구들의 특징을 인식할 수 있었다. 자신이 술을 마시다가 폭력으로 연결되는 술 친구들의 공통점이 자신의 단점을 닮아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Y씨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를 닮은 사람들이고 Y씨 역시 아버지를 닮아서 알콜 중독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술을 마시고 가족 구성원들에게 행사한 폭력 Y씨의 가슴에 남아서 Y씨 역사 아버지를 닮아 있는 모습 Y씨 자신도 놀랬다. Y씨는 술 친구들을 통해서 자신의 반사된 모습을 보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이제 Y씨는 술을 절제해서 마실 수 있고 치료가 시작된 후에 지금까지 술 자리에서나 술 마신 후에 폭력적 행동이 없었다. 핵심 문제인 감정을 다루어서 마음 속에 억압된 분노, 적대 감정을 방출 시키는 치료 과정을 진행하다가 Y씨가 3개월 정도 해외 출장 때문에 치료를 당분간 중단되었으나 이후에 치료 종결로  이어졌다.

두 번째 사례는 치료자가 1990-1992년 동안 미국의 캘리포니아 노스 헐리우드에 있는 가족치료 연구소에서 인턴 모집에 응시해서 20명의 미국인 인턴들과 함께 2년 동안 인턴십을 받으면서 알게 된 35세의 B씨의 이야기이다. 그는 치료자의 옆방에서 거주하는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 시점에서 치료자는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집 주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그 때 한국에서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병수발을 하기 위해서 미국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가족들이 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병수발을 들게 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정해진 면회시간에 만 방문한다. 모든 환자의 병수발은 병원의 도우미들이 한다(우리나라에서는 삼성병원에서 유사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귀국 후에 알게 됨). 어머니는 그것을 모르고 미국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간호에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게 되면서 치료사가 저녁 시간에 어머니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면서 어머니가 치료자가 심리치료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 자신의 심리분석을 의뢰하게 된 것이었다.

 아들 B씨는 지금 3 번째로 병원에 재입원해서 생사의 갈림길에 있다고 했다. 창자의 누수로 새는 것 때문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의사들도 어디에서 누수가 생겼는지?2번의 수술 후에도 실패해서 3번째 마지막으로 찾고 있다고 했다. B씨는 사실은 정식으로 유학을 온 것이 아니고 관광으로 왔다가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해서 눌러 앉아서 조그만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으면서 불법으로 체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 한가지는 유학생들이 만나게 되면 서로 몸이 아프게 되면 공부는 끝난다라는 것을 항상 강조한다. 정식 유학을 하게 되면 한 학기 $100불짜리의 보험이 있다(치료자의 경우). 그것은 응급처치에 불과하다. 미국의 병원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라는 것을 치료자는 잘 알고 있었다. 고로 유학생들은 만약에 급한 경우에는 쓰러져서 엠블런스를 타고 입원을 하면 미국의 병원들은 그 사람이 불법체류자 혹은 돈이 없는 가난뱅이든지 간에 구분이 없이 입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B씨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B씨는 불법 체류자로 돈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3번째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입원한 것이었다.

 B씨의 어머니는 아들 B씨가 지금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해서 세 번째 수술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아들을 퇴원시켜서 한국에 가서 최고의 병원인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키고 치료를 받게 하려고 아들과 어머니의 비행기 표를 예약해서 구입해두고 있다고 했다. B씨가 입원한 병원은 L.A. 시립병원이었다. 그 병원은 USC(남가주 대학: 사립대학으로 L.A.의 주립 대학인 UCLA와 맞먹은 유명대학이다) 의과대학 부속병원이었다. 그 병원이 L.A.의 사립병원으로 시설이 노후 된 것은 사실이었다. 치료자는 어머니에게 아들의 귀국을 만류를 했다. 아무리 미국에서 최하위 병원이라고 해도 우리나라의 최고 병원보다는 의료진들이 우수하다, 고로 만약에 아들을 데리고 귀국하면 미국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을 한국에서 고칠 수 없다, 고로 데리고 가면 아들의 사망을 불을 보듯이 뻔하다고 극구 만류를 했다 어머니도 치료자의 조언에 수긍을 해서 예약한 비행기 표를 취소할 수 있었다. 아들 B씨는 세 번째 수술에서 성공해서 완쾌되어 퇴원을 했다. 그가 옆방에서 기거하면서 그는 농담으로 선생님 저는 배꼽이 없습니다. 세 번째 수술로써 배꼽이 날라가 버렸다 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제 B의 어머니의 기구한 삶의 분석에 들어가 보자. 어머니는 중부지방에서 자라나서 중학교를 마치고 일찍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중학교 교사였다. 3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남편은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남편이 외도를 해서 가정을 떠난 것이었다. 부인은 혼자서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서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고 실토를 했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언제가 교회에 갈, 올 때 찬송가를 부르고 자신을 달랬다고 했다.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면서 한 푼의 위자료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남편은 유명한 신문사의 주필로 있으면서 길거리에 고아들, 거지들에게는 용돈을 털어서 주었지만 자신의 아들들에게는 한 푼도 보내주지 않았다고 했다.

 결혼해서 부부 관계를 분석하면서 핵심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부인은 남편을 하늘처럼 존경경하고 언제나 남편이 출근할 때는 안녕이 다녀오세요 라고 대문 밖에서 인사를 하고 귀가할 때는 안녕이 다려왔습니까? 라고 인사를 했다고 했다.남편의 말은 하늘처럼 존중하고 남편이 하자고 하는 것을 존중해서 반대하지 않았다고 실토를 했다. 한가지 예를 들어서 남편의 구두를 닦아서 언제나 윤기가 나게 구두약으로 손수 닦아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부인을 떠나갔다고 통분했다.

치료자는 남편과 부인의 부부 관계가 위에서 A씨의 할아버지의 부부처럼 틀림없이 남편을 하늘같이 떠받드는 부부관계와 유사한 것으로(A씨의 할아버지 부부관계는 치료자가 유추) 아버지와 딸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남편이 외도로 바람을 피우고 부인을 떠나간 것이었다. 그런데 장남인 아들이 결혼을 해서 3살짜리 딸을 남기고 부인인 며느리가 이혼을 선언하고 떠나간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 손녀를 데리고 그녀가 키우면서 그 손녀가 할머니를 엄마, 엄마라고 부르면서 성장을 했다고 했다. 지금은 고교를 졸업하고 그 해 비행기 승무원에 취업을 해서 조만 간에 L.A.에 비행기 승무원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지금도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고 했다. 둘 째 아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셋째인 B씨 역시 미혼이었다. 치료자는 3명의 자녀들이 어린시절에 부모님의 애정생활을 보지 못하고 성장을 헸기 때문에 장남의 결혼 생활에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세 번째 사례는 60대의 할머니의 의뢰로 그녀의 남편의 폭력 문제를 치료를 부탁을 해서 6개월 동안 치료를 하게 되었던 치료 사례였다. 할머니는 남편이 한번도 봉급을 타서 부인에게 제공한 적이 없다고 분개 했다. 그리고 남편은 화가 나면 물건을 집어 던진다고 했다. 전화기, TV 리모콘, 밥상을 뒤엎어버리고,전기 밥통 등등 집어 던지지 않는 물건이 없다고 했다. 부인은 피아노를 한 대 가지고 레슨을 해서 먹고 살았는데 아들은 일찍이 남편의 누나인 고모가 미국에 살고 있엇기 때문에 미국에 보내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지금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을 해서 가족부양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도대체 남편이 어떤 인간인가?를 알고 싶다고 했다. 1주일에 할아버지 C씨가 1회로 2시간씩 치료를 6개월 동안 받게 되었다. 할머니는 중간에 치료에 대한 정보가 쌓이게 되면서 몇 번 나와서 치료의 과정을 설명해주고 C씨를 지원해주도록 했다.

C씨는 유복한 가정에서 청년기까지는 어려움이 없이 성장을 했다. 대학 1학년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를 해서 뒤처리를 부인과 아들에게 맡기고 도망을 가버렸다. 아버지는 C씨가 어린시절에 경제적으로 부유해서 누나는 서울에서 명문 여자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이민을 가서 잘 살고 있었다, C씨는 그 당시에 지방의 이름난 법대학생이었다 그런데 사업의 실패로 부도가 나면서 집과 가재도구를 모두 부인의 이름으로 등기를 하고 피신해버린 것이었다.

여기에서 고스란히 채권자들의 분노의 표적이 C씨가 된 것이었다. C씨는 아버지의 빚쟁이들에게 십자포화를 받게 되었다. 빚쟁이들이 몰려와서 C씨와 어머니에게 울분을 토해냈다. 사기꾼이라고 욕설을 퍼 부었다. 대학생인 아들에게 너의 아버지는 사기꾼으로 가난한 사람의 돈을 편취한 악랄한 인간 쓰레기들이라고 혹평을 했다. 너는 대학생으로 양심이 없는가? 남의 돈을 떼먹고 갈취한 놈들이 잘 사는가? 어디 두고 보자, 너희 놈들은 하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등등의 온갖 욕설들언어 폭력으로 C씨의 가슴에 대못으로 박혀있었다. 그러나 C씨는 한마디로 할 수 없었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갈 곳이 없었다. 그는 그들의 화풀이를 몇 년 동안 당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변명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부도난 가산을 정리를 하고 파산선고를 하고 집안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C씨는 문제 해결능력을 배울 수가 없었다. 그냥 세월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 C씨의 청년기의 모습은 그대로 그의 어른시절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세월만 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치료자는 이러한 부모님이 사업을 하다고 부도를 내고 가족들에게 뒤처리를 부탁하고 떠나버린 것 때문에 고교생이던 아들이 정신분열증(조현병)에 걸린 사례를 여러 번 보았다.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고소를 상해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아버지가 전화로 경찰들에게 조사를 받을 때 xxx라고 해라, xx라고 하지 말라 하는 말들 듣고 경찰관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가 말의 앞뒤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면서 환청이 들리고 집안에서 구석에 처박혀서 자신을 체포하려 온다는 것 때문에 학교를 포기하고 정신병 환자가 된 사례들을 보았다.

C씨의 부인은 여고를 졸업하고 지방의 명문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해서 사법고시를 하고 있다는 말에 결혼을 결정을 했다 .그러나 남편은 고시준비를 하다가 포기를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번도 취업을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남편은 매일같이 부인에게 아침 식사 후에 외출을 하면서 지금도 용돈을 요구 했다. 그 당시에 2천원(오늘 날 2만원 정도의 가치)을 받아서 동네여서 술친구 똘만이 들을 데리고 술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할머니가 호소를 했다. 그 똘만이 들은 C씨를 박사님 혹은 교수님이라고 부르면서 부추겨 세웠고 C씨는 기고만장에서 술이 입에 들어가면 유식한 박사가 된다고 했다.

한번은 C씨가 버스 안에서 그 당시에 전두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쏟아낸 것이었다. 전두한 그 놈은 돌대가리야! 그는 공부를 못하고 축구를 조금한 한심한 친구였다. 그는 얼간이로 공부는 0점이었다라고 하는 독설에 버스에 타고 있는 한 형사가 그를 간첩이 아닌가? 라고 의심을 해서 그를 버스에서 내게 하고 경찰서로 데리고 가서 조사 후에 귀가를 시켰다고 C씨의 부인이 털어 놓았다. C씨의 분석에서 대학 1학년 때 아버지가 피신으로 빚쟁이들 한데서 당한 언어 폭력과 상처를 토해내고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지 말(acting out 성격장애, 충동장애) 말로써 표현하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C씨의 분석을 통해서 C씨의 부인이 감정이 없는 사람(alexythymia: 감정을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사람) 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부인은 자신의 감정을 남편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었다. 즉 부인이화가 나면 남편을 도발해서 분노하게 만들어서 그녀 자신의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것 대신에 남편이 대신에 표현하도록 해서 남편은 악인이 되고 부인은 선한 사람이 된다. 그것을 밝혀지게 되면서 C씨로 하여금 부인의 감정을 대신 표현해주지 말고 그리고 부인은 자신의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도록 하는 치료로 진행을 할 수 있었다.

 

네 번째 사례는 38세의 남자로써 치료자에게 1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D씨의 사례이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과 그리고 부모님의 부부싸움으로 초등학교 시절에 삶이 망가져서 대인관계가 어려운 사람으로 36세로 늦깎이 결혼으로 작년에 태어난 딸을 둔 가장이었다. 그는 7년 동안 사귀던 한 연인이 그를 떠나면서 오빠를 7년 동안 사귀었지만 알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남기도 떠났다고 했다.

그는 치료자를 만났을 때 선생님 저는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나는 명문대학 경영학과(SKY 대학) 그리고 외모, 지식, 그리고 직장(이름 있는 외국인 회사)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고 있는 엘리트 사원으로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고 업무에 따라서 스스로 출퇴근을 조정해서 한다고 자랑을 했다(그 시점은 지금부터 10 ) 그런데 사소한 문제, 정말로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사소한 문제로 망신을 당하고 있는 내 자신의 문제 때문에 찾아왔다고 스스로 실토를 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남들 앞에서 특별히 그룹 앞에서 말을 할 때 더듬거리고 으음, 음음 등의 말로써 버벅거리면서 손에 땀이 등에는 식은 땀이, 호흡이 가팔라지고 현기증으로 쉰 목소리가 나온다고 했다. 마치 자신이 없는 유치원 어린이처럼 말을 하는 것 때문에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15년 전에 입사한 한 외국계열의 명문 회사에서 6년 전에 사장의 배려로 전체 직원들이 13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한 개의 프로젝트를 발표를 하다가 머리 속이 하얗게 생각이 나지 않아서 망신을 당하고 연단에서 내려온 이후에 대인공포증으로 그리고 간부 회의에 들어가면 자신이 지명을 받을까 봐서 가슴이 띄고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호소를 했다.

그는 3개월에 80만원을 주고 3 개월 동안 실행하는 인지-행동 그룹치료를 하는 한 정신과의사에게 치료를 받아보았으나 실패를 그리고 몇 번의 심리치료를 받아보았으나 실패를 했다. 치료자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고 치료를 요청해서 1 6개월 동안 1주일에 1회의 치료 회기로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다.

언제부터 그러한 증세가 시작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대학 1학년 때 한창 반정부 시위 데모가 유행일 때 대학 서클의 노래패 그룹에서 운동권 학생들을 위해서 뒤에서 격려 노래를 불러주는 서클에 가입해서 노래 연습을 하다가 자신이 노래를 부르게 될 때 버벅거리고 노래 가사가 생각하지 않아서 동료들의 웃음을 산 것이 시발점이었다고 했다. 그 이후에 그의 증세는 가속도를 받게 되었다. 몇몇 동료들 그룹 토론으로 발표를 할 때 그는 자료를 모으고 기기를 조작하는 일을 했지만 절대로 연단에서 발표를 하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고 했다. 군입대 후 3년간 복무를 무사히 끝내고 복학 후에도 그 증세는 계속되었다. 그는 6개월 중국 유학을 갔다가 실제로 첫 날 학원에 등록 후에는 나가지 않고 혼자서 방에서 지내다가 왔다고 했다. 그의 증세는 수행공포증이었다. 대인공포증의 하나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발표, 공연 등의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불안 장애의 하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폭력의 대물림만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의 명문 대학에서 학도호국단장(박정희 대통령 때 학생회장의 호칭)을 하고 박대통령이 그 대학을 방문을 했을 때 악수를 한 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가족들은 가문의 인재가 탄생했다고 자랑스러워하고 언젠가는 크게 될 사람이라고 전체 가문의 기대가 컸다고 했다. 어머니는 일제 시대에 은행장을 한 아버지를 둔 가정의 장녀로써 은퇴 후에 아버지는 노후 자금으로 시골에서 농장을 사서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었다. D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남들이 보기에는 전생연분으로 부러움 속에서 결혼을 시작을 했다. D씨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2살 아래 남동생이 태어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첫 사업으로 스마일 마크 단추를 만들어 파는 사업을 했다가 실패하고 한 친구와 동업으로 지방의 대도시에서 6층짜리 백화점을 건축을 했다고 친구가 혼자서 하겠다고 손을 떼라고 하는 것에 격분해서 그 친구를 폭행하고 고소를 당해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한 것이 시발점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이후에 처가의 도움으로 조그만 가계를 몇 개 차려주었으나 구멍가계라고 거부하고 운영을 제대로 하지 않아 번번히 실패 했다. 아버지는 남자는 통이 커야 출세한다고 하면서 조그만 일에는 남자가 쩨쩨하다고 거부하고 거들떠 보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실직과 음주와 폭력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부부 싸움이 거칠 날이 없었다. 어머니가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서 노점상, 행상, 외판원, 보험회사원, 다단계 등등으로 어머니는 아침 7시가 되면 출근을 해야 했다. D씨는 출생 후에 3살 때 아버지의 실직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외갓집에서 7세까지 외갓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위에서 첫 번째 사례 A씨와 유사). D씨는 학교에 입학해서 동료들을 벌써 한글을 깨우치고 익혀왔는데 그는 한글을 모르고 입학한 유일한 학생이었다고 했다.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어머니는 D씨와 동생에게 목에 열쇠를 걸어주고 집에 들어오면 스스로 문을 열고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전비밥솥에서 밥과 큰 냄비에 들어있는 국을 떠 스스로 식사를 하는 것이 습관이었다고 회고를 했다.

D씨는 초등학교 시절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이 미술시간에 준비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고 회고를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출근 준비를 하는 엄마에게 엄마, 미술 시간에 준비물을 사야 하는 데 돈이 없어요라고 이야기를 했다가 호되게 처벌을 받았던 기억을 회상을 했다. 어머니는 노발대발했다.“내가 돈의 어디에 있느냐? 너의 눈으로 보지 않느냐? 내가 돈을 벌러 나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느냐? 너의 아버지게 돈을 달라고 해라는 호통에 놀래서 그 이후에는 평생동안 한번도 어머니에게 돈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문제는 미술시간 때마다 학습 준비물들(도화지, 크레용, 화판 등등)이 없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이 너는 왜 학습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라고 물었을 때 잊어버렸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어머니가 준비물을 챙겨주지 않았다 혹은 돈이 없어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잊어버렸다고 하면서 매번 마다 잊어버린 게으름뱅이로 낙인이 찍혀서 담임의 미운 털이 되었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의 가정환경 조사서에는 아버지는 대졸, 어머니는 고졸로 둘 다 사업가로 명시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담임 선생님은 치맛바람이 거셀 때여서 부모님이 담임을 한번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에서 더욱 더 D씨가 미움의 표적이 되었다고 회고를 했다. 그는 미술 시간만 되면 준비물 부족으로 학급 동료들 앞에 불려 나가서 무릎을 꿇고 꿇어 앉아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부인을 폭행을 하고 집기를 집어 던졌다. 밤새도록 부부싸움은 D씨와 동생을 잠 못들게 했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점에서 교실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머리를 흔드는 것에 놀래서 씨발놈아!라고 욕설을 하면서 쳐다보니 담임 선생님이었다. 그는 사과를 하지 못하고 동료들에게 나쁜 놈으로 인식이 되었고 그 후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무실을 쳐다볼 수 없었고 교무실 앞을 지나갈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5명의 친구들이 모임을 해서 서로 돌아가면서 한 달에 한번씩 그의 집으로 초대해서 서로 모임을 가지는 서클에 가입을 했다. 도지사의 딸, 의사의 아들, 교사의 아들, 은행원의 아들, 사업가의 아들 등으로 D씨는 부모님이 사업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살고 있는 지하방에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친구들의 그의 집에 와서 그의 환경을 보면 놀래서 도망을 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매번 마다 그의 차례가 돌아오면 그는 어머니가 출장 중이다. 사업차 지방에 내려갔다 등으로 끝내는 5명의 친구들을 D씨의 집에 초대하지 않았다.

또 한번은 초등학교 5학년 시점에서 그의 학급에서 한 동료가 공부를 하지 못한다고 놀리고 비아냥거렸는데 D씨가 이사를 간 곳이 바로 그 친구의 집에 월세 들어살게 된 방이었다. 쥐 구멍을 찾고 싶었다고 회고를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모시려 가자고 해서 B씨를 데리고 가서 어떤 술집에 갔을 때 아버지가 그 주점 종업원을 때리고 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버지의 음주와 폭력은 계속되었다.

초등학교 시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 끝에 아버지가 냉장고를 집어 들고 창문 밖으로 집어 던지는 바람이 놀래서 집 밖에서 동생과 함께 빈 볼박스 통을 뒤집어 쓰고 밤샘을 하면서 보냈다고 하소연을 했다.

중학교 2학년 시점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하는 것을 보고 D씨가 야구 방망이로 아버지를 때렸을 때 아버지가 놀래서 D씨를 바라보았다고 토로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한번도 아들 D씨는 때린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평생동안 한번도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월급 봉투를 가져다 준 적이 없었다고 회고를 했다.

, 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머니가 빌려준 돈을 업자가 갚을 수 없어 그 업자가 운영하던 다방(오늘날 커피숍)을 물러 받아서 3개를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방은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면서 특별히 여자 종업원들을 희롱하고 섹스적으로 좋지 않게 보는 시선 때문에 그 다방의 마담이었던 어머니를 아버지도 D씨도 싫어하고 미워했다고 털어 놓았다. D씨는 동료들이 어머니가 다방 마담이라는 것을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나 그 다방업도 사업 실패로 문을 닫으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다시 궁핍해졌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생활에 어려움 때문에 학교에 가는 것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경제적으로 나아지면서 D씨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동료들과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아서 승승장구 했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이 절대다수로 반장을 하라고 했지만 반장을 고사하고 부반장을 했다고 했다. 반장을 하게 되면 어머니가 학교에 나와서 임원으로 나와야 하는데 어머니가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고사를 했다고 했다.

D씨는 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죽기살기로 공부하는 수 밖에 없다 라고 결심하고 공부에 매진해서 드디어 서울의 SKY대학 경영학과에 진학을 했다. 서울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아버지가 D군과 함께 하숙집을 구하게 되면서 함께 서울에 올라왔을 때 아버지가 기뻐 했다. 그러나 대학 1학년 여름 방학 때 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갔을 때 아버지가 간암말기로 D씨 도착 후에 며칠 만에 아버지는 45세로 세상을 떠났다. D씨는 불쌍한 아버지라고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의 분석이 시작되었다. D씨의 어머니는 치료사가 직접 만나서 컨설팅을 하지 않았다. D씨의 회고를 통해서 어머니의 삶을 재건축한 것이다. 어머니의 아버지를 일제시대 은행장을 한 인텔리였고 은퇴 후에 D씨가 살고 있는 시골에 노후 자금으로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어머니 6, 25 사변으로 어머니가 나이 6살에 전투기의 폭격에 사망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재혼을 했고 양모 밑에서 성장한 것이 밝혀졌다. 어머니는 친 엄마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양모가 잘해주었다고 해도 눈치 비위를 맞출 수 밖에 없었다 고로 감정의 표현이 없는 사람으로(Alexythymia) 라는 감정 장애를 가진 것이 밝혀졌다(사례 3번에서 할머니와 유).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망 이후에 하는 사업마다 실패를 연속했다. D씨가 외국인 회사에 입사 하고 나서 수 차례에 걸쳐서 2천만 원, 3천만 원 그리고 4천만 원 등으로 돈을 빌려갔다 그러나 모두 실패해서 돈을 갚은 적이 없었다. 모두 약 2억 원을 날렸다고 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사건의 실마리가 분석으로 다루어졌다. D씨는 돈에 대해서 돈 문제만 걸리면 도망을 친다는 것이었다. 그의 삶에서 돈이 장애물로 발 몫을 잡고 있었다.

첫 번째는 어머니가 수 차례에 걸쳐서 돈을 빌려가서 갚지 못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남동생이 중학교 중퇴로 아버지를 가슴 아프게 했다. 아버지가 중학교 졸업 후에 항공 정비학교 교장이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로써 그 학교에 원서만 넣으면 합격해서 항공정비사로 밥 먹고 살 수 있다고 설득을 했지만 남동생은 가출로써 비행청소년들과 어울리면서 아버지의 말에 정반대로 했다. 지금은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 남동생이 D씨에게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서 7천만 원을 빌려갔다. 이번에는 성공이 확실하다고 해서 빌려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게임을 해서 7천만 원을 날려버린 것을 알게 되어 노발대발 했다고 털어 놓았다.

결혼 후에 처가의 장인 어른이 D씨의 회사에 찾아와서 2천만 원의 적금을 깨서 빌려주고 그리고 부인 몰래 4천만 원을 은행에서 대부를 받아서 장인 어른에게 초 6천만 원을 빌려주었다고 했다. 그의 연봉을 보증금으로 돈을 빌려주었는데 사업의 실패로 돈을 갚지 못해서 매월 D씨의 봉급에서 이자가 50만원씩 날아간다고 토로 했다.

또 한가지 이벤트는 그의 새내기 부하 직원이 입사해서 축하 회식 후에 시간이 늦어서 택시비용이 없어서 부장인 D씨에게 3만원의 돈을 빌려갔는데 그녀가 갚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분개 했다. 왜 그녀에게 빌려준 돈을 달라고 하지 못하는가? 라는 말에 돈을 달라고 하면 부장님이 째째하게 돈 3만원을 가지고 독촉한다 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서 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새내기 부하직원을 위해서 선심을 썼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매일 같이 머리 속에서 그 생각이 떠 놀라서 미칠 지경이라고 했다.

또 한가지는 D씨가 최근에 고향에 동창회에서 회식을 하고 마지막에 헤어지면서 동료들이 너는 서울에 가서 출세를 했으니 오늘 비용은 모두 네가 지불하라고 해서 O.K. 라고 친구들이 택시 비용이 없다고 해서 몇 만원씩 지불하고 나중에 자신의 지갑에서 정작 택시 비용이 없어서 자신은 3시간-4시간의 거리를 밤중에 걸어서 집에 가면서 자신의 자아를 처벌했다고 털어 놓았다.

D씨는 함께 입사한 동료들은 벌써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해서 10억의 아파트가 생겼다고 기뻐하고 있는데 자신은 돈을 저축하기는커녕 매월 봉급에서 마이너스 통장으로 연명하고 있다고 탄식을 했다.

핵심은 D씨가 초등학교 1학년의 시점에서 어머니에게 마술공작 시간에 준비물을 산다고 하면서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호되게 처벌받은 상처가 D씨의 무의식 속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의 치료자의 지적에 동의를 했다.

이제 폭력의 대물림으로 초점을 맞춰보자.

