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 치료에서 결정적인 요소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는 말은 치료자(필자)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서 백 번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강점은 내세우기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를 좋아하는 것에서 치료자는 항상 어떤 일을 할 때 내 취약점을 먼저 생각해서 내 약점을 보완하는데 삶의 방점을 찍고 있다.

치료자는 치료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10개년 계획을 세웠다. 공부를 하는데 내 장애물이 될 것을 미리 찾아서 준비를 하기로 했다. 치료자가 원하는 미국의 3개 대학에 카탈로그를 구입해서 치료심리학을 전공하려고 하면 무엇이 장애물인가?를 분석한 결과 인체(심리생물학1, 2), 화학(생화학), 그리고 수학(통계학 1, 2)을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드디어 1982, 8, 3일에 11년 동안의 교사 생활에 사표를 쓰고 친척, 친구하나 없는 미국에 입학 허가서와 대학에서 보내준 약도 하나만 들고 조그만 배낭의 왼쪽에 한영 사전, 오른쪽에 한영 의학사전 그리고 휴대용 국산 타자기(그 시점에서는 노트북 혹은 PC가 등장이전)를 짊어지고 김해공항에서 일본 하네다 공항으로 가서 일본항공(JAL)으로 L.A.로 날라갔다(영어에 자신감). 700만권의 대학 도서관에서 정신의학에 관한 책을 전부 읽겠다는 야심으로 35세의 나이로 대학 1학년으로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을 했다.

그 이후에 지금까지(2020, 6, 20) 38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치료자는 자폐증을 제외하고 모든 정신장애들을 치료한 경험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83세의 할아버지까지 범위가 다양하다. 전문인들 중에서는 3명의 대학교수들(한 사람은 300시간, 또 한 사람은 2년의 치료) 그리고 한 사람의 의사(1년의 치료)가 치료를 받았다. 최근에 지난 3년 동안에 5명의 조현병 환자가 치료를 받았다. 그 중에 21세의 대학 1학년 A군은 조현병 진단 1달 후에 치료자에게 40시간의 치료를 받다가 중도에서 중단하고 치료를 떠났다가 10개월 후에 다시 찾아왔다. 그는 치료자를 떠난 10개월 동안에 이미 2번의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었다(2개월, 1개월 입원) 다시 30시간을 치료를 재개 했다가 떠났다. 그의 실패를 제외하면 4명은 성공적으로 치료가 완료 되었다. 치료 기간이 평균 1, 약물은 6개월 치료 후에 본인 스스로 포기(치료자는 약물에 대해서 복용하지 말라고 강압하지 않는다. 치료실에 나올 수가 있다면 약물을 불필요, 대신에 취약점을 자아의 능력으로 뚫고 나가도록 한다)(지금 2명의 조현병 환자들 중에 고 1학년 B군은 치료 6시간 만에 어머니가 약물을 제거, 28세의 C군은 50시간 만에 의사의 약물처방 취소로 두 사람은 성공적으로 치료를 받고 있음).

치료자의 경험에 의하면 조현병은 정신장애의 백화점으로 정의를 하고 싶다(불안증, 우울증, 강박증, 성격장애 등을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조금씩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조현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사는 모든 장애를 치료할 수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치료사는 조현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조현병을 치료하는 치료사는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조현병의 성공적인 치료에 결정적인 요소가 있는가? 라고 물어 본다면 치료자는 첫 번째 치료사는 항상 철저하게 무장(치료 이론과 기법으로)을 해야 한다, 두 번째는 환자의 보호자 특별히 어머니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환자에 알맞은 맞춤치료가 조현병 치료에 필수적이다라고 본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래에서 전개될 것이다.

첫 번째로 치료사는 철저하게 이론과 기법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논의해보자.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한 개의 비유로써 군인이 전쟁에 나갈 때 철저하게 무장을 하고 그리고 전술과 전략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치료사에게 적은 정신장애 즉 여기에서 조현병이다. 조현병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이미 다른 블로그에서 조현병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이전의 글을 반복하면서 여기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을 첨가하기로 한다.

조현병이 등장한지 120의 세월이 흘러갔다. 조현병은 1896년에 독일의 정신과의사인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in)이 정신의학 교과서를 편집하면서 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조발성 치매와 조울증은 다른 질병으로 전자는 뇌의 질병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2%의 치료 확률의 인지적 파괴, 사고 장애의 병이다 동시에 조울증감정장애의 병으로 회복될 수 있다 라고 명시를 했다.

여기에서 정신의학계에 정식으로 조현병은 조발성 치매라는 질병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질병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가 최초로 시작되었다. 1909년 제 1회 국제 정신분석학회가 융(Jung)의 사회로 독일의 찰스부르그에서 42명의 회원으로 개체되었다(Ellenberger, 1970: 주㈜: 참고). 조발성 치매에 대한 2편의 논문이 제출 되었다. 한 편은 스위스의 정신분석학회 회장이었던 융(Jung)의 논문으로 조발성 치매에 대한 연구이고 두 번째는 독일의 정신분석학회 회장인 아브라함(Abraham)조발성 치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연구 논문이다. 융은 심리적인 독극물로써 뇌의 질병으로 치료불가능으로 정의를 했다. 그는 이후에 조현병 치료를 포기했다. 일반심리학 즉 신화, 전설, 종교 등과 신경증 치료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0-1세 사이에 오디팔 문제로 정의를 했다. 이후에 정신분석학자들이 아브라함의 이론에 따라서 조현병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소상하게 밝혔다(조현병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연구를 보라). 그런데 조발성 치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좀 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여기에서 그 시점에서 현대적인 정신병원이 등장에 대한 이야기가 필수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세계에서 최초의 현대적 정신병원은 스위스의 쥬리히에 부르고졸리(Burgholzli) 대학정신병원이다. 1 대 총장인 신경학자이자 정신과의사, 내과 의사인 윌헬름 그리싱거(Wilhelm Griesinger)에 의해서 연구와 치료를 위한 정신병원(psychiatry hospital)으로 1842년에 태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정신병원이 없었단 말인가? 그 이전에는 미친 사람들의 수용소(lunatic asylum)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 수용소는 가족과 이웃에 대한 피해를 막기 위한 감금으로 족쇄와 쇠사슬로 묶여있던 시설이었다.

그리싱거는 최초에 정신과 교과서를 쓴 사람으로써 그 당시에 프랑스에서 유행을 했던 최면치료에 대한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앞으로 정신병은 뇌가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견을 했다. 이후에 독일에서 헤몰츠 학파들의 연구 모임이 독일의 물리학회가 된다. 여기에서 물리학, 화학 그리고 수학으로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쪽으로 발전하게 되는 원동력을 제공을 했다(Ernest Jones, 1953,1955, 1957: 주㈜: 참고). 부르고졸리의 4대 총장인 신경해부학자이자, 정신과의사로, 최면학자, 유전학자로 그리고 개미학(곤충)의 연구로 세계적인 인물이었던 오그스트 포엘(Auguste Forel) 20년 동안 브르고졸리의 대학정신병원을 역동적 정신의학과 뇌의 정신의학을 통합을 해서 혁신적인 정신병원으로 개선을 했다. 그는 국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스위스의 100프랑의 지폐에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2020, 6, 20 위키피아). 그가 은퇴를 하면서 후임자로 유진 블루러(Eugen Bleuler)1898년에 5대 총장(이전의 글에서 4대 총장을 바로잡습니다)으로 부임하면서 조발성 치매에 대한 그의 14년 동안의 연구가 빛을 보게 된 것이 1911에 그의 저서 조발성 치매, 정신분열증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이 되었다. 드디어 조현병에 대한 정신의학계의 공식적인 이름인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는 뇌의 질병이라는 것은 인정을 하면서 치료의 비율을 60%로 그리고 정신분열증이 한가지 종류의 질병이 아니고 다양한 종류의 질병이라고 노트를 했다. 그는 정신분열이라는 말은 성격이 분열(해리장애(빙의)되는 것이 아니고 성격 안에서 심리적인 기능들생각, 행동느낌감정서로 분열되는 것이라고 명시를 했다(두 장애의 차이점은 빙의 대(vs) 조현병을 보라). 그는 그 대학정신병원에서 30년 동안 총장직으로 연구에 몰두해서 조현병의 연구에 전설적인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55년 후에 1966년에 윙(Wing) 40명의 여성 정신분열증 환자를 30년 동안 추적 연구한 결과 치료의 비율이 67%였다는 연구 결과는 블루러의 연구가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4 A(영어의 첫 글자인 A를 따서)는 생각들의 연결의 분열, 연상의 분열, 감정이 없거나, 무디거나, 이상한 표정의 감정의 분열, 사랑과 미움, 너와 나와 같은 양면 감정의 분열 그리고 내면세계로 철수 라는 유명한 그의 진단은 지금도 정신분열증의 간단한 진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는 심층 심리학, 자아분열(schizoid), 자폐증(autism) 등의 신조어를 만든 장본인이다(Stone, 1983: 주㈜: 참고).

그는 융으로부터 프로이트를 소개받아서 융과 함께 정신분석 학회에 가입을 했다. 부르고졸리 병원의 모든 스텝들에게 3년 동안 정신분석학을 공부해서 마스터 하도록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Ellenberger, 1970). 그러나 그는 프로이트의 다양성의 불인정, 종교 지도자처럼 독선적인 점을 지적한 편지를 프로이트에게 전하고 학회를 탈퇴했다. 이후에 그는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영국의 신경과 의사인 에너스트 존(Ernest Jones)과 함께 국제 심리신체의학 즉 의학심리학(심인성질환) 학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프로이트를 노벨 의학상에 추천한 장본인으로 앞으로 정신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프로이트를 반드시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1, 3월에 대한 정신의학회에서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으로 개칭을 했다(상세한 것은 조현병과(vs) 정신분열증에 대한 치료자의 글을 보라).

부르고졸리의 출신으로 유명한 정신의학자들이 많다. 첫 번째는 스위스인으로 아돌프 메이어로(Adolf Meyer)이다. 그는 미국에 이민을 가서 미국 정신의학회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는 정신분열증을 뇌의 질병으로 보지 않고 기질적인 요소를 가졌지만 환경적인 영향력을 강조를 했다. 그의 영향력으로 많은 학자들이 조현병의 연구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는 제 1대 미국정신의학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좁 홉킨즈 의과대학 부속병원인 필립스 병원을 창설했다. 그리고 1952년에 DSM-(미국 정신장애의 통계와 진달 분류 시침서)을 등장시킨 장본인으로 처음으로 정신분열증이 미국의 정신의학에서 반응행동성 정신분열증으로 DSM-Ⅰ에서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앞에서 조발성 치매의 최초의 논문의 연구자인 칼 융(Carl Jung)이 이 병원에 레지던트로 입사해서 9년 동안 부르고졸리 병원에서 근무를 했고 치료국장이 되었다. 칼 아브라함(Karl Abraham)이 융 밑에서 4년 동안 레지던트로 연구를 했다. 미국 뉴욕의 정신분석학회 회장을 역임한 아브라함 브릴(Abraham Brill), 그리고 로샬테스트(잉크 방물 검사지)를 만든 허만 로샬(Herman Rorschach), 스위스의 정신분석학회 회장인 루드위스 번스윙커(Luwig Binswanger), 정신분열증 연구에 자주 등장하는 유진 민코워스키(Eugene Minkowski) 등이 세계 최초의 혁신적인 부르고졸리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거친 유명인사들이다. 

여기에서 좀더 조현병의 등장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 적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감소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최초의 조현병의 이름은 조발성 치매로 소개가 되었다. 그런데 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독일어)를 의학용어로써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의 의사인 베네틱 모넬(Benetic Morel)로 그가 임상의 연구 라는 저서에서 정신장애로 조발성 치매(demence precoce)(프랑스어)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디맨티아(dementia)라는 말은 이미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가 사용한 말로써 정신이 나간 사람, 정신이상(out of mind)라는 용어인데 네이버 영어 사전에서 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라는 이름으로 번역이 되어지고 있다. Praecox는 독일어로 조숙(早熟)으로 네이버에 번역되어진 것으로써 우리나라 말로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청소년의 뇌의 질병이 정확하다.

1866년에 독일의 코닝스베르그(Konigsberg) 대학의 정신과 교수였던 칼할바움(Karl Ludwig Kahlbaum)이 그의 제자인 헤크(Ewald Hecker)와 함께 고로니츠(Gorlitz) 정신병원의 원장으로 이동 후에 젊은이들의 정신병을 연구하면서 정신장애를 우울증(dysthymia), 순환우울증(cyclothymia), 긴장성(catatonia), 편집증(paraphrenia) 그리고 청소년 유형(hebephrenia)으로 분류하면서 그가 현대적 정신의학계에 선구자가 되었다.

1891년에 프라하 대학(체코)의 정신과의사인 아놀드 피코(Arnold Pick)조발성 치매헤베프레니아(청소년의 미침병으로 헤베는 그리스의 제우스의 막내 딸로써 감정이 이상해서 히죽거리고 이상한 표현을 짖는다는 것에서 만든 신조어)유사하다는 논문을 썼다 그러나 크레펠린은 그것을 부인을 했다 그러나 이후에 그의 재편집한 정신과 교과서( 7 회 개정판)에서 인정을 했다.

드디어 유진 블루러가 정신분열증이 한 종류가 아니고 다양한 종류를 분류하면서 긴장성, 편집증, 사춘기형 그리고 단순형으로 정신분열증을 분류하게 되었다. 정신분열증의 이 분류는 계속해 사용되어 오다가 2013년 DSM-에서 4 가지의 정신분열증을 한가지의 종류인 그냥 정신분열증(조현병)으로 묶어버리게 되었다. 조현병의 약물이 종류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신경이완제의 약물들인 항정신증약물 들은 페노티아진 계통의 약물들로써 모두가 도파민의 감소라는 점에서 분류가 의미가 없다고 인정을 한 것이다(2020, 6, 20, 위키피아).

조현병의 치료에는 정신분석 한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조현병 치료에서 정신분석가들의 도전과 연구들에 대해서 기술한 것에서 다양한 치료 쪽으로 방향을 돌려보자. 정신의학에서 적()은 조현병이다. 조현병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성공적인 치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언급을 하면서 다른 치료기법들로 확대시켜 보기로 한다. 정신분석은 최면학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등장을 하게 되었다. 최면학은 18세기에서 시작해서 19세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정신병의 치료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최면의 신비가 과학자들과 치료사들에 의해서 밝혀지면서 최면은 카타르시의 효과임이 밝혀졌다. 프로이트가 이 최면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신분석을 창안했다는 것은 여러 번 밝혔다. 정신분석이 만병통치약이라면 다른 치료이론과 기법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신분석에 대한 실망 때문에 가족치료가 등장하고 인지 치료가 등장하게 된다는 것은 아래에서 밝혀지게 된다. 여기에서는 행동 치료 쪽으로 방향을 돌려보기로 한다.

행동 치료학은 정신분석과 계통이 전혀 다르게 등장하게 된다. 행동치료학은 심리과학으로 등장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글은 그리스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쓴 에니마(anima)라는 글에서 식물의 마음, 동물의 마음 그리고 고등동물의 마음이라는 논문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후에 심리학은 철학의 일부로써 이어져왔다. 17세기 프랑스의 데카르트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써 사람의 생각에 대한 연구로써 최초의 심리치료사로 등장을 한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철학자였다.

심리과학의 등장은 독일의 라이프찌그(Leipzig)대학에서 3 대에 걸쳐서 태어나게 된다. 라이프지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들 중에 하나로써(1409년에 창건) 독일에서 두 번째 오래된 대학으로 유명인사로 괴테, 니체, 슈만(음악가), 메르겔(총리)가 졸업한 대학으로 6 명의 노벨상의 인물을 배출한 대학이다. 이 대학에서 청교도 목사의 아들로 의과대학을 졸업한 어네스트 웨버(Ernst Weber)가 등장하게 된다. 그는 해부학에 질려서 의사를 그만두고 대학에 생리학 교수가 된다. 그는 마음을 수학적으로 측정한 최초의 과학자이다. 예를 들면 5명의 피실험자에게 종이와 연필을 주어서 오늘의 기온을 노트하게 한다. 제 각각의 5명의 기온의 측정을 평균으로 해서 영하 1도라고 하면 실제 기온이 영하 3도였다면 이것을 우리가 체감 온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실험실에서 이것으로 우리의 몸의 각 부분들의 감각을 측정을 했다. 이것을 교과서로 출판한 것이 심리생물학이라는 저서였다.

그의 수제자인 구스타브 페크너(Gustive Fechner)가 스승의 연구를 계승하게 된다. 그는 청교도 목사의 아들로써 신학을 전공했다가 그만두고 라이프지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의사를 포기하고 동 대학에서 물리박사가 되어 철저한 실험 물리학자가 되었다. 그는 만년에 물리학자가 되면서 마우스박사(Dr.Mises)라는 가명으로 많은 글을 썼기 때문에 라이프지그 대학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정작 그가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2년 만에 붕괴되어 두문불출하게 되었다. 모든 창문의 햇볕을 가리고 식음을 전폐하고 2년 동안 칩거를 했다(조울증), 2년 후에 그가 문을 열고 나오면서 세상은 참 아름답다 로 시작을 했다. 그는 몸과 마음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계산을 했다. 10년 동안 연구로써 그는 신체적인 자극과 감각적 지각은 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때 후자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수학적인 공식을 만들어냈다. 이것을 ∆R분의 R은 비례상수 K로 표현을 하면서 이것을 스승의 이름을 붙여서 웨버의 법칙으로 명명을 했다. 그는 실험실에서 감각과 지각을 측정하는 과정을 저서로 심리물리학으로 출판을 했다.

드디어 페크너의 제자인 윌헬름 분트(Wilhelm Wundt)가 등장하게 된다. 그는 역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써 하이델베르그(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1386년에 창건)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는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생리학자인 헤몰츠의 조수로서 실험실에서 근무하다가 라이프찌그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 하면서 그 대학에서 웨버와 페크너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연구를 계승하게 된다. 그는 1879(1789년 프랑스 혁명, 기억을 쉽게 하기 위해서 이 두 개의 숫자를 바꾸면 기억하기 쉽다)실험실에서 감각과 지각을 실험으로 심리학 강의를 하고 심리학 교과서를 출판을 했다. 드디어 생물학, 물리학철학으로부터 심리과학이 1879년에 탄생하게 된다(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보다 15년 앞선다). 독립된 과학으로써 심리학이 실험실에서 탄생하게 된다. 분트는 박사학위 학생들을 배출하게 된다. 1919년까지 분트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184명으로 그 중에서 70명이 외국이 학생들(러시아가 23, 미국인이 18)이었다(2020, 6, 20, 위키피아).

분트 밑에서 박사 학위를 가진 에드워서 티치너(Edward Titchener)뉴욕의 코넬대학에서 1892년에 심리학을 강의하게 된다. 반면에 미국의 하버드 의과대학을 졸업한 윌리암 제임즈(Wiliam James)1870년에 심리학의 원리 라는 저서를 출판해서 전 세계. 특별히 유럽의 지식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의사를 포기하고 심리치료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심리학을 강의하게 된다. 1876년에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심리학 조교수가 되었다. 그 밑에서 미국의 심리학 박사 1호가 바로 스텐리 홀(Stanly Hall)(미국 심리학회 제 1 회 회장)로써 그가 31세로 클라크 대학 총장이 되었을 때 프로이트와 융을 미국에 초대한 장본인으로 프로이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윌리암 제임즈의 심리학과 제자들이 시카고 대학에서 미국의 심리학 제 1 세대가 된다. 그들이 바로 제임즈 엔젤스(James Angell), 하비 카(Harvey Carr), 에드워드 숀다이크(Edward Thorndake)(시행착오설이 이후에 하버드의 스키너(B.F. Skinner)에 의해서 강화이론으로 발전) 그리고 존 듀이(John Dewy)(실용주의 철학으로 교육자로 변신) 등이다. 그들은 코넬 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된 티치너(Titchener)순수심리학에 기초한 구조주의 심리학에 반대해서 시카코 대학의 심리학기능주의로 이름을 붙이게 된다. 기능주의는 응용심리학과 실용주의 심리학에 기반을 두게 된다. 그들은 티치너가 의식을 내면관찰법으로 마음의 한 부분을 관찰한 것에 반대해서 의식은 분리되어질 수 없는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대조가 된다.

여기에서 1904년에 러시아의 생리학자인 이반 파브로프(Iran Pavlov)가 개의 위에 구멍을 뚫어서 고기를 줄 때 침을 흘리는 것에 0.5초 이전에 빛 혹은 종소리를 내면서 이것을 서로 반복 연결 시키면 빛, 종소리에 침을 흘리게 된다는 조건학습을 발표하게 된다. 이것은 학습의 뇌의 원리실험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는 그 연구로 노벨상의 받게 된다. 고전적 조건 학습이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서 자극-반응 심리학(S-R 심리학)이 된다. 여기에서 1913년에 시카코 대학의 심리학 박사인 존 왓트슨(John B. Watson)이 컬럼비아 대학의 강의에서 행동주의자가 본 심리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행동주의(Behavior)라는 용어가 심리학의 대명사로 등장하게 된다. 행동주의, 행동주의 심리학, 혹은 행동 치료학 등은 이 용어에서 나온 것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미국의 실험심리학, 학습 심리학의 대명사이다.

190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미국의 심리학은 실험심리학이 대학에서 좌지우지를 했다. 그들은 자극(S)-   --반응(R) 사이에 빈 공간인 네모 안은 블랙박스로써 무시하라고 강조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블랙박스 속에서 상상, 느낌, 감각, 지각을 분석하는 것과는 정반대가 된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관찰하고, 측정하고, 데이터와 할 수 있는 것만 심리과학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이론이 미국 심리학의 흐름이 된다.