D씨는 중학교 1학 년 때 한 학급동요를 두들겨 패서 그 학생의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 그의 어머니가 학교를 찾아와서 D군을 퇴학시켜달라고 하는 것을 담임선생님이 빌고 달래서 무마시킨 것을 회상을 했다. 중학교 3학년 시점에서 한 동료에게 분노해서 걸상을 들어서 그 학생을 내려찍으려고 할 때 옆에서 동료가 막아주었기 때문에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회고를 했다

최근에 그는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앞차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브레이크로 섰지만 되에 택배 트럭이 D씨의 차를 들어 받아서 40만원의 손해가 났다. 그런데 택배 트럭 운전사가 오늘 사고 때문에 하루 벌이가 날아갔다고 읍소하는 바람에 20만원만 받고 무마해주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자신이 손해 본 것에 대해서 후회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랬다고 털어 놓았다.

최근에 그는 자동차 수리 때문에 정비 공장에서 정비사와 사소한 말다툼으로 그를 몽키(쇠뭉치수리 기계)로 내려찍으려고 하는 것을 동료 정비공의 만류로 무산되었으나 그 정비공이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썼던 것을 회고를 했다.

또 한번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 비평기사를 쓰는 조선일보 신문사를 죽여버리겠다고 조선일보 사에 불을 질러서 태워버린다고 상상을 했던 것을 회고를 했다.

부부 문제를 분석하면서 D씨는 지금까지 약 6개월간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부인에게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결혼 전에 각종 정신과 서적들과 정신과 약물을 한번씩 복용하면서 부인이 혹시 그 정신과 책을 보지 못하게 책을 꺼꾸로 꼽아 놓고 그리고 정신과 약물을 감기약으로 철저하게 속이고 있는 것을 실토를 했다.

부인의 출산 이후에 부인과 잠자리를 1년 동안 같은 방을 쓰지 않고 있다고 했다. 치료자가 그 문제를 지적했을 때 부인이 아기 남편이 옆에 있으면 잠을 잘 수 없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장모님이 와서 아기를 돌보아 주고 자신은 부인과 같은 침대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털어 놓았다.

치료자는 약 6개월의 시점에서 D씨의 수행공포증은 어린시절에 부모님의 폭력과 부부싸움으로 받은 수치심, 모욕, 굴욕에서 자신의 감정을 차단하고 감정을 억압해 버린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지적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 치료자에게 했던 내면의 비밀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즉 7년간 사긴 여자친구에게도 그리고 지금의 부인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다고 토로 했다.

심층에는 부끄러움, 모욕, 수치심, 조롱, 멸시 등의 수치심과 죄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그것을 행동으로 acting out 하지 말고 왜 그것이 상처가 되었는가?를 깨닫고 말로써 표현하는 훈련을 첨부하기로 했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1 6개월 동안 치료의 과정을 거치면서 수행 공포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10년 전에 D(사례 에서는 B)의 치료과정을 소개한다.

대상: 38세의 남자 B

증세: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면 손에 땀이 나고 가슴이 꽉 조이고 숨이 막히고 호흡이 가파지고 말을 할 때 버벅거리면서 말을 더듬고 목소리가 거칠 게 나오는 증세 때문에 20년동안 고통속에 살아온 B

접촉: 정신과 의사에게 약물 치료를 받아보았으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6년 전에 한 정신과 의사가 운영하는 집단 치료 프로그램인 "인지 행동 치료" 80만원의 큰 돈을 주고 12주 동안 받아 보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음, 이후에 몇 번의 심리치료를 받았으나 실패했음. 그 후에 자신의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다양한 정신 의학적 서적을 탐독하면서 라깡의 정신분석,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불교 서적, 각종 정신 의학 서적 들을 탐독하면서 자신의 문제 해결을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음. 치료자의 홈페이지에 접속한 후에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 왔음

진단: 불안증, 수행 공포증

치료 기간: 1회기에 2시간씩 1주일에 1회 치료 회기로1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음

치료 결과: 치료 1.5개월 만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문제의 핵심 원인이 분석되어졌음. 이 분석에 대해서 B 씨는 100% 치료자의 분석이 정확하다고 확신을 한다고 동의를 했다.

 

치료의 과정

1 회 치료 회기

B씨는 치료자를 만나자 말자 당당하게 그가 명문 대학의 명문 학과 출신이라고 소개를 했다. 외모로 보아서 키도 크고 미남이었다. 직장도 세계적으로 이름난 외국인 회사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엘리트 사원으로써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고 자신의 업무에 따라서 스스로 출퇴근을 조정해서 한다고 자랑을 했다. B씨는 자기 자신도 자기가 어디에 내 놓아도 꿀리는 것이 없는 당당한 엘리트 출신이라고 자부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그만 문제 즉 큰 문제도 아닌 "조그만 문제"(그가 여러 번 강조함때문에 자신이 만신창이가 되어왔다고 한탄 쪼로 말을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만 되면 가슴이 조여오고 손에 땀이 나고 호흡이 가파지고 현기증이 나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말을 버벅거리고 목이 쉰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더욱 더 나아가서 이제는 그러한 상황이 예상되면 공포적이 되고 겁부터 먼저 난다고 했다. 언제부터 그러한 증세가 시작되었느냐는 치료자의 질문에 처음 시작된 것은 대학교 1학년 써클 활동 때였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지방의 소도시에서 성장한 지방 출신으로 중, 고등학교 때는 반에서 1 2등을 다투었고 늘 반장 부반장을 해서 여러 동료들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처음 증세가 시작된 대학 1학년 때의 그 치명적인 그 이벤트 이전에는 발표 문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고 강조를 했다. 그 이벤트가 어떤 이벤트이었는지를 물었을 때 그는 망설이지 않고 소상하게 이야기를 했다.

xx 대학교 1학년 때 그 당시에는 한창 데모가 유행이었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길거리로 가두 행진을 했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는 학생 이념 써클에 가입해서 사회주의 이론들과 계급 투쟁 이념 서적들을 탐독하였다고 했다. 자신이 가입한 써클은 데모 시에 다른 학생들을 선동하는 노래 패 써클로써 여러 명이 역할을 분담하였는데 B씨는 그 때 노래를 부르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했다. 연습 시에 다른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데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오고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자 동료들이 깔깔 거리며 웃었던 일이 있었다고 했다.

이 때 그는 심한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꼈다고 했다. 동료들이 그것에 대해서 그 당시에 웃었던 것밖에 없었으나 그는 그 이벤트에 대해서 치명적으로 모욕감, 수치심에 치를 떨었다고 했다.

그 이후에 그는 여러 사람들 앞에 나와서 발표를 하는 것에 신경이 쓰이게 되었고 대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각종 연구 발표나 세미나 등에서 그룹으로 연구를 해서 발표를 할 때면 항상 B씨 자신은 직접 발표를 하는 것을 피하고 동료들에게 발표를 하는 것을 맡기고 B 씨 자신은 슬라이드 등을 조작하거나 발표 이외의 자료 수집 등의 역할을 도맡아서 옆에서 도와주는 일을 의도적으로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10년 이상을 엘리트 사원으로써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다른 모든 면에서는 남에게 꿀리는 것이 없는데 단지 다른 사람 앞에서 발표를 하는 이러한 조그만, 별 것도 아닌 일에서 자신의 콧대 높은 자존심이 꺽이는 것에 분해서 못살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2 회 치료 회기

 치료자는 B씨의 증세 발생에 관계해서 좀더 소상하게 그 증세와 관련된 과거의 역사들을 탐색하기로 하고 B 씨에게 그 증세와 관계되어 지금까지 어려웠던 경험들을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다.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노래 패의 써클 행사 공연 연습장에서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서 겸연쩍어 동료들의 웃음거리가 된 이후에 이것을 커다란 망신으로 체면 손상으로 기억을 하고 있었다. 이후에 동료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피하고 도망을 다녔다고 했다.

자신의 약점이 다른 사람에게 발각 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했다. 대학 3학년, 4학년이 되면서 그룹 연구 조사나 세미나 등에서 자신이 발표를 하는 것을 피하고 다른 그룹 참가자로 하여금 발표를 하도록 하고 자신은 자료들을 챙기거나 시청각 기구들을 조작하는 일들을 일부러 맡아서 발표를 피해왔다고 했다.

 회사에 입사 후에 얼마되지 않아서 어느 날 직장의 상사가 자신에게 어떤 인쇄된 유인물을 자신에게 주면서 읽어 달라고 요청을 받고 그 인쇄 내용물을 읽으면서 또 망신을 당했다고 부끄러워했다. 그것을 읽는데 목소리가 떨리고 더듬거리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초등학생처럼 부자연스러웠다고 했다. 그 때 상사가 B씨가 인쇄물을 읽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이상하게 보면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던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 이후에 직접 발표를 하는 일은 의식적으로 빠지고 동료들에게 미루어왔으나 지점장의 명령으로 자신이 발표를 직접 하게 되어 피할 수 없었던 때가 회사 입사 후에 약 6년쯤에 있었다고 했다. 그 때 그의 회사의 직원들과 간부들이 약 130 여명이 모인 대 강당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고 사전에 많은 연구들을 해서 풍부한 자료 수집으로 모든 준비를 완료 한 후에 정작 그 발표 시에는 준비한 자료들을 제대로 활용도 하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머리 속이 햐얗게 변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겨우 발표를 끝마쳤으나 동료들과 상사들이 다음에 더욱 잘하면 된다는 격려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망신을 당하고 수치심으로 고통스러웠다고 그 때를 치욕으로 회상을 했다.

 최근에 3개월 전에 지점장을 뽑는 지점장 채용 시험에 응시를 했으나 인터뷰 시에 말을 더듬거리고 목소리가 떨려서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약 30여명이 응시한 시험에서 떨어진 경험을 이야기를 했다.

 지난 주일에는 새해 업무 보고에서 약 8명의 간부들이 지점장과 함께 타원형 테이블에 앉아서 슬라이드로 준비한 약 15페이지의 내용물들을 각자가 발표를 하는데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면서 손에 땀이 나고 긴장되어 부자연스러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역시----"라는 한탄 쪼의 목소리가 입 속에서 맴돌았다고 했다.

 그리고 더욱 최근에 지점장이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나서 같이 근무를 했던 사원들이 각 부서별로 비디오 촬영을 해서 그것을 떠나는 지점장에서 선물로 주게 되어 B씨 자기 차례가 왔을 때 비디오 촬영을 하는 카메라 앞에 섰을 때 또다시 말을 버벅거리고 손에 땀이 나고 목소리가 거칠 게 나와서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몇 일 전에는 동료들과 모여서 스크린 골프를 치면서 1000원 차리 내가 골프를 장난으로 칠 때에 B씨는 자신이 그의 자아에게 마음 속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치료자에게 이야기를 했다. "친구들보다 더욱 잘해야 해, 멋지게 해서 친구들을 능가해야 해" 이런 말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손에 땀이 나고 가슴이 꽉 조여오고 호흡이 거칠고 숨이 막힐 것 같은 것을 느꼈다고 실토를 하면서 자신의 머리 속에는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이 작동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어떤 것을 동료들 앞에서 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예견 불안이 오고 그 다음에 손에 땀이 나고 그 다음에 호흡이 가파지고 가슴이 조여오는 순서가 그대로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짜여져서 B씨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대로 작동이 되는 것 같다고 하소연을 했다.

 어제는 신임 지점장이 오셨는데 깐깐하고 일일이 하나씩 따지는 성격으로 혹시 자신에게 엄무 보고나 앞으로 그 지점장과 대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고민으로 고통스럽다고 했다.

3회 치료 회기

치료자는 B씨의 어린 시절의 가족 환경을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너무나 경제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고 자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학 때 학생 회장을 했던 사람으로 키가 180cm가 넘은 호인으로 성격도 호탕하고 친구가 많았고 운동을 했던 체질로 단단한 근육형이었으며 대학 때 학생 회장을 했었던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을 했다. 아버지가 대학 시절에는 학생 회장을 "학도 호국단 단장"이라고 호칭을 했으며 그 때에 학생회의 활동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를 하면서 찍은 사진이 지금까지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늘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B씨가 유치원 시절에 처음으로 사업을 했는데 그 사업이 스마일 벳지(smile badge) 사업으로 스마일 마크를 만들어 가슴에 달고 다니는 장식물 사업이었으나 그 사업이 실패하고 두 번째로 동료와 동업으로 아버지가 아이디어를 내서 친구와 동업으로 크다란 백화점을 개업을 했는데 친구가 그 사업을 자신이 독차지 하면서 아버지에게는 그 백화점에 딸린 점포를 몇 개를 주면서 발을 빼라고 한 것에 격분해서 그 친구를 폭행했다가 6개월간 감옥에 갔었던 이후에 다시는 사업 실패에서 재기를 하지 못하고 결국은 45세의 나이로 간 암으로 별세하기까지 아버지는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아왔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과 대학 시절에 친가에서 앞으로 큰을 할 인물이 태어났다고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기대를 했던 인물로써 각광을 받았으나 결혼 후에 사업 실패의 연속으로 한 번도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고 늘 신세 한탄과 음주와 부부 싸움으로 조용한 날이 별로 없었다고 했다. B씨가 대학 1학년 2학기 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를 만나뵈었을 때는 아버지는 간암 말기로 피골이 상접해서 눈뜨고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몇 일 후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의 이런 모습에서 죽음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무능력한 모습, 빌빌대며,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슬렁 거리면서 세월을 사신 아버지에 대한 평소에 느꼈던 분노, 적대 감정에 괴로워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은행원 출신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난 딸로서 외할아버지가 은행 지점장을 마지막으로 은퇴해서 지방에서 엄청나게 큰 과수원을 하게 되면서 시골의 B씨의 아버지가 사는 지역 인근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고 결혼이 이루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만나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소상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백화점 사업의 실패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어머니가 일을 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다고 했다.

B씨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을 해 왔으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머니의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일이 잘 되면서 B씨의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런대로 큰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살아온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B씨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사업이 잘 되지 않아서 어려움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B씨가 대학에 입학할 시점에는 어머니의 사업의 완전한 실패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었고 입학 등록금을 다른 친척이 부담을 했을 정도로 어려웠다고 했다.

그 시기에 B씨가 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B씨는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와 학비를 부담하게 되었다고 대학 시절의 경제적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이후에 어머니는 지금까지 각종 다양한 사업들을 시도했으나 결국은 실패를 거듭하고 B씨가 회사에 입사해서 셀러리 맨으로 모아 저축한 돈들을 사업을 한다고 빌려간 후에 한번도 제대로 돈을 갚아준 적이 없이 약 2억원의 돈을 빌려갔으나 한푼도 돌려 받지 못하고 있다고 어머니에게 분노했다. 어머니는 매번마다 눈물로 호소를 하는 바람에 2천만원, 3천만원, 4천만원 등으로 돈을 빌려가서 봉급 생활로써 푼푼이 모아두었던 돈들이 날아가 버리고 B씨 자신은 정작 10여년간 돈을 저축해 왔으나 지금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분개 했다.

친구들은 모아서 저축한 돈으로 구입한 아파트와 부동산들이 10억이 넘어가는 사람도 있는데 B씨 자신은 정작 모아둔 돈도 없고 내 세울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고통스러워했다.

 형제로는 2살 아래의 남동생이 있으나 그는 학교 시절부터 부모님의 속을 썩이게 만든 동생으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말썽만 피워온 동생으로 몇 번 사업을 한다고 형인 B씨에게 모두 7천여만 원을 빌려 갔으나 사업에 성공을 하지 못하고 지금은 서로 연락이 잘 되지 않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남동생은 중학교 시절에 군에서 운영하는 항공 정비 고교 교장 선생님이 아버지의 대학 때 친한 친구로써 원서만 내면 합격할 수 있도록 손을 써 놓았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동생에게 응시 원서를 내라고 종용을 받았으나 아버지의 권고를 무시하고 공부는 뒷전으로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아버지에게 호되게 처벌을 받은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 당시 항공 정비 학교는 국비로써 그 학교에 들어갔었다면 비행기 정비 기술자로 군에서 장기 복무자로 하사관(부사관)으로 복부하면서 크게 어려움이 없이 정비 기술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B씨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한번도 체벌을 당한 적이 없었고 부모님의 기대를 많이 받고 자랐다고 했다.

4회 치료 회기

 치료자는 B씨에게 증세와 어린 시절의 경험을 더 구체적으로 연결시켜 탐색을 해 보기로 하고 B씨에게 어린 시절의 상처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소상하게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B씨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별로 없었다. 유치원 때는 거의 기억이 없었다. 유치원 때 찍었던 사진이나 생일 파티 기억들, 친한 친구의 기억, 유치원 모습, 유치원 선생님들의 기억이 있는지 또 유치원 때 재롱 잔치 등의 기억이나 사진들이 있는지 물어 보았으나 그러한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잦은 이사로 유치원 때 찍은 사진들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유치원 시절의 기억은 완전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이것은 유치원 시절에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억압해서 무의식으로 억압해 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에 기억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쯤에 담임 선생님에게 정확하게 어떤 쌍욕인지는 기억이 아니 않으나 쌍욕(개 새끼, 씨발년과 같은 심한 욕설)을 한 것 때문에 이후에 동료들과 학교 선생님들에게 소문이 났을까 봐서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수년간을 교무실을 쳐다볼 수 없었고 동료들에게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살았던 고통스런 기억을 떠 올렸다.

그는 그 시절을 회상하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쉬는 시간에 책상 위에 업드려서 자고 있었는데 그 때 누가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바람에 "씨발놈" 혹은 "씨발"이라는 욕설을 하면서 머리를 처들었을 때 담임 선생님이 자신을 쳐다보고 황당해 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했다.

그 희미한 기억이 정확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B씨의 성격상 선생님에게 쌍욕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친구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욕을 하고 보니 선생님이어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그 때 부끄러움과 수치심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5년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 중, 고등학교 시절에까지 그 상처가 따라다녔고 지금까지 머리 속에 남아서 괴롭히고 있다고 했다.

 이후에 초등학교 5학년 시점에서 그가 동료를 공부를 못한다고 놀리고 괴롭히던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가족들이 이사를 간다고 해서 간 그 집이 그가 놀리고 괴롭히던 그 친구의 집에 세를 들어서 그 친구 집에 들어가게 된 자신을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B씨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공부는 그런대로 잘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갈등이 많았던 것 같고 싸움이 잦았던 것 같다고 했다.

 , 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머니가 사업이 잘 되어서 경제적으로 좀 나아졌고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해서 반에서 1-2등을 하고 그리고 반장과 부반장을 해서 동료들에게 인기도 있었다고 했다. 크게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몇 가지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학급 동료들을 지도하면서 중학교 1학년 때는 한 동료와 싸움이 터져서 B씨가 그 친구를 두들겨 패서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 그 동료의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서 B 씨를 퇴학 시키겠다고 하는 것을 담임 선생님이 극구 말리고 달래서 무마되었던 기억이 있고 또 중학교 3학년 쯤에 한 동료와 갈등으로 그 급우를 걸상으로 내리 찍으려고 할 때 옆에 동료들이 말리는 바람에 큰 사건으로 터지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이 두 개의 사건에서 한번도 부모님에게 그 사건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B자신의 고통을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없고 자신의 괴로움과 갈등을 마음 속에 억압해 온 것이 밝혀졌다.

이후에 대학 1학년 2학기 때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사업 실패 때문에 그리고 경제적으로 심한 어려움이 겹치면서 그는 대학 1학년 2학기 때가 가장 어려운 시점으로 그 때 6개월간 심한 우울증과 공황 장애를 앓았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1학년을 마치고 휴학계를 내고 군에 입대해서 3년 간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2학년으로 복학을 해서 졸업을 할 때까지 다양한 아르바이트와 학업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했다. 군에서 복학한 이후에는 1학년 때 몰두했던 이념 써클이나 학생 운동에는 손을 때고 공부에 올인했고 졸업과 동시에 세계적으로 이름난 외국인 회사에 입사를 했다고 했다.

그는 초, ,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절 즉 초등학교 시절과 대학 1학년 시절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료들과 갈등으로 그리고 대학 1학년 시절에는 자신의 증세의 등장과 우울증, 공황 장애로 가장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다고 회상을 했다. 자신의 어려움이 경제적인 것과 연결되었음을 시사한 것이었다.

5회 치료 회기

치료자는 B씨에게 어린 시절의 가족들과 상호관계와 가족 구성원들과 의사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탐색을 하기로 했다. B씨가 어떻게 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과의 어린 시절의 관계가 대인관계로 연결되었는지를 탐색해 보기로 했다.

B씨의 아버지는 그가 암으로 죽을 때까지 어머니와 늘 티격태격으로 싸움이 잦았다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쯤에 한번은 어머니가 B씨를 불러서 아버지를 데리려 가자고 해서 따라 갔었더니 아버지가 어떤 술집 홀에서 종업원들을 때려서 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고 했다. 그 이후에 자주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B씨와 동생을 돌보아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직접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고 B씨는 지금도 그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목에 집의 열쇠를 걸고 다녔던 기억을 회상했다.

어머니는 6살 때 6.25사변으로 가족들이 방공호에 숨어 있다고 조용해지자 밖으로 나갔다고 폭격으로 사망했고 이후에 그녀의 아버지(외할아버지)의 재혼으로 양모 밑에서 자랐다고 했다. 여기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감정 표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양모는 어머니에게 잘해주어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어머니가 말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양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자신의 욕구 표현과 감정 표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이것을 지적해주고 있다.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B씨의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하거나 B 씨 자신의 감정을 솔찍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분노와 적대 감정을 마음 속에 쌓아두었고 유치원 시절의 엄마와 관계의 기억이 거의 없다는 것 등이 B씨의 감정의 표현의 어려움의 원인이 된 것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아버지 역시 감정을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사람으로 동업 친구와 갈등에서 폭력으로 감옥을 6개월 갔었고 술집에서 종업원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어머니에게 폭력을 사용한 점 등이 이것을 증명해주었다.

어머니는 B씨에게 여러 번씩 몇 천만 원을 빌려가면서도 빌려갈 때마다 자기 합리화로 "내가 혼자서 잘먹고 잘 살려고 했느냐? 내가 말못한 것이 뭐가 있느냐 나도 잘살아 볼려고 하다가 실패한 것이 아니냐?"라고 자기 변명으로 일관되게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석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서 B 씨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면서 쌍욕을 했다고 했다. 씨발년아! 개년! 등으로 분노를 언어 폭력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죄의식으로 자신을 처벌한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불효 자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어머니가 요구하는 돈을 보내 달라는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어머니에게 분노와 적개심을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언어 폭력으로 사용해서 화풀이를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죄의식으로 어머니에게 거부를 하지 못하고 돈을 빌려주었고 이것이 되풀이 되면서 지금까지 약 2억 원의 돈이 어머니 사업 자금으로 날라갔다고 했다. 동생의 행동을 보면 동생 역시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생은 부모님에게 분노를 말로써 표현한 것이 아니고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반대로 함으로써 부모님을 처벌했다. 공부는 하지 않고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고등학교 시절에 반장 부반장으로 동료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으나 그는 한번도 친구들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적이 없었다고 했다. 자신의 사는 모습을 동료들에게 숨기고 경제적 어려움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중학교 때 우연히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그 돈을 받지 못하게 되자 그 돈 대신에 다방을 물러 받아서 사업을 해서 제법 다방이 잘 되어서 몇 개의 다방을 함께 운영을 했으나 이후에 그 사업의 실패로 고통을 받게 된 때가 B씨의 대학 1학년 시절이었다고 했다.

B씨는 중, 고등학교 시절에 어머니가 다방을 경영한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부끄럽게 생각해서 한반도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학교의 환경 조사서에도 어머니가 사업을 한다고 적었지만 다방업을 한다고 적지 않았다고 했다. 다방은 유흥업소로써 다방 마담이나 다방 여종업 원들의 품행 때문에 자랑스러운 직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또 아버지께서도 어머니가 다방을 운영하는 것 때문에 남자들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그 문제로 자주 다투었다는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이야기했다.

6회 치료 회기

B씨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말로써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계속 분석에서 밝혀졌다. 그는 결혼을 한지 1년이 되었고 부인은 프랑스에서 10년동안 유학을 한 여성으로 이후에 한국에서 프랑스 계통의 사업을 하는 프랑스인 사장의 여비서로 근무하다가 결혼으로 물러나서 지금은 출산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부인과 결혼을 하기 전에 7년 동안 사귀던 여성이 있었고 그 여성은 7년 동안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해서 공부를 했던 여성으로 B씨가 학원 비용이나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고 임용 고시에 합격을 해서 지금은 교사로 근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와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는 서로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서로 흥미가 사라져서 B씨가 그녀를 보내주기로 했다고 했다. 여기에서 B씨는 7년 동안 사귀던 결혼을 약속한 여성이나 결혼을 한 지금의 부인에게 한번도 자신이 치료자에게 이야기를 한 이러한 자신의 고통과 수친심, 모욕감에 대해서는 일체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어떤 친구들에게나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에게 쌍욕을 한 사건은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대학 1학년 때 수행 공포증과 우울증, 공황 장애 등을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고 실토를 했다. 한번은 7년 동안 사귀던 여자 친구가 어느 날 "지금까지 오빠를 사귀어 오면서도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하소연을 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치료자는 B씨의 수행 공포증의 증세를 세밀하게 분석해 보기로 했다. B씨에게 수행 공포증의 증세의 과정을 빠짐없이 소상하게 재연해 보라고 요구를 했다. B씨는 어떤 것을 발표를 할 때가 되면 마음 속에서 "예측 불안" 혹은 "예견 불안"이 온다고 했다.

 그는 정신 의학에 서적들을 많이 읽어서 대부분의 정신의학이나 정신분석의 전문 용어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식으로 이해를 하면 자신의 문제들이 해결되어질 것으로 믿었다고 했다수행 공포증이 어떤 것인지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를 알 게 되었으나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했다.

즉 정신분석적인 전문 용어로써 지식화의 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식으로 많이 알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어질 것으로 생각해서 이론적 무장을 해 보았으나 결국은 문제를 덮어 버리는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론적 무장을 하느라고 치료의 시기가 그 만큼 늦어지고 그 고통이 점점 커지게 되어 할 수 없이 치료자를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지식화 방어는 자신의 불안을 일시적으로 감소 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정신분석에서는 방어로 보고 있다. 이 방어를 사용할 때는 지식으로 무장하면 그 문제가 풀릴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마음 속의 고통을 줄어든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시적으로 고통을 피하기 위한 다른 방어기재들과 똑 같다는 것을 본인은 모르고 있다. 고로 치료의 시기가 지연되고 고통은 연장이 되는 것이다.

 예견 불안이 오면 이미 마음 속에서 자신의 문제가 예상이 되고 피할 수 없다는 듯이 목에 힘이 들어가고 "" "" 으으"라는 말들이 나오면서 말을 하면서 더듬거리고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고 껄끄러워지고 손에 땀이 나고 호흠이 가파지고 가슴이 조여오고 심하면 머리에 현기증이 느껴진다고 했다. 입사 6년쯤에 130여명의 회사원과 간부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 그 때는 많은 준비와 연구를 해서 사전에 연습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머리 속이 하얂게 되면서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을 기억을 했다. 최근에 년 초 엄무 보고에서도 15페이지 정도의 유인물을 스라이드로 보여주면서 달걀형 타원형 테이블에 앉아서 발표를 하는데도 머리 속이 하앟게 되지는 않았으나 말을 하면서 "음음" "" 으어" 등으로 말을 더벅거리고 초등학교 시절에 글을 잘 읽을 줄 모르는 어린이처럼 목소리가 떨리고 발음이 유창하지 못해서 동료들이나 자신이 실망을 한다고 했다.

그는 이것을 마음 속에 만들어진 고정된 프로그램이 작동을 해서 아무리 그가 그것을 수정하려고 해도 그대로 작동이 되는 컴퓨터와 같다고 하소연을 했다. 이것 때문에 대학 시절에는 웅변학원이나 말더듬이 학원에도 다녀 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여기에서 B씨는 과거의 수치심, 모욕감으로 얼룩진 고통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씹는다고 털어 놓았다. 치료자에게 결정적인 단서가 포착되었던 순간이었다. 그는 자동차를 몰고 가면서 옛날의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회상하면서 "그것도 못하는 바보가 어디있어!"라고 큰 소리를 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동차의 커락숀을 빵빵 울리다가 옆 자동차의 운전자가 깜짝 놀래서 자신을 처다보도 욕을 하는 수모를 여러번 겪었고,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초등학교 학생들도 다 하는 말들을 하지 못하는 바보야! 이 거지 같은 놈아!"라고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가 튀어나와서 옆에 걸어가던 사람이 그에게 욕을 하는 것으로 오인해서 항의로 비시를 걸어와서 극구 변명을 하면서 무마했던 기억들도 이야기를 했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그 담인인 여자 선생님에에게 한 쌍욕에 대한 수치심과 그리고 대학 1학년 때 노래패 써클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망신을 당한 그 상처와 그리고 6년 전에 회사의 전 사원들 앞에서 당한 부끄러움, 수치심과 3 개월 전에 지점장 승진 시험에서 말을 더듬거리고 버벅거리든 그 상처, 그리고 최근에 동료들과 장난으로 내가 골프를 치면서 손에 땀이 나고 가슴이 조여오던 그 부끄러움 그리고 최근에 연초 업무 보고 때 더듬거리고 말 소리가 부자연스러웠던 그 일등 등을 하루에도 여러번 되풀이 반추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그 수치심의 이벤트들을 하루에도 수 십번씩 깨씹고 반추하면서 자신의 자아를 처벌하고 있다는 B씨의 사고 과정 즉 정신분석적인 말로 그의 자아의 사고 하는 인지 구조가 밝혀지게 되었다. 만약에 이 문제를 그대로 방치를 하면 계속해서 앞으로 유사한 문제들이 늘어나서 계속 쌓이게 되고 그러한 상처와 자아 처벌은 누적되어져 산더미처럼 많아져서 앞으로는 더욱더 자아 처벌이 늘어나고 삶은 고통스러워질 것임을 지적하자 그것 때문에 더 이상 그 문제를 방치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문제를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는 단계 즉 한계점에 왔다는 것을 그가 판단했다고 했다.

 B씨는 지난 주일에 부인이 딸을 순산했다고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그 딸을 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회상했다고 했다. 치료자가 그 딸을 보면서 만약에 B씨의 감정 표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면 딸에게 그 문제가 대물림이 될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것이 걱정이 된다고 했다. B씨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정신적인 문제는 그것이 본인도 모르게 자녀들에게 대물림이 된다는 것이 아닌가!라는 지적에 B씨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 해결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 즉 모요감, 수치심을 절대로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또 다른 사람이 그 감정을 알게 되면 큰일 날 것이라고 마음 속에 꼭꼭 숨겨서 비밀로 지켜왔다고 했다. 그러면 B씨의 누적된 감정적인 홍수는 대학 1학년 때 증세로써 터져 나왔으나 그 이후에도 역시 꼭꼭 숨겨서 마음 속에 억압해서 지금까지 어떻게 해서 마음 속에서 참고 견디어 낼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여기에서 치료자는 또 한가지의 B씨의 습관적 행동을 분석해 낼 수 있었다. 그는 작년에 결혼 한 이후에도 1주일에 3-4회 정도는 소주 반병 정도로 술을 혼자서 마신다고 했다. 그는 혼자서 마시는 것 이외에도 고등학교 때 친구나 대학 친구들을 만나서 한 달에 23회 정도로 동료들과 같이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라고 했다.

B씨의 아버지는 직장을 잃고 무의 도식하면서 술을 비교적 많이 먹었던 편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사망 원인은 간암 이었다는 것을 알고 치료자가 술과 간암 과의 관계를 연결 시킬려고 했으나 그는 아버지는 평소에 간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간염이 간암으로 간으로 술과 연결을 피하려고 했다.

치료자는 B씨의 술을 마시는 습관이 언제부터 인지 탐색을 해 보았을 때 그가 입사 후 지금까지 2-3년전까지만 해도 술을 하루에 빠짐없이 그의 소주 반병 정도를 마셔왔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업 자금으로 자신의 봉급의 저축을 밑도 끝도 없이 뜯기면서 분노해서 우울증으로 심하게 고생을 해 왔으며 어머니에 대한 분노, 적대감정 때문에 자살을 해 버릴까 생각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이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그가 술을 많이 마셨다는 것이 연결 되면서 자신의 내면에 쌓이 고통스러운 감정을 술로써 완화 시켜온 것임을 지적했을 때 스스로 인정을 했다. 술은 불쾌한 감정을 완화시키고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에 지적에 스스로 동의를 했다.

 또 한가지 B씨의 사고 과정에서 밝혀진 것은 B씨가 어떤 고통스러운 일에 직면하거나 자손심을 상하는 일에 직면하게 되면 그는 그 자아에게 스스로 "사법고시 수석합격!"이라고 마음 속에서 외친다는 것이었다. 사법 고시 수석합격 할 것이다 이냐? 혹은 사법 고시 수삭합격을 했다는 것이냐? 어느 쪽이냐고 질문을 했을 때 그는 그냥 "사법 고시 수석 합격!"이라고 해서 그 말 뿐이라고 했다.

치료자는 "사법고시 수석 합격을 했다!"고 말을 하면 그것은 자아가 거짓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아 수치심에 더 클 것이라고 지적을 했다. 만약에 아직 사법고시를 공부를 한 적도 없고 공부를 할 예정이 아니기 때문에 "사법 고시 수석 합력을 할 것이다"라고 하면 아직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같이 보이지만 역시 공부를 한 적도 없고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말이 됨으로 자아에 처벌, 양심에 처벌을 받게 된다는 지적에 대해서 그는 "사법 고시 수석 합격!"이라는 말만 한다고 했다.

자아가 얼마나 교모하게 이러한 약점을 피하고 있는지을 분석하면서 무의식적인 면의 지혜에 감탄을 했다. 여기에서 B씨는 자신의 자손심을 들어 올리는 방어기재를 사용해서 자신의 감정적 불쾌감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분석해 낼 수 있었다. 즉 라이벌의 상대에게 혹은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자아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서 자신감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즉 라이벌에게 "나는 사법 고시 수석합격을 한 사람이다, 당신과는 다른 사람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은 내 적수가 아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무의식적인 자아 칭찬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치료자는 B씨에게 사법 고시를 꿈꾼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대학 입학 시에 법대를 가려고 했으나 성적이 미치지 못해서 경영학과에 갔다고 했다. 사법 고시를 하려고 시도를 해 보지는 않았지만 언제부터 인지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말들을 자신의 자아에게 하고 있다고 의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수집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문제의 원인을 분석

 B씨는 한번도 자신의 수치심과 모욕감에 해당되는 고통들을 말로써 다른 사람에게 표현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즉 그는 부모님에게도 7년 동안 사귀오던 여자 친구에게도 그리고 지금의 부인에게도 자신의 수치심과 모욕감의 상처에 관련된 이벤트 들에 대해서 한번도 이야기를 해보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치료자의 지적에 대해서 맞장구를 쳤다. 그는 1년 전에 부인과 결혼을 한 이후에 자신의 책꽂이 꽂혀 있는 정신 의학 서적들의 표지들부인이 보지 못하게 책을 거꾸로 꽂아 그 책들의 제목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반대로 꽂아 놓았다고 했다. 부인이 자신의 문제점을 알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게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씨발놈, 깨새끼" 등의 심한 욕설을 한 것에 대해서 깜짝 놀라서 그것을 기억 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정작 그 욕설은 그의 머리를 때린 사람이 학급 동료인 것으로 오인해서 그렇게 욕을 하게 되었고 정작 선생님에게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선생님이나 동료들에게 말로써 해명을 하지 못하고 그 부끄러움을 평생도록 십자가로 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그는 그의 그러한 해명을 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부모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스타일을 보면 알 수 있다. 부모님에게 자신의 감정을 소상하게 말로써 표현을 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 역시 그들의 감정을 말로써 표현한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표현을 한 것임이 이것을 증명해준다. 고로 이후에 자라면서 B 씨는 자신의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에 결함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고통, 수치심, 모욕감 등을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즉 한마디로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장애는 성격장애의 핵심으로 떠 올라서 최근에 미국에서 이 장애를 alexythymia라고 부른다. 라틴어로 A는 없다. 못한다는 뜻이고 lexy는 언어, 말이는 뜻이고 thymia라는 말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병 이라는 그리스 말의 복합어로 탄생되었다.

 B씨의 마음 속의 자아는 어린 시절 즉 유아기 때부터 엄마가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결함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의 감정 표현 결함 때문에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는 자아는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을 정신분석적인 용어로써는 "고착"이라고 부른다. 어떤 욕구들이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성장을 멈추어 버린 것으로 이것을 성장이 중지되거나 성장의 지연으로 부른다. 우리가 성인 어른들 한데서 다른 부분들은 정상적인 어른의 모습인데 어떤 특이한 점이 유아적이어서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보고 "당신의 xx 는 어린 아이처럼 미성숙하다"라는 말을 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변태성욕자들의 변태성욕 행동들은 모두가 어른들이 하고 있는 어린 유아들의 행동이 아닌가! 다른 사람의 섹스 행위를 보려고 남의 집을 침범하는 행동인 관음증이나 자신의 성기를 다른 사람에게 내 보이면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노출증 이나 자신의 성기나 엉덩이를 채찍으로 때리게 상대에게 요구를 하면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마소키즘적 섹스 행동들을 보면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행동 들이 아닌가!

 B씨가 처음으로 상처를 받았던 초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에게 한 욕설(씨발년 혹은 개쌔기) B씨가 증세로써 처음 등장한 대학 1학년 때 소래 써클에서 소리를 부르다가 모욕을 당한 것 들은 모두가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관련되어있지 않는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바로 감정을 말과 리듬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B 씨는 이후에 이것이 확대 증폭 되면서 이것이 인지 구조로 습관화가 된 것이었다. 여기에다 그는 과거의 상처들을 되씹어 자아 처벌을 하고 있는 것을 하루에도 여러번씩 되풀이 해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B씨는 자신의 감정 처리에 고착이 되어서 어린 시절부터 고통스런 감정을 마음 속에 억압해 온 것으로 이러한 불쾌감, 부정적인 감정이 누적이 되어 마음 속에서 갇혀 있어서 이 고통스러운 부정적 감정들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서 한계점에 다가가면서 한쪽이 터진 것이 대학 1학년 때의 최초의 증세의 등장으로 나타난 것임을 B씨에게 인식을 시켰다.

그는 한번도 고통스러운 감정을 부모나 부인이나 7년 동안 사귀어왔던 여자 친구에게 말로써 표현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해준다. 결국 B씨의 수행 공포증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에 결함이 표면으로 나온 것이며 내면에는 불쾌감, 부정적 감정들이 저수지처럼 고여 있어서 누적된 감정에 두려움, 공포를 느끼고 있고 이들 감정들이 터져나올까 봐서 전전 긍긍하고 있는 것이 증세로써 나타난 것이다이것은 수행 공포증은 불안증, 불안장애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불안증이라는 장애 그 자체가 내면 마음 속에서 자아가 감정을 통제하기 못해서 생기는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가!

 치료자는 여기에서 B씨의 어린 시절에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하고 웅크리고 무의식속에서 고통스럽게 신음을 하고 있는 감정을 말로 표현을 하지 못하는 자아를 성장을 시켜서 어른의 자아와 통합을 하는 것임을 설명을 했을 때 B씨는 "선생님의 말이 100% 맞다는 것을 확신합니다."라고 무릎을 쳤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B씨의 질문에 치료자는 어린 시절의 상처 기억들을 전무 끄집어 내어서 다시 재연해서 그 때 표현하지 못하고 막혀 있는 감정 표현 자아를 다시 되살리기 위해서 감정을 새로 표현하는 것을 치료자 한데서 배우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 과정이 될 것입을 지적을 했다.

 그는 동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로써 표현을 해 본 기억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을 할 수가 없다. 그는 치료자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 맞장구를 치면서 자신은 자신의 자아에게 "그것도 못하느냐 이 바보야, 그것은 유치원 아이들도 다 하는 것이야!"라고 질책을 하면서도 그것을 정작 실현을 하려고 하면 입에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경험이 많이 있다고 했다.

즉 그는 한번도 입 밖에서 감정을 말로써 표현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표현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행을 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시행, 수행 공포증이 아닌가!

 B씨에게 치료자는 B씨의 증세인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 손에 땀이 나고 말이 더듬거리고 가슴이 꽉 조이고 호흡이 막히면서 말을 자연스럽게 나오지 못하는 공연, 혹은 수행 공포증은 그 행동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어린 시절에 고착된 감정의 표현이 성숙해지면 그 문제가 저절로 해결이 되이질 것임을 확인 시키면서 앞으로 치료의 결과를 지켜 보기로 하고 다음 치료 회기부터는 어린 시절의 감정 표현에 치료의 초점이 맞추어질 것임을 예고 했다.

 B씨의 6개월 치료 과정에서 그 동안에 드러나지 않은 더욱 세부적인 많은 것들이 분석되어졌다. B씨는 6개월의 치료 과정을 끝내고 다시 6개월의 치료를 재 계약을 한 후에 7개월 째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B씨의 첫 2개월 이후의 치료 과정을 상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페이지에 서 소개되고 있다.

정신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환자의 어린시절의 성장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한다. 양육 과정과 환자와 부모님과의 관계 특히 엄마와 관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치료에서 초점이 최근에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대상관계에 맞추어져 있음).

B씨의 유아기 시절---B씨는 태어나자 말자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어머니가 생활 전선에 나서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B씨는 외갓집에서 자라나게 되었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기억이 거의 없었다. 유치원 시절의 기억도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어린 시절에 불행하게 보낸 사람들이 치료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별로 없는 것이 공통점이다. 이유는 사람은 고통스런 경험들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이미 100년 전에 이야기를 했다. B씨는 어머니에 의해서 듣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3세 정도에서 7세까지 외갓집에서 자랐다고 했다. 집에는 어머니가 아침 일찍 집을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양육자인 부모님이 집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외할아버지가 은퇴해서 그의 고향 주변에서 대규모의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가끔씩 과수원의 원두막이 회상이 된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엄격하고 근엄하셔서 겁을 집어 먹고 가까이 가지 않았음을 기억해 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오줌싸개였다고 기억을 했다. 외할머니에 의해서 키위를 쓰고 이웃 집에 소금을 얻어러 갔던 것이 기억이 난다고 했다. 오줌싸개는 어린 시절에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부모님은 단순히 오줌을 싼다고 생각하지만 동생이 태어나고 부모님의 주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항의로써 표현하는 어린이들의 도움을 위한 울음이라고 정신분석에서는 보고 있다.

B씨의 초등학교 시절 ---B씨는 초등학교 때의 기억은 그의 과거 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고 회상을 했다. 그가 학교에 입학을 해 보니 다른 어린이들은 거의 한글을 알고 입학을 했는데 그는 한글을 깨우치지 못하고 입학을 한 것을 회상을 했다. 그리고 늘 그는 미술 시간에 준비물 부족으로 고통스럽게 보냈던 것을 회상했다. 한번은 공작 만들기 준비물을 가져가야 하는데 엄마에게 돈을 요구를 했다고 호되게 혼이난 이후로는 그는 어머니에게 절대로 준비물을 사기 위해서 돈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늘 그는 공부 시간에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선생님이 물었을 때 잊어먹고 엄마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직장이 없고 어머니가 외판원보험회사 설계사, 다단계 회사 등에서 다양한 일을 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직장에 나간 어머니는 저녁 늦게 돌아오기 때문에 어머니가 돈 때문에 돈을 벌려고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B씨가 미리 알고 어머니를 보호하려고 한 것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차라리 준비물을 잊어먹고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을 해서 엄마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더욱 게으름뱅이로 낙인이 찍히고 호되게 처벌을 받았다. 그는 미술 시간, 공작 시간 때 준비물을 가져 오지 않아서 반에서 몇 명과 함께 복도에서 벌을 받았다. 돈이 없어서 공작, 미술 도구를 살 수가 없었고 정직하게 돈이 없어서 학습 준비물을 살 수가 없었다고 선생님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차라리 자신이 벌을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늘 매월 납부하는 육성 회비를 제 때에 내지 않았다고 선생님에게 벌을 받기가 일수였다. 오후에 공불를 끝내고 집에 오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늘 목에 아파트 열쇠 키를 걸고 다녔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그는 늘 외로웠다. TV만 보고 지냈다. 냉장고에는 엄마가 항상 국을 한 솥 끓어놓았던 것이 기억이 났다. 식사 때가 되면 전기 밥솥에서 밥과 국을 한 그릇 떠서 밥을 국에 말아서 먹는 습관이 B씨의 표현대도 "개 밥"을 먹고 있는 자신을 최근에야 발견을 했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TV 앞에서 국을 떠서 밥을 말아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부인이 "오빠는 왜 그렇게 '개 밥'을 먹고 있느냐?"라고 빈잔을 받은 것을 알고 그 "개 밥"을 먹는 버릇이 어린 시절에 엄마가 옆에 없고 늘 학교에서 돌와오면 밥과 국을 퍼서 말아서 먹었던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음을 치료를 받으면서 그가 몇 일 전에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정신분석적인 치료에 감탄을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지 혹은 3학년 때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는 쉬는 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그의 머리를 때리는 것을 알고 "씨발 놈아!"라고 욕설을 하면서 고개를 들어보니 담임 선생님인 것을 알고 그는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는 선생님에게 "씨발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수치심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후에 그의 학급과 학교에 그 소문이 나서 부끄러워서 교무실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선생님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6년동안 교무실을 피해다녔고 선생님의 얼굴들을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이것을 부모님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혼자서 평생 동안 어린 시절에 수치심으로 마음 속에 묻어 둔 것이었다.

 그는 늘 동료들과 다툼이 많았고 동료들과 갈등 속에서 외롭게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회상을 했다. 항상 싸움이 많았고 동료들과 잘 화합을 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보내는 성적표인 통지표에는 "머리는 좋으나 동료들과 다툼이 많다", "침착하지 못하고 덤벙거린다" 등의 선생님들의 평가가 적혀있었다고 씁쓰레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구구단을 외우는데 다른 동무들은 집에서 구구단을 다 외워왔는데 그는 구구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학교에 갔고 다행히도 머리가 좋아서 구구셈을 따라갈 수 있었다고 회상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쯤에 옆자리 동료를 공부를 못한다고 놀려대고 무시를 했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이사를 간 집이 그 친구의 집에 셋방으로 들어간 것을 알고 그 친구에게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 했고 얼마전에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에 가서 지금은 고향에서 xxx 신문사 기자로 있는 그 친구와는 직면을 피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쯤에 동생과 집에서 놀다가 장남감이 장롱 밑으로 굴러 들어간 것을 찾는다고 촛불을 켜서 찾다가 불이 나서 이웃집 형이 달려와서 물로써 불을 조기 진압해서 큰 불이 날 것을 사전에 막았다고 회상을 했다. 온 집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부모님으로부터 호댄 야단을 맞았다고 회상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은 B씨가 기억하지 싫어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로써 그 시절에 일어났던 일들을 한번도 부모님에게 특히 어머니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 그는 늘 외로웠고 모든 고통스런 경험들을 혼자 만이 짊어지고 일제 입 밖에 말을 하지 않았다.

, 고등학교 시절---그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료들과 좋지 못한 관계로 충동적이고 싸움이 많고 동료들과 적대적이었다. 특히 선생님들을 두려워하고 거리감을 두려고 했다. 그러나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를 잘 해서 학급에서 반장, 부반장을 했기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리더 십이 좋아서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아서 학교 생활이 즐거웠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발표에 두려움과 같은 증세는 없었고 학급에 반장으로써 그가 모든 학급 행사를 주관하고 소풍이나 야외에 가서 동료들 앞에서 진행을 주관을 했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어머니가 하는 다방이 잘 되어서 다방을 여러 개를 경영하게 되었는데 경제적 빈곤에서 탈출해서 비교적 큰 어려움이 없이 지낼 수 있었다고 회상을 했다. , 고등학교 시절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동료와 갈등 때문에 동료를 두들겨 패서 얼굴에 만신창이가 된 그 동료의 부모님이 학교에 찾아와서 B씨를 퇴학시키려고 하는 통에 혼이 났어며 담임 선생님의 간곡한 노력으로 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중학교 3학년 시점에서 한 동료와 말타툼으로 걸상을 들어서 그 동료를 내려 찍으려고 할 때 동료들이 말리는 바람에 중단을 했지만 만약에 동료들이 옆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큰 사건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회상을 했다.

대학 시절 ---그는 지방에서 서울의 명문 대학에 합격을 했으나 등록금이 없어서 친지들이 등록비를 대주었던 기억을 했다. 그 시점에서 어머니의 다방 사업이 실패를 해서 빚을 지고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했다.

입학식 때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해서 아버지와 같이 서울에서 하숙집을 마련해서 자치를 시작했으며 아버지는 B씨를 한번도 체벌을 한 적이 없었다고 기억을 했다. 아버지는 늘 B씨를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했다. 대학 1학년 2학기 때 집에서 긴급 연락이 오고 아버지가 위암 말기로 위독하다고 해서 집으로 갔다. 집에서 본 아버지는 피골이 상접해서 뼈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아버지는 얼마 후에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가 한번도 자신의 꿈을 펼쳐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에 가슴 아파 했다. 아버지가 대학 시절에는 집안의 큰 인물이 났다고 소문이 자자했고 아버지는 대학 시절에 학도 호국단 단장 즉 지금의 학생 회장으로 있었고 인물로 출중했고 키고 크고 미남이었다고 자랑을 했다. 그는 그가 중학교 시절에 아버지, 어머니, B씨가 함께 찍었던 사진을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고 그 사진을 치료 시에 가지고 와서 치료자에게 보여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대학 1년을 끝마치면서 그는 휴학계를 내고 군에 입대를 했다. 그 시점에서 그는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태였고 처음으로 그의 증세가 표면화 되었던 시기였다. 1학년 때 그는 이념 써클에 가입을 해서 데모 학생들의 지원을 하는 노래패에서 선동 노래를 하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을 때 연습 공연 때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을 쉴 수가 없고 말을 버벅거리고 얼굴이 붉어지고 머리가 하얗게 되는 증세를 경험을 했다.

이후에 공황 장애가 가끔씩 오고 우울증이 따라왔다. 군 복무 후에 학교에 복학해서 공부를 해 나가면서 세미나에서 발표를 할 때면 발표는 동료에게 맡기고 그는 학습 준비를 맡아서 하는 일을 했다. 일부러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가서 발표를 하는 것을 껄끄럽게 여기기가 시작되었다. 대학 3년 때 중국에 6개월 코스로 유학을 대학에서 보내주는 바람에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중국어 학습 클래스에서 유사한 증세 때문에 중국어 학습 클래스는 포기하고 혼자서 독학으로 6개월을 보내다가 귀국했던 고통스런 기억을 회상을 했다.

사회 생활---대학 졸업과 동시에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외국인 회사에 취업이 되었고 지금까지 약 15년간을 회사원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회사의 동료들이 약 130여 명이 모인 발표에서 많은 준비를 했으나 발표 도중에 가슴이 뻘떡거리고 숨이 막히고 말을 더듬거리고 머리 속에 하얗게 되어 생각이 나지 않는 수치스러움과 모욕감을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 그 회사 입사후에 약 6년쯤의 시쯤이었다. 그 때 그가 발표를 피하려고 했는데 지점장의 지시로 그가 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에 그는 종종 규모는 작으나 비숫한 상황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증세 때문에 미래가 어둡고 불안해졌다.

입사 직후 2주쯤에 과장이 인쇄물을 주면서 읽어보라는 것에 유치원 어린이들처럼 버벅거리면서 글을 읽는 것을 보고 과장이 왜 그러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수치스러운 기억들도 있었다.

결혼 생활----결혼한지 1 6개월이 되었고 그는 결혼 직후부터 부부가 같은 방을 사용하지 않고 서로서로 다른 방을 지금까지 사용해 오고 있다고 치료자에게 실토를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느냐고 오히려 치료자에게 반문을 했다. 3개월 전에 부인이 딸을 출산을 하고 나서 부인은 딸 옆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대신에 장모 님에 어린 유아 옆에서 부인을 대신해서 어린 유아를 양육을 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을 했으나 그 후에 부인은 남편과 같이 잠을 자거나 혹은 어린 딸과 같이 잠을 자면 신경이 예민해서 잠을 잘 수 없다고 하소연으로 지금까지 부부가 각자 다른 방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것들 서로 의사 소통으로 부부 사이에 의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음이 밝혀졌다. 부인이 남편과 같은 침대에서 자면 예민해서 깊이 잘을 잘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떤 문제가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B씨는 그러한 문제들을 서로 논의를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내오고 있었다. 그 자신이 감정을 잘 표현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결혼 직후에 집에 오면 정신 의학 책들을 고시공부를 하듯이 읽을 읽는 것을 부인이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최근에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이론적 근거

 위의 어린 시절의 경험들을 종합해 보면 B씨의 증세들은 어린 시절의 고통과 갈등으로 상처받은 것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있음을 분석해 낼 수 있었다.

 B씨의 어머니는 6.25 때 전쟁에서 어머니가 초등학교 시절에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했고 아버지가 재혼을 하는 바람에 양모 밑에서 자랐다는 것이 드러났다. 어머니는 양모가 친 어머니처럼 잘 해주었다고 했지만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자랐고 특히 어머니는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 B씨의 이야기에서 드러났다.