여기에서 심리치료적인 면에서 행동주의를 잠깐 들어다보기로 하자. 행동주의 심리학은 실험심리학으로 학문으로써는 정립이 되었다. 그런데 치료에서는 어떻게 이것이 진화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왓트슨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최초의 공포증 치료인 리들 한스(Little Hans)의 말() 공포증 치료를 잘 알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한스는 5세 때 말()에 대한 공포증 때문에 집 밖을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아버지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회의 회원으로 프로이트의 오디프스 이론으로 어머니를 독점하고 아버지를 피하려고 하는 심층의 두려움과 처벌(거세불안)의 이론으로 그를 치료한 것을 프로이트가 1909년에 리틀 한스라는 제목으로 첫 공포증의 성공적인 치료 사례로 등장한 것을 왓트슨이 알고 있었다.  왓트슨은 리틀 엘버트(Little Albert)라는 제목으로 9 개월 된 엘버트 라는 남자 어린이에게 조건 학습 실험으로 그에게 흰쥐 장난감을 보여주면서 큰 소리가 나도록 해서 엘버트를 놀라게 했다. 이후에 그에게 흰토끼 인형흰곰 인형 그리고 산타크로스의 흰 수염에도 놀라게 되는 자극 일반화의 실험으로 공포증을 소개를 했다. 그는 조건학습을 거꾸로 탈 조건학습의 이론으로 흰색의 인형에 부드러운 촉감 감각으로 조금씩 놀라게 하는 것을 줄여가면서 거꾸로 흰 토끼와 마지막으로 흰쥐에 놀라지 않게 하는 감각박탈 실험 기법을 보고하면서 탈 조건학습이 심리치료에 등장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스텐리 홀 밑에서 발달 심리학을 전공한 마리 커버 존(Mary Cover-Jones)이라는 여성이 왓트슨의 강의에 매료되어 그의 지도 하에서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얻어서 동 대학 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유사한 실험으로 9살 된 피터(Peter)라는 어린이가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탈 조건학습으로 공포증을 성공적으로 치료를 한 결과를 연구 논문으로 리틀 퍼터”(Little Peter)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한편으로 남아 공화국에서 정신과의사가 된 조셉 울프(Joself Wolpe)가 정신분석으로 치료를 하다가 실망하고 실험심리학적으로 조건학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버지니아 대학에서 커버 존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이 함께 탈 조건학습으로 어린이들의 공포증을 치료하게 되었다. 울프는 커버-존을 미국의 행동주의 치료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울프는 행동주의 실제치료(The Practice of Behavior Therapy)라는 저서를 통해서 다양한 행동치료를 소개하면서 조직적 감각 박탈, 비보치료(영국의 이삭 마크(Isaax Marks)가 창안) 홍수요법(감각 속에 빠지게 하는 기법), 혐오자극 치료 등을 소개를 했다.

한편으로 정신분석에 실망한 아론 백(Aron Beck: 주㈜: 참고)이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인지치료를 개발을 했다. 실험실에서 나온 데이터, 관찰, 측정을 강조한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간접적인 매개 변수를 통해서 생각을 데이터로써 측정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 인지 심리학의 창조했다. 그는 이후에 인지-행동치료의 대변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인지-행동치료를 하는 치료사들이 몇 년 전부터 건강보험으로 지원을 받게 된 것을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다가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게 된 사람들로부터 알게 되었다.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 중학교 3학년 E군은 1 6개월간 약물과 심리치료를 받다가 치료자에게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는 1주일에 1회로 50분의 치료 비용으로 6만원의 지불로 40%를 의료보험에서 지원으로 그리고 조현병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F군은 1년 동안 약물 치료를 받으면서 50분 동안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50분에 3만원을 지불했다고 했다. 그는 조현병은 국가에서 의료보험비용으로 70%를 지불하고 그 자신이 3만원을 지불했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금까지 적의 약점(조현병의 숨겨진 비밀들에 대해서)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제부터는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서 나의 약점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한다. 나의 약점을 알게 되는 것이 조현병의 치료의 핵심 요인으로써 공헌하게 되는 전문가로써의 철저한 지식의 습득과 어떻게 관계가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약점을 알지 못하고 도전을 하면 백전백패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치료자(필자)가 미국의 대학 강의실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실화에서 시작된다. 미국에서 첫 번째 강의실에서 치료자는 우리나라에서 초, , , 대학 시절에 경험을 했던 것에 익숙해서 강의시간에는 교수님의 강의에 집중해야 한다는 수업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강의실의 앞쪽에 앉아서 교수님의 강의에 정신을 집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의 시간에 필기를 즉 노트를 하는 것은 금기로 배웠다. 강의하는 선생님들이 칠판에 판서는 강의 끝나기 5분 전에 판서를 해도 좋다는 신호가 떨어지면 노트를 정리하고 수업은 끝이 나는 것으로 철저하게 습관화가 되어 있었다. 공부시간에 노트를 하거나 판서를 하는 것은 나쁜 습관으로 인식되어 수업 태도가 나쁜 학생으로 인식되어져 온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첫 강의가 끝이 나고 치료자가 노트를 한 것은 교수가 칠판에 핵심으로 노트한 몇 개의 용어만 노트되어져 있었다.

미국에서 첫 강의가 끝나고 치료자는 도서관에서 오늘 첫 번째 시간에 배운 것을 정리를 하면서 만약에 다음 강의 시간에 그 교수가 시험을 친다면 얼마나 정확하게 배운 것을 정리할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을 해 보았을 때 눈앞이 캄캄해졌다. 단 한 줄의 문장으로도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나는 미국인이 아니고 외국인이 아닌가!). 첫 번째 장애물인 암초가 첫 강의 시간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물론 나는 철저하게 예상문제를 준비를 했었다. 그 교수의 강의 계획서에 소개된 대로 첫 시간에는 제 1과와 제 2과를 강의를 할 것이다 라는 것에 의해서 그 교수의 교과서를 예습으로 읽고 내 나름대로 핵심적인 요소들을 정리를 해서 노트를 가지고 가서 강의를 들었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그 교수의 강의는3분의 2는 이해가 되는데 3분의 1은 듣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두 번째 시간에는 강의 시간에 중간 지역에 앉아서 옆에 앉아 있는 미국인 학생들은 강의 시간에 어떻게 하는가? 를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깜짝 놀랬다. 미국인 학생들은 교수의 강의 시간에 치료자처럼 조용히 앉아서 경청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전부가 노트를 하는데 귀신처럼 강의를 듣고 나서 척척 스스로 중요한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노트를 하는 것을 보고 치료자가 한국에서 배운 학습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치료자의 첫 번째 나의 허점, 취약점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다음 시간부터는 강의 시간에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국인 학생에게 다가가서 친구를 만들기로 했다. 내 약점을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한 학생에게 나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으로 영어가 부족합니다. 좀 도와주세요라고 도움을 요청을 했다. 미국인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대신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도와주지 않는다(개인의 퍼라이버시의 침해), 그래서 각각 과목마다 한 사람씩 미국인 친구를 만들어서 그에게 허락을 얻어서 강의시간 5분전에 강의실에 먼저 가서 내 의자 옆에다 강의용 의자(의자를 개조한 강의실 책걸상)를 만들어서 친구 학생을 그 의자용 강의책상에 앉게 하고 내가 옆에서 한번씩 그의 노트를 훔쳐보고 정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듣기가 부족한 3분의 1의 강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휴대폰으로 녹음을 할 수가 없었다. 녹음을 한다고 해도 1시간 정도의 길이였기 때문에 적당하지 않았고 그러한 아이디어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그 당시에 작은 꼬마 녹음기 등장 이전). 그래서 치료사는 강의 시간에는 그 교수의 강의를 전부 노트를 하기로 했다. 못 알아 듣는 것은 빼고 알아듣는 것을 모두 노트를 하기로 했다. 내 노트는 거미줄처럼 내가 보아도 글자를 알아볼 수 없듯이 엉망으로 갈겨져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도서관에 가서 강의시간에 한 노트들을 다시 하나씩 정리를 해서 그것에 빠진 부분을 미국인 친구의 노트에서 기록된 것을 보충을 했다. 대학 입학 오리엔테이션에서 외국인 학생들은 한 한기에 12학점 이상을 듣지 말라고 예고한 것을 철저히 따라서 4과목(한 과목에 3학점)만 들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는 교수의 지정 교과서 이외에도 도서관에서 같은 제목의 교과서들을 한 개씩 첨부를 해서 함께 공부를 했다. 미국의 교과서들은 많은 차이들이 있다. 어떤 교과서는 약간 세부적으로 상세하게 한 책도 있고 다른 교과서는 약간 덜 세부적으로 쓴 교과서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인간발달학 교과서는 세부적으로 상세하게 실험들의 내용이 수록된 것도 있고 실험적인 것이 덜 세부적인 교과서들이 있다. 한 개의 교과서에서 빠진 부분들을 다른 교과서를 통해서 빈틈없이 보충을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강의시간에 등장한 암초는 잘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복병들은 곳곳에서 암초로 등장하게 된다.

두 번째 복병이 등장한 것이다. 미국에서 학부학생들은 반드시 미국의 역사와 정치학을 필수과목으로 수강해야 한다. 여기에서 정치학 시간에서 다시 문제가 터졌다. 그 강의실의 학생들은 대부분이 외국인 학생들로 가득 찼다.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대만, 스웨덴 등등 세계 각지의 학생들이 대부부분으로 그들도 치료자와 비슷해서 그들의 노트를 빌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교수의 강의가 교과서의 내용이 아닌 교수 자신의 독특한 강의내용이었다. 학생들이 볼멘 소리로 교수님! 교수심의 강의는 교과서에 없는데요? 라고 항의를 했을 때 그 교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학생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강의를 한다면 집에서 교과서를 읽어보면 되지 왜 강의실에 나옵니까? 내 강의는 교과서에 없는 것들입니다. 치료자는 그 교수의 말이 정답이다 라고 수긍을 했다. 그렇다면 교과서를 읽지 않고 강의노트만 철저히 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반드시 시험에는 교과서에서 50% 그리고 강의에서 50%가 출제된다고 강의 계획서에 명시되어 있었다.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두 번째 복병이 등장한 것이다. 치료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냈다. 틀림없이 그 교수가 어떤 전문서적을 읽어보고 그것에서 정보와 지식을 얻었을 것이니 그 교수가 강의하는 주제가 틀림없이 700만권의 책들이 보관되어져 있는 도서관에 어딘가에 있을 것이니 그 책을 찾아내서 그 교수의 강의를 보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도서들 중에서 어떻게 그 교수가 본 책을 찾아내는가? 이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치료자가 9월 달에 정식 입학이 되기 이전에 치료자는 8 3(1982)에 미국에 와서 오리엔테이션 때 여름방학 기간 동안에 필수과목인 도서관학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고 9월 달에 입학하는 학생인데 그 도서관 과목을 이수할 수 있는가? 라고 물어 본 결과 입학학인서를 가지고 있는 학생은 등록할 수가 있었다. 그 도서관학은 첫 시간의 강의로 어떻게 공부를 해서 이 과목의 학점을 이수하는가?의 설명 이후에는 혼자서 공부하는(self-study) 학습으로 도서관의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면서 어떻게 전문도서를 찾는가? 어떻게 연구를 계획할 때 전문서적을 찾아내는가? 등등을 몸소 학습해서 그 과정을 테스트를 받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기 시험에서 통과해서 학점을 얻는 과목이었다. 그 과목은 필수과목으로 제일 먼저 그 과목부터 이수를 해야 공부를 하는데 가장 도움이 된다는 것을 소개받고 나서 이미 그 과목을 이수를 했기 때문에 도서관 이용을 철저하게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결국은 그 교수가 강의하는 책을 찾아내서 그 과목을 잘 통과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유사한 과목이 또 한 개가 있었다. 전공과목에서 감정심리학 과목에서 그 교수가 역시 교과서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고 교과서에 없는 내용을 강의를 할 때 이 전략을 사용해서 그 과목을 무사히 해쳐나갈 수 있었다.

세 번째 복병이 등장을 했다. 이번에는 교양과목으로 미국문학을 택하게 되었는데 학점이 4학점으로 만만한 과목이 아니다 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필자는 한국에서 영문학의 했기 때문에 대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과목에 도전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교수가 매시간마다 쪽지시험을 친다는 것이었다. 12번의 쪽지 시험에서 10회 이상 통과를 해야 기초평가에서 패스(pass)로 그리고 기말고사의 자격이 주어지고 실패하면 탈락(F)로 기말고사 자격이 박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특별한 것은 교과서에 나오는 미국의 작가들의 작품을 교수가 지적하는 것을 반드시 읽어야 했다. 그 작품에 대해서 쪽지 시험을 치는 것이었다. 그 교과서는 마치 영어 사전처럼 얇은 종이로 엄청나게 많은 거대한 책이었다. 첫 번째 작품은 학클베리핀의 모(마크 트웨인의 핵심 작품)이었다. 그 책은 약 3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로 내용은 한국에서 대충 알고 있었지만 실제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치료자는 그 교수의 그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문학을 하면서 실제 작품을 읽어보고 맛과 향기와 음향을 감상해야 하는데 음식 맛을 보지 않고 평론가의 말들을 입술 서비스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반드시 작품을 읽어보고 나서 이야기를 하라는 취지를 알고 수긍을 했다.

미국인 학생들은 금요일 오후가 되면 승용차를 몰고 데이트 혹은 여가 생활로 훌훌 떠나갔다. 그런데 치료자는 금요일 오후, 토요일, 일요일은 뒤떨어진 과목들의 보충으로 매달려야 했다. 치료자는 이미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각오를 단단히 했다. 미국인 학생들이 1시간 공부를 하면 치료자는 5시간으로 그들의 5배를 해야 그들을 따라 갈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나의 헛점). 미국의 도서관은 주중에서 24시간 열렸지만 주말에는 토요일에는 12시에 문을 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미국인들은 토요일에는 아침 10시까지 잠을 잔다 고로 온 동네가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는 것을 이후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치료자는 토요일은 정상대로 일찍 오전 6시에 도서관에 도착해서 인근에 벤치에 앉아서 공부를 하다가 12시에 문을 열면 도서관에 들어갔다. 그런데 토요일, 일요일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도서관에 앉아 있을 때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려고 미국에 공부하러 왔는가? 다른 공부를 뒤로 미루고 이 소설을 다음 시간까지 읽어가야 한다. 그러나 한번 시작한 것을 피하면 안 된다. 끝을 내야 한다는 단단한 각오 돌파를 해 나갔다. 단어를 찾아가면서 열심히 읽었다. 모든 시간은 이 소설을 읽는데 투자를 해야 했다. 그 다음주에 강의 시간에서 첫 번째 쪽지 시험이 나왔다. 제목은 학클베리핀 모험을 읽어보고 가장 인상이 깊었던 3가지 장면을 기술하세요 였다. 치료자는 몸소 읽어보았기 때문에 기술을 할 수 있었고 첫 번째 시험은 무사히 통과 되었다. 그런데 죽도록 읽은 책은 불과 몇 분만에 논평으로 지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그러한 방식으로 그 과목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 교수는 치료자에게 강의 시간에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 중에 하나가 미국의 시인으로 케네디 대통령 때 취임 축하시를 낭송한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를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치료자는 프로스트는 자연주의 시인으로 유명한 시, “눈 오는 날 저녁에 숲 속에 서서” “내가 가야 할 세 갈래 길에 서서”, 라는 유명한 시를 낭독했을 때 깜짝 놀랬다. 그는 기말고사에서 내 시험지에 자네는 강의실에서 강의한 내용보다다 평론가의 일반적인 논평을 노트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하는 주석을 달아주고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일반 미국인 학생들도 기진맥진해서 나가떨어지는데 자네는 끝까지 통과를 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미국에서 공부는 만만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암초들이 등장을 했다. 그 다음의 네 번째 복병은 전공과목에서 인터뷰와 사례연구의 과목이었다. 이 과목은 강의를 듣고 필기 시험을 치는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인터뷰의 실기 시험이었다. 한 시간의 강의 과정을 설명한 이후에 교수는 약 23명 정도의 학생들에게 서로 역할 놀이 형식으로 상담자와 내담자를 번갈아 가면서 연습을 하라고 했다. 중간 고사는 서로 짝이 지어진 상담자와 내담자를 10분 동안 인터뷰를 하고 나서 다시 10분 동안 교대로 역할을 바꾸어서 그 인터뷰 내용을 시험의 실기 점수화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대학을 다닌 캘리포니아 주립 롱비치 대학은 심리학(교수들이 시간 강사를 포함해서 72명의 교수가 대학 안내서에 노트된 것을 알고 그 대학에 진학)의 별채 건물로 지상 4층과 지하 1층으로 정사각형의 건물로써 소()(2 - 3), ()(5 - 7), ()(20-30)의 일면거울이 장치(그 교실 밖에서는 안쪽을 보고 들을 수 있지만 그 교실 안에서는 밖에서 사람들이 보고 경청한 것을 볼 수 없는 시설: 심리치료에 필수적인 장치)된 인터뷰와 강의실이 있고 그곳에는 비디오 촬영과 대() 강의실에서 대형 화면에 개개의 학생들의 인터뷰 과정을 방영하면서 개개인의 장단점의 특성들을 지적하고 교정해주는 학습과정을 거치게 되었다(1982년의 그 시점에서는 대형 TV 스크린이 우리나라에서는 등장 이전 그곳에서 그러한 시설에 놀랬다). 치료자는 미국인들 보다 5배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각오로써 그 과목 학생들에게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내가 유학생으로 영어에 어려움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해서 개개의 학생들과 인터뷰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기말시험이 문제였다. 기말고사는 동료학생들과 인터뷰를 하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학생들은 자신의 지인들을 모시고 와서 자신이 모시고 온 그 지인과 인터뷰를 하는 것이 아니고 교체로써 다른 지인과 인터뷰를 해서 성적을 산출한다는 것이었다. 치료자는 깜짝 놀랬다. 한국인 학생들을 초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영어도 서툴고 미국인 학생들이 한국 학생들을 내담자로 인터뷰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치료자는 오리엔테이션 때 이미 미국인 여학생 친구와 친하게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전공하는 대학원 학생으로 프랑스에서 2년 동안 유학생활을 한 학생으로 치료자의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진실로 고마운 친구였다. 내가 학부의 4년 과정에서 그 친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외국생활의 어려움들을 잘 이해해 주었다. 치료자가 쓴 글들을 수정하고 교정도 도와주었다.

나는 인터뷰 과목의 문제점을 그녀에게 이야기를 하고 그녀를 초대를 했다. 그녀와 인터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학생들이 모시고 온 전혀 모르는 사람을 내담자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이 과목을 공부하면서 치료자는 게스탈트 치료법을 공부를 했다. 저서를 구입하고 그들의 인터뷰의 과정들을 스스로 학습으로 배웠다. 역할 놀이와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해서 직접 감정의 방출에 뛰어난 효과를 가진 치료기법임을 배울 수 있었다(이후에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면서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로 수정했다 즉 정신분석은 장기치료이기 때문에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면 자칫 잘못하면 폭력적인 학습으로 번질 위험 때문에 금기시 하는 것을 새로 배움). 한 한기 동안 게스탈트 치료법을 익일 수 있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지도 교수가 첫 시간에 나를 보고 언어의 어려움 때문에 이 과목을 해 낼 수 있겠느냐? 라고 특별한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러나 치료자는 솔직하게 언어의 어려움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이것을 배우기 위해서 11년 동안의 직장을 포기하고 이것을 배우려 왔으니 어떤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으니 수용해 달라고 했을 때 수강을 허용해주었다(먼저 교수의 허용을 받아야 수강할 수 있는 과목). 마지막 점수에서 A학점(캘리포니아 롱비치 주립대학에서는 A, A+ 학점이 아니고 A, B, C, D, F학점제)을 받았을 때 지도 교수가 특별히 칭찬을 해주었다. 심리학과목에서는 유일하게 치료자가 외국인학생이었고 모두가 미국인들이었기 때문에 치료자는 항상 교수들의 눈에 잘 띄었다.

 치료자는 특별히 전공인 심리학 과목들에 신경을 써야 했다. 왜냐하면 학부에서 심리학성적이 좋지 않으면 대학원에 진학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대학원에서 치료심리학(clinical psychology) 혹은 상담심리학(counseling psychology) 과목들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했다. 법대와 의대의 수준으로 경쟁이 치열했다. 사무실 개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치료 혹은 상담을 미국에서 공부를 원하는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심리학에 대학원 공부 안내서(graduate study of psychology)라는 미국심리학회에서 매년마다 출판되는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아야 한다. 이 책은 미국 전역의 대학들의 심리학과 안에서 제공하는 각각의 과목들의 그 해와 이전의 해의 지원자수와 경쟁비율을 그리고 그 대학에서 그 과목에 석, 박사의 입학생 숫자와 경쟁 비율 그리고 학비와 기숙사 제공 등등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어느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를 미리 선정을 해서 그 대학에서 강조하는 핵심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정신분석 학교에 대한 소개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정신분석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이후에 알게 된 것은 정신분석 학교는 유일하게 뉴욕대학원 그리고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박사 후 정신분석과 심리치료 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분석학교는 특수학교로 대도시에서 미니 학교운영된다는 것을 인턴 과정을 밟으면서 알게 되었다).

심리학의 첫 과목은 물론 심리학 개론(소개)이다. 이 과목을 통과해야 다른 심리학 과목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첫 심리학 소개의 과목에서 사용된 그 당시(1982)의 교과서(스텐포드 대학의 교수인 힐가드와 아트킨슨(Hilgard & Atkinson)의 제 7 개정판)를 지금 살펴보면 1 장 감각과 지각, 2 장 뇌와 신경조직(생리심리학), 3 장 학습심리학, 4 장 발달심리학, 5 장 기억심리학, 6 장 감정심리학, 7 장 성격심리학, 8 장 병리심리학, 9 장 측정심리학(심리검사지 제작과 해석), 10 장 심리상담과 치료심리학, 11 장 심리학의 역사와 진화 등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위의 과목들을 4년 동안에 전공과목으로 세부적으로 공부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과목들은 위에서 기술한 행동학적인 실험심리학적으로 편집되어져 있기 때문에 학부에서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기술은 겨우 병리심리학과 심리치료에서 몇 페이지 정도가 고작이었다. 치료자는 학부 시절에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겨우 프로이트의 이름과 무의식, 정신분석이라는 단어 정도 밖에 몰랐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그것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 하루하루 전공과 교양과목들에 장애물을 뚫고 나가는 것에만 정신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회고해 보면 미국의 심리학 공부는 철저하게 기초적인 심리학 과목들을 철저하게 기반을 닦은 다음에 대학원에 치료자가 원하는 치료법과 치료기술 등으로 연결되어져 있었다는 것을 회상하게 된다.