어머니가 자녀들의 고통, 괴로움 등의 감정을 흡수해 줄 능력이 없었다. B씨는 한번도 어머니에게 그 자신의 고통스런 감정 즉 수치심, 모욕감, 슬픔, 우울함 등을 표현을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모든 감정을 숨기고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 미술 준비물을 살 돈이 없어서 엄마에게 돈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이것은 나중에 B씨가 어른이 된 후에 돈을 다루는 돈 문제로 남게 되었다. 그는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려하고 회사 후배, 부하들에게 택시 비용을 빌려주고 이후에 달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끙끙대는 그 자신의 모습을 대단히 싫어했다.

한번은 동료들과의 년초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동료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B씨가 돈을 내야 한다고 부추기는 바람에 그가 회식 비용을 몽땅 지불을 하고 동료들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나중에 정작 자신은 택시 비용이 없어서 통행 금지 시간이 임박한 밤 12 경이 되어서 한 두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새벽 1-2시 경에 걸어서 혼자서 집에 갔던 이벤트를 회상하고 쓸쓸리 웃었다.

그는 겉으로는 자신이 돈을 지불하고 나서 속으로는 끙끙 앓는 것으로 돈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 드러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어머니가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서 돈을 벌면서 대학 등록금이 없어 친척들이 돈을 모아서 등록을 할 수 있었고 대학 시절에도 고학으로 학비를 조달해서 졸업을 했다.

사회에 나와서 입사를 하고 나서 월급을 모아서 저축한 돈을 어머니가 사업 명목으로 3천만 원 혹은 4천 만 원씩 빌려서 가져 갔고 이후에 사업 실패를 이유로 갚지 않았남동생이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서 사업 명목으로 도합 7천만 원을 빌려 가서 역시 갚지 않았고 결혼 후 6개월도 안 되서 장인과 장모님이 회사로 찾아와서 돈을 빌려 달라는 바람에 저축을 한 2천만 원을 정기예금 통장을 털어서 빌려 주었고 또 장인 장모님이 찾아와서 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4천만 원을 대부 받아서 부인 몰래 빌려주고 나서도 결국은 장인 장모님이 돈을 갚지 않아서 지금은 B씨가 한 달에 그 이자로 50만원 씩을 월급에서 차압을 당하고 있었다. 이후에 부인에게 말을 했지만 처가에서는 빌려간 돈을 세를 준 건물이 팔리면 그 지분을 주겠다는 말 만하고 있고 언제 갚겠다는 말도 없다고 했다.

 감정적 자아의 미성숙함은 계속된 돈과 관계된 행동에서도 분명해졌다. 그는 돈을 이야기하는데 수치스러워했다. 최근에 부하 직원과 회식 모임 후에 여자 직원이 택시 비용이 없다고 3만원을 빌려 달라는 말에 돈을 빌려 준 후에 그 여자 직원이 빌려간 돈을 지금까지도 갚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는 그 여직원에게 돈을 이야기를 하면 그 여직원이 "쫀쫀하게 몇 푼 안되는 돈을 가지고 과장님이라는 분이!"라고 말을 할까 봐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고 했. 또 지난 주일에 부부 동반으로 강원도 팬션에서 하루를 보내고 오면서 부인과 함께 재래 시장에 저녁 반찬을 사러가서 길거리 노점 판에서 나물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부인이 두 개의 나물 모듬에서 한 개에 5천원을 4천원으로 깎아서 두 개의 나물 모듬을 사기로 하고 흥정이 끝나는 시점에서 B씨가 한 개의 큰 모듬에서 1만원을 주고 사 버리는 버람에 부인이 집에 와서 그 문제로 잔소리를 했다고 했다. 강원도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인은 승용차 안에서 여러 번을 "오빠는 왜 바보 같은 행동을 했어! 2천원을 절약할 수 있었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잔소리를 했다고 했다.

 그는 몇 주일 전에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앞차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차를 세우자 뒤에서 작은 트럭이 B씨의 차를 들이 받아서 뒷범버가 찌그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이 때 작은 트럭의 주인이 사과를 하면서 오늘 하루 택배로 물건을 배달하러 가는 길인데 사고가 나서 오늘 하루 벌이는 날아가 버리고 손해가 났다는 불평에 그는 40만원 정도의 수리 비용을 20만원만 내라고 하고 트럭 주인에게 선심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지난 후에는 그는 그 자신을 비난을 하며 괴로워하며 고통스러워했다. 바보 같은 행동을 왜 했는지를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회사에 입사한지 15년이 지나가는 지금의 시점에서 그는 통장에 저축한 돈이 하나도 없고 빚만 6천만원으로 한 달에 50만원씩 이자를 물어가고 있다고 했다. 마이너스 통장으로 빌려주고 매달 이자를 갚아나가고 있다고 했다. 같은 회사의 친구들을 아파트를 사서 지금은 10억 정도의 재산을 불린 사람도 있다고 신체 타령을 했다.

 위의 이벤트들을 분석하면서 결국 B씨는 어머니, 남동생 그리고 처가 부모님, 그리고 직장에서 부하 여직원, 그리고 동료들과의 회식 비용 등에서 돈을 다루는 패턴이 유사함을 분석해 낼 수 있었다. 그는 돈 이야기가 나오면 짜증이 나고 돈을 빌려줄 때 상세하게 자신의 경제적 사정을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석의 과정에서 B씨의 돈을 관리하는 스타일은 어머니, 동생, 장인장모, 친구들 모임에서, 부하들에게 하는 돈 관리가 유사함을 지적하자 B씨는 무릎을 쳤다. 그는 돈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린 시절의 엄마에게 미술 시간에 준비물을 사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호되게 처벌을 받은 이후에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돈 이야기를 금기시 한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분석해 낼 수 있었다. 즉 그는 돈 이야기만 나오면 불안해져서 안절부절 못하고 그냥 빨리 돈 문제로부터 도망을 가 버린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치료 과정에서는 돈 이야기를 세부적으로 명료하게 계속하도록 했다. 돈에 대한 껄끄러움을 더 이상 느끼지 않도록 계속 돈의 관리와 지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그는 처음에 치료자를 찾아 올 때 수행(시행, 공연) 공포증 때문에 치료자를 찾아왔다. 수행 공포증은 공포증으로 불안증 안에 들어가는 장애이다. B씨는 어린 시절부터 감정을 제대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잦은 다툼으로 늘 불안했다고 했다.

한번은 초등학교 5학년 쯤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판 싸움을 해서 아버지가 냉장고를 들어서 창문 밖으로 던지는 바람에 놀래서 B씨와 동생은 울면서 집을 나가서 남의 집 대문 앞에서 빈 종이 상자를 뒤집어 쓰고 밤을 세운 적이 몇 번 있다고 했다.

늘 부모님은 싸웠고 그로 인해서 감정은 위험한 것으로 생각하고 감정을 억압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육성 회비, 학습 준비물 등에서 받는 고통을 한번도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것은 최근에 B씨가 어머니와 과거를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3번째 동생이 심장 결함으로 죽어갈 때 돈이 없어서 병원에 한번 가보지 못하고 죽은 것에 한이 맺혀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마음의 문을 닫았다고 이야기를 한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시점에 B씨가 7살 때 쯤이었다고 했다. 이후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싸움은 끝이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음주 과음과 폭력은 그 때 이후에 더욱 심해졌다. 중학교 2학년쯤에 한번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보고 격분해서 B씨가 야구 방망이를 들고 아버지를 때리는 통에 아버지가 놀래서 B씨를 쳐다보았던 기억을 회상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감정의 소통이 끊어져 버린 것을 분석해 낼 수 있었다. 어머니의 말을 빌리면 어머니는 막내가 돈이 없어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병원에 한번 가보지 못하고 죽은 것을 지쳐 보면서 그 때 이미 어머니는 아버지와 의사 소통을 접었다는 말에서 부모님의 감정 커뮤니케이션이 그 때 이미 닫혔다는 것을 분석해 낼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감정 소통 문제는 B씨와 B씨의 동생에게 고스란히 대물림이 된 것을 B씨도 부모들도 모르고 있었다.

 이미 치료 초반기에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연, 수행을 하거나 발표를 할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막히고 머리 속의 마음이 하얗게 되어 생각이 없어지는 현상은 감정을 표현하는데 두려움에서 비롯됨을 분석이 되어졌었다. 노래를 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 앞에서 발표를 할 때 잘 못하면 수치심, 모욕감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에서 비롯된 두려움은 고통스러움, 수치심, 모욕감을 숨기는 데서 비롯된 불안이 아닌가! B씨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결혼 후에까지도 한번도 부모님, 친구들, 동료들에게 자신의 고통, 수치심, 모욕감을 말로써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B씨의 내면의 감정적 자아는 유치원 시절에 이미 성장이 중지된 것으로 밝혀졌었다.

문제 해결 과정

 B씨는 치료의 과정에서 어린 시절에 고통을 받았던 상처의 기억들을 다시 한 개씩 재연을 해 가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배워갔다. 감정 표현의 자아가 싹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유아기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분석을 B씨 자신도 인정을 했다.

그는 종종 그 자신에게 혼자서 하는 말로써 "바보야! 그것은 유치원 아이들도 하는 것이 아니냐! 너는 유치원 아이들도 다 하는데 그것을 말로 표현을 제대로 못하다니 이 바보야!" B씨가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을 분석해 보면 그가 바로 유치원의 아이들도 표현을 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즉 그의 감정 표현의 자아가 유치원 아이들의 자아라는 말이 아닌가?

그는 치료의 과정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선생님에게 자신도 모르게 욕을 한 표현을 재연하면서 그 당시로 돌아가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먼저 선생님에게 "선생님 제가 내 머리를 때리는 사람이 내 친구인줄 알고 제가 욕을 했습니다. 선생님인줄 몰랐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나는 내 친구가 내 머리를 떼리는 것으로 알고 욕을 했습니다." 학급 동료들에게는 "내가 친구인줄 잘못 알고 선생님에게 욕을 했는데 잘못했어요. 선생님인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집에 와서 부모님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이야기를 하도록 연습을 했다. 그 당시에 만약에 문제를 그렇게 해결해 가갔더라면 부모님에 학교 선생님을 찾아가서 혹은 전화로 선생님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를 하고 선생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드라면 6년 동안 B씨가 학교에서 선생님들에 대한 죄의식과 교무실을 쳐다보지 못하고 피해다니는 고통스러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에 B씨는 인정을 하고 받아들였다.

 이것은 B씨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님이 어린 유아기 때부터 자신의 고통, 감정 표현을 제대로 표현하도록 배워주지 못한 부모님의 잘못이라는 것을 알도록 했다.

 그가 집에 오면 늘 외로웠고 혼자였고 동생과 둘 뿐이었다. 저녁 7-8시가 되어서야 어머니가 돌아 오셨다. 어머니는 자녀들과 학교 일이나 하루 일과 등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았다. B씨는 피곤한 엄마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체 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학습 준비물들을 가지고 가는 것 즉 미술 준비물, 학습 도구를 사야 하는 것 등에 대해서 처음에 엄마에게 돈을 요구했다고 호되게 혼이 난 이후로는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는 학습 준비물을 왜 가져 오지 않았느냐는 선생님의 꾸중에 잊어 버렸다고 스스로 처벌을 받기를 원했. 부모님은 돈이 없어서 엄마가 아침 일찍 돈을 벌러 나갔다는 것이 머리 속에서 B씨를 엄마, 아빠를 이해 하는 부모님을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아이 어른"으로 성장하게 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그는 부모님이나 친척들로부터 "어른스럽다".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척척하는 대견한 어린이" 칭찬을 받았다. 즉 그는 부모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아이 어른"이 됨으로써 감정을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하는 감정 장애자가 된 것이었다.

 감정적 자아가 유아기에 머물러 있다는 분석은 여러 가지 어린 시절이나 어른 시절에 이벤트들에서 증명이 되었다. 그는 최근에 그가 지지해 주었던 "노무현 대통령"에 비판적인 조선일보의 기사에 분노해서 조전일보를 몰래 찾아가서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 혼자서 중얼거렸던 일들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최근에 자동차 정비차 정비 공장에 갔다가 정비 공과 사소한 시비 끝에 정비 공의 머리를 정비소의 쇠망치로 그 정비공의 머리를 내려 치려고 했다가 정비소 직원들을 만류로 불상사를 피했으나 파출소에 폭력 혐의로 신고가 되어 파출소에 붙잡혀 가서 진술서를 쓰고 풀려난 이야기를 했다.

또 중학교 1학년 때 동료를 두들겨 패서 만신창이가 된 그 학생의 부모가 퇴학 운운하며 학교에 찾아왔던 이야기 그리고 3학년데 동료를 걸상으로 내려 찍으려고 했다고 동료들의 만류로 위기를 모면한 사건 그리고 군에서 괴롭히는 고참을 폭행한 사건 그리고 특히 군에서 초반기에 고참한데서 시달렸던 기억 때문에 고참이 되어서는 후배들에게 절대로 기합이나 폭력을 하지 않아서 군에서 "부처"라는 별명을 얻었던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러한 이벤트들의 공통점이 평소에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의 한계점을 넘어서면 폭력으로 변해서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 버린다는 것을 분석을 통해서 알 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인정을 하고 평소에 불쾌한 감정, 수치심, 분노, 적대 감정을 표현하는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 조금씩 개선이 되어가고 있었다.

부부 문제의 등장

 그는 결혼 1 6개월의 시즘에서 부인과 남편이 각자의 방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치료가 시작된 후에 약 6개월의 시점에서 털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부인이 너무 예민해서 남편과 같이 잠자리를 하면 깊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부인이 딸의 출산 이후에 신생아가 밤에 자주 깨어나서 부인이 깊은 잠을 자지 못해서 친정 어머니가 신생아를 밤새도록 안고 양육을 해야 했고 지금은 3개월 된 딸아기가 혼자서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남편과 딸고 함께 잠을 자지 못하고 밤에 혼자서 자야 한다고 했다.

 부인에게 치료 6개월이 지나가면서도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인에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부인이 B씨가 심리치료를 받고 있고 또 어린 시절의 고통들을 이야기를 하면 B씨를 좋지 않게 보고 남편을 무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결혼 초기에 정신의학 책들을 책장에 꽂아 놓으면서 책들의 제목이 뒤로 가게 꽂아서 부인이 그 책의 제목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고우울증 약을 몰래 먹다가 부인에게 들켜서 감기약을 먹고 있다고 변명을 했다고 했다. 결혼 후에 부인에게 B씨의 어린 시절의 상처들을 일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결혼 전에 한 여성과 7년을 사귀다가 헤어지면서 그 여성이 떠나면서"오빠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위의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B씨의 감정의 표현 자아가 유아기로 고착되어있다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이 되었다. B씨는 자신의 수치심, 부끄러움, 모욕감, 적대 감정 등의 부정적 감정을 일체 다른 사람에게 밝히지 않고 숨기고 억압해 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이 그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조롱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의 분석에 무릎을 쳤다.

 이와 같은 감정적 자아의 미성숙은 그가 직장, 동료들이나 자신의 직장 상사들에게 솔찍하게 자신의 불안, 두려움을 감추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가 동료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파지고 말을 더듬거리는 현상은 자신의 발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만약 그가 발표시에 이러한 신체적 현상을 다른 사람이 알고 나면 자신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천대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 근원임을 B씨도 인정을 했다.

 자신의 부인 앞에서 그 자신의 두려움, 불안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동료, 직장의 상사에게 자신의 부끄러움, 두려움, 수치심을 말할 수 있겠는가?를 알 게 되면서 우선 부인에게 의사 소통을 하도록 하는 치료자의 권유를 수용하기로 했다. 먼저 자신의 수치스러움, 모욕감, 부끄러움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훈련이 계속되면서 B씨는 부부 관계의 막혀 있는 의사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인정을 하고 막힌 소통을 뚫고 나가기로 했다.

치료의 결과

 치료가 6개월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B씨와 부인의 의사 소통 문제를 많이 개선이 되었다. 그는 부인에게 결혼 후 처음으로 그가 정신과에 몇 번 다녀 온 일이 있다고만 말을 했다. 그러자 부인이 그렇나 이야기를 자신에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부인 자신도 정신과에 몇 번 다녀온 일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이후에 지점장에게 그가 말을 할 때 심장이 벌떡거리고 호흡이 가파지며 말을 잘 더듬는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 지점장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할 때 호흡, 심장이 뛰는 경험을 했다고 이야기를 해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에 고맙다고 했다.

그 이후에 B씨는 부인에게 심리치료를 6개월간 받기로 결심을 했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부인이 자신도 강박증, 신경증 때문에 심리치료를 한번 받아보고 싶다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그는 몇 달 전에 딸이 태어나면서 손녀를 보러 온 어머니에게 과거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조금은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과거의 이야기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미래만 생각을 하라는 말에 더 이상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고 했다. 치료자는 아직 감정적 자아가 유아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지적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시도한 점을 높이 평가를 해주었다.

 B씨는 치료 초반기에 정말로 자아가 자랄 수가 있는지 의아해 했다. 치료자는 B씨가 부인이나 어머니에게 그리고 지점장에게 자신의 문제점을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가고 있는 과정이 바로 감정적 자아가 자라고 있는 증거가 아닌가! 하고 설명을 하자 그는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치료가7개월로 접어들어가는 시점에서 그는 회사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치료자에게 해 주면서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회사 간부 회의에서 지점장이 B씨에게 유인물을 읽어 보라는 지시에 깜짝 놀라서 순간적으로 정신 없이 읽어가다가 갑자기 내가 글을 읽으면 말을 더듬거리고 호흡이 가파히고 숨이 흘떡거린다는 사실이 생각이 나면서 순간적으로 흔들렸으나 그 순간에 그렇게 되면 어떠냐! 하고 무시하고 밀고 나갔드니 아무 문제 없이 잘 읽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 이벤트에서 B씨가 치료 7개월 만에 처음으로 수행 공포증의 증세를 뚫고 나가서 돌파한 것이었다.

 치료자는 B씨에게 수행 공포증은 생리적 현상을 설명해주었다. 호흡이 가파지고 맥박이 뛰고 머리 속이 하얗게 되는 것은 자율 신경계통이 교감신경계의 작동의 영향하에서 놀래거나 두려움, 시급한 상황에게 일어나는 생리적 현상으로 이 자유신경계통을 의식적으로 컨트롤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일어주었다. 자유신경은 글자 그대로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생리적 현상인데 B씨는 위기의 순간에서 호흡, 심장, 맥박 등을 체크를 하면서 놀라서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컨트롤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컨트롤할 수 없게 되고 그 순간 표정이 이상해져 버린다고 설명을 했다.

그는 이해가 어려운 듯이 자신이 컨트롤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그렇게 된다고 의아해 했다. 치료자는 B씨에게 호흡이 가파지고 심장이 뛰고 맥박이 빨라짐을 스스로 인식을 하고 그것을 없는 것처럼 숨기려고 아무 일도 없는 것 처럼 숨기려고 시도를 하고 있음을 지적하자 그는 그것을 인정을 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의 호흡, 맥박, 심장 박동을 알까봐서 노심초사하고 그것을 숨기려고 하고 있음을 인정을 했다.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파지고 말을 더듬거리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솔찍하게 동료들에게 내가 지금 심장이 뛰고 호흡이 빨라지고 말을 더듬거려고 한다는 것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돌아가는 것이지 그것을 없다는 듯이 숨기려고 하는 것이 그것들을 컨트롤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B씨가 지점장에게 자신의 불안의 생리적 현상을 이야기를 했고 부인에게 솔찍하게 자신의 생리적 문제점을 이야기를 한 것은 그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수치심, 취약점을 이야기를 하는데 두려움이 감소된 증거임을 인식하게 했다.

 치료는 B씨에게 간부 회의에서 한번 유인물을 읽었을 때 생리적 현상을 보이지 않고 잘 통과를 했다고 해서 그 문제가 전부 해결된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유사한 상황에거 그 문제를 통과를 하려고 하면 먼저 부인에게 B씨 자신의 수치심, 모욕감, 노여움, 적대 감정 등을 자연스럽게 표현을 할 수 있으야 하고 그리고 B씨의 어머니에게 어린 시절에 표현을 하지 못한 감정적 수치심, 모욕감, 상처들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동료, 직장 상사들에게 B씨 자신의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를 했다.

그것은 그러한 부정적 감정들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고 그러한 감정을 두려움이 없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이 되어져야 한다는 치료자의 지적에 B씨도 흔쾌히 동의를 했다. 그는 지금 일주일에 한번씩 치료자를 찾아와서 2시간씩 그 자신의 어린 시절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이야기들을 재연하고 마음 속에 쌓여있는 적대 감정, 모욕감, 수치심을 퍼내면서 그 감정들을 정화 시키는데 열중하고 있다.

수치심, 모욕감, 부끄러움을 표현하는 것이 왜 죽기보다 더 싫은가?

 B씨는 자신의 결함, 단점을 표현하는 것이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표현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수치심의 표현은 자아 소멸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이유를 알고자 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 우선 B씨의 돈 문제의 표현과 관계해서 분석해 보자. B씨의 돈의 표현 문제는 어린 시절의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비롯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B씨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남자는 통이 커야 한다, 무엇을 한든지 간에 남자는 손이 크야 성공을 할 수 있"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조그만 돈을 따지면 짜잖하게 보이고 속이 좁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느껴진다고 했다. 특히 물건 값을 흥정을 하는 것에는 짜증이 난다고 했다.

두 번째는 B씨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에게 돈 이야기를 하지 못했. 돈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에게 혼이 난 이후에는 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금기시 되어 성장을 해 온 점이 밝혀졌다.

세 번째 어머니가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했다. 어머니는 보험 설계사, 화장품 외판원, 다단계 직원 등으로 물건을 흥정을 하는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물건을 파는 어머니로 인식되어진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얼마나 물건을 하나는 팔면서 모욕감, 수치심을 당했겠느냐 하는 물건을 파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애 늙은이" "아이 어른"이 되면서 상대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읽어서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는 돈을 다룰 때 상세하게 이야기를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게도록 훈련을 통해서 재연을 할 수 있게 되어갔다.

 그 다음에 B씨는 자신의 실수, 수치심, 모욕감 등을 절대로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문제는 위에서 언급을 한 초등학교 2학년 때 쉬는 시간에 B씨가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는데 누가 머리를 치는 것을 보고 짜증이 나고 화가 나서 "씨발놈"이라고 욕을 하고 나서 일어나서 쳐다보니 담인 선생님이었고 선생님에게 욕을 했다는 것이 반 동무들에게 알려지고 학교 전체에 알려질까봐서 전전긍긍하고 이후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무실 옆을 지나치는 것을 피했고 선생님들의 눈을 쳐다보는 것을 피했다고 했다.

이 이벤트가 시발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B씨는 이 사건을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치료자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해서 약 5년 이상은 학교에서 두려움과 불안으로 고통 속에서 보냈다. 그는 그것이 밝혀지는 것은 그의 자아의 소멸로 인식했다.

그 사건 때문에 학교 선생님이나 동료들이 그를 이상한 아이로 볼 것으로 두려워했고 또 이상한 아이로 보지 않을까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않을까 공포 속에서 5-6년을 보냈다. 이것이 마음 속에서 수치심과 모욕감은 바로 자아의 소멸로 연결되어진 계기가 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는 이후에 어떤 수치심, 모욕감은 절대로 말로 표현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 수치심과 모욕감의 표현은 차라리 그가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로 표현하는 것은 할 수 없다라는 의식의 밑바탕에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숨어저 비명을 지르고 있음을 그 자신이 모르고 있었다.

 위에서 분석되어진 자료들을 바탕으로 B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감정적 자아를 성장 시키는데 치료의 초점을 두고 계속해서 어린 시절에 고통스러웠던 감정, 느낌들을 표현하는 과정을 계속해 나갔다.

돈을 다루고 관리를 하는 문제를 재연하고 옛날 어린 시절의 이벤트들을 다시 재 경험하게 했고 다시 표현 훈련을 거치게 했다. 초등학교 시절 동안에 웅크리고 공포 속에서 지내온 5-6년의 고통스런 감정, 느낌들을 재연해서 다시 경험하고 표현하게 했다.

B씨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에 입사 후에 어머니와 남동생이 B 씨에게 빌려가서 갚지 않고 있는 돈 문제에 얽힌 분노, 적대감정을 하나씩 재연해서 그 노여움을 표현하게 했다.

 치료의 과정에서 다시 경험하고 행동으로써가 아니고 말로써 표현하게 된 느낌들을 다시 집에 가서 부인에게 재연해서 표현할 수 있도록 하게 해서 점차로 억압되고 금기시 된 감정 표현의 싹이 자라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알 수가 있었다.

 B 씨는 이제 부인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경험들을 치료자에게 한 이야기의 50%를 부인에게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최근에는 수행 공포증의 동반 없이 발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치료 이전에는 1주일에 4-5회씩 집에서 술을 마셨으나 지금은 술은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끔 부인과 같이 소주 병을 놓고 같이 한번씩 마신다고 했다.

또한 최근에 고교 시절의 동료들과 만난 회식 자리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회식 비용을 모아서 각자가 분담으로 지불하게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우울함도 많이 감소해서 이제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나 삶에서 의욕의 상실은 느끼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B씨는 지적인 자아는 엄청나게 다른 사람보다 잘 자랐으나 대신에 감정적 자아는 아직도 유아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 감정적 자아가 자라나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치료에 열성을 다하면서 자신의 내면의 심리적 움직임에 호기심을 가지고 치료에 열성을 다하고 있다.

B씨가 치료 11개월의 시즘에서 어느 한 치료 회기 때 그는 그의 어린 시절에 고착되어 자라지 못하고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는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초등학교 시절의 자아를 직접 만나서 대면을 할 수 있었다. 이 직면의 결과 그는 그의 치료의 돌파구를 뚫고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정신분석 심리치료는 환자가 자신의 자아를 알아 가는 과정이다. 환자 자신의 어린 시절의 꽁꽁 얼어붙어 있는 성장하지 못하고 고착되어 내면의 한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 자아를 만나서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치료의 결정적인 돌파구가 마련된다.

이러한 치료의 과정이 영화로 만들어져 소개된 것이 디즈닐랜드의 제작으로 수년 전에 소개된 "키드"(The Kid)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성인인 중년기의 한 남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신경증 즉 안면 근육 경련증과 아버지와 껄끄러운 관계, 징징대며 짜는 것에 참을 수 없어 폭발 등의 여러 가지 힘들어 하는 고통스러운 문제들의 해결을 시도하면서 그 문제들을 직면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자아를 만나게 되고 왜 그가 지금 현재의 문제로 힘들어 하는가를 알 게 되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의 삶의 돌파구를 만들어내고 자신의 꿈을 펼쳐나간다는 내용의 정신분석적 치료 내용을 담은 영화이다.

 B씨는 어린 시절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성장이 멈추어 버린 감정 표현 자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미 첫 치료 회기 때 분석이 되어졌다. 그는 최근에 15-16년 동안 근무한 회사에서 순환 근무의 규칙에 따라서 지방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그는 그의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지원서를 제출했고 이것이 수용되어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지방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매주 마다 한번씩 2시간 동안 치료를 받는 치료 회기 시에 B씨는 이번 주일 며칠 전에 지방 근무지에 가서 인사를 하게 되었고 회식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치료자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치료자는 매주 치료가 시작되면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에게 "이번 주일에는 어떻게 지냈습니까?"라고 물어본다. 지금 현재에 좋은 일이든지 좋지 않는 일이든지 소상하게 치료자에게 이야기를 하게 함으로써 현재의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면서 과거의 내 경험이 어떻게 연결되어있는가를 분석해 나가기 때문이다.

이번 주일에 일어난 이벤트들을 과거의 상처 경험과 어떻게 연결되어있나를 분석해서 찾아내어 그 환자로 하여금 알 게 만들어주기 위함에서 이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경우에는 지간 시간에 하는 분석의 내용으로 되돌아가서 분석 치료를 계속하게 된다.

 B씨는 치료자에게 이번 주일에 있었던 한 개의 이벤트를 탄식 조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회식 때 약 30여명의 직원들이 신, 구 대면 파티에서 한창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을 때 내마음의 한 쪽 구석에서 불안감, 두려움이 싹이트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지점장이 나를 지명해서 동료들 앞에서 소개를 하면 어떻게 하나? 나에게 노래를 시키면 어떻게 하나? 하고 구석진 곳을 찾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첫 파티의 시작 때 이미 자신의 소개는 큰 어려움이 없이 잘 진행이 되었고 내가 옛날부터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할 때 떨리거나 목소리가 거칠 게 나오거나 하는 것 때문에 괴로웠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내 소개를 잘 해서 과거에 발표를 하는데 어려움은 이번에 사라진 것을 알 게 되어 기뻣습니.

그러나 한 쪽 마음의 구석에는 혹시 나에게 어떤 것을 시키거나 나를 지명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구석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이지 않는 구석진 곳을 찾고 있는 내 자아를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실망을 했습니다." "지명이 되면 노래를 하든지 코메디를 하든지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데 왜 내가 어린 유치원 아이들도 다 하는 것을 못하는 데는 기가 막힙니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유아적인 태도를 비난하면서 고통스러워했다.

 치료자는 그의 상세한 이벤트의 설명을 B씨의 어린 시절에 초등학교 시절의 6년 동안의 자신의 자아로 연결 시켰다. 초등학교 때 미술 시간이나 학습 준비물을 요구 하는 시간에는 B씨는 늘 준비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엄마에게 학습 준비물을 사야하니 돈을 달라고 했다가 호되게 야단을 맞은 이후로는 절대로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선생님에게 "잊어 버리고 엄마에게 말을 하지 않아서 학습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서 선생님의 노여움을 샀다. 그는 늘 미술 시간이나 학습 준비물이 필요한 시간에는 동료들 앞에 끌려 나가서 벌을 서거나 아니면 동료들이 하고 있는 학습의 과정을 우두커니 고통스럽게 지켜보면서 혹시 선생님에게 발각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했다. 게으름뱅이라고 선생님으로부터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는 공부 시간이 되면 선생님의 눈치를 살폈다. 선생님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등치가 큰 동료들 뒤에 숨거나 교실의 한쪽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 시점에는 서로 마음이 맞는 친구와 같이 짝지로 자리에 앉는 학급의 룰이 있었다.

그는 늘 구석진 곳에 선생님의 눈을 피해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과 지금 현재 성인이 되어 회사의 회식 모임에서 지점장의 눈을 피해서 지점장과 눈길이 마주치지 않는 구석진 자리를 찾아서 다른 사람들의 눈의 피하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서 치료자가 지적을 하자 그는 깜짝 놀라서 무릎을 쳤다.


 
그는 탄식을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초등학교 시절에 늘 선생님의 눈을 피해서 등치가 큰 친구들 뒤에 숨거나 구석진 자리를 찾았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그 어린 시절의 자아는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되풀이 되고 있다는 것에 너무나 놀랬습니다. 선생님께서 치료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상처는 평생동안 되풀이 된다는 말을 그냥 흘러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정말로 내가 어린 시절의 내 상처받은 자아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늘 왜 내가 바보 같이 유치원 생들도 하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글을 낭독하거나 내 자신을 소개하는 일들만 만나면 버벅거리고 말을 더듬거리고 가슴이 뛰고 심장이 벌떡거리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치료자는 B 씨에게 어린 시절 초등학교 시절에 6년 동안 고통스럽게 학교 생활을 다시 회상해서 그 때의 내 자아를 회상해 보게 했다. 늘 공부 시간만 되면 고통스럽고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선생님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눈길을 마주치지 못하고 힘들어 했던 내 어린 시절의 자아와 만나서 그 자아와 직접 대면 즉 직면을 하게 했다. 학교에 가는 것이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처럼 괴로웠다고 했다.

집에 오면 엄마와 아빠는 늘 싸움을 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세탁기를 창문으로 집어 던지는 바람에 B씨와 동생이 놀래서 울면서 집 밖으로 뛰쳐나와서 밤새도록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뚜꺼운 종이 박스 상자를 뒤집어 쓰고 남의 집 문 앞에서 밤을 세운 일들을 회상하게 했다. 가정은 마음의 안식처, 휴식처가 되어야 하는데 집에 들어가도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고 창살 없는 감옥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웠고 그리고 학교에 가도 마음은 늘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두려웠. 그 시절에 괴로워하던 내 자아와 직접 대면을 하게 했다.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내 자아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편안하지 못하고 늘 안절부절하지 못했던 것을 회상해 보라고 치료자가 지적을 했을 때 B씨는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내면의 쪼그라들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불쌍한 내 자아가 아직도 회식이나 모임에서 쥐구멍을 찾으면서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바로 수행 공포증으로 지금 치료를 받고 있는 내 자아가 아닌가! 라는 치료자의 해석에 그는 통곡하기 시작했다.

치료자는 B씨로 하여금 통곡을 하도록 울도록 했다. 더구나 나아가서 지금까지 한번도 그러한 불안스러움, 두려움들을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한 내 자신의 자아의 고통스러움을 직면하게 했다. 엄마, 아빠는 물론 1 6개월 전에 결혼을 한 부인에게 조차도 나의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갇혀 있는 내 자아를 보게 했다.

그는 치료가 시작된지 11월이 지나도록 아버지에 대한 애증 때문에 몇 번 울었던 때는 있었으나 2시간 동안 그렇게 애절하게 통곡을 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B씨는 자신의 내면 속에 갇혀 있는 꽁꽁 얼어붙은 자아와 직면을 할 수 있었다. 그 자아가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게 했다. 아버지에게 그리고 어머니에게 그 시점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쏟아내게 했다. 울면서 B씨는 2시간 동안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냈다. 갇혀 있는 한이 맺인 감정들이 폭소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B씨는 지금까지 자신의 문제가 약 60%는 지금의 부인에게 이야기가 흘러가서 이제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40%는 남아 있음을 시인을 했다. 이제부터는 어린 시절에 못다한 말들, 감정들을 부인에게 그리고 어머니에게 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를 했다. 가장 하기 쉬운 가족들에게 조차도 부끄러워서 이야기를 하지를 못하는데 하물며 직장의 동료들이나 낯선 사람들에게 어떻게 내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동료들이나 낯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내 자신의 자아를 숨기려고 하고 내 자신의 결함이 발견될까 봐서 발각될까 봐서 전전긍긍하며 숨기려고고 하는 것이 수행 공포증 그 증세가 아닌가? 그 증세는 바로 가슴이 벌렁거리고, 심장이 뛰고, 숨이 가프고, 말이 버벅거리는 증세들은 바로 어린 시절의 초등학교 시절에 선생님과 학급 동료들에게 자신의 학습이나 준비물 부족이 들통나지 않으려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고통스럽게 싸워야 했던 바로 그 자아의 모습이 아닌가!

 지금까지 B씨는 늘 자신의 문제는 큰 문제는 아니라고 위로를 해 왔다. 그러나 과거를 되돌아볼 때 특히 그의 초등학교 시절은 그야 말로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두려움의 기간이었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었다. 그 두려움, 불안은 그 시절에 직면했던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찌를 부모가 가르쳐주지 않아서 해결 방법을 몰랐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혼자서 짊어지고 끙끙거린 그 어린 시절의 초등학교 시절의 소년이 지금은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내 내면에서 한번씩 유사한 상황에서 과거가 되풀이 되어 반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수행(공연) 공포증이라는 것을 확실이 깨닫게 되었다.

 이 치료 회기 이후에 B씨는 전출로 인해서 회사의 간부들의 회식 모임에서 자신을 소개하게 되었을 때 수행 공포증은 깨끗이 사라졌다고 의아하게 기분 좋게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이상 하게도 이번 주일에 있었던 간부들 모임인 저녁 회식 때 자기 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과거의 수행 공포증은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20년 이상 나를 괴롭혀왔던 그 수행 공포증이 사라졌습니다. 동료들과의 모임에서 '내 자신이 능숙하게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기합니다."

 치료가 1 1개월을 지나갈 무렵의 시점에서 B씨가 어린 시절의 상처의 기억들 중에 그들과 연결되어진 한 가닥의 실마리를 찾게 된 치료 회기의 한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B씨는 지난 달에 서울에서 지방으로 전출 지원을 간 이후에 동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말을 더벅거리거나, 호흡이 가파지거나, 가슴이 벌렁거리는 수행 공포증이 사라졌다는 것을 이미 이전의 치료 회기에서 밝혔었다.

지난 주일에 간부 모임에서 연초 새해 사업 계획서를 발표하는 간부들의 모임에서 B씨가 올해의 사업 계획서를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에도 수행 공포증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즐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치료 회기를 시작했다.

그는 그 프리젠테이션에서 "내가 내 자신도 모르게 유창하고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신기하게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B씨는 치료 초반기에 자신이 치료자에게 가지고 온 증세인 수행 공포증이 사라졌다고 치료가 끝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B씨의 치료는 증세의 하나인 수행 공포증의 제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핵심 문제인 감정적 자아가 제대로 성숙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가 어린 시절에 고착되어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 감정적 자아를 성장시키는 것에 있음을 알고 전보다도 열심히 치료에 전념하게 되었다. 정신분석 심리치료에 대한 인식 즉 그의 증세가 그의 핵심 문제가 정신분석적으로 치료될 수 있다는 확신과 치료자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게 생기게 된 것이었다.

 최근에 B씨의 문제들 중에 또 한가지가 표면으로 드라나게 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직장 상사들이나 동료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표시를 했다가 상대가 반대 의견을 강하게 들고 나오면 그만 꼬리를 내린다는 것이었다. 즉 자신의 초반기 주장을 철회하고 상대의 의견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속내로는 그는 상대의 의견에 동조를 하지 않지만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고민을 털어 놓았다. 이 문제는 이미 치료 초반기에 치료자가 지적을 했지만 그는 그 문제를 그의 심각한 문제로 지금까지 인식을 하지 않고 있었고 최근에 다시 문제로 급 부상하게 되었다고 했다.

 직장을 서울에서 지방으로 순환 근무제 때문에 이동을 해야 하는 것을 알고 그는 지난해 말에 고향으로 전출을 희망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 가족들이 그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는 고향에서 친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친구의 특징이 지금까지 같이 식사를 한 후에 한번도 그가 돈을 지불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 친구가 만나자는 요청에 응해서 만나게 되었으나 식사 후에 그 친구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바람에 주저없이 그가 접대 비용을 지불했다고 마음 속으로 아파했다. 이러한 유사한 이벤트는 B씨의 삶에서 종종 있어왔다는 것은 이미 여러번 치료에서 다루어져왔다. 그러나 B씨는 그 문제를 심각한 그의 문제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이번에도 역시 똑 같은 고통을 스스로 답습, 반복한 것임이 지적되었다.

그는 그 친구나 직장 상사 앞에서 그들이 강력하게 그와 반대 주장을 하면 그냥 그의 주장을 철회해 버린다고 했다. 여기에서 치료자는 그에게 그가 그의 어머니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누어 온 대화를 생각해 보도록 했다. 그는 치료자와 치료를 시작한 후에 어머니에게 그의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감정의 경험들을 이야기를 하도록 권유를 받았다. 그가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을 때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경험들을 말로써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조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과거를 이야기 해서 무엇하느냐?" "사람은 미래를 보고 살아야지 지나간 과거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한 마디에 그만 그의 감정 표현을 중지하고 말았다는 것을 치료자는 그 이벤트 직후에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그의 돈을 몇 천만 원씩 사업비 명목으로 빌려가서 갚은 적이 없고 오히려 그는 빚더미에 눌려 지금까지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어머니는 단호 하게 "그 때는 나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일부러 너의 돈을 가져다 썼느냐!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냐? 나는 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를 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는 마음 속에서 차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말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입을 다물고 만다고 한 것이 지적되었다. 그가 다른 사람이 강하게 주장을 하면 그는 그의 주장을 슬그머니 철회를 해 버리니까 그의 주장을 틀린 그가 잘못된 것으로 지각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는 왜 그가 그렇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치료자는 그가 어린 시절에 초등학교 2학년 쯤에 엄마에게 내일 미술 시간에 쓸 공작 도구를 사야 하니 돈을 주세요하고 요구를 했다가 호되게 엄마로부터 처벌을 받은 것이 치료 초반기에 다루어졌고 이후에는 절대로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고 한 사실을 지적을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했다가 어머니로부터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부터 그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자기 주장을 한 사실이 한번도 없었음을 지적을 했다.

다시 말을 해서 그는 그의 어린 시절의 감정적 자아,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는 자아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이 아닌가? 즉 다시 말해서 그러한 자기 주장 경험이 컴퓨터에 입력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경험이 머리 속에 없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는 치료자의 해석에 100% 수긍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미 여러번 지적이 되었으나 그 해석에 썩 만족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시점에서 치료자는 한 가지 마음 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실마리가 있었다. 그것을 B씨에게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B씨가 왜 초등학교 시절에 그가 학교 동료나 선생님들에게 거짓으로 자신의 가정 환경을 숨기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속이고 살아왔던가를 다시 한번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대졸이고 지방에서 가장 큰 백화점을 세우고 사업을 하다가 친구의 배신으로 쫓겨나게 되었다고 치료 초반기에 이야기를 했다. 매년 초마다 학급에서 실시하는 가정 환경 조사부에는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로 엄마는 고졸의 학력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 부부가 사업을 하는 사업가로 등록이 되어있고 잘 살고 있는 학생으로 인식이 되어있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실직자로 무직으로 일을 하지 않고 엄마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행상, 보험 외판원, 다단계 등의 하찮은 일에 종사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는 말을 절대로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차라지 죽은 것보다 못하다. 죽었으면 죽었지 그 말을 할 수 없었다고 여러 번 이야기를 했다. 그가 진실을 이야기를 하면 그는 자아가 해체되어 자아가 붕괴되어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그는 지금에 와서 왜 그가 그러한 진실을 외면하고 그것을 비밀로 해야 했던가?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다. 치료자가 감정적 자아의 미성숙이나 컴퓨터에 경험이 입력되지 않아서 자신의 고통을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음을 수 없이 지적을 했지만 그의 마음 속에 심금을 울리지 못하고 있음을 직감을 했다. 즉 그는 치료자의 해석에 이해는 하지만 마음 속에 딱 와서 닿아서 그의 마음이 공감을 하는 정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치료자가 직감을 했다.

 여기에서 치료자는 그가 중학교 1학년 시절에 학급 반장 선거에서 동료들이 그를 적극 반장으로 추천을 하면서 반장을 하라고 했지만 그 순간에 그는 반장은 고사하는 대신에 부반장을 하겠다고 해서 그 스스로 반장을 포기하고 부반장을 한 사건을 이야기를 했다. 동료들의 절대 다수가 적극적으로 추천을 하는 반장을 고사한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만약에 내가 반장을 하면 어머니가 학교에 자주 나와야 하고 환경 정리나 학급 비품을 어머니가 사 줄 수 없고 소풍이나 학교 행사에 어머니가 지원이나 학교 방문을 할 수 없다 고로 내가 반장을 하면 안 돼"라는 생각으로 머리 속에서 그러한 수 많은 생각들이 교차되었음을 실토를 했다.

이후에도 그는 절대로 반장을 맡지 않았고 부반장이나 학습 부장 등을 맡아서 했다고 했다그는 이미 반장이 되면 어떤 어려움이 닥칠 것인지를 미리 계산해서 행동을 한 것이었다. 그 만큼 그는 다른 동료들이 생각을 하지 않는 것까지 복잡한 생각들을 그 어린 나이에 많이 하고 있었던 것이 지적이 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의 자아가 얼마나 많은 잡다한 생각들을 해야 했었는지 부모님이 해야할 생각들을 그 어린 시절의 자아가 대신해서 세상 짐을 지고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너무 많은 생각들로 가득차 있어서 그 생각들이 마음의 에너지를 빨아먹어서 다른 곳에 에너지를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실제로는 그는 그가 중학교 시절에는 그의 어머니가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그 친구가 망하는 바람에 그 돈의 대가로 그 다방을 인수해서 다방이 잘 되어서 그 당시에 어머니가 여러 개의 다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괜 찮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방이라는 직업 그 자체에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으로 아버지가 극구 반대를 했고 그리고 그도 역시 절대로 어머니가 다방을 하고 있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다방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도 그에게는 일급 비밀로 묻혀있었다.

 여기에다 그는 그 자신에게 늘 "나는 내 가족 환경을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절대로 해서는 안 돼, 내가 만약 나의 실제 가정 환경이 친구나 선생님에게 알려진다면 나는 사망이야, 친구들이 실망을 하고 나를 버릴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버림받게 될 것이다. 대신에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나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죽어라고 공부를 해야 해, 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을 얻어야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어!"라고 그에게 수 없이 다짐을 했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그는 공부를 잘하고 모범생으로 친구들의 인정을 얻었고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의 자존심의 받침목이 되었다. 그는 그 자존심의 지렛대를 바탕으로 서울의 명문대학 경영학과에 입학을 했고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적인 제약 회사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고액의 연봉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치료 초반기에 이야기를 했었다. 치료자는 여기에서 한 개의 실마리를 찾아 연결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에 왜 거짓 자아로 다른 사람을 속이고 살아 왔던가? 그는 그 자신의 가족 환경을 진실되게 선생님이나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에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는 달리 그 자신의 장점을 내 세울 만한 근덕지가 없었. 유일하게 그의 자존심의 버팀목이 된 것이 아버지가가 대졸이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고 엄마는 고졸로 역시 사업을 하는 부부가 맞벌이는 하는 부유한 잘 사는 가족으로 그를 변장시켰다.

즉 그는 그의 허상 자아, 거짓 자아가 그의 자존심을 보호해 주는 버팀목 역할을 하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고 친구들에게는 잘 사는 집 아들로 변장을 한 것이었다. 그것이 진실로 밝혀지면 그는 그의 자아를 지탱해줄 아무 것도 남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바탕으로 죽어라고 공부를 했고 그 바탕이 그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갔고 좋은 직장을 얻었고 높은 연봉을 받게 되었다.

그는 외형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미남이고 이었다. 치료 초반기에 그가 강조한 것은 "선생님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꿀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일류 대학의 경영학과를 나왔고 세계적 이름있는 제약 회사에 입사했고, 고액의 연봉을 받고 있고 그리고 지식적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은 책들을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고 외모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어떤 것을 발표하는 프리젠테이션이나 팜프렛을 읽는 조그만 사소한 일 때문에 망신살을 당합니다. 꼭 유치원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행동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수 없이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서 밝혀진 것처럼 그는 다른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지금은 그는 다른 면에서는 성공을 해서 잘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자신의 수치심, 부끄러움, 모욕 등을 동반하는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거나 자신의 내면의 고통을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는 어린 유아기의 자아가 작동을 한다는 것을 치료자가 실마리로 찾아 연결한 것이었다.

 이 연결에서 그는 치료자의 해석에 이제는 내 마음 속에서 의문이 100%가 해소되는 시원함을 느낀다고 실토를 했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혹은 3학년 시절에 반에서 글짓기를 해서 발표를 하는데 한 예쁘장한 공부를 잘 하는 여학생이 그녀가 쓴 작문을 읽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녀는 솔찍하게 그의 아버지가 장애인으로 일을 할 수 없고 엄마가 노점상으로 행상을 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가 부모님을 열심히 도와주고 있고 그러한 부모님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하는 낭독에 반 동무들과 선생님이 박수를 보내고 격려하던 기억을 회상시켰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자연스럽게 한 그 여학생이 대단해 보이고 용기있게 보였다고 실토를 했다. 그는 자신은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두 번째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면서 그는 왜 자신을 지금까지도 그의 단점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수치스럽고 모욕으로 느껴지는지를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가 취업 후에 사귄 여자 친구가 7년 후에 그를 떠나면서 "오빠는 7년 동안 사귀어 왔지만 어떤 사람인지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다"라고 한 말을 떠 올렸다. 그 시점에서 그 여자 친구가 B씨의 집을 방문하고 싶다고 요청을 해 왔다. 그는 그 시점에서 엄마에게 2억원, 남동생에게 7천만원을 뜯긴 상황에서 마이너스 통장으로 원룸으로 이사를 한 직후여서 갖가지 변명으로 그 여자 친구의 방문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의 실제 생활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해서 그가 자신을 밝히기를 거부한 거짓 자아승리였다.

 여기에 더 붙여서 그는 초등학교 4학년, 혹은 5학년 시점에서 반에서 제일 잘나가는 친구들이 5명이 그룹으로 서로 자신들의 집에 초대를 해서 같이 식사를 하던 기억을 떠 올렸다. 도지사 딸, 의사집 아들, 교사집 아들, 고급 공무원의 딸,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 등으로 구성되어있었다. B씨는 자신을 사업하는 아버지와 엄마를 내세웠. 잘 사는 집 자녀로 과장을 했다. 외형적으로는 아버지가 대졸, 큰 사업을 하는 사업가. 엄마는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 학적부에 기록이 되어있어서 아무도 그의 환경을 눈치를 챈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의 차례가 다가오자 갖가지 변명으로 그의 집 방문을 막았다. "어머니가 아파서 입원을 해 누워있어서 우리집에 너희들을 데리고 올 수가 없!" "아버지 어머니가 출장으로 집에 아무도 없어서 너희들을 접대할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갖가지 변명들로 미리 친구들의 방문을 막았던 기억을 떠 올렸다.

 최근에 그는 또 한가지 기억을 회상하면서 쓸쓸히 웃었다. 2주일 전에 그가 지방으로 가족이 이사를 갔다. 어머니가 양품점을 하고 있는 고향으로 이사를 갔었다.그런데 부인이 시어머니가 사업을 하고 있는 양품점을 직접 방문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 요청을 해 왔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가 화려하게 꾸민 양품점이 아니어서 초라하게 보일까 두려워해서 부인에게 갖가지 변명으로 지금까지 어머니의 양품점을 방문하지 않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그가 자신의 약점이나 결함이나 고통스런 감정들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해서 철저하게 거짓으로 숨기는 과정에서 그는 엄청한 에너지를 그들을 방어하는 것에 쏟아 붓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치료자의 연결에 맞장구를 치면서 크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그의 집안 사정을 철저히 비밀로 숨긴 것은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보루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아가 해체되지 않고 자아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죽자고 했다. 그는 그 결과로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그리고 높은 학식과 외모 등으로 이제는 든든한 자신감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그러한 장점이 많이 늘어나서 자신의 조그만 단점들을 한 개 두 개 정도는 밝혀도 그의 자존심에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는 자신의 실수, 수치심, 단점 등을 밝히는 것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초등학교 시절처럼 똑 같이 반응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이야기를 하는 시점에서 그의 어린 시절의 초등학교의 거짓 자아, 허상 자아가 반복해서 지금도 작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치료자의 지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었다.

 치료자는 B씨에게 어린 시절의 거짓 자아, 허상 자아는 초,, 고등학교 시절의 자아의 해체를 막아주는데 보루 역할로 내 자아의 갑옷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제 어른이 되어서 내 장점들이 늘어나서 내 자신의 단점 몇 개를 밝힌다고 해서 내 자존심이 흔들리지 않는 시점에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약점을 밝히는 것에서는 유아기의 거짓 자아가 작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약점들이 밝혀지면 나는 사망이다! 내 자아의 해체, 내 자아가 산산조각으로 붕괴될 것이다!'라고 어린시절의 자아의 갑옷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한 때 도움이 되었던 그 자아의 갑옷이 이제는 내 자아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잘 보아야한다고 해석을 했을 때 그는 이제 "내 문제의 한가닥 실마리가 풀리는 것을 느낀다"라고 시원해 했다.

 B씨가 이 치료 회기를 끝내고 치료실을 나서면서 그는 "이사를 간지 2주일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언제까지 부인을 엄마가 하는 양품점 가계를 방문하는 것을 변명으로 미룰 수 없음을 알 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부인을 조만 간에 엄마의 상점을 방문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문을 나서는 B씨의 말에 치료자 역시 한 가닥의 뒤엉킨 실타래의 한 올을 풀어낸 느낌으로 기분이 좋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다섯 번째로 폭력으로 얼룩진 40대 초반의 한 대학 교수가 치료자에게 약 300시간의 심리치료를 받은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결국 폭력적인 충동적인 성격 때문에 부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가족들로부터 외톨이로 자살을 결심하고 난폭운전으로 사고로 위장해서 자살을 꿈꾸고 있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는 부인이 인터넷에서 치료자의 홈 페이지인 21세기의 정신장애의 유형인 보드라인 장애(경계선 장애)라는 글을 보고 남편인 E씨에게 소개를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7년 동안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를 가지고 귀국해서 이름있는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가족으로부터 부인으로부터 거부당하고 대학의 교수들과 단절되어 혼자 숨어서 고립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E씨의 가족 상황: E씨는 6살 위의 형님이 그리고 4살 위의 누나가 있었다. 형님은 학교시절부터 문제아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는 공부를 하지 않고 비행학생들과 어울려 다녔다, 겨우 야간 고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누나는 겨우 고교를 졸업하고 결혼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형님과 누나를 괴롭혔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불량학생들과 어울린다는 이유에서 였다. 아버지의 음주와 폭력 그리고 외도로 어머니와 부부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회고를 했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조폭들이었다. 아버지의 큰 형님(E씨의 큰 아버지)는 조폭의 두목으로 그리고 둘째 형님 역시 조폭으로 그리고 막내인 아버지는 학교를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 아버지는 조폭인 형님의 보호를 받아서 xx 기차역에서 구두닦이를 했다고 털어 놓았다. 아버지는 돈을 모아서 중고차 매매, 부동산, 천막, 등산 장비를 판매하는 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형님에게 그 점포를 물려주고 자신은 임대사업으로 돈을 빌려주는 사업을 해서 지금은 100억대가 넘은 자산가가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어머니를 폭행하고 형님을 구타를 했다. 어머니 역시 맞불작전으로 외도를 하다가 발각되어 위자료 한 푼이 없이 쫓겨났다고 했다. 부모님은 막내인 E씨가 고교졸업 후에 이혼을 하기로 약속하고 E씨가 고교를 졸업할 때 이혼으로 갈라섰다.