치료자는 대학의 정보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분석을 했다. 여름 학기가 개강이 되고 그리고 롱비치 대학에서는 여름 학기의 학비가 50% 활인이 된다(학습 기간이 짧기 때문에)는 것을 알고 여름 학기에 자주 등장하는 과목들을 빼 놓았다. 그래서 여름 학기에 4 과목을 할 수 있었다(전반기 2과목 후반기 2과목). 그런데 한국인 동료 유학생들은 여름 학기에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고 자랑을 할 때 치료자는 여름 학기에 12 학점으로 학비를 절감한 것을 이야기를 해 주었을 그들이 깜짝 놀랬다. 또 다른 몇몇 학생들은 이미 여름 학기 개강 과목을 이수했기 때문에 여름에 받을 과목이 없었기 때문에 일을 하게 되었다고 실토를 했다.

치료자는 두 번의 여름 학기에서 과목들을 이수했기 때문에 3년 만에 졸업을 하고 캘리포니아 주립 로스앤젤리스 대학원에 무사히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원에서는 가족 치료를 선택을 했다. 가족 치료를 공부하면서 제이 헬리(Jay Haley: 주㈜: 참고)전략적 치료에 초점을 맞추었다. 헬리는 버클리 대학에서 치료 심리학을 전공한 교수로써 메릴랜드 의과대학 교수로 그리고 팔로 알토(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정신분열증 가족 연구 팀의 핵심 멤버로써 조현병 환자 가족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이중구족, 이중속박을 밝혀낸 연구팀의 핵심멤버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의 스승인 미국에서 최면학의 권위자인 밀턴 에릭슨(Milton Erickson)(주체성이론의 정신분석가인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이 아님)의 치료 기법을 연구하고 최면학에서 치료심리학을 개발한 전형적인 심리치료사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밀턴 에릭슨의 저서와 그의 치료 기법을 연구를 해서 쓴 3권의 저서(특이한 심리치료: 밀턴 에릭슨의 정신의학적 기법과 치료), 밀턴 에릭슨과 대화 Ⅰ권, Ⅱ권, Ⅲ 권, 그리고 그의 저서, 특이한 치료, 분가, 문제-해결치료, 심리치료의 전략, 최면의 치료와 고급 기법 등의 그의 저서를 모두 구입을 해서 철저하게 치료 기법과 치료 이론들을 연구를 했다.  물론 가족치료사들의 대표적인 미뉴친(Minuchin:주㈜: 참고)의 가족구조 이론과 그의 저서들과 탐독을 했다.

 2년 동안의 대학원 과정을 끝내고 귀국을 해서 부산교육대학의 학생생활 연구소에서 상담 실장으로 학생들의 문제들을 2년 동안 실전을 쌓았다. 2년 동안 대학 학생생활 연구소의 심리상담실에서 3 개의 성공적인 치료 사례를 논문을 써서 한국 심리학회지한국 가족 학회지 그리고 부산광역시 중, 고교 상담 교사 연수자료집에 연구 논문이 수록이 되었다.

첫 번째 사례는 한 부인의 치료 사례로써 산후우울증으로 3번의 정신병원 입원의 기록을 가진 37세의 이혼직전의 부인을 매주마다 부인과 남편을 교대로 약물 없이 3시간씩 6개월 동안 학생생활 연구소의 상담실에서 치료를 받아서 정상적인 가정생활로 복귀를 할 수 있었다(한국심리학회지 제 2권 제 1, 1989, pp. 105-118),

두 번째 사례는 30세의 결혼 5년째 부인으로 5살 아들이 있었다. 그녀는 두 번째 임신 6개월 때 태아가 사산 한 이후 6개월의 시점에서 공황장애로 한의원과 신경정신과 약물 치료를 받아보았으나 실패했다. 그 후에 발짝과 기절로 몇몇 동안 구급차에 실려 병원의 응급실에 실려가게 되었다. 빈도수가 점점 늘어가서 시도 때도 없이 공황장애의 공포 속에서 치료사에게 치료를 받게 되었다. 약물치료 없이 1주일에 2회씩 1회기 당 2시간으로 3.5개월 동안 제 15회의 치료 회기를 학생생활 연구소의 심리상담실에서 치료를 받아서 성공적으로 회복되었다(한국가족치료 학회지 제 3 , 1995, pp. 85-117).

 세 번째 사례는 고교 1학년의 여학생의 5년 동안의 도벽문제부모님을 교대로 3개월 상담을 한 이후에 여학생을 매주 1 2시간씩 치료 회기를 통해서 3개월 간 치료를 한 결과 도벽 문제는 깨끗하게 해결되었다. 2년 후에 추적 연구결과 그녀의 도벽 문제는 더 이상 등장하게 않았다(부산광역시 교육연구원, , 고등학교 상담교사 연수자료, 1995, pp. 58-75).

치료자는 이 2년의 기간 동안에 가족치료의 인턴쉽의 시험에 응시하기 위한 공부를 철저하게 했다. 물론 대학과 대학원 시절에 심리학 과목의 성적은 철저히 관리를 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지만 가족 치료에 대한 전공시험이 문제였다. 다행히도 캘리포니아 가족치료 학교의 인턴쉽에 합격을 해서 2년 동안 헐리우드 북쪽에 있는 가족치료 학교에서 20명의 인턴들과 함께 인턴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로 돈을 받고 치료실에서 미국인들의 상담치료를 하는 것에는 치료자에게 만만치 않았다. 그들이 최소의 비용을 지불(가족 치료 학교의 인턴들)하기 때문에 대화와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는 치료자를 환자들이 환영하지 않았다. 물론 인턴들은 캘리포니아주에 인턴 등록을 하고(등록된 인턴) 지도교수로부터 슈퍼비젼을 받아서 치료를 진행한다. 치료자는 동료 인턴들의 치료의 실제들을 따라다니면서 눈으로 보고 어떻게 치료를 진행하는지?를 관찰하고 배웠다. 치료자는 L.A. 아시아 태평양 카운슬링 센터에서 자원봉사로 L.A. 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의 정신적인 문제들을 상담하고 그리고 그 결과를 슈퍼바이져에게 지도감독을 받았다. 시간은 카운터가 되고 캘리포니아주의 수도가 있는 새클라맨토의 행동 과학실에 보고되어졌다.

이 시점에서 캘리포니아 주에 신청한 H1 비자(미국에서 전문인으로 일자리를 가져도 좋다 라는 인정 비자)가 승인이 되어 다행히도 치료자는 하프웨이 하우스( 4층 건물로 300명의 환자들을 수용)에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방을 제공받아서 치료자는 야간 근무를 지원을 해서 야간에 입원 환자들을 관리하고 돌보아주게 되었다. 그곳에서 입원한 한국인 환자들( 5-6명 정도)를 상담해주고 그 내용을 미국인 슈퍼바이져의 지도감독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도 간이 정신병원(이곳에서 악화 되면 큰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고 완화 되면 이곳으로 와서 돌봄을 받게 되는 지역사회 치료센터가 바로 하프웨이 하우스 제도이다)(상세한 것은 치료사의 정신병원의 블로그를 보라). 그곳에서 경험은 정신의학의 가장 값진 체험이었다. 그곳에서 모든 정신장애 환자들과 함께 생활 하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동고동락했다(그들은 악인이 아니고 너무 착한 자아가 없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더 붙여서 치료자는 가족치료 학교에서 지도교수들, 슈퍼버이져들의 치료 사무실을 방문하고 그들이 어떻게 상담실을 운영하는가? 하는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값진 기회였다. 치료자는 2년 동안의 인턴을 받으면서 한국에서 직접 치료 경험을 통해서 가족치료에서 정신분석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증세는 해결이 되는데 신체적인 불평들 즉 두통, 위와 장, 그리고 천식, 과민서 대장염 등의 세부적인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을 실감을 했다. 그리고 5년 동안의 가족치료는 이제 거의 마스터 단계가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시점이 인턴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인턴들과 가족 치료 학교를 방문하는 상담치료 전문가들을 통해서 대상관계 정신분석이 미국에서 인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2년 동안의 인턴 기간에 치료자는 학부 시절에 약물과 알코올중독이라는 과목을 이수한 것을 바탕으로 화학약물 의존 장애(chemical dependency)의 전문가 교육에 합격해서 6개월의 과정을 끝내고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신분석 쪽으로 책을 읽어가면서 최면학의 코스와 실기 과목이 개설되어 6개월 과정을 끝내고 최면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최면사가 되기 위한 것보다 정신분석의 출발이 최면에서 시작된 것을 알게 되면서 최면이 어떤 것인가?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나의 헛점을 모르고 도전하게 되면 백전백패이고 나의 헛점을 알고 이것을 보완해서 도전하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실제로 치료자가 유학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했는가?를 기술한 것이다. 지금 회고해 보면 치료자는 미국 생활을 시작할 때 국제학생과의 카운슬링 센터의 카운슬러를 1주일에 몇 회씩 4년 동안 꾸준히 찾아갔다. 그곳에서 치료자의 어려움들을 실토하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흔쾌히 치료자의 도움을 도와주었다. 그 카운슬러와 친밀한 사이가 되어서 졸업식 때 꽃다발로 축하를 받았고 졸업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들을 통해서 치료자는 렌트비가 싼(월세) 할머니 집을 소개 받았고 그녀의 집에서 그녀와 대화와 토론으로 2을 보냈다 그리고 또 장애인 할아버지의 집의 도우미와 청소 등으로 월세를 면제받을 수 있다.

미국에서 치료자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용을 조달을 했다. 야간 주유소에서, 편의점에서, 리커 스토어(술을 판매만 하는 업소) 등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실제 삶의 체험을 경험을 했다. 이러한 삶의 실제 경험들은 지금 치료사로써 나의 삶에 값진 경험을 제공해주었다.

  10년 동안의 미국유학을 끝내고 1992년에 귀국을 해서 부산의 부산수산대학에서 파트타임으로 심리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치료자는 한국의 실정이 전임강사 이상이 되면 공무원으로 이중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시간 강사직책을 선택을 했다. 미국에서는 교수는 자신의 강의 시간에 10분 일찍 출근해서 학생들을 면담 그리고 강의 후에 20분 정도 학생들의 면담을 끝내고 자신의 사적인 치료소에서 환자들을 치료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치료를 하지 않는 교수는 강단에 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반대라는 것에 많은 실망을 했다.

그래서 전임을 포기하고 심리문제연구소라는 사무실을 열어서 실전에서 고군분투를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을 했다. 이 선택은 현명했다. 명퇴 이후에 전문 치료사로써 어려움이 없이 잘 진행될 수 있었다. 전임강사로 들어가면 일시적으로는 편안하지만 정년 퇴임 후에 치료소를 개설하면 이미 늦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료자는 부경대학(수산대학이 공업대학과 통합으로 개명)에서 학생들에게 20년 동안 강의를 해서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물론 심리학과가 개설된 것이 아니고 교양과목으로써 심리학을 강의를 했다. 심리학이 선택과목이었지만 학생들의 입소문으로 강의실을 최고의 대형 강의실을 배정받았다. 100명 이상의 학생들이 강의를 듣기 위해서 수강 신청(4학년, 3학년 2학년 1학년 순서)이 늦은 2학년과 1학년들은 강의를 들을 수가 없었다. 특별히 정신분석학의 섹스학 강의는 최고의 인기였다. 20년 동안의 대학강의는 즐겁고 행복한 기간이었다. 물론 치료를 하면서 실전을 쌓아가는 것에서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치료자는 귀국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신분석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신분석 한가지만 올인 한 것은 아니었다. 졸업식영어(commencement) 시작, 출발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대학원을 졸업한다는 것은 이제 전문가로 인정을 해준다는 뜻으로 전문가들과 소통하고 논문을 쓴다는 뜻이지 그 전문분야를 모두 다 안다는 뜻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아라라는 말은 치료자에게 내 약점, 헛점을 먼저 알아라 그렇지 않으면 백전백패이다 라는 말에서 치료자는 정신의학에 대한 너무 미흡하고 기초적인 지식만 가진 치료자 자신의 헛점을 보고 나서 이제부터 본격적인 정신의학에 대한 공부다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먼저 모든 정신의학의 분야에 도전을 선포를 했다. 첫 번째가 불안증에 대한 공부였다. 중요한 것은 불안증에 대한 저명한 학자들의 저서들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불안장애 치료소를 개설해서 치료를 하고 있는 뉴욕 알바니 주립 의과대학 불안장애 치료소의 소장인 데이비드 바알로우(David Barlow, 2001: 주㈜: 참고)가 쓴 블안장애.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저서인 공황장애를 읽고 철저하게 탐색하고 사례들을 통해서 습득해 나갔다. 스텐포스 대학의 롤로 메이(Roll May, 1996, 1953: 주㈜: 참고)의 불안과 불안장애를 읽고 나서 그들의 연구를 종합해서 불안장애 심리치료 홈 페이지를 만들었다.

그 다음 단계로 우울증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뉴욕의과대학의 학과장인 캔코르(Cancro, 1988: 주㈜: 참고)가 쓴 우울증과 조증, 뉴욕의과대학 교수인 그린에이크(Greenacre, 1968: 주㈜: 참고)의 감정장애들, 여기에 하버드 의과대학의 벰포드(Bemporad, 1978: 주㈜: 참고)교수가 쓴 심각한 우울증과 그리고 가벼운 우울증, 여기에 더 붙여서 조증과 조울증의 프로이트의 걸작 논문의 분석을 샌프란시스코 의과대학 교수인 오가덴(Ogden, 2005: 주㈜: 참고)의 저서를 통해서 우울증의 심리치료 홈 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인지-행동치료에의 아론 백(Aron Beck, 1975, 1979, 1984, 1885: 주㈜: 참고), 불안장애와 공포증, 인지 행동치료, 인지치료와 감정장애, 성격장애의 인지치료의 저서들을 일고 인지-행동에 대한 공부를 했다.

뉴욕의과대학의 마스트슨(Masterson, 1981, 1988: 주㈜: 참고)의 참 자아를 찾아서, 나르시즘과 보드라인장애로부터, 라크맨(Rackman, 1988: 주㈜: 참고)의 공황장애 그리고 린드맨(Lindemann, 1989: 주㈜: 참고)공포증의 핸드북 등으로부터 공황장애와 공포증 심리치료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위스콘신대학의 불안장애 치료소의 소장인 존 마샬(John Marshall. 1994) 대인공포증 등을 읽고 정리를 해서 대인공포증 홈페이지 그리고 이미 전공을 한 가족 치료로부터 가족 치료 홈페이지 그리고 부부치료 홈 페이지를 만들어 나갔다.

이번에는 그 다음 차례로 신경증 치료에서 성격장애 치료로 확대시켜 나갔다. 뉴욕의 코넬 의과대학의 교수인 정신분석학자인 오토 컨버그(Otto Kernber) 5, 뉴욕대학의 마스트슨(Masterson)의 저서 6, 일리노이 의과대학의 지오바치니(Peter Giovacchini)의 저서 7, 샌프란시스코 의과대학의 오가덴(Ogden)의 저서 5권 등으로 성격장애 홈 페이지와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서 조현병에 가까운 자아분열 장애들을 다루는 홈 페이지인 보드라인 홈 페이지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심리신경면역학(PIN)을 연구하기 위해서 노스웨스턴 의과대학의 페트슨의 알레르기 질병의 저서들(Grammer et al., 1989: 주㈜: 참고)을 탐독해 나갔다. 컬럼비아 의대의 윌슨(Wilson et al., 1989: 주㈜: 참고)의 심리신체 질병, 시카고 학파의 핵심 인물인 알랙산드(Alexander, 1948, 1949: 주㈜: 참고) 심리신체 의학,  심리신체 장애의 치료연구, 스텐포드 의과대학의 웨이너(Weiner, 1989: 주㈜: 참고)교수의 심리생물학과 인간의 질병을 읽어나갔다. 이 들은 특별히 심리신체 의학, 심인성질환의 치료로써 뉴욕학파 그리고 시카고 학파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서적들을 읽고 심리성질환 홈 페이지 그리고 이후에 좀 더 구체적으로 고질병인 신체적 질병인 아토피, 비염, 천식 등의 심리치료를 하고 있는 전문가들의 저서를 통해서 재발하는 특이질병(고질병)의 홈 페이지를 만들 수 있었다.

더 붙여서 아토피에 대한 최근의 세계적인 학자들 중에 한 사람인 영국의 노팅험 의과대학의 교수인 윌리엄(Williams, 2000: 주㈜: 참고)이 유럽과 전 세계의 아토피와 피부염 학자들의 26편의 논문을 모은 논문집인 아토피 피부염: 원인과 예방과 치료라는 저서를 통해서 아토피의 심리치료 페이지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최근에 미국에서 지능이 높은 중, 상류 청소년들의 정신장애로 등장한 거식증과 폭식증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 세계적인 거식증 치료의 대가인 브룩스(Bruck: 주㈜: 참고)(그녀는 독일에서 정신과 의사로 미국에 이민)의 거식증 환자들과 대화, 황금의 상자(소녀들의 거식증 원인) 그리고 뉴욕의과대학의 사워(Sours: 주㈜: 참고) 교수의 거식증의 저서인 거식증 증후군: 대상의 바다에 빠져 굶어 죽는 사람들 그리고 필라델피아 어린이 가이던스 치료소의 거식증 치료 전문가들의 저서인 미침, 혼란과 폭력(1991: 주㈜: 참고), 가족 치료의 대가인 미뉴친(Minuchin)의 거식증 치료와 가족 그리고 뉴욕의과대학의 윌슨(Wilson)과 민츠(Mintz)와 호간(Hogan)의 공동저서 뚱뚱함에 대한 두려움의 저서(1983)를 읽고 거식증과 폭식증의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식이장애자들의 부모들이 치료자에게 자녀들의 식이장애를 호소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문의가 증가하고 있다. 특별히 외국에 유학중인 우리나라 여자 대학생들이 거식증과 폭식증의 문제를 e-메일로 문의가 증가하고 있다(치료자의 홈페이지를 보라).

정신의학의 모든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는 각오로써 자폐증의 대가인 영국의 프란시스 투스틴(Frances Tustin)의 저서 자폐증과 어린이 정신증 그리고 신경증안에서 자폐증적 요인과 미국 죠지 와싱턴 의과대학의 그린스펜(Greenspan, 1997: 주㈜: 참고)의 어린이의 자폐증 치료를 읽고 자폐증에 대한 지식을 습득을 했다(그러나 자폐증 치료는 제외).

치료자는 우리 사회에서 거의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인 사건과 사고들이 심리학적인 문제와 관계된 것들을 스크랩을 해서 치료자의 메일 박스에 저장(2020, 7, 4일 현재 752개 저장)을 해서 글을 쓸 때 증거자료로 사용한다.

더 붙여서 자료 수집에만 거친 것이 아니고 심리치료와 정신장애에 대한 영화들을 수집해서 영화 속의 주인공의 심리분석 홈페이지를 만들었다(32개의 영화들이 포함). 이 영화들은 조현병을 극복하고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프린스톤 대학의 존 내시(John Nash)의 조현병을 그린 아름다움 마음 그리고 호주의 천재 피아니스트로 정신분열증과 조울증을 함께 가진 데이비드 핼프캇(David Helpgott)의 치료 회복의 과정 그린 샤인 그리고 세계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영화와 장기 공연 연극으로 기록을 세운 연극 신의 아그네스와 에쿠우스, 미국의 백만장자의 손자로 태어나서 청소년이 되어가면서 조현병으로 살인자가 될 때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 세비지 그레이스 등의 정신장애자들의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 한 것들이 포함되어져 있다. 치료자는 20년 동안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과제물로 자신의 꿈을 분석해서 무의식적인 자아의 목소리를 듣게 하고 그리고 치료자가 지정한 정신장애 영화와 정신장애 걸작품들의 주인공의 심리분석에서 학생들의 우수한 작품들이 그 영화의 분석과 함께 소개되어 있으니 참고로 하면 정신장애의 가르침과 학습에 도움이 되도록 홈페이지로 남겨 놓았다.

치료자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할 때 반드시 공부한 내용을 노트로 남기는 버릇을 만들어갔다. 이것은 미국유학 생활 시절에는 시간이 없었고 공부를 할 때 남겨진 정리된 노트뿐이었기 때문에 이후에 남아 있는 증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반드시 읽고 이해한 것을 번역으로 노트로 남기는 버릇을 만들어나갔다.