 E씨는 형님으로부터 부모님 몰래 구타와 폭력에 시달렸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고교 시절에 형님과 싸움에서 이발이 4개가 부러져서 임플란트를 했다고 토로 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구타,폭력을 당하지는 않았다. E씨가 공부를 잘해서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졸업 후에 이혼으로 어머니가 E씨의 학원에 자주 찾아오는 바람에 공부에 주의집중을 할 수 없었다고 회고를 했다. E씨가 수능에 실패를 해서 3수 끝에 이름있는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대학 입학 후에 원하는 대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고 놀다가 미국의 동부지역에 6개월 해외 연수 후에 귀국 후 유학을 결심하고 정부에 전념하다가 군입대 후에 전역하면서 대학 졸업 시에 수석으로 졸업을 하고 유학 길에 올랐다. 그 때 그는 아버지의 지원을 얻어서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손수 L.A.에 날아가서 하숙집과 방을 구해주고 되돌아갔다고 회고를 했다.

E씨는 미국 유학 7년 동안 기독교 신자로써 교회에서 목회상담을 하는 목사님으로부터 3년 동안 간간히 심리상담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미국 유학 중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졸업 후에 러시아 카자흐크스탄의 선교사로 갈 것이라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졸업하면서 얼굴이 삐뚤어지고 입이 돌아가는 아사병(한의학 용어) 때문에 우리나라의 최고의 한의과 대학에서 6개월 입원 치료 후에 회복되어 그 시점에서 우리나라의 대기업에 취업이 되고 1 3개월 근무하다가 지금의 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었다고 했다.

 치료가 시작되면서 그가 7년 동안 우리나라의 최고의 의과대학 병원의 정신과과장으로부터 약물 치료와 그 대학의 부설 심리치료사로부터 1주일에 1 50분씩 심리상담을 8만원씩 주고 7년 동안 받아왔으나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최근에 심리치료를 중단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대학에서 6년 동안 근무하면서 7년 때 안식년으로 1년을 유급 휴가로 쉬게 되면서 하루에 여러 개의 복용 약물을 중단하고 1주일에 5(-금요일) 1회당 2시간으로 1주일에 10시간씩 심리치료에 올인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약 300시간의 심리치료 이후에 7년 동안 단절된 아버지와 형님 과 누나 그리고 어머니와 관계를 회복하고 그리고 대학에서 그의 학과의 12명의 교수들과 일 대 일로 화해를 해서 정상적인 관계회복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폭력의 대물림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이벤트 1: E씨는 미국 유학 3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 가족(2명의 자녀들)이 미국에 방문차 오게 되었다. 그 다음 날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E씨가 교회에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본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면서 오래간 만에 아버지와 누나 가족이 미국에 방문을 왔는데 너는 친가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교회에 가려고 하느냐? 교회가 아버지와 누나가족보다 더 중요한가?  네가 여기에서 아버지를 선택하든지 혹은 교회를 선택해라라고 강압적으로 요구를 했다. E씨는 미국 유학 후에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를 선택했다. 아버지는 노발대발해서 즉각 한국 행 비행기 표를 예약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나가족은 그 다음 날에 한국으로 돌아가버렸다.

이벤트 2: E씨가 박사 학위 후에 귀국해서 대기업에 1 3개월간 근무를 할 때 32회의 맞선을 아버지와 함께 보았으나 적당한 배우자를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E씨에게 배우자 선택을 일임을 했다. 그 시점에서 지금의 전 부인(지금은 이혼으로 8개월이 흘러갔다) 을 알게 되었고 교사인 부인이 만난 후에 3개월 시점에서 임신이 되는 바람에 결혼을 결심을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반대를 했다. 그녀를 유산시키고 다른 여성을 선택하라고 강압을 했다. E씨는 기독교 신자로써 불가를 천명(임신 3개월은 미국에서는 금지-인간으로 본다)하고 강행을 했다. 아버지는 네가 만약에 결혼을 하면 너는 아버지와 인연을 끊겠다고 라고 폭탄 선언을 했다.이 때 E씨는 아버지가 끊기 전에 내가 먼저 끊겠다 라고 하고 결혼을 강행을 했다. 부인과 태아를 지키겠다는 결심 때문이라고 했다.

이벤트 3: 형님이 아버지의 의중을 파악해서(100억대의 재산) 모든 친지들에게 결혼 취소를 통보했다. 결국 E씨의 손님은 아무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단지 어머니 혼자만 참석했다. 그런데 결혼식을 한참 진행하고 있는데 누가 고함을 치면서 이 결혼식은 무효이다라고 선언하면서 결혼식에 뛰어들었다. 형님이었다. E씨와 형님이 난투극이 벌어지고 결혼식을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그 후에 E씨는 가족들과 인연을 끊어버렸다. 어머니 역시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E씨와 상의 없이 아버지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을 알고 어머니와도 관계를 단절해버렸다. 전화, 편지 등 일체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대신에 처가 가족과 관계를 이어간 것이었다.

이벤트 4: 7년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 부인은 남편에게 당신은 1년 중에 10개월은 조용한데 2개월이 충동적이고 폭력 적어서 두려고 무섭다 라고 호소를 했다. E씨는 부인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섹스관계를 거부하는 것에 불만이었다. 여기에서 사건이 터졌다. 그가 부인의 허락을 얻어서 영화를 보고 집에 왔을 때 부인이 가방에 짐을 싸는 것을 보고 노발대발했. 부인에게 왜 짐을 싸고 있는가? 라고 물었을 때 부인은 말이 없이 짐을 챙기고 있었다. 부인이 집을 나간다고 직감한 E씨는 자신이 짐을 나가겠다고 짐을 싸서 나와버렸다고 했다. 그는 부인이 섹스를 거부한다, 두 번째는 남편을 존중하지 않는다, 이 두 개의 조건을 이혼의 유책 사유가 된다고 주장하면서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서류를 제출했다.  3개월의 조정기간에 E씨의 주장으로 부인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부인이 6살 된 딸의 입학 문제로 친정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이번에는 3억 정도의 아파트를 사 주겠으니 재결합하자고 졸랐지만 이번에는 부인이 반대를 했다. 남편과 헤어지면서 부인은 마음이 편하고 남편과 7년 동안 살면서 얼마나 자신이 긴장하고 불안했는가?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부인은 치료자와 2시간 컨설팅을 했다).

이벤트 5: 부인과 이혼 후에 E씨는 외롭고 공허하고 허무하고 삶에 즐거움이 없다고 실를 했다. 그래서 그는 전화방을 찾았다. 전화를 통해서 통화를 하는데 음담, 패설과 섹스 욕구 충족을 시키는 곳으로 전화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번에는 놀이방이라는 곳에 갔다. 그곳에서는 한 여성과 일대 일로 직접 섹스를 제외하고 그녀의 몸과 음부와 신체를 애무하고 섹스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치료자는 처음 듣게 됨). E씨는 그곳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E씨가 그녀와 자주 만나서 따뜻하고 감정적인 그녀에게 매혹되어 그녀에게 결혼을 요구 했다. 그녀는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업소에 1200만원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해소되어지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했다. E씨가 당장 내가 해결해 주겠다 라고 해서 은행에서 현금 1200만원을 인출해서 그녀에게 제공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 다음에 업소에서 사라진 것을 알고 업소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녀는 사라졌다고 했다.

E씨가 업소에 당장 그녀의 주소를 알려주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얼음장을 놓았고 결국 그녀가 돌아왔다. 왜 도망을 갔느냐? 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빚을 갚았기 때문에 업소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돈을 받아먹고 도망간 것을 따졌을 때 그녀는 내가 돈을 요구하지 않았지 않느냐?  내기 빚이 있다고 했고 당신이 돈을 주겠다고 한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내가 50%를 그리고 당신이 50%를 잘못했으니 반액은 면제해주겠다 고로 600만원의 상당의 서비스를 해달라고 해서 타협이 되었고 몇몇 서비스를 받다가 그녀와 헤어졌.

이벤트 6: E씨가 미국 유학 중에 한 유학생 여성과 사귀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와 3개월 정도 사귀면서 두 사람을 같이 여행을 가거나 같이 영화 혹은 놀이터에서 즐겁게 보냈다. 그런데 갈등이 생기면서 E씨가 헤어지자고 했다. 그녀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가?  그 이유를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을 때 E씨는 관계를 단절하고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위와 같은 이벤트들이 분석 치료 30시간의 시점에서 밝혀지게 되면서 치료자는 E씨와 아버지의 관계E씨와 부인이 관계에서 되풀이 되고 있다는 것을 분석으로 밝혀냈다. 아버지는 자신의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단절하고 관계를 끊어버린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 복종하면 아버지는 모든 것을 지원해준다 즉 아버지가 30세가 된 아들을 대학에 입학하는데 미국까지 비행기를 함께 타고 가서 거주지를 보살펴 준 것 그리고 유학 3년 째 부모님과 누나 가족이 미국에 여행차 방문 때 교회 문제로 아버지가 당장 그 다음 날에 한국으로 돌아간 것, 결혼을 할 때 아버지가 원하지 않은 여성과 결혼을 한다고 해서 자식과 단절 여기에 이혼한 어머니가 유방 암으로 아버지의 복종에 수술비용의 지원 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부인과 관계에서 부인이 남편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섹스 시에 남편의 욕구를 거부한다는 것을 핑계를 대고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강행 그리고 이혼 후에 부인이 친정으로 귀가하려고 하는 것을 3억의 아파트를 사줄 터이니 재혼을 하자고 종용하는 것은 자신의 말을 거부하면 처벌, 비난 그리고 자신의 말에 복종하면 모든 것을 지원하고 달래는 것들이 바로 남편 E씨의 말에 복종, 순종을 하라고 하는 인간관계의 패턴임을 분석으로 밝혀냈을 때 깜짝 놀라면서 자신은 지금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시인을 했다.

E씨는 아버지가 E씨를 유치원 어린이처럼 복종을 하도록 강압하고 있는 것에 대한 40대 초반의 성인의 자아가 질식을 느끼면서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의존된 자아를 독립시키고 혼자서 자치적인 독립심의 갈구가 아닌가?  의존으로부터 독립심을 위한 자아의 울음으로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치료가 40시간의 시점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E씨 자신도 역시 부인과 관계에서 똑 같이 아버지와 관계 패턴이 반복되면서 질식을 느낀 부인이 도망을 간 것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치료를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는 E씨는 감정의 표현에 문제가 지적되었다.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지 않고 acting out로 즉각적 욕구만족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시절에 부모님의 부부싸움으로 그리고 형님으로부터 구타와 폭력 때문에 감정은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리고 말로써 표현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 증거로써 E씨가 30시간 동안에 치료자에게 한 내용의 상처와 고통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부인에게도 이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실토를 했다. E씨의 내면에 쌓인 살인적인 분노가 치료의 표적이 되고 그리고 그것을 말로써 표현하는 훈련이 첨가되었다.

아래의 E씨의 7년 전(2014)에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30시간의 치료 회기의 내용E(A)요약한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상: 40대 초반의 대학 교수 A

증세: 우리나라의 최고의 명문 의과 대학병원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xxx 대학병원 신경 정신과 과장으로부터 약물 치료와 그 정신과 소속 심리치료사로부터 7년 동안 우울증으로 약물과 심리치료를 병행해서 받았으나 치료 결과에 불만족한 부인의 추천으로 치료자를 찾게 되었음

접촉: 인터넷에 치료자의 우울증 홈 페이지성격장애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치료 사례들을 읽어 본 부인의 추천으로 치료자를 찾아 오게 되었음

진단: 심한 우울증이라고 본인은 생각하고 있으나 조울증 관계 약물을 복용해 왔었고 약물 치료 효과에 불만족으로 최근에 약물을 끊었음. 이제 그는 그의 문제가 우울증은 2차적인 것이고 근본 문제점은 성격장애, 인격 장애 임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의 문제로 확신을 하게 되었음

치료 기간: 6개월 간 치료 계약을 하고 1주일에 3회씩 (1회기에 1주일에 2시간으로 월, , 금 요일) 치료 회기로 심중적인 심리치료를 시작. 2주일 째 그는 1주일에 5(, , , , ) 1회당 2시간씩 1주일에 10시간의 집중적인 심리치료를 요청해서 실시 중에 있음.

치료 결과: 아래의 치료 과정은 A씨가 치료를 시작한지 제 5 회 치료 회기(치료 10 시간의 치료)에서 드러난 그의 핵심 문제점을 분석한 것이다. 그는 그의 문제점 들을 인식하고 그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인 동기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1년 동안 안식년, 직장에서 7년 째 되는 연도에 휴가로 1년 동안 휴식 기간)으로 강의, 공부, 관계를 일체 중단하고 그의 심리 문제 해결에 만 집중할 각오로 치료를 하고 있음

치료의 과정

A씨의 대인 관계의 패턴 분석

 첫 번째 이벤트: A씨는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와 그리고 결혼 후에 7년 동안의 부인과 관계를 소상하게 털어 놓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번도 처벌을 한 적은 없었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했기 때문에 형님으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그와 아버지가 뒤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미국 유학 생활 7년의 과정(석사에서 시작해서 박사 완료까지)에서 3년 째 시즘에서 아버지가 어머니와 누나 가족(두 명의 자녀를 대동하고)과 함께 미국에 있는 A씨를 방문을 하게 된 것이 그 발단이었다. 그 방문 시쯤에서 A씨는 그가 미국 유학 시절에는 기독교에 심취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그의 계획은 그가 대학을 졸업 후에 러시아의 카차흐크스탄 지역으로 선교사 겸에 대학 교수로 갈 계획을 세우고 착실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계획은 그가 대학을 졸업할 시점에서 얼굴에 반쯤 돌아가고 입이 삐뚤어지는 "아사 장애"(한의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우리나라로 귀국하는 바람에 무산 되어 버렸다고 했다. 그는 xx대학 한방 병원에서 6개월간 입원을 해서 아사 장애는 정상으로 해결이 되었고 선교사의 꿈은 무산되어 버렸고 우리나라의 대 기업인 xxx에서 근무하다가 그 시점에서 xxx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그 대학에서 임용의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거부하고 현재의 xxx 대학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나의 두 명의 자녀로 모두 5명이 미국에 있는 A씨를 방문을 한 날 그 다음 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A씨가 교회에 예배를 가려고 하자(그 시점에서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있였다)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나는 네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인정해줄 수 없다" "네가 교회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아버지와 가족을 선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을 해라!" A씨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나와 두 명의 조카들 앞에서 당당하게 "아버지! 나는 교회를 선택하겠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교회로 향해서 문 밖을 나가 버렸다. 아버지는 당장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서 출국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즉시 한국으로 귀국해 버리고 말았다.

 두 번째 이벤트: A씨가 부인의 혼전 임신 때문에 결혼을 결심하고 아버지에게 허락을 요구했으나 아버지는 거부하고 태아를 유산 시키고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할 것을 요구 했다. A씨는 전처와 결혼을 하기 이전에 이미 아버지의 소개로써 30명 정도의 신부 후보 감을 맞선을 보았고 모두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A씨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들과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부 감을 네가 알아서 선택하라!"로 허락을 한 이후였고 그는 전부인과 만나서 3개월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그 당시를 회상을 하면서 실제로는 그가 전 부인과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임신으로 낙태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써 그는 낙태는 죄악으로 보고 결혼을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에 왜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도 결혼을 강행을 했느냐?를 회상을 하면서 그가 마음 속에 이미 결혼을 하기로 결정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라고 말을 했다. 그는 일편 단심으로 그가 선택한 가족을 끝까지 지켜려는 loyality 즉 믿음, 신의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한 결심으로 그는 7년 동안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을 했는데 이혼을 한 후에 전 부인이 그의 그러한 마음의 결심, 가족을 지키고 보호하려 헸단 그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서운해 했다.

 결혼 식 며칠 전에 아버지가 A씨에게 전화를 걸어서 A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했다. "만약에 네가 그 결혼을 강행 한다면 나는 너와 인연을 끊겠다. 그 결혼을 하면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이와 같은 협박 전화를 받고 나서 분기탱천한 A씨는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보복을 했다. "아버지가 나와 인연을 끊기 전에 내가 먼저 아버지와 인연을 끊겠습니다. 다시는 아버지와 관계를 하지 않겠습니." 이 말이 두사람 사이에 마지막 말이 되었다. 그 후에 7년 동안 A씨는 가족들 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님과는 전화 접촉이나 일체의 접촉을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세 번째 이벤트: A씨는 2012 1월 달에 부인에게 연극을 보고 싶다는 허락을 받아서 xxx 연극을 보고 오후 6시 경에 집에 돌아왔을 때 부인은 아무 말이 없이 불쾌한 표정으로 휴대폰과 가방을 챙기는 것을 보고 왜 그렇냐?로 물어 보았지만 부인을 삐져서 말이 없었다. 부인이 집을 나가겠다는 제스처임을 직감하고 그는 부인을 말리며 "내가 나가겠다"고 짐을 싸서 나온 이후에 그 이상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이 이혼으로 이어졌고 이혼의 요구에 부인을 완강히 반대를 했다. 그러나 A씨는 법정으로 소송으로 끌고 갔고 결국은 완화 기간(3개월 이후에) 합의 이혼으로 끝이났다. 그것이 5 29일에 이혼으로 서류상 정리가 되었다고 했다. 이혼 후에 3개월이 지나가면서 A씨는 부인과 동의로 7살된 딸을 1주일에 1번씩 만나면서 이번에는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부인이 그녀의 친정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 이사를 가서 자녀 문제를 돌봄을 받으려고 하자 이번에는 A씨가 전 부인이 친정 어머니 곁으로 가게 되면 다시는 전 부인과 자녀인 딸을 영구적으로 잃어 버릴 것이라고 두려워해서 이번에는 부인에게 3억정도 되는 아파트를 사 주겠으니 지금의 지역에(경기도 xxx 지역) 남아 있어라고 종용을 하고 A씨가 함께 새로 산 아파트에서 살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지금은 안식년으로 학교를 쉬고 있으니 내년 3월 달에 딸이 입학을 하면 그가 전적으로 1달 가량 딸의 초등학교 입학에 동행을 하겠으니 그렇게 해 달라고 애걸을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했다.

네 번째 이벤트: A씨는 이혼 후에 외로웠다. 그래서 특히한 곳을 찾게 되었다. A씨는 전화방, 대화방, 놀이방 이라는 여러 곳을 이야기를 하면서 소개를 했다. 전화방에 전화를 걸면 온갖 음담패설을 들어주는 곳으로 여기에는 전화 비용을 부담을 하는 곳이고 대화방이라는 곳은 여자와 일대 일로 만나서 직접 섹스를 제외한 키스나  몸을 만지는 것(유방, 음부를 포함)을 허용해주고 온갖 음담패설과 이야기를 들어주는 곳이라고 소개를 했다(그 때까지 치료자는 전화방이라는 말은 알고 있었으나  대화방이라는 곳을 모르고 있었음). 그가 대화방에 가서 어떤 아가씨를 소개를 받았다. 그녀는 A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A씨가 원하는 것은 직접 섹스를 제외한 모든 것을 허용하고 들어주었다. A씨는 그녀에게 "나와 결혼을 하면 어떻하겠니?"라고 청혼을 했고 그녀는 "내가 부채가 1200만원 정도 있는데 그것을 갚아주면 결혼을 생각해 보겠다" 고 했다. A씨는 당장 그 다음 날에 현금으로 1200만원을 손에 쥐어주었고 그 이후에 그녀는 종적을 감추었다. A씨는 사기를 당한 것을 알고 분개 했으나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 대화방 주인을 찾아가서 그녀의 신분을 요구했다. 대화방 주인에게 경찰에 신고해서 꽃 뱀으로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위협을 해서 그녀의 전화 번호를 알 게 되었고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에게 "꽃 뱀"으로 경찰에 처 넣겠다고 했다. 그녀는 돈을 다 써 버렸으니 돈을 돌려줄 수가 없으니 A씨가 원하는 대화방에서 놀이에 응하겠다고 응수를 했다. 그는 그녀에게 당신의 잘못도 있고 내 잘못도 있으니 반반으로 6백만원은 내 잘못이고 6백만원은 당신의 잘못으로 6백원의 서비스를 해달라고 했고 그녀는 1회에 60만원씩 10회에 걸쳐서 직접 섹스를 제외한 서비스를 하기로 합의하고 그녀가 예쁘게 디자인해서 만든 회수 표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위의 4가지 이벤트에서 A씨의 대인관계 패턴을 분석해 낼 수 있었다. 먼저 아버지의 대인관계 패턴을 분석해 보자. 아버지의 대인관계 패턴을 아들인 A씨가 빼 닮아 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첫 번째 이벤트에서 아들에게 두 개중에 한 개의 선택을 강요했다. 교회를 선택하겠느냐? 혹은 가족을 선택하겠느냐? 두 번째 이벤트에서 결혼을 선택하겠느냐? 가족을 선택하겠느냐? 이것은 아들에게 아버지의 생각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맹종, 복종을 강요하고 있는 이분법적인 발상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생각과 느낌과 상상과 지각을 가진 독립된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물건처럼 아버지의 말에 복종을 하는 기계적인 로봇과 같은 생각이 없는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사람으로 관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들을 자치심을 가진 독립된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꼭두 각시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부모님의 말에 복종을 하는 인간으로 대인관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말에 복종을 하면 착한 사람이고 거부를 하거나 갈등을 일으키면 반항적인 사람으로 아버지에게 도전을 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A씨는 세 번째 이벤트와 네 번째 이벤트에서 아버지와 같은 대인관계 패턴을 부인과 그 매춘 여성에게서 대풀이를 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A씨가 부인에게 이혼을 강압하고 그리고 이혼 후에는 부인에게 재결합을 강요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다. A씨 역시 자신의 생각대로 상대가 딸아오지 않으면 분노가 폭발하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강압하고 있었다. 부인에게 A씨가 주인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고 부인은 A씨의 복종적 역할을 하고 있고 그리고 이혼 후에는 부인이 아버지처럼 주인 역할을 하고 있고 A씨가 이번에는 노여의 역할 즉 아버지 관계에서 아들인 A씨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혼 후에는 주인과 노예의 역할이 거꾸 되어 부인이 주인 역할을 하고 있고 A씨가 노예 역할을 하고 있었다. A씨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아버지의 명령적인 태도 무엇이든지 아버지의 생각에 따라야 한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그 자신이 빼 닮아서 부인과 매춘 여성에게 똑 같이 하고 있는 것임을 그리고 이 역할이 어떤 시점에서는 거꾸로 바뀌어서 반대로 A씨가 노예 역할로 아버지와 아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치료자가 지적을 했을 때 그는 깨달음으로 무릎을 쳤다.

 치료자는 A씨에게 다음과 같은 분석의 결과를 이야기를 했다. "손님(치료자는 환자들을 손님으로 부른다)의 대인관계를 잘 보세요, 손님은 "주인과 노예 관계"를 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는 철학자 헤겔이 이미 200년 전에 발표한 글에서 처음으로 대인관계의 핵심을 지적한 것에 학자들이 관심을 끌 게 된 것입니다. 노예는 권리나 자기 주장이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복종을 해야합니. 부부 관계나 대인관계는 주인과 노예 관계가 아닙니다. 특별히 연인 관계나 부부 관계 그리고 동료들과 관계는 주인과 노예 관계가 아니고 수평적인 관계평등한 관계이고 대등한 관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인관계 특히 부부 관계, 연인 관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상대에게 비위를 맞추는 관계로 상대방이 하자는 관계로 상대방이 원하는 관계, 비위를 맞추고, 상대방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관계가 바로 주인과 노예 관계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게 되면 관계가 부드럽고 좋아지고 갈등이 없는 관계로 보이지만 이것을 잘못된 관계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치료자의 이러한 분석에 A씨는 깜짝 놀라면서 자신의 대인 관계가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 있고 부인과 그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그것이 반복되고 그리고 그 관계가 거꾸로 되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관계가 좋은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에는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지금은 그가 외톨이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는 부인이 그에게 최근에 한 말을 인용을 했다. "당신이 처음에 결혼을 하지고 해써 결혼을 했고 7년 동안 살면서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대로 비위, 욕구를 맞추어주지 않으면 폭발하고 삐지고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것들이 여러 번 있었고 그리고 이제 7년 후에는 이혼을 하자고 해서 이혼을 했고 그리고 이번에는 재 결합을 하자고`에게 결혼하자고``했고 그리고 내가 빚이 1200만원이라고 하자 그것을 갚아주겠다고 1200만원을 내게 주었고 그리고 당신이 그만 만나자고 해서 내가 그만 만났습니다." 치료자는 A씨에게 물어 보았다. 꽃뱀 여성에게 A씨가 그만 만나자고 했느냐?라는 물음에 그는 지겨워서 "그만 만나자"라고 했다고 시인을 했다.

 여기에서 A씨와 부모님 특별히 아버지와 A씨의 관계가 주종 관계 즉 주인과 노예 관계였다는 것이 분석되어졌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 하는 A씨에게 사랑을 주면서 복종을 강요 했다. 아버지의 말을 들는 착한 아들로 공부를 잘 하는 아들로 이웃 사람들과 친척들에게 자랑을 했고 그리고 미국 유학 학비를 말없이 대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성인이 된 아들에게 유아기 시절의 관계를 똑 같이 강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이 아들의 교회에 예배에 참석과 결혼에서 아버지에게 복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인 A씨 역시 그가 부인과 7년 동안의 관계에서 똑 같은 관계를 반복해 온 것이었다. 결국 결혼을 파경으로 깨어졌고 이번에는 A씨의 요구로 재 결합 쪽으로 흘러가자 이번에는 부인이 완강하게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꽃뱀과의 관계에서도 그 꽃뱀이하는 말이 바로 A씨 자신의 대인관계 스타일을 그대로 지적을 한 것이 아닌가? "당신이 나에게 결혼을 하지고 했고 당신에 내 빚을 1200만원을 갚아주었고 그리고 이번에는 당신이 그만 만나자고 한 것이 아닌가?" 이 말에 A씨는 할 말이 없었고 그녀와 관계에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A씨의 문제는 대인관계 결함을 한가지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A씨의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그의 문제는 계속해서 분석되어지고 있고 그리고 한가지씩 그 자아 결함들이 밝혀질 것이고 치료는 앞으로 그 결함을 수정을 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아래의 치료 회기는 A씨가 10 회기 (총 분석 치료 20 시간)에서 그의 문제점이 분석이되어진 것이다. 그의 폭력의 대물임이 분석되어졌다. 그는 조용할 때는 의사 소통이 잘 되지만 화를 내면 즉 감정에 걸리면 폭발하거나 벙어리가 되어 억누르거나 둘 중에 하나를, 그리고 친밀 관계를 할 수 없었다.