드디어 한국에 돌아와서 정리를 하면서 머리 속에 이해로 남아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필요할 때 활용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고 300페이지 이상의 책을 읽을 때 그 내용의 핵심들을 50페이지 혹은 60페이지로 요약으로 남기다가 그 다음 그 책들을 전부 번역해서 자료로 남기는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고로 위와 같은 특정 분야의 공부를 해 나가면서 그 때 그때 모은 자료들을 통해서 특별한 홈페이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치료가가 연구하고 공부한 흔적이고 그 결과가 흔적으로 탄생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 손으로 직접 탄생한 홈페이지가 정신의학의 전체를 다루게 된 21개의 홈페이지들이 바로 그들이다(각각의 장애들에 대한 세부적인 것은 21개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세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터넷의 홈페이지 시대가 시들어지고 이번에는 블로그 시대가 온 것을 알고 2015, 1월부터 연구하고 치료를 한 위의 사례들을 중심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블로그는 평범한 일반사람들을 위한 것보다 전문가들을 위한 블로그로 나의 발자국을 따라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고증학적으로 학자들의 이름과 년도 그리고 내용들을 연구 논문의 형식을 빌려서 쉽게 쓴 글들이기 때문에 영어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심리학에 조예가 없는 사람들이 읽기 어려운 점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총 362의 블로그의 글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제 정리를 해보자 치료자가 대학에서 4년 동안 배운 심리학은 주로 행동주의 심리학으로 주로 행동학적인 치료 이론과 기법들이었다. 여기에 인터뷰 과목 때 학부에서 한 한기 동안 게스탈트의 이론과 현장 실기과목에서 그리고 대학원에서 헬리의 전략치료법에서 최면학의 이론과 기법 연구에 이어서 드디어 인턴시절에 서 취득하게 된 최면사 자격증이다. 여기에 첨가되어진 알코올과 마약 중독 자격증을 그리고 5년 동안 가족 치료의 전공 등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그 이후에 정신분석으로 15년의 투자정신분석 한가지만 올인 해서 모든 정신과적인 문제를 치료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정신의학의 전체로 확대 시킨 것이다.

일반의학은 내과, 외과 등의 전공분야 한가지로 전문가가 될 수 있지만 정신의학은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불안장애 한가지만 가진 것이 아니고 우울증에 성격문제 등이 겹쳐서 마치 두부의 잘라낸 부분처럼 우울증, 불안증 등의 한가지만 가진 환자가 거의 없었다. 고로 한가지 치료기법으로는 환자들의 치료를 성공적으로 치유를 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회고해 보면 치료자가 유학생활에서 공부를 하면서 내 허점을 모르고 도전을 하면 백전백패라는 말에서 치료자가 헛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가? 하는 것을 소상하게 기술을 했다. 이것이 바로 행동 치료학에서 사용하는 체계적 감각박탈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포증의 치료에서 인기가 있는 이 치료는 장애물의 목표를 정하면 절대로 포기 하지 말고 조금씩 불안을 낮추면서 그 목표에 수십 번을 접촉함으로써 그 문제를 극복한다는 조직적 체감법(감각박탈) 혹은 조직적 둔감법이 바로 치료자가 사용한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먼저 치료자는 복병이 등장하면 그것을 시인하고 내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주변에서 필요한 도움을 요청한다 그 다음에 극복의 방법들에 몰두한다. A방법, B방법. C방법들의 방법들로써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서 해결하는 방법은 조직적인 체감법(감각박탈)에서 목표를 정하고 조금씩 접근하면서 수없이 도전해서 불안을 감소시켜 나가서 마지막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과 유사했다. 절대로 장애물을 피하지 않고 직면으로 수십 번 도전해서 끝내는 해결 방식이 바로 치료자의 이 기본 철학이 되었고 이후에 모든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적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의 핵심은 정신분석뿐만 아니라 행동치료에서도 이름을 달리한 것이지 비슷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모든 치료의 핵심으로 이것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치료자가 인턴을 받으면서 약물과 알코올 중독 치료사 자격증의 공부를 하면서 실제 AA모임(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 전문가가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알코올 중독자들의 자발적인 모임으로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은 전화를 걸어서 한동안 통화를 하면서 알코올을 마시고 싶은 욕구를 말로서 표현함으로써 극복해나가는 방법을 사용하는 민간 단체)에 직접 참가해서 그곳의 실체를 알아오라는 지도 교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 치료자가 L.A. 시청의 한 쪽 코너에서 AA 사무실로 AA를 운영을 하고 있는 사람을 면담하고 그들의 실체를 연구 하면서 치료자는 AA의 십계명의 저서를 숙독하게 되었다. AA 모임의 10개명의 제 1 나는 알코올 중독자 입니다라고 인사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코올 중독(코카인 중독, 마리화나)(학부에서 이 과목을 이수)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이것은 바로 알코올 중독자는 비틀거리면서도 절대로 자신이 술에 취하지 않고 이상이 없다고 말을 하는 것으로 평소에 수없이 많이 보아온 장면들이었다.

그들의 첫 번째 치료의 단계는 바로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야 치료의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모든 정신장애의 첫 번째 단계이다. AA모임은 그들이 서로 만나서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할 때 바로 구호를 붙이는 것이 나는 알코올 중독자 입니다.”라고 인사를 함으로써 음주의 욕구를 컨트롤해나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치료자가 내 헛점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내 문제의 해결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치료사의 나의 헛점을 알고 내 약점을 수정해서 도전을 하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금과옥조가 된 것이다. 이 기법이 치료자가 10년 동안의 미국유학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게 된 핵심 비결임을 지금은 확고하게 믿고 있다.

여기에서 치료사의 발자국을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치료자가 살아오면서 어려운 장애물들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을 했는가? 라는 것을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면서 행동치료법, 가족치료법, 최면 치료법, 게스탈트 치료법, 정신분석 치료법 등의 장점들을 습득으로 각각의 치료기법들의 모든 장점들을 모두 습득을 해서 정신장애들에 치료에서 응용하고 동원해야 치료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즉 정신분석 치료를 한다고 해서 다른 치료기법들을 무시하고 정신분석 한가지 만으로 모든 치료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각각의 치료는 장점들을 다 가지고 있다. 그들의 치료에서 핵심 장점들을 모두 동원을 하는 것이다. 고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경제 원칙이 바로 정신장애들의 치료에서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심리치료를 하는 사람들은 이론과 치료기법의 개발에서 완전무장이 되어야 치료의 성공비율을 높일 수 있다는 말이다. 치료사로써 돈과 명예에 우선하지 말고 진실로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매력을 잃지 않고 죽을 때까지 책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단단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는 3살 먹은 어린이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고 했다. 성서에서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고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라는 명언들과 의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있다명언들이 정신장애의 치료사로써 피부로 절감한 명언들이다.

조현병 치료의 성공적인 요소들의 두 번째의 주제인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의 보호자 즉 어머니의 극단적인 지지가 없이는 치료에 성공할 수 없다는 문제로 들어가 보자.

조현병은 청소년의 초반에서 성인의 초반기에 가장 많이 발생하는 가장 심각한 정신장애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환자들은 학생들이 많은 편이다 고로 경제적인 이유로 보호자가 치료 비용을 전담하기 때문에 부모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이는 치료의 성공을 거두기가 어렵다는 점이 이 요소의 그 핵심 문제이다.

 6개월의 치료 계약을 했기 때문에 치료가 40시간을 넘어가면 치료 효과가 눈에 보이게되는 시점에서 그리고 가장 주요한 핵심은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는 사람이 계속해서 치료를 받고 싶다고 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심리치료에 인식 부족과 정신분석에 이해 부족으로 치료를 종결해버리고 6개월의 치료에서 치료가 끝나버리는 것 때문에 눈 앞에서 치료 효과를 보면서도 안타깝게 치료를 종결하는 경우를 수 없이 경험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를 이해시켜서 정신분석 치료의 핵심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치료를 받는 자녀들은 스스로 치료 효과를 인정하고 좋아진다고 말을 하는데 그들이 치료 비용을 지원하는 어머니에게 그러한 소통을 상세하게 전달하지 못해서(의사소통 능력의 부족) 치료를 종결해버린다는 것이다.

치료자가 어머니에게 면담을 위해서 전화 상담을 요청을 하거나 혹은 인터뷰 면담을 초대를 할 때 그들은 전화를 거부하거나 혹은 인터뷰 면담 그 자체를 거부하게 됨으로써 부득이 치료를 종결하는 아픔들을 수 없이 경험을 했다. 아래에서는 치료를 받는 사람도 그리고 치료를 하는 사람도 안타까움으로 발을 동동 구르게 했던 경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사례로 W군은 치료사의 홈페이지에서 동성애 때문에 치료를 요청을 하고 6개월 계약으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는 많은 섹스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과학공원에 여행 때 화장실에서 소변을 하는데 옆에서 소변을 하고 있는 한 남학생의 페니스가 너무 큰 것에 놀래서 자신의 페니스를 비교한 이후부터는 절대로 자신의 페니스를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남자 화장실에서 반드시 대변실에 가서 소변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는 소변시에는 반드시 남자 대변실에서 남들이 자신의 페니스를 보지 못하게 숨어서 소변을 했다고 털어 놓았다.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으러 오기 이전 1년 전에 그는 페니스 확대 수술을 위해서 지방의 소도시에서 서울에 가서 한 비뇨기과 의사에게 150만원을 주고 페니스 확대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수술 후에 부작용의 체크로 다음 날에 검진을 받을 때 그가 페니스의 확대수술에 대한 불안감으로 확대수술을 한 것이 혹시 부작용이 생기면 어떻게 하는가? 라고 그 비뇨기과 의사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 40대 후반의 의사가 노발대발해서 내가 의사경력이 20년이 넘어가는데 나를 의심하는가? 라는 말에 놀래서 그 다음날에는 그 비뇨기과를 찾지 않고 다른 비뇨기과에 가서 성기 확대 수술을 이야기를 하면서 섹스 문제를 첨가를 했을 때 그 의사가 컵을 주면서 화장실에 가서 정액을 받아 오라고 했다. 정액을 어떻게 가져오는가? 라고 물었을 때 자위행위를 해서 정액을 컵에 받아오라고 하는 말을 듣고 기절초풍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어떻게 자위행위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고 실토를 했다. 그 이후에 4개월 만에 그는 스스로 어떻게 자위행위를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섹스 문제는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3살 아래의 여동생과 엄마 아기 놀이를 하면서 여동생이 엄마 역할을 하는 오빠의 유방을 빨게 되었는데 그 시점에서 유방이 약간 붉어졌다고 했다. 야회학습 후에 사워장에서 사워를 하는 것을 본 어머니가 그에게 너의 유방이 왜 붉은가? 라고 물었을 때 옆에서 여동생이 울면서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한 장난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의 엄마와 아기 놀이가 들통이 났다고 했다.

W군은 그 이후에 남자가 그의 유방을 빨아주는 상상을 하면서 섹스 흥분을 하는 것 때문에 인터넷에 찾아보았을 때 동성애라는 말을 듣고 고민을 하다가 치료자의 동성애 치료의 홈 페이지를 보고 치료를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섹스 흥분은 유방을 빨아주는 남자에 의해서 흥분은 하지만 직접 섹스는 이성과 섹스를 하는 상상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고로 그는 동성애가 아니다 라는 진단에 안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최초의 섹스 흥분이 여동생이 자신의 유방을 빨아준 것에서 뇌의 회로가 연결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남자가 그의 유방을 빨아주는 섹스 흥분으로 연결되었는가? 하는 것은 분석을 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여동생은 근친상간의 두려움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여동생이 아닌 유방을 빨아주는 사람을 남자로 바꾼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문제는 섹스 문제가 아니고 대인관계의 문제임이 분석으로 드러났다. 그는 동료들과 관계가 거의 없었다. 그가 고교 1학년 때 동료들과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그는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하려고 했다. 그는 어머니의 배려고 필립핀에 유학을 가서 1개월 만에 귀국을 해버렸다. 동료들과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지속적으로 그들과 관계에서 불편함과 고통과 과도한 긴장에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귀국 직후에 한 종합병원에서 심리치료사로부터 심리치료를 4개월 동안 받다가 그만 두었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어 보았을 때 여성 심리치료사에게 그의 가장 큰 고민인 섹스 문제를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 이후에 1년 만에 치료자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의 어린시절의 분석은 맞벌이 부모님 때문에 친척의 손에서 혹은 이웃 아주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먹는 것과 대소변 그리고 병들었을 때 병원에 데리고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양육이었다. 이후에 영아원, 유치원에서 돌봄을 받았다. 특별히 그는 돌봄의 도우미들이 조용하고 착하고 말이 없는 어린이들의 선호에 맞추어져 성장을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좋은 말로 순둥이였다. 말을 잘듣고 눈치가 빨라서 양육자들의 좋아하는 스타일로 성격이 형성된 것이었다. 그는 착하고 말을 잘듣고 모범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사춘기의 시점에서 동료들과 갈등을 해결해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고로 자퇴로 혼자서 방에 칩거하게 된 것이 밝혀졌다. 그는 동료들과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가족들의 비정상적인 면들을 피드백을 받지 못한 것이 드러났다. 대표적인 것은 그가 고교 1학년 때까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한 방에서 잠을 잤다고 실토를 했다. 방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3개의 방을 가진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는 동료들과 친밀관계에서 섹스적인 정보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치료 회기에서 그것이 분석으로 밝혀졌을 때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왜 어머니는 3개의 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가 고교 1학년까지 모든 가족들이 한방에서 생활 하도록 방치를 했는가? 항의를 했을 때 어머니는 너희들이 부모님과 함께 잠을 자기를 원하지 않았느냐? 라고 오히려 W군 탓으로 돌리는 것에 치료자가 경악을 했다.

W군은 자신의 목소리가 없었다. 그냥 눈치를 보고 시키는 것을 그대로 하는 청년이 되었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로써 표현하는 훈련을 하면서 치료시간에 다루었던 내용의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하도록 하면서 부모님이 경청하도록 W군의 이야기를 들어주도록 하는 어린시절의 발달에서 결함들을 수정해나가면서 많은 진전이 있었다. 그는 군입대 통지서를 받고 6개월의 연기를 해서 치료에 전념으로 대인관계를 개선한 이후에 군대에 가서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점점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되면서 자신의 양육의 잘못된 부분들을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갈등이 잦아지게 되면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 갈등에 놀래서 두 번째 6개월의 치료 계약을 거부했다. W군은 치료를 받고 있으니 부모님에게 계속해서 치료를 받게 해 달라고 요청을 강력하게 했지만 어머니는 거부를 했다. 지금까지 6개월의 치료 기간 동안에 변화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치료자가 W군에게 어머니의 컨설팅을 요구를 했지만 어머니는 4년 전에 종합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았던 곳을 추천하면서 그곳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제의했으나 W군이 거부했다.치료를 종결이 되었다. 아버지 역시 치료사와 전화 통화에서 아들 W군이 왜 진전이 없는가? 라고 이야기를 했다. 치료자가 W군의 대인관계를 소상하게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거부했다.

W군은 치료 종결 이후에 연락이 단절되었다. 그러나 몇 개월 전에 그가 군에 입대를 한 후에 지금은 상병으로 전역이 7개월이 남아 있는데 지금도 선생님이 심리치료를 하고 있는가?라고 군대 병영에서 전화를 걸게 되었다고 했다.치료자는 지금도 치료를 하고 있다고 했을 때 W군은 전역 이후에 다시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치료자가 부모님이 치료비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6개월로 치료가 끝이 났는데 부모님이 지원을 해주겠느냐? 라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이 아르바이트로 치료 비용을 마련하겠다고 하면서 안부 전화를 했다.

두 번째 사례는 약 10년 전의 사례로 초등학교 6학년 A군의 어머니가 치료자의 홈페이지를 보고 치료자에게 의뢰를 해서 6개월간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는 친구관계가 거의 없었다. 부모님이 그의 대인관계 때문에 치료를 의뢰한 것이었다. 그는 관계를 하고 싶다는 의지가 없었다. 자아분열 성격장애자였다. 대인공포증은 관계를 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치료를 받으러 오지만 자아분열은 관계를 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야기를 하기를 싫어했다. 말을 하기 싫어했기 때문에 항상 치료자가 물어 보고 대답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어쩌다 말을 할 때도 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서 버벅거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엘리트로 아버지는 대학교수이고 어머니는 미국에서 8년 동안 그래픽 디자인을 한 유학생으로 귀국해서 우리나라의 대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컨설팅에 특별히 아버지가 치료자에게 특별한 부탁으로 A군에게 심리치료를 받는다는 말을 하지 않도록 당부를 했다. 혹시 그가 치료를 거부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머니는 특별히 A군이 치료 도중에 거부하면 대신에 어머니가 나와서 나머지 시간에 상담치료를 받도록 배려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A군은 사춘기의 시점을 지나가는 6학년의 학생이지만 아직도 섹스 욕구 혹은 이성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사춘기의 발달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A군과 대화에서 치료자가 마음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A군의 마음이 치료자에게 반사되어 치료자가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별히 그는 친구들과 관계를 왜 해야 하는지? 를 모르는 학생이었다. 그는 대인관계의 수준이 어느 정도 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한 개의 예를 아래에서 설명해보기로 한다. 이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패쇠적인가? 를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한 반에 27 명의 6학년 동료들이 모두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데 그 자신과 또 다른 한 학생만이 휴대폰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어 보았을 때 그는 부모님이 휴대폰을 사주겠다고 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 이유는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에게 전화를 걸어올 친구도 없고 그리고 그가 전화를 할 친구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부담이 되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치료는 대화를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었다. A군에게 대화를 하면 경험들이 분류되어지고 정리되어지면서 잡다한 고민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배우는 경험을 말로써 표현하지 않으면 그 경험들이 머리 속에서 분류되어 저장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과 관계에서 사용할 수가 없어서 죽은 경험이 된다는 것을 강조를 했다. 삶에서 배운 경험들을 말로써 표현하게 되면,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로부터 피드백으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재조정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고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지각과 경험을 수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를 해 주었다.

A군은 머리가 좋은 학생으로 이해력을 빨랐다. 치료 회기 시간은 그가 일상에서 1주일 동안 있었던 이벤트들을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 시작을 했다. A군은 점차로 이야기를 하는 빈도수가 많아지고 그리고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5분에서10분 정도로 길어졌다. 치료가 진행되어가면서 그가 여름 방학 때 그의 가족과 서울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이모네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펜선에서 3 4일로 여행을 한 것을 소상하게 이야기를 약 15분 동안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점점 A군과 대화에서 치료자가 초반기에 답답하게 느껴지는 느낌들은 조금씩 사라지고 그와의 대화가 즐겁고 재미있게 변화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A군은 추석 명절에서 연휴가 겹쳐져서 공휴일 다음날을 가정 학습의 날로 학교에서 허락을 받아서 총 6일 동안 추석을 보낸 것을 소상하게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남동생이 좋아하는 강아지 한 마리와 남동생 그리고 A군이 함께 아버지가 운전을 해서 혼자 원룸에서 살고 계시는 외할머니를 방문해서 그곳에서 합류한 이모네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하고 그리고 그 다음 날에 승용차를 타고 귀가 하면서 보낸 즐겁게 보낸 이야기들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히 추석 이후의 연휴에서 인터넷에서 알게 된 다른 3 가족들과 함께 1 2일로 한 목사님 집에서 포도농장을 방문한 이야기를 소상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날 저녁에는 목사님 집에서 3가구의 가족들이 함께 불고기 파티를 하고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목사님이 운영하는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서 상자에 넣어주고 목사님에 제공하는 포드를 싫도록 먹었다고 했다. 저녁 때 집으로 출발 할 때 목사님 집에서 주는 포도식초를 한 병씩 선물로 받아왔다고 했다.  치료자가 함께 한 두 명의 가족들 중에 동료들이 없었는가?라고 물어 보았을 때 다른 한 가족 중에서 같은 6학년 여학생이 한 명이 있었지만 관심이 없었다고 쑥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한달 후에 개천절의 휴가와 그 다음의 체험학습의 날로 4일간 연휴에서 어머니가 인터넷에서 알게 된 가을 지역 축제 행사에 어머니의 친구네 2 가족들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참가한 1 2일의 이야기를 소상하게 했다. 저녁에 펜선에서 여자들은 한쪽 방에서 남자들은 다른 쪽 방에서 기숙한 것과 특별히 농촌풍경에서 허수아비와 지역 축제에서 잡은 빙어 튀김이 맛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같은 나이 또래의 어린이가 없고 모두 유치원 학생이어서 서운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이제 평균 20분 정도 그리고 최대로 30분 정도로 혼자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6개월의 제 1 차 치료 계약의 기간이 다가 오면서 A군은 스스로 휴대폰 사달라고 해서 부모님이 휴대폰을 사주었다고 치료자에게 자랑을 하면서 치료자의 휴대폰에 자신의 전화 번호를 입력하도록 요구를 했다. 그리고 스스로 과거에 거부했던 학원에 보내달라고 해서 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치료자는 다시 6개월의 재계약으로 계속해서 치료를 받도록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반대를 했다. 6개월의 치료과정에서 눈에 띄게 A군이 변화가 없다고 불평을 했다. 치료자는 A군이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편안하고 그리고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즐겁게 하게 된 것은 지적을 했지만 아버지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초반기에 A군이 치료 계약을 해지만 중간에서 치료 거부를 할까 걱정을 했는데 A군이 치료실에 나오는 것에 거부감이 없이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것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A군의 제 1단계 치료가 끝났으니 이후에 다시 기회가 되면 찾아오겠다고 하고 치료를 했다. 부모님이 A군의 자아분열형 성격장애에 인식의 부족으로 치료가 종결된 아쉬움이 남게 되었다.

세 번째 치료 사례는 10년의 사례로써 인터넷에서 자주 소개를 했던 미국의 4년간 유학생활에서 조현병이 되어 10년 동안 약물 복용을 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치료자의 홈페이지를 보고 치료를 의래 하게 된 30대의 Y군의 이야기이다. 그는 치료 회기 초반기에 거의 말이 없었다. 물어보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아침에 먹은 식사의 메뉴를 이야기를 하는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일부러 말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고 그의 조현병 약물이 감정을 억압하고 생각을 억제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하루에 아침에 5알 그리고 저녁에 5알씩 약물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물었을 때 21라고 대답을 했다. 나중에 그의 어머니에게 확인을 한 결과 그는 31이었다. 그는 시간의 감각이 중지된 사고의 장애로 심각한 만성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20시간 정도가 지나가면서 조금씩 그의 기억이 회복되어져 갔다.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명문 대학을 졸업한 어머니로부터 집에서 학습을 하다가 학대를 당한 것이 밝혀졌다. 어머니는 Y군을 빨리빨리 따라오지 않는다고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렸다 A군은 팔과 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던 것을 회상을 했다. 학교에서 동료들이 팔에 왜 멍이 들었는가? 라고 물었을 때 넘어져서 다쳤다고 변명을 했다고 털어 놓았다.