A씨는 한 치료 회기에서 그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을 했다.

 "선생님 저는 미국 L.A.에서 최고의 명문 사립 대학인 xxx 대학에서 7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석사, 박사 과정을 맞치고 학위를 따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xxx 대학 부교수가 되었습니다. 내가 인물로 보나 신체적인 체격으로 보나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못나 보이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 그리고 부인과 딸과 관계는 모두 끊어져서 지금 나는 "은둔형 외톨이"(그의 표현)입니다. 내 마음 속에는 찬 바람만 불고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이 텅 비어 있고 외롭고 쓸쓸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살아갈 이유를 잃어 버렸습니다.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지고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잃어 버렸습니다. 죽고 싶어집니다. 내가 죽고 싶어지는 생각들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오직 공부 하나만으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로써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나는 외롭습니다. 지금 나는 집에서 나와서 캠프장에서 혼자서 텐트를 치고 살고 있습니다. 나는 부인과 딸과 같이 살고 있던 집을 나와서 혼자서 생활을 한지가 8개월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 동안 원 룸에서 살다가 몇 주일 전에 집을 나왔습니다. 야영지에 텐트를 치고 조용하게 혼자서 살고 있습니. 내가 살고 있던 원룸은 내가 어린 시절에 새로운 아파트에 이사를 해서 살 때 아버지,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시고 고등학교에 다니던 형님이 공부에 흥미가 없어서 불량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공부를 잘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해 온 나를 때리고 괴롭히기 시작한 시절이 바로 xxx에서 유명세를 탔던 그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였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돈을 꽤 모아서 그 아파트를 샀었습니다. 그 때 아파트가 유행을 하는 초반기 시절이었고 그 아파트는 xxx에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 아파트에서 형님은 문을 잠그고 나를 괴롭히고 폭력으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울고 도움을 요청해도 아파트는 밀패되어 있어서 아무도 구원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내가 거주를 하던 그 원 룸은 그 아파트를 닮아서 그 원룸이 싫어져서 집을 나와서 야영장에 텐트를 치고 혼자서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하게 보내고 있습니. 주 중에는 사람들이 없어서 조용해서 좋습니다. 그러나 주말에는 사람들이 붐빕니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싫어졌습니다. 선생님! 내 마음 속에는 공허하고 찬 바람만 붑니다. 허무하고 쓸쓸 합니다."

 A씨의 현재의 심정을 잘 표현을 한 말이었다. 그는 그의 말대로 "은둔형 외톨이"라고 그의 현재의 삶을 표현을 했다. 그가 은둔형으로 가족과 관계를 끊고 살아온 이유 중에 한가지는 그는 내면 속에 엄청난 분노, 적대 감정을 쌓아 놓고 있고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피해왔다고 했다. 아버지, 형님, 어머니를 만나는 것을 극구 7년 동안 피한 이유는 그가 그들을 만나면 칼로 찔러 죽일 것 같아서 그들을 만나기를 피해왔다고 했다. 그는 그의 내면에 쌓인 그의 분노, 적대 감정, 미움 등을 알고 있어서 그가 가족들을 만나면 그 감정이 폭발할 것 같아서 그것이 두려워서 그 자신이 두려워서 그는 가족들을 외면해서 살아 왔다고 했다. 자아 속에 갇히 분노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은둔형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는 조용해서 감정이 가라앉아 있을 때는 소통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고 솔찍하게 자신의 문제점들을 이야기를 잘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감정에 걸리면 폭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억압, 억제로 말이 없는 사람으로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는 사람으로 분석이 되어졌다. 그것을 입증하는 여러 가지 증거들은 다음과 같은 것에서 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초등학교 3학년, 4학년 때부터 형님에게 얻어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들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직장에서 돌아와서 A씨의 모습을 보고 나서도 형님의 폭력에 대해서 아무런 제제 조치도 하지 않았다. 그냥 모르는체 했다. 더 붙여서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한번도 형님으로부터 폭력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하소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학교 친구들에게도 형님 한데서 얻어 맞는다는 사실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묻는 치료자에게 그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도 부모님은 뽀쪽한 대책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모님은 형님이 동생을 때린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동생의 얼굴 신체의 폭력의 흔적을 보고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부모님을 눈을 감아 버렸고 모르는체 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가 7년 동안 부모님과 형님 그리고 누나와도 관계를 단절한 이유 중에 또 하나의 이유는 부모님과 누님이 그의 폭력을 무시하고 외면한 것에 대한 분노라고 이야기를 했다.

 두 번째 에피소드: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형님과 갈등으로 형님이 그를 때리려고 하자 그가 형님에게 대들면서 "때리려면 때려 봐!"라고 대들자 형님은 A씨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고 A씨는 이빨이 4개가 부러졌다. 이것을 알고 아버지가 A씨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아버지는 이후에 형님에게 야단을 치거나 처벌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세 번째 에피소드: 그가 결혼식에서 형님으로부터 당한 에피소드는 이미 앞에서 이야기를 소상하게 했다. 결혼식 며칠 전에 아버지는 A씨에게 전화로써 "네가 결혼을 하면 나와 인연은 끝난다. 가족이냐? 결혼이냐?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라는 말에 A씨는 "아버지가 나를 인연을 끊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인연을 먼저 끊겠습니다."라고 해서 선수를 쳤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복수를 한 것이었다. 그는 말로써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A씨는 직접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말로써 언어 폭력을 쓴다는 것이 분석 되었다. 말로써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이다. 이것은 부인에게도 화가 나면 쌍욕을 하는 것에서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분노에 치를 떨면서 큰 아들에게 하소연을 했고(A씨의 추측) 큰 아들인 형님은 아버지의 복심을 읽고 결혼식 날에 갱판을 놓은 것이라고 그가 설명을 했다. 형님은 아버지가 1000억대의 돈을 가진 것을 알고 아버지의 유산에 눈독을 드리고 있고 그래서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려 했고 아버지의 환심을 산 것이라고 그는 해석을 더 붙였다.

 위의 세 개의 에피소드를 분석해 보자. 그는 대학 시절에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보았다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형님으로부터 얻어 맞고 있다는 폭력의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형제 간에 사소한 폭력은 흔히 있는 것이 아니냐 그것이 대수냐?라고 대수롭지 않는 듯이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더 이상 따지거나 물어보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말에 더 붙여서 "나는 어렸을 때 내 형님으로부터(둘 째 형님--A씨의 둘 째 큰 아버지는 조폭, 강패 두목으로 동생인 아버지를 폭력으로 행사했다) 나는 가죽 혁대로 늘 얻어 맞았는데 네가 형님으로 몇 차례 주먹으로 얻어 맞은 것이 무엇이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라는 아버지의 말에 대경실색으로 말을 잃고 마음 속에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것이 두 번째,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버지는 형님에게 별 다른 처벌을 가하지 않았던 것이 밝혀진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형님으로부터 구타, 폭력으로 얼룩진 어린시절의 경험 때문에 아버지 역시 그의 큰 아들(삐뚤어져서 공부를 팽개치고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려서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함)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그리고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를 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폭력적인 장면과 형님으로부터 폭력에 시달리면서 A씨는 친구들에게 그리고 부모님에게 절대로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치료자가 그 이유를 물어 보았을 때 친구들에게 절대로 가족 이야기들을 하지 않았던 것은 다른 친구들이 형제 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폭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그것이 다른 친구들 한데서도 있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러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부모님이 그가 형님으로부터 얻어 맞은 폭력을 몰라서 무시한 것이아니고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하고 별다른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던 것을 예를 들었다.

 A씨는 아버지가 형님과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늘 보아왔고 그것이 다른 가족들 한데서도 일어나고 있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원래 인간들을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었다. 이것이 A씨에게 상처들이 그의 삶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A씨는 모르고 있었다. A씨는 폭력에 반항을 하거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폭력에 맞서거나 폭력을 피할 대책이나 폭력에서 벗어날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폭력에 그대로 적응해서 살아 남은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를 보호를 해주어야 할 부모님이나 가족들이(4살 위의 누나) 그를 보호해 주지 못하고 폭력에 노출을 그대로 무시하고 묵인하고 방관해 버렸기 때문에 그는 가족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 즉 폭력에 대처하는 방안을 찾지 못한 것이다. 폭력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폭력을 당하면 그냥 폭력에 부응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대로 주저 앉아서 폭력을 당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가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알렸다면 친구나 선생님으로부터 위로와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의 분노를 다스리고 분노를 방출할 수 있었다면 대인관계가 바르게 이어졌을 것이고 친밀관계를 얻어서 가족 안에서 불만족한 부분을 친구들로부터 해소하는 탈출구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A씨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대부분의 우리나라의 전통 유교식 교육에서 아버지의 권력이 절대적이어서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폭력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호소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우리 사회에서 폭력은 경찰에 신고를 하고 부부 문제에서도 폭력적인 것은 경찰에 신고를 해서 경찰이 접근 금지를 내리거나 쉼터와 같은 곳이 생겨나서 폭력으로부터 부인들과 자녀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친구, 이웃, 경찰에게 알리고 보호를 요청해야 한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치료자는 미국에서 10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미국 사회에서는 폭력을 어떻게 대처하고 대응해 나가거 있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있는지 A씨에게 물어 보았다. A씨는 미국에서 7년 동안 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에 주변의 상황을 보고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물어 보았다. 그는 미국의 어린이들이 폭력을 당한 신체적 흔적들 얼굴이나 몸에 멍이 들거나 신체의 체벌 흔적을 발견했을 때는 교사나 의사는 그 사실을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고 만약에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으면 교사 자격증 박탈과 의사 면허증 박탈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A씨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폭력을 당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폭력에 대응하는 방어는 오로지 그래도 폭력을 당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고 머리 속에 입력이 되어 있다는 것을 치료자가 지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성인이 되어서 분노하거나 갈등이 생기면 폭발하거나 혹은 참고 무시하고 견디는 것으로 대응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갈등적인 관계, 분노에 연결이 되면 폭력으로 대응하거나 아니면 참고 무시하고 대응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해 나가는 것이 그의 감정 처리, 갈등 관계의 대응 방식인 것으로 나타났다.

 치료자는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폭력적인 상황에 마주치면 그대로 주저 앉아서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참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부모의 갈등 해결 방식, 분노 폭발 방식,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을 그대로 A씨가 배워서 어른이 되어서 지금은 부인과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반복하고 있음을 지적을 했다.

 치료자는 A씨가 폭력에 노출되었을 때 그것을 참고 저항을 하지 않고 대응 방법을 모색하지 않고 해결 방안을 찾지 않는 것을 최근에 심리학에서 실험으로 밝혀진 "학습된 무기력" "배운 절망"의 예로써 설명을 했다.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마핀 셀리그만(Martin Seligman) 박사가 실험실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개를 철장 속에 가두어 두고 철장 안에 전기 쇼크를 주면서 개의 반응행동을 관찰을 했다. 한 마리의 개에게는 입구를 막아서 탈출 할 수 없도록 한 후에 전기 쇼크를 주었다. 다른 한 마리의 개에게는 입구에 문을 감그지 않고 그냥 닫아 놓았기 때문에 개가 문을 박차고 뛰쳐나갈 수 있도록 한 후에 전기 쇼크를 주었다. 첫 번재 문을 잠가 놓은 개는 전기 쇼크를 받았을 때 뛰쳐 나가기 위해서 문을 열려고 부디치고 발버둥을 쳐 보았으나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대로 주저 앉아서 전기 쇼크를 받았다. 이후에 계속해서 전기 쇼크를 주었을 때 그 개는 더 이상 문을 박차고 나갈 시도를 하지 않았다. 문의 잠그지 않고 그냥 닫아 놓았을 때에도 전기 쇼크를 주었을 때 그 개는 더 이상 문을 열고 나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 두 번째 개는 전기 쇼크를 받았을 때 문을 박차고 달아났다. 이후에 그 개는 전기 쇼크가 올 때 마다 문을 박차고 도망을 갔다. 이 두 개의 실험으로부터 셀리그만(Seligan) 박사는 어린 시절부터 문제 해결력을 배우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 문제에 부딪치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 문제에 복종해서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으로 밝혀내면서 이것을 "배운 무기력함" "절망을 배운다" "학습된 무기력" learned helplessness"라고 이름을 붙였다.

 치료자는 이러한 예를 들어서 A씨가 어린 시절부터 폭력에 노출되어서 그대로 폭력을 답습하는 것을 배운 것을 지적을 했다. 그는 부모가 폭력이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갈등이나 폭력에 직면을 하면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무인하고 무시하고 참거나 억제해서 반응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분석을 했을 때 A씨는 시인을 했다. 그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그의 부인과 딸과 함께 가족들이 승용차를 타고 에버랜드에 가면서 그의 마음 속에서 과거에 부모님과의 관계 때문에 화가나고 분노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버랜드에 도착을 했을 때 갑자기 부인이 노발대발하면서 "무엇 때문에 승용차를 타고 2시간 동안 오면서 한마디 말도 없느냐?"라고 분노해서 승용차 문을 꽝 닫고 나갈 때 그는 아무 말고 하지 못하고 멍 하니 그대로 참고 있었다 라는 에피소드를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자신보다 강한 사람들에게는 분노하거나 갈등이 생기면 대응을 하지 않고 참는다고 했다.그러나 자신보다 약자들 즉 부인이나 딸에게는 분노가 자주 폭발한다고 털어 놓았다. 그의 부인은 A씨와 결혼 후에 7년 동안 A씨의 주장이나 생각에 반대를 하거나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폭발을 해서 매사에 A씨에게 신경을 쓰고 그에게 복종적이 되었다고 털어 놓았다. A씨는 이것을 인정을 했다. 그리고 남편과 가족들이 외출이나 나들이를 하면 다른 사람들과 조금한 갈등이 있어서 시비를 걸고 폭력으로 맞서려고 해서 부인은 남편과 외출을 할 때마다 가슴을 조인다고 털어 놓았다. A씨는 치료자의 이러한 분석에 그의 관계 스타일이 갈등이 생기면 피해 버리거나 관계를 끊어 버리거나 아니면 폭발하는 것을 인정을 했다.

 네 번째 에피소드: 그가 미국 유학 시절에 한국 유학생인 A양과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평소에는 갈등이 없을 때는 두 사람이 만나서 같이 여행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해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3개월 쯤 지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A양이 A씨에게 "왜 그러느냐?" 대화로써 풀자면서 이야기를 하자로 했을 때 그는 필요 없다면서 A양과 관계를 단절하고 더 이상 A양을 만나지 않고 두 사람 관계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고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 그가 xxx 대학 정신과 과장인 xxx 박사로부터 치료를 1년 정도 받았을 때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나가는 불 특정 다수(그의 표현)들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마스크를 하고 각목을 가지고 다니면서 "어느 놈이든지 걸리면 때려 죽이겠"는 심정으로 화풀이 대상을 찾으면서 지하철을 탔을 때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해다녔다고 털어 놓았다. 그의 눈에서 내 뿜는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을 보고 더욱 더 분노했다고 했다. 이것을 알 게 된 그 신경 정신과 과장님은 전보다 강한 약물을 써서 그가 파김치가 되도록 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 시점에서 그 신경 정신과 과장님은 그에게 입원 치료를 권유했으나 그가 거절을 했다고 했다.

 A씨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자주 다투었고 아버지가 자주 어머니를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아 오면서 갈등이 생기면 부모님이 대화를 통해서 서로 해결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고로 그는 대인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관계를 피하거나 끊어 버리는 것으로 관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을 하자 그는 그것을 인정을 했다. 그래서 그는 친구가 없었고 지금도 친한 친구가 없다고 했다. 가족 관계나 친구 관계나 대인 관계에서 갈등이 없는 관계는 없다는 것을 지적을 하면서 A씨는 지금까지 잘못 배운 대인관계 기능을 치료자 한데서 새로 배워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그러한 자신이 변화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이 고쳐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그가 7년 동안이나 심리치료를 해 왔지만 변화된 것은 별로 없다면서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어질 수 있는지를 물어 왔다. 치료자는 심리치료는 천차만별로써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심리치료 분야가 초보 단계로 발달이되지 않았음을 지적을 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심리치료 분야가 잘 발달이 되어 다양한 심리치료 기법과 심리치료 이론들이 잘 발달해서 성격장애, 인격 장애들을 성공적으로 치료를 하고 있다고 소개를 하면서 A씨에게 그가 7년 동안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32시간의 분석에서 치료자가 분석해서 밝혀낸 것들을 전임 심리치료사 한데서 분석되어 밝혀냈었는지?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그는 심리치료는 그냥 환자와 치료사가 서로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만 알고 그냥 자신의 이야기만 했지 이러한 분석이 이루어진 적도 없고 그러한 자신의 결함은 치료자에게 분석을 받으면서 알 게 되었다고 했다.

 A씨의 내면에 쌓인 부모님과 형님, 누나에게 대한 분노는 엄청난 것임을 치료자가 시적을 했을 때 A씨 자신도 그것을 시인을 하면서 그것이 해결될 수 있겠는지?를 물어 왔다. 치료자는 A씨에게 내면의 심리적인 자아()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 내가 태어나서 경험한 것이 내 자아 이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자아는 나이보다 우수하게 성숙을 해서 잘 자라났으나 감정을 처리하는 자아, 관계가 갈등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자아, 친밀감을 형성해 나가는 자아, 자신의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는 자아는 유아기 상태로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 한 마디로 성장이 중지되어 있어서 그 부분의 자아를 다시 발달시키는 것이 심리치료의 핵심임을 지적해 주었다.

 치료자는 앞으로 치료는 지금까지 분석되어진 것들을 다시 바로 잡고 새로 배우고 결함을 고쳐가는 과정임을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을 뚫고나갈 강력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

 A씨는 이제 희망이 보인다고 기뻐했다. 당장 이라고 형님에게 찾아가서 결판을 낼 자신감이 생긴다고 내일 이라고 당장 형님을 찾아갈 수 있다고 했다. 치료자는 아직까지 내 자아가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고 대인관계 갈등을 풀어나갈 자아가 성장을 할 때까지는 형님과 부모님에게 찾아가지 말고 내 자신의 자아의 성장에 몰두해야 함을 강조했다.

여섯 번째는 치료자 한데서 13년 동안 심리치료를 받은 한 30대 후반의 젊은이 F의 사례로써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있던 중에 서점에서 치료자가 쓴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1999)이라는 책을 읽고 마지막 희망으로 치료자를 찾은 젊은이였다. 그는 대학졸업 후에 에니메이션 회사에 6개월간 다녔으나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직장을 잃고 그가 모아둔 약 350원의 돈을 그냥 두고 자살을 하려고 했을 때 돈도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가? 라는 부모님이 비아냥에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돈으로 심리치료를 받아보고 나서 결정을 하기로 결심하고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다고 토로 했다.

그의 분석과정에서 F씨와 어머니와 관계가 언어 폭력적이라는 것이 분석되어졌다. 여기에서는 폭력의 대물림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F씨의 가정환경: F씨의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정년 퇴직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과거에 교사로 근무하다가 IMF시점에서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F씨는 장남으로 그리고 3명의 여동생이 있다. 3명의 여동생들은 모두 출가해서 자녀들을 출산하고 잘 살고 있다. 그러나 F씨는 어머니를 닮은 여성들에 대한 혐오감으로 혼자서 살고 있다. 2004년에 치료를 시작할 때 치료가 약 20시간 정도 지나가면서 가족들의 문제가 표면화 되면서 치료자가 F씨를 부모님 집에서 독립해서 나오게 했다. 부모님에게 원룸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하고 열악한 고시원에서 그가 원했던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도록 해서 13년 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가 치료 10년이 되는 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치료자를 찾아와서 이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의 말을 전해다.

부모님의 집을 나와서 독립을 한다고 해도 부모님과 형제들과 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를 복원하면서 자아가 정상적인 괘도로 진입해서 성장을 계속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정신분석 심리치료의 핵심이다.

F씨가 부모님 집을 명절 때 혹은 기제사 때 부모님이 생일 날에 방문하고 올 때 마다 F씨가 초반기에는 1주일 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부모님으로부터 특별히 엄마로부터 받은 언어 폭력 때문이었다.

치료가 1년을 넘어가면서 어머니와 F씨의 관계에서 두 사람의 대화 관계를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하는 말을 항상 고장 난 레코드처럼 비슷했다.

너는 병든 병아리 같다, 그렇게 허약해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너는 돈 먹는 기계이다, 너 때문에 집안 기둥이(적금 통장) 날아갔다”(F씨가 키가 너무 작아서 초등학교 1학년 때 99cm,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게 되었다 그 주사는 보험처리가 안 된다), “너는 돈을 벌려고 하지 않고 쓰려고 만 한”, “다른 사람들은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으로 고학을 해서 돈을 벌여서 부모님을 봉양하는데 너는 돈을 쓸 궁리만 하고 있다.” “네가 너를 돌보아주지 않으면 너는 고아원에 가야 할 것이다.” “너는 부모님이 먹여주는 밥값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엄마의 친구들의 자식들은 모두 돈을 벌어서 엄마에게 선물을 사주는데 너는 엄마가 키워준 고마움을 모른다.”“부모님 말을 언제나 옳다, 옛날부터 부모님 말을 들으면 자다가 떡이 생긴다고 하지 않았느냐?”

F군의 어머니는 3명의 여동생에게는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았다. F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혹시 어머니가 계모가 아닌가? 라고 호적 등본을 떼어 보았을 때 어머니는 계모가 아닌 것을 확인을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딸들에게는 그러한 표현을 쓰지 않고 딸들이 하는 것은 100% 수용해주었다 그러나 F군이 하는 것에는 모두가 브레이크가 걸렸다.

너는 나에게 돈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 다시는 나에게 돈을 요구하지 말”(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F씨는 감기 몸살을 달고 살았기 때문에 학교에 출석보다 결석이 많았다고 회고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점에서 감기 때문에 엄마에게 약을 사달라고 했을 때 어머니가 F씨에게 한 말이었다.) 그 이후에 F씨는 절대로 엄마에게 돈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위와 같은 분석을 하면서 치료 초반기에 치료자는 어머니와 오빠(외갓집의 장남)와 관계가 나뻐서 지금까지도 서로 관계 단절로 살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의 친가는 오빠가 장남이고 그리고 3명이 딸들이 있었다. 큰 이모(병사했음), 둘 째 이모(교장으로 은퇴), 어머니(교사로 명퇴) 그리고 셋째 이몬(전업주부)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다. 특별이 F씨가 외삼촌(큰 오빠)를 닮았다고 엄마가 F씨를 싫어한다고 했다. 엄마는 학교시절에 엄마의 어머니(외할머니가) 오빠의 도시락에는 달걀을 넣어주면서 엄마의 도시락에는 김치뿐이었다라고 엄마를 미워했다고 했다. 치료자는 이것을 딸 3명에 아들 1명으로 엄마가 아들을 편애하는 오디스프 콤플렉스도 해석을 했다. 엄마의 어머니(외할머니가) 아들 선호 때문에 엄마가 무시된 것에 대한 분노로 보았다. 그런데 치료가 수년을 지나가면서 한결 같은 분석의 내용은 이모들은 완전히 엄마와 성격이 다르다는 F씨의 분석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둘 째 이모는 F씨에게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화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막내 이모는 F씨에게 어린시절에 선물을 많이 사주었다고 했다. F씨가 중학교 입학 때 막내 이모가 사준 만년필을 고장 낸 것을 두고 엄마가 호되게 야단친 것을 기억을 했다. 그런데 유독 엄마는 3명의 딸들에 대해서는 다정한데 한 명의 아들인 F씨에게는 냉담하고 처벌적이고 비판적이라고 했다.

특이한 것은 F씨가 초등학교 2학년 때 7, 5살 된 여동생 2명을 불러 놓고 너의 오빠는 나중에 혼자 살기가 어려울 것이니 너희들이 도와주어야 한다라고 여러 번 훈시를 한 것 때문에 F씨가 거지공포증에 걸려서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토로 했다. 왜 그말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는가? 라고 물었을 때 F씨는 자신이 어른이 되면 거지가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거지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유심히 보면서 동냥을 어떻게 얻는가?를 관찰하면서 고민을 했다고 털어 놓았다. 실제로 F씨의 어린시절은 어머니가 맞벌이고 교사생활을 했기 때에 할머니 손에서 성장을 했다고 털어 놓았다. 밤에 잠을 잘 때 할머니와 함께 잠을 자면서 할머니에게 거지공포증을 이야기를 했을 때 할머니는 그러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F씨가 막내 이모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엄마와 함께 타고 나면서 두 사람이 하는 대화를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엄마가 이모에게 네가 너를 업고 키웠다. 네가 내 등에 업혀서 내 머리카락을 얼마나 잡아 당기고 뽑았는지? 알고 있느냐? 네가 너를 키우면서 골병이 들었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이모가 그 말 한번 더 들으면 100번이다 이제 그만해라라고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치료실에서 이야기를 한 것을 치료자가 기억을 했다.

그 다음에 F씨가 대학 졸업 때 앨범 사진을 찍기 위해서 양복으로 정장을 하고 학교에 가려고 거울 앞에 서 있는데 첫 째 여동생이 오빠를 보고 하는 말이 오빠는 첫째 외삼촌과 붕어빵이다?”라는 말에 엄마가 맞장구를 치면서 그래 두 사람이 똑 같다, 붕어빵이다라고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치료자는 한가지 씩 증가가 수집 되면서 F군의 엄마가 계모가 아닌 것은 호적에서 확인 되었기 때문에 엄마는 F군의 아들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엄마가 F군에게 하는 말들은 친 엄마가 아들에게 하는 말들이 아니고 계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들의 특징이다 라는 것은 분석에서 찾아내면서 엄마가 혹시 계모 밑에서 성장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게 되었다. 증거로써 F군의 어머니는 3명의 딸들에게는 그러한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들이 어머니의 오빠와 닮았다는 것에 대한 오빠의 미움에 아들 F군에게 방향이 바뀌어 흘러간다 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는 엄마와 아빠가 F군이 4살 시점에서 부부 싸움으로 서로 1주일간 말을 하지 않게 되자 할머니가 사돈에게(엄마의 친정엄마) 전화를 해서 부부싸움으로 이혼하게 되었으니 사돈이 와서 딸을 달래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F군이 엿듣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엄마의 친정의 전화 번호를 알고 F군에게 다이얼을 돌려달라고 해서 F군이 전화의 번호를 돌려주었고 그리고 대화의 내용을 듣게 된 것이었다. 몇 시간 후에 엄마의 친정 엄마가 사돈집에 찾아오게 되었다. F씨가 그 때 그 외할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을 했다. 아주 멋진 귀부인의 차림으로 쏠(값비싼 여우 목소리)에 고급 옷을 입고 치장을 한 외할머니가 대문의 도어벨을 울리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달려 나가서 친정 엄마와 대판 싸우고 되돌려 보냈다 라는 것을F씨가 회상을 했다. 친할머니가 화를 내면서 오래간 만에 사돈댁을 방문한 사돈을 왜 차 한잔 대접하지 않고 되돌려 보냈는가? 라는 질문에 엄마는 왜 쓸데없이 친정에 연락을 했는가? 라고 화를 내 것을 회상을 했다. 어머니는 친정 어머니를 한번도 F군의 집에 초대를 한 적이 기억이 없다고 했다.