고교 1학년 때 부모님에게 떠밀려서 뉴욕에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부모님의 생각이 70%였고 자신의 생각이 30%였다고 토로 했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재난 그 자체였다. 그 학교에 한국 유학생들이 없었느냐? 라는 질문에 약 30명 정도가 있었지만 그들과 접촉을 하지 않고 혼자서 생활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미국유학 4년 동안에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실토를 했다. 시험은 어떻게 했느냐? 라는 질문에 사지선다형으로 그냥 적당하게 시험을 쳤다고 했다 그런데 졸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시점에서 그는 환청으로 기계소리가 들리게 되었고 귀국으로 대학병원에서 입원해서 4개월 치료 후에 퇴원으로 지금까지 10년 동안 약물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부모님의 강압으로 한 공장에 취업을 해서 3개월간 일을 했다고 털어 놓았다. 50대와 60대의 2사람과 Y군이 함께 어떤 출판사에서 찍어낸 책들을 묶어서 보내는 작업을 했지만 그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결국은 해고를 당했다고 털어 놓았다.

조금씩 기억이 회복되고 감정이 되살아가면서 Y군은 아버지가 조간 신문을 받아보는 것을 읽어보고 치료실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는 정도로 발전을 했다. 그런데 중간에서 한 개의 이벤트가 발생을 했다. Y군이 그 출판사의 창고에서 책을 발송하는 작업을 하면서 겨울철이어서 외투를 종이 가방 안에 넣어서 창고에 가져가서 옷을 옷걸이에 걸어 놓고 그리고 집으로 귀가할 때 그 종이 가방이 고급스러워서 그것을 재활용하기 위해서 빈 종이 가방을 들고 집에 왔을 때 아버지가 그것을 보고 이유도 없이 Y군의 뺨을 갈긴 것을 토로 하면서 눈물을 흐렸다. 치료자가 왜 아버지가  그의 뺨을 갈겼는가? 라는 질문을 했을 때 Y군은 또렷하게 아버지가 이웃사람들에게 아들 Y군이 돌 아이 행동을 한다고 창피한 것 때문에 맞았다고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왜 빈 종이가방을 들고 왔느냐? 라는 것을 물어보지도 않고 아들 Y군이 정신이 돌아서 돌 아이가 되어 빈 종이 가방을 들고 다닌다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고 처벌을 한 것이었다. 치료자가 왜 그 빈 종이 가방을 들고 집에 갔는가? 라고 물었을 때 Y군은 그 종이 가방이 고급스러워서 그것을 그 다음에 사용하기 위해서 들고 갔다고 했다. 정신이 돌아서 들고 다닌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한 사례는 가족구성원들 사이에 대화가 없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어린시절부터 소상하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고 성장한 Y군의 발달 과정이 소상하게 분석으로 밝혀졌다.

두 번째 사건은 어머니와 갈등이 폭발했다. Y군이 자신의 침대 옆에 놓아둔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Y군은 치료실에 오면서 늘 모자를 쓰고 다녔다. 어머니에게 모자를 보지 못했는가? 라고 물었을 때 어머니는 네가 정신이 빠져서 돌 아이가 되어 이제는 모자로 어디에 놓아두었는지?를 모르는가? 라는 말에 분기탱천해서 어머니에게 씨발년아! 네가 그것을 치우지 않았다면 누가 그것을 치웠겠느냐?”라고 욕설을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어머니에게 씨발년이라고 욕설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Y군이 재발이 징조라고 치료자에게 항의 전화를 했다. 치료자는 오늘 Y군이 치료실에 나오는 날이기 때문에 체크를 해 보겠다고 대답을 했다.

치료실에 나타난 Y군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치료자 어머니의 항의 전화를 받은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와 갈등의 자초지종을 물어 보았다. Y군은 분명히 자신이 침대 옆에 그 모자를 놓아두었는데 어머니가 그것을 다른 곳으로 이동을 시켰음이 분명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모자가 침대 밑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어머니가 숨겼다는 것이 Y군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치료자는 Y군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싸울 때 서로 씨발년아! 라고 아버지가 욕설을 하면 어머니 역시 씨발새끼야! 하고 똑 같이 서로 쌍욕으로 부부 싸움을 한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었다. 부모님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이 자식이 보고 배운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또 한가지의 사건이 터졌다. Y군이 조금씩 자아를 찾아가면서 자신의 용모와 옷차림에 관심이 생겨나게 되었다. Y군이 자신의 얼굴을 자주 쳐다 보면서 최근에 그의 눈썹을 손질을 했다. 어머니는 Y군의 그러한 행동을 증세의 재발 혹은 악화로 보았다. 치료자가 볼 때 특별히 눈썹의 손실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고 표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치료자에게 눈썹을 이상하게 손질하는 것이 재발의 증세이고 그리고 어머니이게 씨빨년이라고 욕설을 하는 것이 재발의 증세의 증거라고 항의를 했다. 치료자는 눈썹은 일반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는 아니고 그냥 눈썹을 손질한 것이 정신장애 때문에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어머니는 단호하게 치료를 거부했다. 6개월의 재계약을 거부했다.

Y군은 계속해서 약물을 잘 복용하고 있었고 특별히 불안하거나 불면증 혹은 과도한 긴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안정된 정상적인 행동으로 몸과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것은 지금까지 무관심한 자신의 자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증거였지만 어머니가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다. 치료자는 다시 6개월의 재계약이 이루어지면 Y군을 집에서 원룸으로 빼내서 부모님과 갈등 관계에서 Y군을 차단하기로 Y군과 약속을 했었다. 그는 치료사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겁고 거부감이 없고 계속해서 치료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치료는 종결이 되었다. 부모님의 정신병을 가진 아들에 대한 주의사람들의 시선에서 Y군이 희생이 된 것이 분명했다.

네 번째 사례는 인터넷에서 몇 번 소개를 했던 24세의 V군으로 그는 8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최고 종합병원 신경정신과 과장으로부터 진단을 받아서 오전에 4알 그리고 저녁에 4 알씩 7년 동안 약물을 복용해오면서도 실제 자아는 40%(그의 표현) 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고 했다. 치료자에게 오기 1년에 군대에서 전역 후에 3년 동안 사귀어오던 같은 대학에 CC 커플인 여성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절교를 선언하고 나서부터 약물을 계속해서 복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복학을 위해서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아가 99%(V군의 표현) 작동하지 않았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우리나라에서 앞의 대형 종합병원과 쌍벽을 이루는 대형종합병원의 신경정신과  과장에게 그 동안의 약물로 40%의 효과를 이야기를 하면서 그 신경정신과 과장님이 직접 V군을 상담 치료를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으나 그 정신과 의사는 자신은 약물치료를 하기 때문에 같은 병원에서 정신과의사로 근무하다가 개인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xx 정신과 의사를 소개 받아서 1주일에 1 50분으로 20만원의 치료비용을 지불하고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보았으나 효과는 99%의 무용지물과 똑 같았기 때문에 그만 두고 다시 그 병원의 정신과 과장님으로부터 지금은 효과가 없으니 약물의 처방을 받고 나서 역시 유사한 량의 약물을 1년 동안 복용해 보았으나 99%의 효과가 없는 것은 똑 같았다.

이번에는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한다는 곳을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50분으로 10만원의 상담 비용을 지불하고 치료를 받아보았으나 50분 동안 자신의 내면의 느낌과 감정을 이야기를 해보라는 상담치료에 실망을 하고 나서 인터넷에서 치료자의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발견하고 치료자에게 나는 지금까지 8년 동안 약물치료와 그리고 몇 개월 동안 심리치료를 받아보았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치료를 하는지?를 알려 달려고 하는 휴대론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치료자가 나는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하는데 6개월간 계약을 한다는 것과 증세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다룬다는 것 그리고 자아가 어떻게 작동을 하는가?를 치료 회기 때 마다 깨닫도록 하면서 자신의 자아의 작동이 몸과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있는가?를 깨닫게 하면서 치료를 하게 된다. 즉 자아의 결함과 잘못 배운 것을 수정해나가면서 치료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라는 것과 반드시 2시간으로 120분의 치료 회기를 가진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한번 2시간 컨설팅을 받고 난 이후에 치료를 결정하는 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컨설팅 비용은 시간 당 15만원으로 2시간 30만원인데 6개월 치료 계약을 하면 50%의 활인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나서 그가 컨설팅을 받고 나서 6개월 치료 계약으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분석의 과정에서 그는 중학교 3학년 말에 어느 날 친한 친구와 방과후에 귀가를 하면서 갑자기 그 친구가 의식이 되면서 불편해져서 심하게 불안해졌다고 했다. 그는 인근의 신경정신과 의원을 찾아가서 심리검사 결과 불안증을 진단받고 약물을 처방 받아서 복용해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최신 종합병원의 신경정신과 과장으로부터 약물을 처방 받아서 총 8년 동안 복용해왔지만 첫 번째는 40%였고 7년 후에는 약물을 복용해도 99%의 효과가 없었다고 했다.

분석으로 밝혀진 것은 그는 약물을 복용하면서 동료들과 관계의 어려움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 처세술 혹은 심리문제들에 관계된 서적들 즉 마인트 컨트롤을 하는 서적들을 구입해서 그 속에서 인간관계를 할 때 중요한 경구들을 약 300 개를 뽑아서 외우면서 동료들과 관계에서 그것을 무기로 대처해 나갔다고 했다. 예를 들어서 동료들과 관계를 할 때는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유머를 섞어서 농담을 하고, 우스개로 분위기를 띄우면서 인기를 얻어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등의 이야기들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경구들은 부분적으로 효과가 있었지만 그 동안에 그가 느낀 것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는 심리치료의 필요성 때문에 심리치료를 찾게 된 것이었다.

V군은 대학에 입학 후에 같은 학과의 여자 친구로 O.T.(오리엔테이션 모임)에서 만나서 사귀게 되었는데 3년 동안 사귀게 되었고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해서 군복무중에 그녀가 3번이나 면회를 와서 그녀의 진심을 느꼈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그는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전역 후에 헤어지자고 했을 때 그녀가 울면서 매달리는데도 불구하고 매정하게 단절을 했다고 했다. 그 이후에 99%로 증세가 악화 되었다고 고백을 했다.

또 한가지로 V군은 대인관계에서 술을 사용했다고 털어 놓았다. 고교 3년 동안은 약물과 처세술로 겨우 지탱을 해 오다가 대학입학 후에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즉 오리엔테이션에 나갈 때 (소주)를 마시면 약간 대인관계가 좋아지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관계를 할 때는 항상 술을 먼저 마시고 동료들을 만난다고 했다. 최근에 그는 소주 2(진로 소주)을 마셔야 한다고 했다. 술을 마시면 농담이 저절로 나오고 불안이 많이 감소된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의 분석의 과정에서 V군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자연스러운 대화의 패턴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의식적으로 처세술을 그리고 술로써 인위적으로 대인관계를 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도움이 되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라는 지적에 그는 동의를 했다. 치료자는 V군의 분석과정에서 V군이 대인관계를 할 때 항상 경구를 생각하고 그것을 그리고 술로써 분위기에 어울리려고 한 것은 바로 대인관계가 잘 되지 않는다는 두려움이고 불안임을 지적을 했다.

그는 철저하게 동료들에게 약점을 보이게 되면 그들이 V군을 이용하고 그리고 평가절하할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자신의 장점을 내세우고 단점을 감추려고 한 것을 지적을 했을 때 시인을 했다. 치료자와 대화에서 약 10시간의 치료 회기를 가지면서 치료자는 그에게 치료자와 2시간의 분석치료가 불편한 점이 있는가? 라고 물었을 때 불편함은 0 % 라고 했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편안한가? 그리고 우리가 나누고 잇는 이야기는 어떤 내용인가? 라고 물었을 때 V군은 내 자신의 약점과 단점 그리고 상처의 이야기들이라고 했다. 치료자는 정확하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내 자신의 단점들은 대부분이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으로 과거의 상처들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숨기고 감추게 된다는 것과 계속해서 상처를 이야기를 하게 되면 감각박탈로 무디어지게 되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긴장이 방출되고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감소되어 감추지 않고 드러나게 표현이 되어진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어린시절의 분석으로 이어졌다.

V군은 부모님이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V군은 외할머니 속에서 맡겨져서 5년 동안 양육을 받았다고 했다. 주중에는 외할머니가 그리고 주말에는 부모님의 손에서 자라다가 7세 때까지 2년 동안은 이웃의 아주머니에게 맡겨져서 식사를 제공받고 식사가 끝나면 자신의 집에서 늘 혼자서 놀았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어머니가 해외에 출장을 자주 갔기 때문에 외국에서 고급 장난감을 사주어서 그것을 가지고 하루 종일 놀았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와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고 실토를 했다 대신에 아버지는 대화가 되는데 그러나 소통이 잘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치료자가 10회 정도의 치료 회기에서 치료시간에 치료가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는 정도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v군은 아버지가 20%, 어머니가 10% 도 그리고 3년 동안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30%정도라고 해서 치료자가 깜짝 놀랬다.

치료자는 V군이 3년 동안 친구로 사귄 여자 친구와 소통이 30%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에 대해서 물어 보았으나 그녀의 부모님의 직업 혹은 형제 관계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만나서 무엇을 했는가? 라고 물어 보았을 때 그는 그냥 만나서 잡담을 하고 영화를 보고 그리고 모델에서 섹스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고 털어 놓았다. 치료자는 섹스에서 누적된 긴장이 방출되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은 심리치료가 끝나고 나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물었을 때 하루 종일 누워서 게임만 한다고 했다. PC로 게임을 하는가? 라고 물어보았을 때 휴대폰으로 게임 혹은 여자친구의 사진을 본다고 했다. 1년 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와 재결합을 원하는가? 라고 물어 보았을 때 그는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매일같이 휴대폰에서 여자 친구를 보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그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는 지금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 다시 사귀자고 해도 다시 그녀에게 되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는 지금 하루 종일 누워서 쉬는데 아르바이트도, 친구들의 전화도 혹은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는 것 등등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하루 종일 쉬어도 긴장이 풀리지 않고 잠을 하루 종일 자도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에 복학도 과거의 아르바이트에서 같이 일을 하는 동료가 나오라고 해도 그의 약점이 들통이 날까 봐서 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치료자는 V군이 하루 종일 누워서 휴대폰으로 헤어진 여자 친구의 사진을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서 한가지 분석을 할 수 있었다. 치료자는 V군이 긴장과 불안으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가 치료실 안에서 2시간 이야기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곧 집에 가서 휴대폰으로 인터넷으로 검색 혹은 여자 친구의 사진을 휴대폰으로 만지면서 계속해서 자극을 공급함으로써 뇌가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스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지적을 했을 때 V군은 깜짝 놀랬다.

치료자는 치료실을 나갈 때 2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에 집중하게 때문에 자아의 의식을 내면의 관찰에서 밖으로 끄집어 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근육의 긴장이 풀린 것(V군은 치료자와 불편함이 0%라고 했다)을 집에 가서 휴대폰으로 계속 자극을 공급하기 때문에 뇌가 쉴 수가 없고 잠을 자도 무의식적인 자(의식의 자아는 잠을 자지만 무의식적인 자아는 24시간 깨어나 있다. 프로이트는 빙산의 물 위에 뜬 부분은 의식으로 10분의 1이고 나머지 물밑에 가라앉는 자아는 무의식으로 10분의9)는 걱정과 근심에서 깨어있기 때문에 잠을 자도 뇌는 휴식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것의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집에서 V군은 휴대폰을 통화 중에 만 사용하고 금지시킨 치료자와 약속을 잘 지켜나갔다. 그리고 집에서는 부드러운 음악을 듣거나 조용한 파도가 없는 호수를 연상하면서 쉬는 근육긴장 이완 방법을 치료실에서 배웠(최면요법에서 나온 것) 혹은 운동으로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는 운동을 하도록 해서 몸의 긴장을 풀 수 있는 방법을 터득을 했다 그리고 핵심은 뇌를 쉬게 해야 한다. 게임은 뇌를 고도로 복잡하게 활동하게 하는 핵심 요인으로 지적한 것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다.

 대인관계에서 자신의 단점들을 말로써 표현하고 수치심과 부끄러움에서 빠져 나오는 대화 훈련을 계속해 가나면서 6개월 치료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부모님과 소통의 채널이 열리기 시작했다. 치료실에서 배운 내용의 이야기를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자신의 내면의 고민과 고통과 갈등드를 듣도록 경청하도록 하는 훈련이 집에서도 연습으로 이어지면서 한 개의 이벤트가 등장을 했다.

 어머니와 논쟁에서 V군이 논리적으로 어머니와 설전을 벌렸다. 어머니에게 정면으로 눈을 맞추면서 직접적으로 분노를 말로써 표현할 수가 있게 되었다. 마지막 부모님의 컨설팅에서 어머니가 V 군과 논쟁을 한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까지 처음으로 엄마의 눈을 쳐다보고 정정당당하게 이야기를 하는 V군 한데서 어머니는 감동을 받았다고 스스로 실토를 했다. 과거에는 엄마의 눈을 맞추지 못하고 항상 다른 곳으로 쳐다보고 분노만 씩씩거려지만 표현을 하지 못한 것이 이번에는 서로 대판 논쟁을 했지만 그 결과 기분은 좋았다고 어머니가 고백을 했다.

 한가지 또 다른 문제는 V군이 대인관계에서 술을 과도하게 사용해서 (5년 동안 모임에는 반드시 소수 2병을 마시고 참석) 알코올 중독의 단계로 이어진 것을 지적을 했다. 아버지는 V군의 음주 문제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라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술에 대해서 별로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 자신을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보통 모임에서 출발 전에 소주 2병 그리고 1차 모임에서 그리고 2차 모임에서 그리고 3차 모임까지 가면 5병 혹은 6병 이상의 소주를 마신다고 고백을 했다. 2년 전부터 블랙아웃 현상(술이 깨고 나서는 기억이 없다)이 왔다고 실토를 했다.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 보니 지갑이 없어진 것을 몰랐다는 것이 몇 번 있었다(어디에서 분실했는지?를 기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새벽 5-6시에 길거리에서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고 깨어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친구들과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시고 헤어졌는데 그 자신이 계단에서 쓰러져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을 깨어나서 발견을 했는데 그 때도 개인 소지품과 지갑이 없어졌다고 했다.

 V군은 계속해서 치료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의 자아는 이제 80%의 수준으로 상승했다고 기뻐했다 그리고 알코올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료를 받고 싶다고 했다. 알코올 문제는 대인관계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배운 행동이었다.

 부모님을 초대해서 컨설팅을 하면서 V군이 치료를 받고 싶어하고 있고 그리고 알코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알코올 중독에 빠지면 치료가 어렵다는 것과 V군은 미국의 기준으로 하면 알코올 중독 2단계에 진입했기 때문에 3단계가 되면 음식을 먹지 않아도 술을 마셔야 한다 술을 마시지 않은 몸에 통증 때문에 견딜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를 해주었다(치료자는 미국에서 학부 때 알코올과 마약중독 과목을 이수했고 그리고 인턴 때 약물 중독사 자격증소지). 그러나 어머니는 V군의 재계약을 거부해다. 7살 아래의 고교 1학년 딸에게도 투자를 해야 하는데 아들 한 사람에게만 집중적인 투자를 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V군은 엄마와 논쟁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하고 그는 일자리를 구해서 스스로 치료를 받으러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치료를 떠났다.

 다섯 번째는 다른 블로그에서 여러 번 다룬 21세의 A군으로 그는 공익근무요원으로 일을 하는데 어려움 때문에 아버지가 치료자의 홈 페이지를 보고 아들을 심리치료를 의뢰를 받게 되었다. A군은 중학교 시절에 반에서 1, 2등을 그리고 전교에서 20등 이내로 공부를 잘 했던 학생이었다. 그는 군입대 후에 3개월의 시점에서 군에 부적당한 사람으로 판정을 받고 귀가해서 공익근무자로 나머지 군대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대인관계에 어려움 때문에 동료들과 관계를 할 수 없다고 스스로 털어 놓았다.

 치료의 첫 회기에서 A군은 스스로 자신이 어떤 때는 말을 할 때와 다른 때 말을 할 때가 달라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본다는 것이 집착해있는 것이 자신의 문제라고 스스로 호소를 했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 때문에 동료들이 두 개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상한 돌 아이라고 놀릴까 봐서 두렵다고 호소를 했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고 혹시 지나가는 사람이 자신을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두렵다고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방과 후에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를 해서 마음이 편안했는데 고교시절부터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가 안절부절 못하고 어려워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리고 어머니에게 동료들과 갈등을 이야기를 할 때도 그러한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멈추어버렸다고 했다.

그의 분석 과정에서 그의 어머니는 심각한 불안장애로 평생동안 약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천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번씩 기절해서 구급차에 실려갔던 적이 최근에도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끝없이 싸웠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점에서 아버지가 칼을 들고 어머니를 찌르려고 하는 것 A군이 보고 나서 아버지의 허벅지에 매달려서 아버지 제가 잘 하겠습니다. 어머니를 용서해 주세요 라고 아버지에게 매달린 무서웠던 장면을 두고두고 회상을 했다. 아버지는 말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한때는 A군과 7살 아래의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가 한편이 되어 아버지를 왕따를 시켰다고 실토를 했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집에 돌아오면 이상하게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가족구성원들이 싫어하게 되면서 아버지가 고립되는 것이 불쌍해 보였다고 실토를 했다.

 A군은 아버지가 소상하게 보살펴주는 것을 장점으로 꼽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컴퓨터를 사주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하루에 4시간-5시간의 컴퓨터 게임을 했고 이후에 전자 오락 때빠져서 초등학교 5학년 시점에서는 하루에 12시간씩 게임에 빠졌다고 실토를 했다.그 후에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게임에 빠지는 것은 계속되었다.  최근에 공익근무를 하고 나서 집에 와서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나면 저녁 늦게까지 게임에 빠진다고 했다.

 그의 분석은 점점 깊이 세부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A군은 스스로 자신의 자아의 관찰에는 귀신처럼 예민했다.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처음에는 자신이 문제가 있다고 느꼈는데 그리고 친구들과 대화를 하고 나면 그 이후에는 자꾸 친구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보고 자신을 피하는 것이 눈에 띄게 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하고 나면 결국은 그들이 나를 싫어하고 피하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사람들이 무서워지고 A군 자신이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점점 외톨이로 변했다고 실토를 했다.

 치료자는 A군이 자아 의식이 강해서 자신이 대인관계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 대인관계를 할 때는 조심스럽게 주의관심을 가지고 했는데 이후에 그 사람을 계속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긴장된 얼굴 표정이 피드백이 되면서 상대방의 얼굴에 비친 자신의 불편한 모습은 자신이 볼 수 없게 되면서 그 사람의 불편한 태도와 자세를 보면서 그 사람이 자신을 멀리하고 껄끄럽게 생각하게 되어 그들이 A군을 피하게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문제가 있는 것은 A군 자신이 아니고 그 사람들이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을 했을 때 A군이 깜짝 놀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라고 물었고 치료자는 치료자와 2시간의 대화가 불편한가? 라고 물었을 때 불편하지 않고 편안하다고 했다. 치료자는 자신의 내면의 단점을 이야기를 하게 되면 방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긴장이 내려가고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회복될 수 있는데 그러한 이것은 한방에 해결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수없는 피드백을 통해서 이러한 자연스러운 대화를 방식을 몸에 익히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치료는 점점 급 물살을 탔다.

A군은 자신이 지금까지 언제나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가 중학교 1학년 말에 학원에 다니면서 그 학원의 원장 선생님이 스파르타씩 교육으로 학생들에게 밤 12시까지 공부를 하게 했다(10시 이후에 과외금지법 제정 이전). 그는 다행히도 공부가 잘 되었다. 학교에서 성적이 1, 2등으로 올라갔고 전교에서 20등 이내가 되었다. 마음이 안정되어 외고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학교에서 공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외고의 입학에서 실패에서 3번이나 지원에 모두 실패를 했고 고교는 추첨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학교여서 공부를 포기했다고 털어 놓았다. 학교 선생님들도 실력이 없어 보이고 동료들이 모두 날날이 들로 보여서 아예 대인관계를 단절하고 공부시간에는 선생님들의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게 스스로 막아버렸다고 했다.

고교 2학년 때는 이렇게 하다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6-7명 정도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다행히도 대인관계의 어려움은 많이 해소가 되었다. 그런데 공부는 보통의 성적 중상위권은 유지를 했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에 열심히 공부한 덕분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3학년이 되면서 그들이 다른 반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그들과 관계를 단절했다고 토로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았기 때문에 A군이 외톨이로 배신간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로 일부러 관계를 피했다고 했다.

A군은 그런대로 고2 시절이 괜찮았다고 했다. 스스로 반 학생들 전체와 친구가 되겠다고 의도적으로 접근을 한 것이 효과가 있었다고 그러나 그는 3학년 때는 그들이 스스로 찾아오기를 기다렸으나 그들은 찾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배신감으로 그들을 스스로 멀리 했다고 실토를 했다.

치료자는 A군이 고2학년 때는 스스로 접근을 해서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을 했기 때문에 그런대로 잘 지냈는데 고 3 때는 그들이 접근하지 않는 것은 반편성으로 동료들이 뿔뿔이 다른 반으로 갔기 때문에 A군이 스스로 그들을 찾아가서 접근을 해야 하는데 그들을 배신자로 거부한 것은 자신의 대인관계 어려움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였다고 지적을 했을 시인을 했다. A군은 대인관계의 어려움들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방법으로 아무리 해결방법을 찾아도 그 자리에서 맴도는 것에 실망해서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자아를 방어하고 있기 때문에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치료실에서 자아의 움직임과 대인관계의 방식을 하나씩 고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면서 치료는 큰 어려움이 없이 진행되어갈 수 있었다.

  3 시절에 A군은 수능은 준비도 하지 않았고 대학입시를 포기했다고 했다. 다른 한곳에 대학에 응시해서 합격을 했으나 대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진학을 포기 했다고 했다( 3 때 일류대학을 꿈꾼 자신이 자아의 자존심 때문에). 집에서 그냥 쉬고 있을 때 아버지가 A군과 외사촌의 동갑내기 동생을 컴퓨터 학원에 보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몇 개월 하다가 그만두었다고 했다. 동료들과 관계의 어려움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 후 1년 후에 아버지가 대입시 전문 기숙사 학원에 보내주었다. 그곳에서 1개월 후에 그는 자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더 이상 동료 룸메이트와 지속적인 관계를 할 수 없었고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고백을 했다. 그 시점에서 심리적인 불안 때문에 수면 혼란으로 정신과의 찾았고 불안증의 약물을 처방 받았 복용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후에 군에 영장을 받아서 입대를 했고 훈련소에서 훈련 후에 자대에 배치 후에 중대장과 면담에서 사람들이 두렵습니다 라고 울면서 이야기를 했고 중대장은 그린캠프로 보내주었다. 그곳에는 약 30명 정도의 장병들이 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서로 말을 놓고 편안하게 하면서 미술치료, 음악치료, 그룹치료 등을 실시했지만 A군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시점에서 아버지가 면회를 3번이나 와서 중대장님에게 아들이 심한 심리적인 문제가 있으니 재고해 달라고 요청을 했고 중대장이 난색을 표현하자 사고가 나면 당신들이 책임을 질 수 있느냐? 라는 항의(그 당시에 GOP 총격사건으로 8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 사고가 있었고 윤일병 치사 사건이 얼마 전에 있었다)과 에 군의관에서 보내져서 심리검사 후에 군대생활 부적당한 자로 군대에서 귀향해서 공익근무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하루에 아침에 10mg와 저녁에 5mg의 신경안정제 약물을 복용하다가 효과 없는 것 같아서 신경정신과의사에게 약물의 증액을 요구했고 아침에 15mg과 저녁에 10mg의 약물을 지금까지 복용해오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두통 때문에 두통약을 달고 다닌다고 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심한 두통으로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바늘로 머리를 찌르는 것 같은 두통을 가졌다고 했다. 병원에 가 보았는가? 라고 물었을 때 병원에는 가지 않고 타이레놀이라는 진통제를 가지고 다니면서 복용을 한다고 했다. 또 한가지는 밤에 불면증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서 어떤 때는 밤샘을 하고 공익요원으로 아침에 출근하면 돌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해서 신경정신과 의사선생님에게 호소를 해서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다고 했다.

 A군은 약물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면 제빨리 약물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위기를 모면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치료자가 A군에게 약물로 위기를 넘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혹시 약물의 복용을 빠트리고 나중에 보니까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라고 물어 보았을 때 A군은 여러 번 있다고 했다. 최근에 아침에 늦잠을 자고 공식근무 시간에 지각을 모면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달려갔는데 다행히도 지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침에 약물을 복용하는 것을 깜빡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지만 평소 때와 다른 점이 없고 오히려 기분이 맑고 좋은 것을 느낀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실토를 했다.

 치료자는 약물 그 자체가 치료 효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고 약물을 복용했다는 그 마음의 안심이 가져오는 효과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약물을 복용했기 때문에 이제는 안심이다 라는 그 마음이 실제 약물의 효과를 가져오는 플레시보 효과임을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래서 약물 복용을 중지하고 약물 대신이 자아로써 위기 대응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을 때 A군은 대경실색을 했다. 그는 5년 동안 약물을 규칙적으로 복용해 왔는데 그것을 중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약물을 포기할 자신감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고 토로 했다. 그는 만약에 약물을 포기 했다가 갑자기 기절하거나 졸도해서 사망하면(공황장애)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고 나서 심리치료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반문을 했다.

 치료자는 맞는 말이라고 수용을 해주었다 그렇다면 한가지 아이디얼 제공해줄 터이니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하면서 만약에 위기가 되면 약물을 복용하는 것 대신에 치료자에게 전화를 하면 약 4-4분 정도 통화를 하면 위기가 지나가고 약물 대신에 자아로 대처할 수가 있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A군이 반신반의를 했다. 그렇다면 치료자가 언제나 전화를 받아줄 수 있는가? A군은 낮에는 옆에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기절한다고 해도 구급차나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는데 밤에 잠을 잘 때는 수면제를 복용해야 하는데 약물 복용이 없이 치료자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데 그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물었다 치료자는 밤에도 언제 몇 시든지 간에 전화를 하면 치료자가 받아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실천에 들어갔다.

 그런데 시도때도 없이 하루에 20여회씩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치료자는 그것을 수용해서 4분 혹은 10분 정도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조금씩 위기가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때는 밤 12시 혹은 1시 혹은 2시경에 전화가 걸려 왔다. 치료자는 불편해하지 않고 A군의 전화를 받아서 보통 1시간 혹은 2시간씩 통화를 하면서 A군이 스스로 잠이 온다고 전화를 끊을 때까지 전화 통화를 수용해주었.

 치료자는 미국의 AA 모임의 회원들이 술을 마시고 싶을 때 전화를 해서 욕구를 컨트롤 해서 자아의 힘을 키우는 것을 현장 답사와 그들의 기법을 익혀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욕구는 말을 하면서 내면의 자아 의식을 밖으로 돌려서 이야기를 하는데 집중하게 되면 신체적 긴장이 자아 관찰로부터 해방되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린다는 심리적인 원리를 알고 있었다. 고로 초반기에 치료자가 힘들지만 조금씩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되면서 어떻게 해서 자신의 위기를 컨트롤 하는가?를 습득하게 되면 약물로 위기를 넘기는 빈도수가 줄어들면서 자아의 컨트롤 능력기 개발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A군의 요구에 흔쾌히 수용을 한 것이었다.

 2개월-3개월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A 군의 전화의 빈도수는 조금씩 줄어들어갔다. 마침내 A군은 5년 동안 정신과 약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수면시에 뇌가 휴식을 취하게 되면 잠이 온다는 뇌의 원리를 깨우치게 되면서 수면제와 두통이 사라졌다.

 위의 과정에 도달하는데 1년 6개월의 치료 시간이 흘러갔다. A군은 공익근무의 전역을 눈앞에 두면서 선임들이 하나씩 제대를 해서 A군이 고참이 되면서 대인관계도 훨씬 편안해져 갔다. 그런데 4번째 치료 계약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아버지가 거부를 했다. 더 이상 치료비용을 부담할 수 없다고 했다. 치료자는 아버지를 초대를 해서 A군의 심리적인 핵심 문제가 대인공포증과 심한 성격장애인 회피적 성격장애임을 설명하면서 이해를 하도록 도와주려고 했으나 아버지를 치료사의 전화를 거부하고 받지 않았다. A군은 자신의 심리적인 문제를 아버지에게 소상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대화의 능력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A군은 치료자와 대화를 하면서 아직도 자신의 대인관계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1 6개월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진단을 했다. 그는 공익근무가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스스로 치료비용을 만들어서 치료를 받으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치료가 종결 되었다.

위에서 소개한 5명의 환자들은 모두가 청소년들로서 스스로 경제적인 부담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부모님의 이해부족으로 치료가 잘 진행되어져 가는데도 불구하고 6개월 후에 치료가 단절되는 아픔을 치료를 받는 사람들도 그리고 치료자가 똑 같이 경험을 하면서 청소년들의 치료에서 첫 번째가 보호자의 절대적인 치료자에 대한 신뢰 구축이 단단하지 않으면 만족할 만한 치료효과가 어렵다는 것을 절감을 했다.  특별히 조현병의 경우는 많은 치료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에 다른 정신장애들 보다 더 많은 보호자 특별히 어머니의 지원이 필요하다.

 정신분열증의 해석이라는 유명한 저서로 조현병의 사무실 치료에 테이프를 끊은 뉴욕의과대학의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아르에티(Arieti,1989)는 그의 저서 정신분열증치료에서 가족들이라는 저서에서 조현병을 가진 자녀들의 부모를 치료의 도우미로 사용해야 조현병 치료에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를 했다. 정신분석에서는 유아기 때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에서 모든 장애가 시작되기 때문에 잘못하면 조현병의 발생을 어머니 탓으로 어머니의 죄의식을 유발하게 되면 치료에서 치료자와 적대관계로 발전하기 쉽다고 경고를 했다. 그는 조현병 환자들은 기질적으로 예민해서 성장과 발달의 과정에서 과도하게 많은 심리적 고통을 경험하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의 애착 거부 수준이 보통어린이보다 높고 그리고 불안의 평균 수준이 높기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는 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고로 부모님에 대한 적대감정이 높다고 노트하고 있다. 이러한 환자 자신의 요인환경적인 요인 그리고 정신증 이전의 성격형성, 잘못된 방어 그리고 정신증의 발발이 개인의 질병에 공헌했음을 분석으로 밝혀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고로 특별히 가족을 병리학적인 원천으로 볼 것이 아니고 건강을 회복하는 도구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한편 UCLA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행동적 가족치료사인 로버트 리버맨(Robert Liverman) 1970년대 초반기에 30년 동안 조현병 환자들의 치료를 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저소득 층에서 조현병 환자가 12배가 높다는 것에 착안을 해서 만성 조현병으로 정신병원과 집을 반복해서 드나들고 있는 환자들에게 약물 한가지로는 치료에서 한계점을 절감하고 그들에게 먼저 조현병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그가 고안한 것이 행동적 가족치료 이론이었다.

 조현병 환자들의 부모들은 대부분이 자녀의 문제를 감추고 숨기고 싶어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정보의 부족으로 약물에만 혹은 병원 입원에만 의존하게 된다는 것을 노트하면서 그는 먼저 환자와 가족들에게 조현병의 증세들의 특징들 그리고 약물의 필요성과 각종 약물에 대한 특징들과 퇴원후에 가족 구성원들의 관계에서 재발의 원인들을 프린트물로써 조현병에 대한 심리교육적인 방법으로 먼저 이해를 하게 하고 조현병을 가진 가족들을 그룹으로 모아서 조현병의 치료에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을 해야 하는 치료기법을 고안해 냈다.

 리버맨과 함께 영국의 무드셀라 정신병원(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신병원)에서 레지던트를 받았던 USC(남가주 의과대학)의 풀런(Falloon, 1984: 주㈜: 참고)교수와 동료들이 리버맨의 행동적 가족치료 이론으로 2년의 치료 과정으로 조현병을 집중적인 치료를 한 과정을 저서로 출판해서 정신분열증을 가진 가진 환자들의 가족돌봄이라는 저서를 출판을 했다. 그의 저서에서 치료 시작 때 조현병 환자와 그의 가족들을 함께 모아서 특별 심리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이 포함되어져 있다. 그러한 교육의 효과가 조현병의 특징들과 그리고 재발의 과정 그리고 약물의 효과등과 재발을 촉진시키는 가족 갈등들의 연구결과들을 숙독하고 일정한 테스트를 통과한 이후에 온 가족들이 조현병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 올인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치료 이전에 조현병에 대한 이해가 조현병에 대한 금기시 된 증세딱지 그리고 조현병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로써 치료를 시작해야 좋은 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치료자는 유사한 사례로 치료자의 지인이 갑상선 암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 직전에 환자와 보호자들을 함께 모아서 심리교육을 하는 것에 참가한 경험이 떠 올랐다. 그곳에서 약 20명의 환자와 보호자들이 모인 가운데 심리교육 전문가가 갑상선의 나비모양의 사진과 생리학적인 작동 그리고 수술후의 후유증 치료의 과정 등을 소상하게 교육을 하는 것에서 이것이 앞으로 조현병의 치료에서 첫 시작 초반기에 필수적임을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조현병 치료에서 핵심 요인으로 맞춤치료에 들어가 보기로 하자. 치료자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써 대부분이 룰과 된 치료 과정과 이론을 가지고 있다 고로 치료를 받는 사람은 그 치료사의 이론과 치료 기법에 따라가는 것이 보통이다. 고로 권위적이고 지시적이다. 최면사들은 최면으로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내서 깨달음을 얻도록 해서 증세에서 벗어나게 한다. 인지-행동 치료사들은 행동의 변화에 그리고 생각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게스탈트 치료사들은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정신분석가들은 과거의 상처와 그리고 어린시절의 엄마와 관계의 발달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각자가 그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느 한가지 만으로 부족하다는 점을 이미 앞에서 강조를 했다. 고전적 정신분석가들은 빈 공간 스크린 이론으로 분석가는 그 빈 공간에 환자의 느낌과 생각과 지각과 상상들이 전이로 나타나도록 해서 그것의 패턴을 환자에게 반사시킬 때 분석가의 감정이 오염되어지지 않도록 분석가가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고 강조를 한다. 이러한 고전적인 방법은 신경증 치료에서는 효과가 있지만 심한 성격장애와 조현병을 치료하는 데는 효과가 부진하다고 주장한다. 조현병 치료에서는 환자들이 치료사의 약점을 귀신같이 파악해서 공격하기 때문에 분석가들이 반전이(역전이)에 걸려들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치료사들이 자신의 약점을 치료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조현병 환자를 장기적으로 치료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치료사가 자신의 약점을 환자가 공격할 때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그것에 무디어져서 불편함을 견딜 수 있는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환자에게 자신의 약점을 들여다 보고 그것을 참고 분석으로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치료자에게 심한 편집증으로 치료를 받는 24세의 한 젊은 대학생 C군이 4년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치료가 1년을 넘어갔을 때 치료자에게 선생님은 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엉뚱하게 엉터리로 분석을 합니다” “내가 선생님의 분석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등등으로 공격을 시작을 했다. 치료자는 그 시점에서 일리노이 의과대학의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지오바치니(Giovacchini)의 반전이의 승리와 재난의 저서에서 반전이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울러 하버드 의과대학의 세인필드(Seinfeld, 1991:주㈜: 참고)가 쓴 텅빈 자아:자아분열 성격장애에 대상관계의 접근 이라는 저서에서 반전이의 치료에 대한 연구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지오바치니는 조현병 치료에서 3분의 2가 반전이가 등장한다고 노트하고 있다. 전이분석 보다 반전이 분석이 필수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황소의 은유를 들어서 황소가 말뚝에서 자신의 몸을 비비고 떠받고 문지를 때 흔들리거나 붕괴되어짐이 없을 때 황소를 안심하고 자신의 몸을 비비고 떠받고 문지를 수가 있다, 분석가도 역시 어떠한 공격에서 흔들림이 없이 그들의 분노 공격을 받아주고 수용해줄 수 있어야 환자는 분석가가 붕괴되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어떤 것들도 마음대로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에 치료사가 어떤 주제에 문제(약점)를 가지고 있다면 그 주제는 환자가 눈치를 채고 그 주제를 건드리지 않고 피하게 된다(조현병 환자는 눈치, 코치. 비위를 맞추는데 100 단이 넘어간다). 결국은 그 주제를 다룰 수가 없게 된다.

세인필드 교수의 가르침에서 치료자는 3개월 동안 치료자에게 맹공격으로 때로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분노하면서 무언으로 2시간을 앉아 있다가 되돌아 갔다. 치료자는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하고 싶은 말을 행동으로 표현하지 말고 말로써 감정을 억압하지 말고 표현을 하라고 했다(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acting out이라고 부른다. 문을 열고 나가버리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욕설을 하거나 신체폭력을 행사하는 것). 그의 공격을 받으면서 치료자는 분노와 공격이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치료자는 솔직하게 분노가 치밀어 올라와서 주먹으로 면상을 치고 싶어지는 분노와 짜증을 느낀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C군이 자신이 어린시절에 마음 속에서 느낀 분노와 짜증과 공격적인 마음을 치료자가 느껴보라고 치료자에게 반사시켜서 느끼게 해준 것에 고맙게 생각한다고 감사한다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했을 때 C군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사과를 했다. 그 이후에는 치료는 3년 동안 잘 진행되어져 갔다. 한번씩 C군은 반전이로 치료자를 괴롭혔지만 그 때마다 치료자는 그것이 C군의 평소에 느끼는 고통임을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조현병 치료를 40년 동안 평생을 해 오면서 조현병의 치료의 기법을 저서로 출판한 뉴욕의과대학의 박사후 정신분석과 심리치료학과의 교수인 스턴(Stern, 1997)는 그의 저서 공식화 되어지지 않는 경험(무의식)에서 치료사의 이론과 해석이 아무리 정확하다고 해도 분석을 받는 사람이 수용하지않고 거부한다면 치료를 답보상태로 변하게 된다고 경고를 했다.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치료에서 미국에서 제 1 세대의 대인관계 정신분석을 창조한 셀리번(Sullivan)의 제자로써 환자와 치료자는 서로 공통된 합의성, 동의된 객관성을 강조했다. 두 사람의 동의된 인정과 공감이 없으면 반전이로 전략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를 했다. 셀리번의 제사로 또 한 사람 브롬베르그(Bromberg, 1998)는 그의 저서 상처와 해리장애 치료에서 조현병 환자는 정신이 분열된 사람으로 여러 개의 분열된 자아들 때문에 자아가 들쭉날쭉으로 상황에 따라서 공격적, 분노적인 자아가 등장을 해서 반전이로 몰고갈 때 그 자아는 가장 깊은 곳에 숨어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기를 기다리는 의인화 된 인간으로 묘사를 했다. 숨어 있는 자아와 대화로 이끌어 내고 그 자아가 원하는 대화의 스타일에 치료자가 맞추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치료자는 이러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현병 치료 학자들로부터 배운 것이 바로 맞춤치료라는 것이다. 환자가 치료자의 이론에 맞추는 것이 아니고 치료자가 환자의 개성과 특징에 맞추어서 치료를 하는 것이다. 조현병 환자들은 증세들은 유사하지만 개개인의 성격들은 다 다양하다, 고로 치료사는 환자의 개인의 특성에 맞추어서 치료기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샌프란시스코 의과대학의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오가덴(Ogden, 1982)은 그의 저서 투사동일시와 치료기법에서 상호주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환자와 치료사가 만날 때 두 사람의 마음은 각자의 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고 두 사람의 주고 받는 대화의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 결과로 나타난 마음은 서로가 합의된 상호주관으 1 + 1 = 2  아니고 1+1= 3, 4가 되는 시너지 효과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기법은 니체가 당신이 심연(깊은 물속)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심연 역시 당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라는 명언에서 그리고 언어 정신분석가인 일리노이 의과대학의 호프만(Hoffman, 1991: 주㈜: 참고)의 저서 사회적-구성주의자의 관점에서 본 정신분석이라는 저서에서 분석가가 환자의 지각을 분석하고 있을 때 환자 역시 분석가의 지각을 분석하고 있다 라고 강조한다.  그는 분석의 과정에서 분석가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환자가 반사시키는 지각이 바로 분석가 자신이 환자에게 피드백 되어진 지각이 환자에 의해서 다시 반사되어져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어떤 영향을 환자로부터 받고 있는지를 알고 이것을 서로 소통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치료자는 조현병 환자를 치료를 할 때 정신분석학 한가지만으로 치료를 하지 않는다. 57세의 D부인은 조현병으로 2000년에 환청의 등장으로 첫 번째 입원으로 조현병으로 고통을 받게 되면서 6개월 동안 신경정신과의 약물치료를 받아서 환청은 사라졌다. 그 후에 2007년에 다시 환청이 등장해서 1.5 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았다. 그 후에 불면증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 이후에 3년 동안 조현병, 우울증, 불안증, 불면증으로 약물치료를 받아오다가 그녀의 아들이 결혼 후에 30대 초반에 치료자에게 심한 불안증으로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던 경험에서 그의 어머니의 조현병을 치료를 해 달라고 의뢰를 한 것에서 2011년에 D부인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치료자가 토, 일요일에만 지역(주 중에는 서울에서)에서 치료를 하기 때문에 회기당 3시간의 치료 회기로 치료를 받게 되었다.