여기에서 추론이 만들어졌다. 틀림없이 외할머니는 계모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6-7세의 시점에서(추론) 어머니의 아버지(외할아버지)가 외도로 엄마를 출산해서 그녀가 키우다가 엄마를 아버지 품으로 돌려보냈고 엄마는 계모인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나면서 엄마와 계모 한데서 받은 학대와 수모, 모욕적인 언어 패턴이 바로 아들인 F씨에게 대화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증거 1: F씨가 초등학교 6 학년의 시점에서 만화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해서 돈을 달라고 했을 때 화를 내면서 동전을 방바닥에 던지면서 너는 돈을 벌려고 하지 않고 쓰려고만 하는가?” 라고 화를 낸 것을 기역을 했다..

증거 2: 이모들이 만나서 회식을 하면서 그들이 하는 말을 엿듣게 된 것이었다. 큰 이모가 너는 왜 한번 찾아보려고 하지 않는가? 그래도 너를 낳아준 부모가 아닌가?라고 말을 했을 때 어머니가 나를 버린 사람인데 왜 내가 찾아야 하는가?라고 말을 한 것을 F씨가 회상을 했다.

치료자는 F씨를 10년 이상 분석을 하면서 지금까지 F씨가 엄마와 아빠로부터 받은 수치심과 모욕, 굴욕의 언어폭력들이 가슴에 박혀있는 그 대못들을 뽑아내는데 10년의 시간이 걸렀다. F씨의 유아기 시절부터 엄마의 불안을 F씨가 덮어쓰고 불안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심리신체 질환으로 신체적으로 병약했다는 것을 밝혀냈다(출석보다 결석이 많았다). 엄마는 아들 F씨를 데리고 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으나 신체적인 이상은 없었다. 고로 교회의 안수기도 혹은 무속인에게 천도제 그리고 점쟁이로부터 부적으로 썩은 명태를 싸서 장롱에 넣어두기도 했다. 온갖 방법으로도 효과가 없다 어머니는 포기를 했다. F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오줌싸개였다고 실토를 했다. 어머니는 포기하고 옷도 갈아 입히지 않았다. 학교 갈 때 오줌 싼 옷을 그대로 입고 갔다. F씨의 엄마의 이러한 언어 폭력에 치료를 받기 전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마디를 하면 10마디의 처벌이 따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치료의 과정에서 자아의 목소리를 내는 훈련과 그리고 자기 주장 훈련이 첨가되었다. 10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F씨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료가 8년의 시점에서 F씨의 몸무게가 8kg이 늘어나서 이번에는 엄마가 아들에게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농담을 했다. 혈압과 혈당은 정상으로 되돌아와서 주치의 의사 선생님이 놀랬다고 털어 놓았다. 건강이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F씨가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그림 그리기를 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긴장의 방출로 신체적인 긴장이 풀리고 불안에서 벗어났기 때문으로 보았다.

치료자 10년째 접어들면서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 문제가 표면으로 떠 올랐다. 아버지는 하루에 최고 탁주 2병을 마신다고 했다. 어머니가 여기에 치매를 걱정하면서 술을 못하게 막으면서 부부갈등이 심하게 된 것을 F씨의 1주일에 1 2시간의 분석 상담을 10년 동안 하면서 치료자가 잘 d라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너와나의 하나된 관계로 찰떡처럼 붙여서 자아의 심리적 공간의 부족으로 질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로부터 심리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술로써 자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40대까지 하루에 매일 최소한 탁주를 2병씩 퇴근 시간에 사와서 혼자서 마시다가 술이 떨어지면 F씨로 하여금 탁주 2병씩 사오게 했다. 이러한 습관이 지속되다가 중년기에 아버지가 종합검진으로 술과 담배가 건강에 위험하다는 의사의 경고를 받아들여서 10년 동안 금주와 금언을 유지하다가 정년 퇴직 후에 사무실을 10년 동안 운영하면서 잘 지탱해 왔지만 은퇴 이후에 밤에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술을 마시게 되면서 술이 과거의 반복으로 재발하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의 음주 때문에 어머니와 첫째 여동생이 함께 치료자의 2시간 컨설팅을 받게 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와나의 하나됨의 관계 때문에 지나치게 밀착으로 부부관계가 폭발할 위험 수위를 넘었으니 어머니가 심리치료를 받거나 혹은 아버지가 심리치료를 받든지 아니면 아버지를 알코올 중독 병원에 입원시키도록 했다. 여동생과 엄마는 아버지를 알코올 중독 병원에 입원을 시켰으냐 아버지의 반대로 결국은 2개월 만에 두 번씩이나 알코올 중독 병원 입원을 거부하고 병원의 프로그램에 참가를 거부하고 모든 병원의 지시, 명령에 반대해서 강제 퇴원을 당하게 만들었다.

치료자는 여기에서 아버지의 자아가 어머니의 강압에 그리고 알코올 중독 병원에서는 그 병원, 병원의 남자 간호사에 반발해서 집에서처럼 자아의 자치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예견을 해서 아버지가 심리치료를 받도록 했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일일이 간섭해서 아버지를 유치원 어린이처럼 일일이 간섭하고, 강압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반발로써 나는 어린이가 아니다 라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다(음주). 어머니는 F씨를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언어 폭력으로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렇게 20년 이상 성장한 F씨는 자아가 없다. F씨가 자아가 성장하지 않아서 엄마에게 의존해지면 질수록 F씨는 불안해진다 그리고 불안해지면 엄마의 간섭이 따라온다 엄마와 아들의 악순환은 계속되는 것이다.

고로 치료실에서 자아를 성장시키고 혼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독립심을 키우는 것이다. F씨의 권유로 아버지가 심리치료를 받겠다고 예약을 했다. 아버지는 스스로 그의 입을 통해서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강압을 해도 나는 절대로 내 의지를 굽힐 수 없다(아버지의 고집과 2병의 음주는 자아의 독립, 자아의 자치심을 위한 울음).

치료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심리적 공간을 만들지 않으면 결국 두 사람의 삶은 파괴될 것이다 라고 예견을 했다. F씨는 처음에 치료자의 분석을 80%만 신뢰한다고 했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 병원 입원 후에 아버지의 행동을 보고 치료자가 예견한 것을 100% 믿겠다고 했다. 집에서 어머니의 강압(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말라, 담배를 피우지 말라(아파트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고 난리법석)  여기에 알코올 중독 병원에 강제 입원(병원의 지시명령, 남자 간호사의 지시, 명령, 술 금지, 담배 압수)등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가 병원 입원 후에도 남자간호사와 병원에서 반복된다는 것을 지적을 했다).

사건이 드디어 터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길거리에게 넘어져서 4번째 구급차에 실려가서 응급실에서 머리에 몇 바늘을 꿰맨 것을 치료자가 F씨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탁주 2병을 사가지고 아파트로 들어오는 것을 어머니가 빼앗아서 계수대에 쏟아 버렸다. 화가 난 아버지가 다시 인근 마트에 가서 2병의 탁주를 사가지고 왔다 이번에도 어머니가 그것을 빼앗아서 계수대에(설거지 통)에 쏟아 부어버렸다. 화가머리 끝나지 난 아버지 밖으로 나가서 술을 퍼마시고 길거리에서 넘어져서 구급차에 실려서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뇌에 출혈로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응급수술 끝에 뇌 속에 고인 혈액을 빼 내기 위해서 수술한 결과 아버지는 똥과 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신생아처럼 변한 것이었다.

부모님은 노후를 위해서 10억의 자금을 모아두었다. 노후가 천국이 된 것이 아니고 지옥이 된 것이다. 몇 차례 수술을 통해서 아버지는 생명을 구했지만 말과 몸을 움직이는 것을 새로 배워야 하는 신생아가 된 것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오줌 똥을 받아낼 수 없기 때문에 24시간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서 몇 년 째 치료를 받아서 벌써 10억의 돈이 바닥이 나고 있다고 돈 걱정을 한다고 했다.

다시 어머니가 계모 밑에서 성장한 것이 이번 사건으로 확인이 된 것이었다. 아버지의 병원 입원으로 친지와 가족구성원들이 병문안을 오게 되면서 큰 이모와 F씨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모는 F씨에게 네가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효과가 있는가? 라고 물었고 F씨는 효과가 있어서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라고 말을 하면서 이모에게 질문이 있는데 심리치료사 선생님이 한번 물어 보라고 해서 질문을 합니다. 라고 했다. 이모의 허락을 얻어서 F씨가 나와 돌아가진 외할아버지(엄마의 아버지)와 많이 닮았습니까? 라고 물어 보았을 때(외삼촌과는 붕어빵) 이모는 얼굴보다 체격과 태도와 스타일이 꼭 빼어 닮았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기에서 F씨가 엄마와 외할머니 사이에 관계가 어떻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이모의 얼굴이 경직되면서 이모는 한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너의 엄마는 참 불행하게 자랐다라고 말을 했다. F씨는 더 이상 이모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계모 밑에서 성장한 것이 증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 보자, 엄마는 엄마의 아버지 즉 F씨의 외할아버지의 외도로 태어났고 그리고 그녀가 키우다가 엄마를 본처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다. 엄마의 아버지는 계모로부터 엄마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엄마의 아버지는 부인에게 미안해서 엄마를 계모로부터 보호해줄 수가 없었다, 그냥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분노, 미움, 적대감정을 무의식 속에 억압해서 아버지에게로 흘러가지 않고 아버지를 닮은 오빠와 원수지간 이 된 것이다. 오빠와 즉 외삼촌과 붕어빵인 아들 F군이 엄마의 아버지와 계모에 대한 분노가 방향이 바뀌어 흘러가게 된 것이었다.

치료자의 분석에 F씨는 감탄을 했다. 어떻게 지금까지 치료자의 분석이 그렇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치료자를 100% 신뢰를 한다고 했다. 치료자 역시 정신분석을 개척한 프로이트에게 그리고 수많은 정신분석가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경의를 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2년 전에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6개월 동안 받은 49세의 독신 미혼 여성 G씨의 이야기를 해 보자, 그녀의 남자 친구의 아버지가 조폭의 우두머리로 그 남자 친구에서 2년 동안 끌려 다니면서 언어 폭력을 당한 이후에 삶이 망가져버린 미모의 매력적인 여성의 사례이다,

G씨의 가족:  G양은 공무원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엄마 그리고 큰 언니는 미국 유학생과 결혼해서 미국에서 2년 후에 딸을 출산하고 조현병으로 귀국 후에 이혼으로 지금은 조현병으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두 번째가 49세의 미혼인 G씨 그리고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여동생 그리고 미국에서 살고 있는 미혼의 남동생이었다. 

G씨는 7개월 전부터 잠을 잘 수 없었 그리고 먹을 수가 없었다 먹으면 토해거나 설사로 나와버린다고 했다. 작은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지만 월세를 한 달에 45만원씩 내고 운명하지 못해서 문을 닫고 있다. 하루 종일 누워서 잠을 자려고 해도 기계 소리만 들리고 잠을 들 수 없다고 했다. 종합병원 정신과의 입원해서 1달 동안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1개월 전에 내과에 입원해서 1주일 동안 영양제 주사를 맞았다고 했다. 한의사에게 약물을 복용하고 있지만 효과가 전무라고 했다. G씨의 어머니의 친구가 딸의 이야기를 듣고 오빠의 한 친구가 미국에서 심리치료를 공부한 사람이 있다고는 말을 듣고 나서 오빠에게 이야기를 해서 G씨의 엄마가 치료자의 전화번호를 알고 전화를 통해서 2시간 컨설팅을 받아보도록 한 것이었다.

컨설팅: 치료자가 G씨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을 때 G씨는 하고 싶은 말이 없다고 했다. 이곳에 어머니가 가자고 해서 따라온 것이 전부이고 그리고 몇 일 동안 식사를 하지 못해서 에너지 고갈로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치료자는 2시간 컨설팅 비용을 지불했으니 고민이나 갈등이 있으면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G씨는 말이 없이 앉아 있었다.

치료자는 잠을 잘 수 없다 그리고 먹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 원인이 틀림없이 말을 하지 못하는 고민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했다. 이 때 G씨가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약속을 할 수 있겠느냐? 라고 했다. 치료자는 O.K. 하면서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G씨는 어머니가 모르게 지금 3000만원의 빚이 있는데 한 달에 250만원 정도의 이자가 나간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 빚을 지게 되었는가? 라고 물었을 때 G씨는 6년 전부터 소화가 잘 안돼서 한의원에서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효과가 좋았는데 작년 6월 달부터 효과가 없어서 다른 한의원들로 전전하면서 더 강한 약물들을 복용하면서 점점 더 효과가 떨어져서 한 달에 200만원 정도의 약물을 처방 받아서 먹지 않고 쌓아 놓았다고 했다. 왜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는가? 라고 물어보았을 때 어머니가 알게 되면 나는 맞아 죽을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현금으로 G양 자신이 치료 비용으로 2천만 원을 이미 지불하고 있는데 3천만 원이 있다면 기절할 것이라고 했다, G양은 사설 대부업체에서 몇 백만 원씩 대부를 받아서 이것을 돌려 막기를 하다가 돈이 점점 불어났다고 고백을 했다.

치료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심리치료를 한다고 해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어머니에게 치료자가 이야기를 해서 G씨가 다치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설득을 했다. 어차피 몇 개월 후면 이 문제가 터지게 되어 있으니 지금 치료자가 터뜨리는 것이 좋다고 했을 때 G씨가 O.K. 했다.

2시간이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G양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어머니에게 놀라지 말고 끝까지 치료자의 이야기를 듣게 하고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으니 어머니가 싫도록 화를 내거나 울어도 좋으니 딸을 처벌하지 말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딸이 지금 3천만 원의 빚이 있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노발대발해서 딸에게 비난을 퍼 붙기 시작했다. 선생님 들어보세요.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정신병원에 입원 1개월 그리고 내과의원에 입원 1주일 한의사 한데서 한약으로 수백만 원의 돈을 지출하면서 2천만 원이 날라갔습니다 3천만 원이 있다고 하니 날벼락입니다. 우리는 넉넉한 가정이 아닙니다. 남편은 4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암 치료한다고 돈을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 겨우 밥 먹고 지내는데 G 때문에 미칠지경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치료자는 싫도록 울게 했다. 그리고 조용하게 이야기를 했다. 3천만 원의 문제를 가지고 심리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다 고로 어머니가 셋째 딸과 넷째 아들에게 상의를 해서 G씨의 빚부터 갚아줄 것을 요청해서 3천만 원의 빚의 문제가 해결되면 심리치료를 받고 싶다고 생각이 들면 연락을 하라고 하면서 2시간 컨설팅을 끝냈다.

1달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 빚 문제를 해결되었으니 심리치료를 받게 하겠다고 연락이 왔고 1주일에 2시간씩 6개월의 심리치료가 시작되었다.

G씨의 문제를 다른 곳에서 여러 번 다루었으니 이곳에서는 언어 폭력만 다루기로 한다. G씨는 키가 180cm가 넘고 체격이 날씬하고 미인형으로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대학생 때 동료들의 유혹으로(지금 보니 계획적으로 접근) 종교에 가입해서 3개월의 수련을 거친 다음에 정식 교인이 되었다. 지역 대표가 되었고 담임 목사가 지역 순회를 왔을 때 대표로 같이 식사를 하는 영광을 얻게 되면서 그녀가 담임 목사의 주목을 받게 되어 그런데 얼마 후에 그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 분석의 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녀는 신이 은총을 받았다고 좋아했지만 서울에 올라가서 보니 자신과 비슷한 젊은 여성들이 10명이 넘었다는 것을 알고 사이비 종교라는 것을 눈치 채고 여기에서 빠져 나오는데 4년이 세월이 걸렸다고 회고를 했다. 교주라는 사람은 고발을 당해서 그 후에 재판을 받아서 10년 징역을 살고 치료가 시작된 20191월 달에 석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인터넷에서 뉴스를 통해서 석방). 이 사건은 G씨가 21세 때의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었다. 24세로 그 종교에서 빠져 나왔다 그래서 모든 것을 청산하고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로써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르친 고교생이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서 수능 후에 그녀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한다고 해서 그 학생과 만나기 위해서 xx 대학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핸섬한 청바지의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유창한 달변으로 같이 차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G씨는 선약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거부했다. 얼마 후에 그 학생을 만나고 나서 다시 그 청년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그 학생의 동의를 얻어서 3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게 되었다. 남자 A 씨는 26세로 그녀보다 2살 많은 청년으로 SKY 대학 체육학과에 다닌다고 학교 마크를 달고 있었다. 그는 스포츠 형으로 유머와 농담을 잘하는 매력적인 남자였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G씨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저녁에 학원에서 영어 강의가 끝나는 10시경에 학원 정문 앞에서 기다리는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급격하게 연인 관계로 발전을 했다. 두 사람이 섹스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까지 약속하게 된 사이가 되었다.

A씨는 G씨에게 과거에 남자관계를 집요하게 물었다. G씨는 사이비 교주에게 농락당한 이야기를 했다. 4년 동안 고통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지금 정신을 차린 고민들을 털어놓았다. A씨를 믿은 것이 화근이었다. A씨는 술을 마시면서 G씨의 섹스 문제를 거론하면서 공격을 하기 시작을 했다. 술을 마시면 너는 걸레다, 처녀가 아니다, 너는 더러운 여자, 매춘부라는 말로써 화풀이가 시작되었다. 서로 만나서 3개월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G씨는 A씨가 조폭의 아들이고 고교 1년을 자퇴한 사람으로 그의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점에서 A씨와 헤어지기로 하고 피하게 되었을 때 A씨는 집요하게 찾아내서 스토커로 따라다녔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G씨를 여왕처럼 대우하고 선녀처럼 대해주고 그녀를 이상적인 여성으로 비위를 맞추고 그녀의 말에 100% 순종을 했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악마로 변했다. 그는 언어 폭력으로 그녀를 매도하고 학대하고 처벌을 했다. G씨는 학원을 그만 두고 강원도로 도피를 했다. 전화 번호를 바꾸고 휴대폰을 바꾸었다 그러나 A씨는 집요하게 찾아냈. 그리고 애걸복걸하면서 같이 살자고 했다.

거대한 사건이 수없이 터졌다. G씨가 xx 스포츠 구단에서 치어리더로 근무하고 있는 운동장에 찾아와서 G를 불러내서 부모님에게 가자고 졸랐다. G씨가 이런 옷차림으로 부모님은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 옷을 갈아입지 않고 스포츠 차림으로 부모임을 만나러 갈 수 없다고 거부했을 때 A씨가 주먹으로 유리창문을 쳐서 A씨의 손의 동맥이 절단되어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와서 손수건으로 손을 싸매고 응급실에 실려갔다.

 G씨의 부모와 A씨의 부모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지금까지 모드 사실들이 들통이 나고 A씨는 가족들의 삶이 드러나게 되었다. A씨의 아버지는 조폭의 우두머리로 4번째 부인과 살고 있었다. A씨의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에 벗어나기 위해서 도망을 쳤다가 남편에게 붙잡혀서 개처럼 끌려와서 백사장에 땅을 파고 머리만 내어놓은 체 파묻혀 몇 시간 동안 있었다는 이야기를 A씨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G씨가 A씨의 집을 방문을 했을 때 A씨의 어머니는 희망이 없는 절망의 눈빛으로 섬뜩했다고 G씨가 틀어 놓았다.

점차로 A씨를 알게 되면서 환멸과 공포로 변해갔다. 2년 동안 전국으로 도망하고 쫓아가는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 때마다 A씨는 용하게도 찾아냈다. A 씨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찾아내는 것과 유사했다. 그에게 끌려 다니면서 A씨가 술에 취하면 섹스에 대한 더러운 욕설들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참고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를 했다.

치료 회기가 4시간 정도 흘러가면서 위와 같은 이야기가 밝혀지면서 치료는 급물쌀을 타게 되었다. 그녀는 이러한 이야기를 부모님은 물론 아무도 모르고 했다고 했다. 사이비 교주에게 4년 동안 섹스로 학대당한 상처들2년 동안 A씨로부터 끌려 다니면서 언어 폭력을 당한 상처치료의 초점이 되면서 G씨는 2시간의 치료 회기를 3시간으로 연장해달라고 해서 1주일에 13시간으로 연장을 했다. A씨는 2년간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괴롭히다가 G씨를 풀어주고 절에 들어가서 스님이 되었다고 했다.

치료 회기가 진행되면서 14시간의 시점에서 G씨의 분노가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왔다. 울고 통곡하고 몸부림 치면서 내면에 쌓인 긴장이 풀리면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비밀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억압의 힘이 약화되면서 G씨는 긴장이 이완되어질 수 있었다. 분석이 과정에서 집에 가서 소화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자율신경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작동하도록 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컨트롤하려고 하면 장이 연동운동이 파괴되어 문제가 확대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고 집에 가서는 자아-의식(잠을 자야 한다. 그리고 소화가 잘 되는가?를 관)을 습관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분석으로 밝혀내고 집에 가서 필사성경(성경책을 노트에 베껴 쓰는 것)을 하도록 했다. 노트를 할 동안에는 위와 장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내장신경조직인 자율신경조직이 정상으로 되돌아간다생리학적인 원리를 이야기를 해 주었다, 치료 14시간이 되면서 수면과 음식은 정상적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문을 닫아 놓았던 사무실 문을 열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치료 40시간 시점에서 어머니를 초대를 해서 치료의 과정을 설명을 했다. 어머니는 딸이 기적같이 일어나서 일을 재개한 것에 대해서 감사를 전했다. 치료자는 성격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6개월의 심리치료를 계속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G씨는 치료를 종료하겠다고 해서 6개월의 치료는 끝이 났다(G씨의 상세한 치료 과정을 알고 싶은 사람은 치료자의 블로그 인격의 살인에 들어가 보세).

 

이제 정리를 해 보자, 조부모, 부모 그리고 나 사이에 관계의 분석을 필수적이다. 대상관계들의 이론엄마와 아기 사이에 관계가 머리속에 입력이 되어 자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확대되어 가족치료로 연결되어지면서 부모와 자녀와 상호관계가 머리속에 입력이 되어서 자아로 건축되어져 간다는 이론이다. 모든 것이 너와나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 경험이 머리속에서 입력되어 내 자아가 만들어지고 건축되어 쌓여 나가게 된다(Cashdan 1988: 주㈜: 참고)

치료 사례의 E씨와 F씨는 부모님이 자녀를 순종, 복종으로 만들어서 E씨와 F씨의 자아가 유아기 어린이로 남아 있도록 한 것 때문에 E, F씨는 부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정신적인 장애인이 된 것이다. G씨는 사이비 교주와 A씨로부터 이상화(공주와 천사의 대우)평가절하(악마)가 되었다. 사이비 교주는 G씨를 성폭행으로 4년 동안 섹스 학대, A씨는 2년 동안 언어 폭력으로 학대)로써 좋을 때는 천국에서 그리고 나쁠 때는 지옥으로 왔다갔다를 반복 했다. B부인과 A씨의 할머니는 남편을 하늘 같이 떠받들고 비위, 눈치를 보고 갈등을 없애아버지와 딸과의 부부관계를 했기 때문에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떠나가 버렸. C 씨와 D씨는 감정이 없는 사람으로 alexythymia로써 남편이 대신 감정을 표현하도록 했기 때문에 남편이 물건을 집어 던지고 밥상을 엎어버리고 감정을 2로 표현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부부(연인)가 공모를 한 것으로 이것을 정신분석에서는 투사 동일시 혹은 가족 치료에서는 무의식적인 공모라고 부른다. 모든 사랑이 건강한 사랑이 아니다, 병든 사랑을 사람을 질식시키고 사람을 병들게 한다. 참 사랑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살릴 수 있다. 무의식적인 공모 그리고 투사 동일시 라는 말은 한 사람이 원하고 상대방은 그가 원하는데도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거울 반사로 서로가 서로를 반사시키면서 서로에게 부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두 사람 관계에서 시작된 것이다 엄마와 아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똑 같은 관계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물림의 치료기법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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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참고

아버트(Abt (Eds)., 1996). Acting out의 이론과 실제

네이프(Niper, 1988). 연약한 결속

카시단(Cashdan, 1988). 대상관계들 이론

헬리(Haley). 특이한 치료, 밀턴 에릭슨과 치료(1979), 심리치료의 전략들(1973), 문제 해결치료(1986), 시련 치료(1984), 집을 떠나는 것(1997).

튜트맨(Tuttman et al, 1981). 대상과 자아

그린베르그(Greenberg & Mitchell)(1983). 정신분석학에서 대상관계 이론

스턴(Stern). 최초의 관계(1977). 일상생활과 심리치료에서 현실의 순간(2004)

스립(Slipp, 1984). 대상관계들: 가족치료와 개인 치료 사이에 연결다리

보웬(Bowen, 1987). 치료적 실제 안에서 가족치료

로젠필드(Herbert Rosenfel, 1987). 치료에서 제자리걸음과 해석

세갈(Segal). 멜라니크레인(1979), 치료적 정신분석(2004), 꿈과 상상과 예술

몰러(Mahler, 1975). 인간 유아의 마음의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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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Moor, 1999). 정신분석에서 현실의 창조

엘렌베르그(Ellenberger, 1970). 무의식의 발견: 역동적 정신의학의 진화와 역사

어네스트 존(Ernest Jones). 프로이트의삶과 업적 제 Ⅰ권(1953), 제 Ⅱ 권(1955), 제 Ⅲ(1957)

그로스테인(Grotstein). 쪼갬과 투사 동일시(1981),페비안과 대상관계의 기원(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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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저서들은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으니 치료자정신분석 심리치료 홈페이지전문서적 안내에 들어가 보세요.

 https://blog.naver.com/psychclinic/2222513395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