D부인의 치료는 시간당 50분 대신에 3시간의 치료 회기를 사용한 것은 최면치료의 긴장방출(카타르시스)의 기법을 응용한 것이고 그녀의 성장과정이 밝혀지면서 가족치료의 기법을 사용해서 성공적인 치료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었다.

D부인은 11년 동안 정신분열증(조현병)에 시달려온 중년 여성으로 그녀 삶과 그리고 그녀의 남편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로써 양쪽의 가족이 계모와 계부로 얼룩진 파란만장한 삶의 역사였다.친가집과 시가집에 얽힌 복잡한 가족관계의 문제는 가족치료가 적격임을 치료자가 활용해서 성공적인 치료 결과를 가져온 사례였다.

D부인은 아들의 치료 권유를 받고 치료자와 치료 시간을 예약한 그날 밤에 밤에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수면제를 두 배로 늘렸지만 결국은 밤샘을 하고 치료사와 처음으로 3시간 동안 치료가 시작되었다.

D부인은 4살 때 친아버지가 폐결핵으로 사망을 하자 어머니가 재혼으로 떠나는 바람에 할머니 손에서 11살 때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을 했다. 할머니는 5살 때 죽은 첫 아들 때문에 술만 먹으면 통곡하고 우는 버릇 이외에는 D부인과 어린시절에 다른 어려움은 없었다고 했다. D부인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재혼한 어머니가 계부의 허락을 얻어서 4살 된 여동생이 있는 계부의 집으로 어머니와 함께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그 이후부터 D부인은 그녀보다 7살이나 어린 4살 된 여동생과 갈등으로 싸우게 되면 한번도 D부인이 이겨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를 했다. 두 사람이 싸우면 늘 우는 쪽은 7살이나 많은 D부인이었다.

그 후에 2명의 여동생과 2명의 남동생이 태어났고 D부인이 그들에게 엄마처럼 양육을 했다고 털어 놓았다. 계부는 돈을 벌어서 집에 가져다 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회고를 했다 그는 한 클럽에서 기타맨으로 연주를 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부동산으로 집을 지어서 팔아서 차액을 남기는 사업으로 그녀와 남편 사이에 태어난 4명의 친자식 그리고 D부인을 합쳐서 7명의 식구를 어머니 혼자서 부양을 한 억척 같은 어머니였다고 회고를 했다.

D부인은 초등학교 4학년에 할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 했다. 그러나 친모의 집으로 이사를 한 이후에 계부와 좋은 관계를 한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고 회상을 했다. 계부는 말이 없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통신표(과거의 성적표)를 받았을 때 그녀의 성()씨가 보호자인 계부의 성씨가 달라서 부끄러워서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고 했다. 한번인 그녀의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가 문패에 아버지의 성씨가 D부인의 성과 달라서 그것을 지적하는 것에 놀래서 그 친구와 결별을 했다고 했다. D부인은 그 이후에 친한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 어머니는 그녀의 성씨를 고쳐주려고 하지 않았고 D부인도 어머니에게 말을 끄집어 낼 수도 없었다. , ,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녀는 보호자의 성과 그녀 자신의 성이 통신표에 달리 기재된 것을 큰 열등감을 안고 살았다.

그녀는 인문계 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이 되었으나 상업고교로 진학을 해서 취업을 하기로 했다. 계부가 여자가 대학에 가서 간등이(배포의 사투리)가 커지면 남편 잡아 먹는다 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목재소에 경리사원으로 취업을 했다. 2년 동안 일을 하면서 월급 봉투(그 당시에는 월급을 봉투에 현금으로 넣어서 받았다)한 푼도 떼지 않고 그대로 계부에게 갖다 받쳤다(그녀의 표현) 그러나 계부는 한번도 용돈을 준 적이 없었다. 이것을 본 어머니가 계부를 비난하면서 그녀에게 교통비와 식비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마디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계부는 회사에서 일이 끝나면 집으로 직행을 해야 했다. 여자가 저녁에 늦게 돌아다니면 바람난다고 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일이 끝나면 집에 귀가를 했다. 그녀는 펜팔(그 시점에서 편지로 서로 우정, 사랑을 나누는 것)로 한 육군 소위와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그 군장교가 전역 1년 전에 집에 찾아와서 부모님에게 결혼을 하게 해 달라고 했을 때 계부가 무슨 연예질이냐? 여자가 시집가지 이전에 연예하면 칼 맞아 죽는다 라는 말에 한마디도 못했다. 어머니도 반대했기 때문에 그 군장교는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갔다.

어머니는 항상 D부인에게 엄마 말만 들어라, 좋은 곳에 시집 보내 주겠다고 라고 했고 D부인은 의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항상 너는 내가 너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너는 고아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을 행운으로 복이라고 생각하라 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를 했다. D부인은 어머니에게 한마디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말씀이 금과옥조로 부모님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23살 때 그녀는 어머니의 권고로 건실한 청년이라고 선(남녀의 첫 만남)을 보라고 했다. 양가의 배려로 D부인과 낯선 청년을 시골의 골방(본채 옆에 사랑채)이서 만나게 하고 밖에서 열쇠로 문을 잠가버린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믿었고 어머니가 다 알아서 해준다고 했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그 청년과 결혼을 했다. 그런대 결혼 후에 나중에 알게 된 것을 남편은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랬다. D부인은 그녀가 고졸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남편은 고졸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남편은 직업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남편 역시 2살 때 어머니의 사망으로 계모 밑에서 6명의 동생들이 태어난 사람이었다. 남편의 친 누나가(결혼 후) 어머니에게 소개를 해서 그녀의 남동생인 남편을 중매로 소개한 것이었다. 남편은 한 친척의 고기배를 타던 어부였으나 그 배가 팔리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결혼 후에 두 사람은 어머니가 사 놓은 시골의 산 자락에서 어머니가 사준 젓소 한 마리와 그리고 그녀가 저축한 돈으로 산 젓소 한 마리로 농사일을 시작을 했다. 남편과 부인은 산자락을 개간을 하기 시작을 했다. 땅을 파고 일구어서 작물을 재배를 했다. 어머니는 그 농장을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를 하면서 나중에 이 농장을 팔 때 50 50으로 배분하자고 약속을 했다. 두 사람은 농장의 개간에 매달렸다. 젖소들이 새끼들을 나아서 10마리로 번창을 했다. 부부는 젖소의 우유를 팔아서 생계비용으로 사용을 했다. 중간에 어머니는 그 젖소들을 D부인의 허락이 없이 한 마리 두 마리를 마음대로 팔아갔다. 나중에 보니 대학에 들어간 바로 밑의 여동생의 대학등록금뿐만 아니라 그 여동생이 사귀는 사범대학 남자친구의 학비를 지원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지만 D부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D부인은 4살 어린 여동생이 연예를 하는 것을 알 게 되었지만 계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저녁 10시 이후에 들어와서 계부는 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D부인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차별은 알고 있었.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농장이 절반이 팔렸으니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10년 동안 일군 농장을 팔면서 달랑 손에 쥐어준 것은 3천만 원이 전부였다. 한달 전에 집을 비워달라고 통고를 했었다면 고려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 집을 비우라고 하는 어머니에게 D부인이 처음으로 한마디를 했다. 계약서를 한번 보여주세요 라고 했다 즉 얼마니 이 농장이 팔렸는지? 그 대금의 절반을 어머니가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에(50 50으로)확인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에 어머니는 노발대발하면서 벼락맞아 죽을 년!” “너는 교통사고로 죽어라등의 악담을 퍼부었다. 그리고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서 죽이겠다고 했다. 그 시점에서 계부가 등장을 했다. D부인에게 건네준 3천만 원이 계산이 잘못 되었다고 다시 해보자고 했을 때 어머니가 거품을 쓰러졌다. 옆에서 남편이 장모님 입에 물을 먹이고 일깨웠다. 깨어난 어머니가 자살하겠다고 산으로 올라갔다. 남편이 장모님을 구한다고 산으로 따라갔다.

그 다음 날에 D부인과 남편은 집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인근의 대도시로 이사를 왔다. 지하방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 시점에서 6살 난 아들과 3살 된 딸을 데리고 대도시로 몇 개의 짐을 챙겨서 나왔지만 막막했다. 남편은 택시 운전으로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고 가정은 안정이 되었다. 자녀들이 성장을 해서 대학에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 시점에서 IMF가 터졌다. 남편이 일자리를 잃었다. 아들이 대학생이 되었고 딸이 고교생이 되면서 학비와 생활비용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D부인은 혼자서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돈을 빌리게 되었는데 사채로 이 돈을 빌려서 저 돈을 메우는 방식으로 하다가 결국은 빚에 내몰리게 되어 밤에 잠을 잘 수 없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남편과 그 사실을 의논하지 않고 혼자서 매달리다가 자아가 붕괴되어 환청이 들리고 환각을 보게 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이 2000년에 첫 증세가 발발한 것이었다.

치료의 과정에서 D 부인은 치료자의 분석을 통해서 친 어머니와 계부에게 철저하게 배신감과 이용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치료자에게 이야기를 털어 놓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남편과 D부인은 계모와 계부 밑에서 성장을 했기 때문에 자아의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착하고 시키는 대로 살아온 사람들로 눈치, 비위를 맞추어온 것이었다. 자아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아의 보호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치료를 계부와 친어머니에게 학대 당하고 이용당한 배신감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었다. 치료의 기법은 가족구성원들 사이에 뒤엉킨 갈등을 분석으로 밝혀내고 그리고 그 속에 뒤엉킨 분노, 적대감정 그리고 자아의 억압된 한맺힌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는 게스탈트 기법을 사용을 했다. 그러나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지 행동으로 즉 뒤집어엎거나 치료실을 박차고 나가거나 하는 acting out를 금지시켰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철저하게 배신을 당한 것을 느끼고 감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짐승처럼 사육 당했다고 스스로 토로할 수 있게 되어갔다. D부인이 10년 동안 일군 농장을 하루 아침에 떠나라고 통고를 받은 그 목장은 바로 그것을 팔아서 7살 아래의 여동생의 아파트를 사준 것을 이후에 알고 노발대발하면서 통곡을 했다.

D부인의 환청과 환각의 분석은 위의 어린시절의 양육과 발달의 과정이 분석으로 밝혀지면서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조현병으로 폭발하면서 가진 환청은 어머니 계모, 라는 말은 친어머니가 계모보다 악독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그녀의 무의식임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조현병 재발 시점에서 환각상태로 그녀가 사랑했던 그 군인이 눈에 보였고 그와 함께 데이트를 하면서 영화의 주제곡을 부르고 있었다 낮에 잠을 자다가 D부인이 밖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나가는 것ㅇ르 가족들이 병원에 입원을 시킨 것이 두 번째 재발이었다. 그녀는 환청으로 그 군인이 죽은 것은 너(D부인) 때문이야라는 환청이 들렸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군인이 죽었는지를 모른다고 했다.

세 번째 재발에서 환청어머니가 칼로 ---죽일려고—--“하는 목소리였다. 그것의 분석에서 D부인이 매매계약서를 보자고 했을 때 어머니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D부인을 죽이겠다고 할 때 3살 된 딸이 그 옆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칼로 딸을 죽일지 모른다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분석으로 밝혀낼 수 있다. D부인은 그 후에 지금은 결혼해서 출가한 딸에게 그 때 그 사건이 기억이 나는가? 라로 물어 보았을 때 딸은 그 사건을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치료를 6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D부인의 마음 속에 억압된 분노, 노여움과 적대감정은 치료의 과정을 통해서 표현을 하고 그리고 가까운 친구에게 처음으로 그녀의 어린시절의 양육과정을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남편과 결혼 후에 처음으로 그녀의 어린시절의 한 맺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

치료가 더 필요하다는 말에 D부인은 이제 편안하게 잠을 자고 머리 속에서 전쟁으로 늘 끝 없이 시달리던 생각들이 사라졌다고 치료를 종결을 했다. 그녀는 이후에 남편이 6개월 동안 치료자에게 심리치료를 받았고 그리고 결혼한 딸이 역시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다. D부인의 아들과 딸과 그리고 D부인 자신과 남편이 모두 따로따로 6개월씩 심리치료를 받는 유일한 한 가족이 전부 심리치료를 받은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

치료자는 인지-행동적인 치료의 기법으로 자아강화 기법, 혐오자극기법(동성애치료), 감각박탈 기법들을 그 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늘 사용하고 있다. 특별히 게스탈트 치료기법은 억압된 감정이 누적되어 한계점을 넘어간 환자들의 경우에는 자주 사용한다.

손과 팔이 마비되어 걸음을 겨우 걸어서 치료실에 들어온 32세의 젊은이 K의 치료 사례를 블로그에서 몇 번 소개를 했다. 어느 날 치료자에게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들이 손과 발이 마비되고 말을 어눌하게 하고 그리고 가슴에 통증으로 가슴을 지어 뜯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신경정신과 약물치료, 한의사의 약물치료 그리고 인지-행동 치료 등을 모두 받아 보았으나 증세는 오히려 심해진다고 했다. 어머니는 특별히 아들 K씨와 어머니의 말만 들어도 발짝 증세를 일으킬 정도로 어머니와 아들 사이가 극단적으로 좋지 않다고 했다. 치료자는 6개월 치료와 그리고 2시간으로 컨설팅 비용을 이야기를 하고 나서 아드님을 데리고 오게 했다.

다음 날 약속 시간에 K씨가 어머니와 함께 도착을 했다. K씨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쇼파에 앉았. 어머니에게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고 치료실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170cm 정도의 큰 키에 K씨는 마른 체구에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치료자는 K씨가 언어장애자 혹은 신체장애자가 아닌가? 의심을 했지만 어머니와 통화를 통해서 인지-행동치료, 한의사, 신경정신과의 약물 치료를 받았다라는 말에서 과도한 긴장이 누적되어 신체기능의 마비로 온 것을 확신하고 K씨에게 말을 하면 긴장이 풀릴 것이니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치료사가 치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K씨가 피드백으로 전달이 된 것을 보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치료자의 안정된 마음에 확신을 얻는 K씨는 첫 마디로 선생님 어머니 때문에 그리고 가족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미치겠습니다라고 운을 떼면서 조금씩 안정을 취하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을 했다. 치료자는 K씨를 달래면서 팔과 다리는 응접세트 위에 올리고 손과 팔을 주물러서 팔다리에 긴장된 근육을 풀도록 했다.

 시간이 30분이 지나가면서 K씨는 자신의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을 했다. 어린시절에 5살 때까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를 했다. 5살 때 부모님과 함께 합류하면서 어머니의 간섭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역할이 서로 꺼꾸로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간섭하고 어머니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유일하게 2 어린 여동생이 오빠를 이해해주는 것도 이제는 싫어졌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료들과 관계가 어려웠다고 털어 놓았다. 대인관계가 어려워서 상대의 눈치, 비위를 맞추고 살아왔다고 고백을 했다.  그러나 군대복무는 그런대로 완료하고 전역 후에 A라는 친구와 4년 동안 어울리면서 힘들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 친구는 처음에는 잘 해주었는데 나중에는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다니면서 못된 짓을 너무 많이 했다고 분개했다. 매춘부 집에 드나들고 도벽과 나쁜 짓들을 골라서 따라서 했다고 분개했다. 그의 똘만이가 된 것에 분기탱천했다.

치료자는 친구 A군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표현을 하도록 했다. K씨는 울부짖으면서 고함을 질렀다. 네놈이 나를 많은 사람 앞에서 개망신을 주고 나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았느냐? 네놈을 찢어 죽이고 싶다. 1시간 동안 K씨의 분노는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쇼파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말을 동동 구르고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지금까지 치료자는 K씨처럼 한꺼번에 쌓인 분노가 폭발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치료는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계속해서 말로써 표현을 하면 긴장이 풀리고 마비가 풀릴 것이다 라고 격려를 해 주었다. 1시간 후에 K씨는 마비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처음에 띄엄띄엄 했던 그리고 어눌했던 발음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그 때 휴대폰이 울렸다. K씨의 어머니였다. 치료실 밖에 나와 있으니 갈 곳이 마땅하지 않으니 치료실에서 아들 K씨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 치료자는 K씨가 어머니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느냐? 고 이야기를 하면서 아들은 마비가 많이 풀렸으니 안심하고 치료실 인근에 초등학교가 있으니 운동장에 벤치에 앉아서 쉬든지 아이쇼핑으로 구경을 하든지 간에 2시간 이전에는 들어 올 수가 없다고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것을 듣고 나서 K씨가 손과 발에 마비가 왔다. 계속해서 분노를 표현하게 되면서 마비를 사라졌다.  조금 있다가 이번에는 아버지 한데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치료실 밖에서 갈 곳이 없다고 하는데 하면서 항의를 했다. 치료자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치료를 하지 않는다는 룰을 이야기를 하면서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고 일러주었다고 했다.  이번에 또 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아들이 지금 어떤 상황인가?를 물어 본 것이다. 치료자는 아들은 마비 완전히 풀렸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K씨는 부모님에 대한 분노 역시 대단했다. 어머니가 사사건건 간섭으로 숨이 막히고 목이 졸리는 기분이라고 했다. 시간은 2시간이 훌쩍 넘어가 있었다. 치료자는 뒤에 예약된 손님이 없었기 때문에 편안하게 충분히 이야기를 하도록 허용해주었다.

K씨는 완전히 몸이 회복된 상태에서 집에 갈 때는 어머니의 승용차를 타지 않고 혼자서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했다. K씨가 나가고 어머니가 들어와서 30분 동안 컨설팅을 했. 아들이 건강하게 걸어서 나가는 것을 본 어머니를 이제야 살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아들 때문에 못살겠다고 통곡을 했다. 몇 일 전에 아들이 손과 팔에 마비가 와서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한 이후에 정신과의사와 면담을 하다가 아들이 손과 발이 마비되어 치료실을 뛰쳐나가버렸다고 했다. 그 정신과 의사는 아들의 병의 원인을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집에 가서 아들을 안아주고 사랑을 제공해주라고 했다. 어머니가 집에 와서 아들을 안아주려고 했을 때 아들이 더욱 더 발짝으로 손과 팔이 마비됨을 느꼈다고 통곡을 했다. 치료자는 아들과 어머니가 너무 밀착 관계로 아들이 분노하고 어머니의 간섭으로 자치심이 훼손된 것을 지적하면서 치료자에게 치료를 받게 되면 K씨를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시켜서 집에서 분가를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노발대발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 한의사 선생님이 아들의 근본 문제는 다른 사람들 말에 똘만이로 따라다니는 것이 핵심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왜 아들을 가족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가족이 문제의 원천이라고 말을 하는가? 라고 항의를 했다. 치료자는 K씨가 어머니의 말만 들어도 분개하고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간섭에 치를 떨고 있지 않는가? 아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가족과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고 아들의 문제가 해결되면 부모님과 화해를 순서를 밟게 되는 치료의 과정을 설명했을 때 어머니는 수긍을 하면서 세를 준 방이 있는데 그것을 다음 달에 빼서 아들을 독립시키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전화가 왔다. K씨가 택시 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라고 물었다 치료자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오거든 치료실에서 했던 것처럼 말로써 표현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전화를 바꾸어서 그 택시기사에게 K씨가 심리치료를 받고 나갔으니 횡설수설해도 신경 쓰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이번에는 택시기사가 K씨가 자신의 집주소를 모른다고 했다(기억이 나지 않음)그래서 어머니가 네비게이션 주소를 알려 주었다.

 몇 시간 후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에 들어온 아들이 마당에 서 있다고 했다. 이유는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것이었다. 가족구성원들과 얼굴도 보기 싫다고 했다. 치료자는 K씨에게 모텔에 가면 어떻겠느냐? 라고 물었을 때 혼자 모델에 가서 수속을 밟아가야 하는 과정을 실행할 수 없다고 했다. 다시 어머니에게 아들의 이야기를 했을 때 어머니가 온 가족 즉 남편과 딸과 어머니가 모델에 가서 잠을 자는 것이 편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10시경에 K씨 한데서 전화가 왔다. 집에 혼자 있으니 마비가 와서 기절하면 누가 도와줄 수 있겠는가? 두렵다고 했다. 치료자는 조금 전에 가족들의 목소리 발자국 소리에 손과 발이 마비가 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혼자 있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K과거에 마비가 와서 기절할 시점에서 가족들이 응급실로 데리고 간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집에 아무도 없으니 발작이나 기절을 하면 누가 도와주는가? 라고 볼멘 소리를 했다. 치료자는 위기가 오거던 언제든지 치료자에게 전화를 하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위기가 해소된다는 말을 했을 때 그는 안심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30분 후에 이번에 K씨가 전화로 선생님 마비가 오려고 합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멈출 것 같습니다 라고 호소를 했다. 치료자는 전화 통화에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치료실에서 보여준 것처럼 분노를 억압하지 말고 말로써 표현하도록 했다. 말로써 표현을 하면 긴장이 풀릴 것이라고 확신을 주었다. 그는 안정을 얻는 것으로 보였.  그 이후에는 K씨로부터 전화가 없었다. 치료자는 K씨가 위기 때 언제든지 치료자와 통화를 할 수 있다는 확신과 그리고 그의 발짝은 말로써 표현하면 긴장이 풀린다는 것을 확신을 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잠을 잘 것이라고 확신을 했다.

이번에는 어머니 한데서 전화가 왔다 아들이 과거에 발짝과 기절로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혼 자두면 위험하다고 아버지가 이야기를 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치료자는 이미 조금 전에 아들이 2번이나 혼자 있으니 기절과 발짝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호소한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아들이 이미 치료자와 통화로 안정을 얻었으니 그리고 위험하면 전화를 하라고 했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대뜸 선생님이 아들과 함께 기거하고 돌보아주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애걸복걸을 했다. 치료자는 심리치료는 혼자서 스스로 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K씨가 혼자서 상황을 대처해 나가게 되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 심리치료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K씨도 가족들도 SOS 전화가 없었다.

위의 K씨의 사례는 다른 사람과 다른 특별한 케이스이다. 환자들은 개성과 특징들이 다르다, 고로 그 환자에게 적합한 치료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맞춤치료라고 치료자가 부르고 있다.

치료자는 K씨의 사례는 가족치료가 적용되어져야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K씨는 어머니로부터 과도한 간섭으로 자치심이 훼손당한 것이다. 자아가 질식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에 과도한 의존으로 혼자서 일어설 수가 없다는 모순에 빠져 있다(혼자 있으면 기절하면 누가 돌보아주는가?) 고로 자치심을 길러야 한다 혼자서 스트레스에 대응할 수 잇는 능력을 배양하면서 독립심을 기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여기에서 동시에 누적된 감정적인 긴장을 풀어 애는 데는 케스탈트 기법으로 감정을 풀어내는 것이 바로 근육의 긴장으로 한계점을 넘어간 K씨의 손과 발의 마비와 심장의 고통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들 적용하면서 성공적인 위기 탈출을 해결한 것이다.

결론으로 다시 정리를 해보자. 심리치료사는 정신과 장애들과 전쟁을 하는 사람이다. 적의 약점을 알기 위해서는 각각의 증세들의 특징들을 알아야 한다. 고로 모든 정신장애들에 대한 공부를 소홀히 하면 된다. 고로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적의 약점을 알고 나면 나의 헛점을 알고 보완을 해나가야 한다. 전문분야를 해서 자격증을 딴 것은 이제 시작이라는 뜻이다 그 분야를 다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보호자와 신뢰관계로 특별히 어머니의 극단적인 신뢰가 없으면 조현병은 치료에 성공하지 어렵다는 치료자의 경험을 사례들을 통해서 강조를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환자들마다 그들의 성장과 발달의 과정에 알맞은 치료기법으로 다양하게 적용해야 한다. 정신분석한가지만 공부를 해서는 부족하. 제 각각의 치료들은 그들의 장점들이 있다 그들을 배우고 흡수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가 있게 될 때 진정한 심리치료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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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참고

스톤(Stone, 1983). 정신분열증 치료: 분석적 접근

(Beck). 인지치료와 감정장애(1979), 우울증 인지행동치료(1987), 불안장애와 공포증(1985), 성격장애와 인치치료(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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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저서들은 치료사가 우리나라말로 번역되어져 있으니 치료사의 정신분석 심리치료의 홈 페이지에서 전문서적 안내에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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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치료 사례는 조현병으로 10년 동안 고통을 받는 57세의 D부인을 10년 전에 2011년에 가족치료 기법 게스탈트 기법으로 6개월 동안 치료를 하면서 성공적으로 치료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http://www.panic119.pe.kr/psychoanalysis.jpg

카우치에 누워서 정신분석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과 분석가

대상: 57세의 부인 D

증세: D씨는 2000년도에 환청으로 6개월 동안 xxx 신경 정신과에서 약물 치료를 받았고 7년 후 2007년에 환청이 다시 재발 xxx 종합 병원에서 1년 동안 약물 치료를 받고 호전되었으나 2008년에 다시 불면증으로 1.5개월 동안 xxx 종합 병원에 입원 후에 몇 개월 동안 안정되었으나 다시 한번 불면증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음. 이후 지금까지 3년 동안 정신분열증, 우울증, 불안증, 불면증 약물을 계속 복용해 오고 있으나 최근에 불면증이 심해져서 불면증 약물 투여량을 증가시켜 복용하고 있으나 별로 효과가 없다고 했음

진단: 우울증, 불안증, 불면증, 정신분열증(조현병)

연결: D씨는 2년전에 결혼해서 분가해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그녀의 아들이 불안증과 대인관계 때문에 치료자 한데서 6개월 동안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았던 사람으로 그 때 그가 그의 어머니가 정신분열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그의 어머니를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게 하려고 다짐을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지금까지 미루어 오다가 최근에 약물 치료에 크게 실망한 어머니를 설득해서 어머니가 스스로 치료자에게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으러 오게 되었음

치료 기간: 2시간의 인터뷰 치료 회기 이후에 집에 가서 D부인은 이번 주일 1주일간 잠을 잘 자고 있다고 했다. 아래의 치료 회기는 D부인이 두 번째 치료 회기 3시간 동안( 5 시간)에 분석되어진 치료 회기의 과정을 요약한 것이다.

 

치료의 과정

 D부인은 치료실에 들어오면서 밝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치료자가 한 주일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별 다른 일들은 없었다고 했다. 치료자가 지난 주일에 여기에 치료를 받으러 오겠다고 시간 약속을 한 후에 잠이 오지 않아서 날밤을 새고 왔었다고 했는데 이번 주일에는 어떻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번 주일에는 그런 일이 없이 잠을 잘 자고 있다고 했다. 1주일 동안 편안하게 잠을 잘 자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과거에 일들이 잊어 버릴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고 계속해서 머리 속에 침투해 들어온다고 했다.

 다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이야기하게 했다. 그녀는 지금도 가끔씩 어머니가 칼을 들고 설치던 일들에 대해서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환청이 생겼을 때 그녀의 머리 속에 "어머니가 xxx (둘 째 딸)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라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고 했다. 치료자는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 같으니 그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 보라고 했다.

 (환청)어머니가 칼을 들고 xxx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두 번째 환청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 생긴 에피소드에서 그녀는 그 사건을 생생하게 이야기를 해 나갔다. 어머니가 돈을 손에 쥐어 주면서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이미 그 시쯤에서는 남편도 부인도 이제 이곳이 지긋지긋하니 집을 나가겠다고 어머니에게 선전 포고를 한 상태였다고 했다. 어머니는 소유하고 있는 목장의 절반을 팔고 그 나머지 땅에서 다시 목장을 계속하라고 딸 부부에게 종용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D 부인 부부는 어머니에게 우리는 다시는 어머니와 동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포를 한 이후여서 집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때 어머니는 딸에게 저주의 말들(첫 인터뷰 내용을 참고)을 퍼부우면서 "너희들이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고함을 치면서 ""--"" 하면서 칼을 찾으려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후에 D부인은 정신이 없었다. 이것을 첫째 아들은 그 시점에서 그 자리에 없었지만 둘 째 딸이 그 장면을 지켜 보고 있는 것을 보고 D부인이 깜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고 했다. D부인은 대경실색으로 어쩔줄을 모르고 있는데 어머니는 칼을 손에 들고 왔는지 혹은 칼이 손에 쥐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자리에서 넘어져서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것을 남편이 보고 물을 떠서 어머니(장모님)의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고 했다. 그 때 4살이었던 딸 아이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 기억 속에 각인이 되어서 D부인이 두 번째 환청 사건으로 병원에 입원을 해 있었을 때 그녀의 입에서 "어머니가 칼을 들고 xxx(둘 째 딸 이름)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로 들리게 된 것이었다.

 xxx 종합 병원에 입원을 해 있을 동안에 D부인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가족 구성원들이 병 문안을 왔을 때 D부인이 입에서 그러한 말들이 튀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D부인이 왜 그렇게 이상한 말들을 하는가? 에 대해서 알지를 못했다고 했다. 고로 D부인을 이상한 미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고 했다. 특히 언니의 병 문안을 온 배다른 바로 밑의 여동생은 D부인의 말을 듣고 이해가 되지 않아서 딸인 xxx 에게 "너희 어머니가 무슨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물어보게 되었다고 했다. 둘 째인 딸 xxx가 어머니한데서 일어난 실제 이야기들을 들려주어서 D부인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었음을 알 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여동생은 D부인에게 "언니가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에게 어떻게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따지듯이 대 들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정신이 이상한 상태에서 D부인은 그녀가 하고 싶었던 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들이 자신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D부인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시집을 간 딸 xxx가 이것을 기억하고 있는지를 물어 본 적이 있었다고 했다. 딸인 xxx 는 그 때 그 사건을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고 회고를 했다. 어머니의 걱정대로 딸은 할머니가 어머니,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부엌으로 칼을 찾으러 간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딸은 "어떻게 그 사건을 잊어 버릴  수가 있어요!"라고 말을 하면서 어머니를 쳐다 보았다고 회고를 했다.

 D부인은 자신의 어머니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어느 누구에게도 지금까지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해서 살 수가 없다고 했다. 어떻게 그렇게 믿었던 친 어머니 한데서 그러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겠느냐?고 통분해 했다. 그녀는 그 사건을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서 이후에 어머니가 그 죄의 대가를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을 했다. 치료자는 D부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 말이 무슨 말이냐고 다시 그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다.

어머니가 강도를 당해서 죽을 뻔한 사건: D부인 부부가 집을 떠난 후에 어머니는 그 나머지 목장을 운영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지역 신문에다 광고를 냈다고 했다. 그 광고를 보고 한 부부가 목축을 하는 인부로 D부부를 대신에서 들어오게 되었다. 4개월 정도 일을 한 후에 어느 날 복면을 한 강도가 집에 들어와서 어머니에게 식칼을 들이대면서 죽고 싶지 않으면 돈을 내 놓으라고 위협을 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강도의 두 팔을 꽉 잡고 "나는 죽고 싶지 않으니 돈이 저기 있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그 강도는 어머니가 붙잡은 팔을 털치면서 손을 빼서 그 돈을 가지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 다음 날 경찰에 신고를 하면서 어머니가 알 게 된 것은 어머니를 살해해서 구덩이게 파 묻으려고 크다란 구덩이를 파 놓은 사실을 알 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에 어머니는 그 목장을 패쇄 시켰고 다시는 목축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에 경찰의 수사로 그 강도 사건은 바로 그 목장에서 인부로 고용한 부부였고 복면을 한 강도는 바로 고용한 그 목장 인부였음이 밝혀졌다고 했다.

 D부인은 그 사건을 마음 속으로 "어머니가 딸인 D부인에게 한 인과응보로 죄 값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은 어머니는 D부인 부부에게 죽도록 노예처럼 일을 하게 하고는 처음 약속을 한 것처럼 "너희 부부는 목장이 커지면 관리, 감독을 하고 너희 밑에 일하는 인부들을 고용시켜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도리어 이후에 이웃 사람들이 "xxx 부부는 이 목장에 와서 이 목장을 번창하게 한 장본인이었다"는 이야기에 어머니가 발끈 화를 내면서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이 있느냐? 그들이 내 목장을 관리하면서 밥을 먹고 살지 않았으냐?"고 반문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결국 너무 심한 머슴살이에 화가 난 D 부부가 집을 나간 후에 어머니는 목장 인부를 사서 D부부 대신으로 일을 하게 하였으나 새로 들어온 목장 인부 부부가 견디지를 못하고 나가면서 자신들의 임금을 챙겨서 나간 것이 아니겠느냐? D부인이 해설을 더 붙였다. 우유 대금을 수금을 해서 집에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목장 인부가 대접 받지 못한 자신들의 몫을 챙긴 것으로 D부인은 생각하고 있었다.

첫 남편에 대한 어머니의 저주: D부인의 어머니는 자주 D부인에게 "너의 친 아버지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줄 아느냐! 너는 내가 받은 그 고통의 대가를 네가(D부인) 대신 갚아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고 분개 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D부인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 후에 폐결핵을 앓게 되었고 각혈로 피를 토해내게 되었다고 했다. 그 때 아버지는 가계를 운영했고 어머니는 행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남편의 폐결핵의 병 간호를 하다가 남편이 죽자마자 D부인을 친정에 맡기고 재혼으로 떠났다. 가끔 D부인의 어머니는 그 때 일을 회상을 하면서 D부인에게 전 남편(D부인의 아버지)이 결혼을 할 때 그가 폐결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숨기고 어머니와 결혼을 한 것에 분개해서 D부인에게 하소연을 자주 했다고 했다. 그 때 첫 남편 한데서 받은 고통들을 이야기를 하면서 D부인에게 화풀이를 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D부인은 "왜 내가 어머니가 아버지 한데서 받은 고통을 내가 대신해서 갚아야 하는지 이해가되지 않는다"고 울분을 토했다. 사실은 아버지를 남편으로 택한 어머니 자신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지 그 남편에게 받은 폐결핵이라는 병을 숨겼다고 분노해 하는 어머니가 D부인에 그 화풀이를 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선택은 어머니 자신이 해 놓고 그 화풀이를 왜 D부인에게 하고 있는가? 또 그러한 말들을 나이 어린 딸 앞에서 한다는 그 자체가 딸에게 이런 말들이 가슴에 상처로 남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는 D부인의 어머니의 잔인함이 묻어 있었다. D부인은 어머니는 치마를 둘러서 여자이지 남자처럼 강인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어머니의 장점을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 장점 대신에 어머니는 잔인함, 매서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돈을 벌어서 생계를 꾸려갈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서 그녀가 집을 지어서 팔아서 자녀들을 5명이나 성장을 시킨 장본인이었다.

내면에 쌓이 배신감, 분노, 노여움, 미움, 적대 감정의 방출: D부인에게 인간의 내면 마음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치료자는 D부인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생각, 느낌, 상상, 감정, 지각 등을 표현을 하는 자아의 미성숙을 이야기를 했다. 어린 시절에 친 아버지의 상실로 양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치를 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느낌, 생각, 상상, 지각, 사고 등을 제대로 마음대로 표현을 할 수 없었던 환경을 지적을 하면서 몸은 성숙해서 어른이 되었으나 마음 속에 자아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어린 시절 그대로 남아 있음을 지적을 했다. 고로 그 자라지 못한 자아를 성장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더 붙이면서 자아와 나누는 대화법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D부인에게 배다른 나머지 동생들을 보게했다. 그들은 D부인처럼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지 않고 그런대로 잘 살고 있다고 했다. 특별히 바로 밑게 4살 어린 여동생과 막내 여동생은 걸핏하면 어머니에게 와서 살기 어려우니 돈을 달라고 해서 돈을 타 가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고 그렇게 자신들 마음대로 어머니,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하는 동생들을 보면서 부러워했었다고 실토를 했다. D부인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자신을 한 없이 원망해 왔다고 했다. 자신들의 요구, 원하는 것, 혹은 어머니에게 섭섭함, 미움, 분노, 사랑 등을 마음 대로 부모님 눈치를 보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친 아버지, 어머니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마음 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아가 성숙하게 된 것임을 알 게 했다.

D부인의 내면 깊숙이 쌓인 미움, 적대 감정의 인식: 치료자는 D부인에게 "왜 어머니가 하필 재혼을 한 후에 7년이 흘러간 후에 D부인을 그녀의 가족으로 초대를 해서 데리고 왔겠느냐?"를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보면 재혼 후에 1-2년 후에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왜 세월이 7년이나 흘러간 후에 어머니의 집으로 데리고 왔겠느냐!"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유추하지 못했다. 치료자는 D부인에게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D부인이 새 가정으로 들어갔을 때 4살 된 여동생이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부동산을 사서 집을 지어서 파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첫 딸은 그녀가 사업을 하면서 키웠으나 다음에 태어나는 자녀들을 돌볼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을 설득시켜서 11살 된 초등학교 4학년 딸을 데리고 오게 한 것이었다. 그 딸을 데리고 오면 태어나는 자녀들을 어머니 대신에 돌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D부인은 새 가족의 품으로 들어왔고 두 번째 두 명의 남동생들과 한 명의 여동생 즉 3명의 동생들을 그녀가 업어서 키웠다고 했다. 그녀가 동생들의 대리모 역할 즉 어머니 역할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바로 밑에 4살 된 여동생과는 7살 차이가 났지만 항상 싸우면 D부인이 지고 우는 쪽은 D부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머지 동생들은 그녀를 마치 어머니처럼 잘 따르고 그녀에게 별 다른 반대 감정이 없었다고 회고를 했다. 그녀는 그러한 집안 일들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서 어머니를 도와야 하는 것이라고 당연지사로 생각을 해 왔다고 했다.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목재소에 취직을 해서 매달마다 받는 월급을 양 아버지에게 고스란히 가져다 바쳤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을 한 이후에도 적어도 동생들 중에 한명 정도는 그녀가 그 동생을 대학까지 부담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무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왔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결혼을 한 후에 친정에 가서 호박 하나는 따 오는데 양 아버지가 어짢해 한 것을 기억하고 분개 했다. 사실 그 호박은 D부인 부부가 심고 재배를 한 호박인데 그 호박 하나는 가져 간다고 눈총을 준 양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그 호박이 누구의 호박인데! 하면서 통분해 했다.

 D부인은 결혼 후에 남편이 직업이 없자 어머니가 사 둔 산지를 개간해서 목축을 하도록 유도했다. 그 시점에서 "너희들이 목장을 운명하고 나중에 절반씩 나누자"라고 구두 약속을 했다. D부인 부부가 그야 말로 불철주야로 제대로 먹지도 않고 아끼면서 죽자살자고 열심히 해서 산지를 옥토로 개간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배신감과 미움 뿐이었다. 어머니는 처음에 약속 대로 일거리가 늘어나면서 바빠졌지만 인부를 고용해주지 않았다. 젖소들이 잘 자라주어서 커지면 그 소들을 팔아서 돈을 가져가 버렸다. 그 당시에 젖소 값이 올라서 상당히 많은 돈이 어머니의 손으로 의논도 하지 않고 흘러가 버렸다고 회고를 했다. 그리고 늘어나는 젖소들을 관리할 인부를 고용해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머니를 믿었지만 결국은 그 땅을 팔면서도 제대로 일한 대가를 지불해주지 않았다. D부인 부부가 어머니와 독립을 선포하고 결별을 결심했을 때 어머니는 저주을 퍼붙고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말 것을 종용했다. 50 50으로 나누자고 한 것도 허지부지 되고 그것을 요구하면서 계약서를 보자고 한 것을 마치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저주를 하고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설치고 그리고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고 양아버지가 계산이 잘못 되었으니 새로 계산을 해야 한다면서 D부인에게 따지고 들자 어머니가 산에 목을 매어 자살한다고 소동을 부리고 산으로 올라가고 남편이 장모님을 구한다고 산으로 따라가고---등등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어머니는 D부인을 이용만했지 실제 4명의 자신의 자녀들처럼 동등하게 대우해주지 않았음을 지적을 했다. 어머니는 친 자식들은 그녀와 둘 째 남편 한데서 태어난 4명의 자녀들이고 D부인은 그녀의 자식으로 취급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난 것을 지적을 했을 때 D부인은 시인을 했다.

 D부인의 내면의 심층에는 친정 엄마로써 계모 보다 못하다는 판단이 이미 목축에서 손을 떼서 나올 때 내면의 자아가 확신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환청으로 "친모가--양모(계모), 양부--"라는 말 속에서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D부인으로 하여금 어린 시절에 그녀가 하고 싶었던 내면 속에 갇혀서 목이 졸려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자아를 등장시키게 했다. 그리고 그녀가 옆에 어머니가 있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들을 토해 내게 했다. D부인은 통곡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나는 친 어머니라고 어머니가 하는 말들을 100% 믿고 따랐는데 이렇게 나에게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통곡하고 울부짓었다. 치료 시간 3시간 동안 내내 그녀는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지나고 보니 나는 친 자식과 다르게 그냥 가정부처럼 취급을 했다"는 것에 참을 수 없다고 통분해서 가슴을 쳤다. 이후에 알 게 된 것으로 D부인은 결혼을 한 여동생들이 종종 어머니에게 가서 돈을 얻어가는 것을 알 게 되었고 분가를 할 때 그렇게 D부인에게 매정하게 대했던 그 어머니가 D부인이 아닌 여동생들 한데는 관대하게 대한 것을 보고 통분해서 치를 떨었다. 그녀를 데리고 가서 동생들을 키우는 대리모로 사용을 했고 결혼 후에 그녀의 부부가 직업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마치 먹여주고 돌보아주는 것처럼 행세를 하면서 D부인의 부부들을 이용하고 부려먹었다는 생각 때문에 그 배신감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실토를 했다.

 3시간 동안의 통곡과 울음은 그 시간 내내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하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이제는 살 것 같다며 치료실을 나서는 D부인을 보면서 치료가 이제 제대로 시작되고 있음에 치료자는 흐뭇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D부인이 24시간의 치료 후에 D부인의 변화된 모습과 치료 과정을 알고 싶어신 분은 다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세요.

https://blog.naver.com/psychclinic/222021673675